소설리스트

약 파는 황태자-292화 (292/468)

292화. 영웅 탄생 (2)

콰아아아아-!

열폭풍이 몰아닥쳤다.

한때의 흑마법사, 뱀파이어 로드의 정혈을 일깨우며 혈염의 짐승으로 거듭난 아난샤가 일격에 증발했다.

“……!”

비명을 지를 여유란 없었다. 죽음의 공포나 자각, 주마등 따위는 사치였다. 그 어떠한 회한이나 비통함조차도 느낄 틈 없이 번쩍, 섬광이 일어난다 싶은 순간 그는 이미 원자와 플라즈마 단위로 흩어져 버렸다.

그러고도 열폭풍은 멈추지 않았다. 아래로, 더 아래로 쇄도했다. 수만 마리의 박쥐 군체를 태웠다. 퍼지는 열기가 그보다 더 많은 박쥐를 즉사시켰다.

물론 열기의 후폭풍은 위쪽으로도 퍼졌다.

콰츠즈즈즈!

냉기의 방패, 만년설이 시시각각 갈려나갔다. 냉기가 녹으며 깎여나갔다. 그리고 더는 생성되지 않았다. 자연히 냉기의 방어 범위가 좁아졌다. 그 좁아지는 뒤편에 라키엘이 있었다.

하지만 라키엘은 아무런 반응도 보이지 못했다. 그의 눈은 이미 감겨 있었다. 마지막의 마지막 순간까지 치달았던 극한의 대결. 화염을 뿜는 자와 막아내는 자. 그 사이의 소모전에서 일찌감치 너무나 지쳤던 그였다.

숨을 제대로 쉴 수 없는 막대한 열기. 8282 모드의 남용으로 지친 육신. 그 속에서의 거듭된 혹사.

이미 진즉 혼절해야 했을 그였다. 그나마 사람들의 기대감 서린 수많은 눈빛 때문에 끝까지 버티고, 무리하며 이겨낸 것일 뿐이었다.

그리고 최후의 순간, 그의 긴장이 풀어졌다.

‘이겼다…….’

눈을 감기 직전, 분명히 보았다. 느꼈다. 내뿜어지는 화염의 열폭풍, 휩쓸리며 사라지는 흑마법사, 흩어지는 박쥐 군체의 마나 연결까지.

경혈 스캐닝을 통해 확인할 수 있었다.

코어인 흑마법사가 죽었다.

혈염의 짐승도 무너질 것이다.

그렇기에…… 이젠 됐다.

내가 할 일은 다 했다.

그러니까 난 좀 쉴래.

너무 힘들거든.

오늘 너무 무리했거든.

숨이 너무 차서, 현기증이 나서, 속도 뒤집힐 것 같아서, 더는 서 있을 수도 없겠거든.

‘그러니까…….’

완전히 감기는 눈꺼풀.

몰려오는 피로감에 저항할 힘이 더는 없었다. 만년필과 만년설, 두 무구를 꽉 틀어쥐고 있던 손아귀도 마찬가지였다. 저도 모르게 스르르 풀어졌다. 더불어 냉기의 방패 만년설에 투입하던 마나의 흐름 또한 끊어졌다.

아.

이러면 냉기의 실드가 사라질 텐데. 열기의 후폭풍에 나도 휩쓸릴 텐데.

그러면 안 되는데.

손, 다시 쥐어야…….

“…….”

꿈틀, 라키엘의 손가락 끝이 미약하게 움직였다. 끊어지기 직전인 의식, 실낱같은 의지로 만들어낼 수 있는 최대한의 움직임이었다. 더는 손을 뻗지 못했다. 놓친 만년설을 붙잡지 못하였다. 냉기의 실드가 거의 다 사라졌다. 열기의 후폭풍이 솟구쳤다

투화학-!

하지만 그는 혼자가 아니었다.

무너져가는 핏빛 짐승의 등줄기 위에서 쓰러지는 그를 향해 달려가는 발걸음이 있었다. 일찌감치 그의 상태와, 그가 감당하게 될 위험을 직감하며 다급히 움직이는 이가 있었다.

그것도 둘이나.

‘전하!’

‘리한 군의관!’

타닷!

혈염의 짐승의 첫 번째 머리와 혈투를 벌이던 데미안이 지면을 박찼다. 애초부터 황태자의 작전과 의도를 거의 모두 짐작한 그였다.

거듭하여 만년필의 화염으로 짐승의 약점을 타격하는 황태자. 그를 도우려면 혈염의 짐승에게 최대한의 타격을 함께 입혀야 한다는 사실을 깨닫고서는 누구보다 맹렬하게 싸웠던 그였다.

그리고 마지막 열폭풍이 몰아닥치는 순간, 그는 깨달았다. 황태자가 한계를 넘어섰노라고. 그 대가로 무너지리라고.

내가, 구해야 한다고.

……파앗!

검을 버렸다. 검을 쥐는 힘과 소모되는 균형마저도 모조리 달리는 데에 쏟아부었다. 무너지는 짐승의 등줄기 위쪽으로 솟아오르는 후폭풍. 그 범위에 고스란히 노출되며 쓰러지는 황태자. 사라지는 것이 확연해 보이는 만년설의 냉기 방패.

늦기 싫다.

황태자가 다치는 것은 싫다.

지금껏 내게 무수한 은혜를 베푼 그이기에, 어쩌면 이제는 황태자의 보살핌이 없으면 제대로 살아갈 수 없게 된 나이기에, 어떻게든 구해야 한다.

‘……전하!’

데미안의 돌진이 더욱 절실해졌다.

그리고 멀지 않은 곳에, 그만큼 절실한 이가 하나 더 있었다.

‘리한 군의관!’

타앗!

혈염의 짐승의 다섯 번째 머리와 격전을 벌였던 쟈빌론이 지면을 박찼다. 애초부터 리한 군의관을 돕겠다는 일념으로 싸웠던 그였다.

핏빛 짐승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리한 군의관을 위협했으니까. 죽어 마땅한 놈이다. 분노의 의지를 담아 포효하고, 날뛰었다. 그러다가 보았다. 리한 군의관이 마지막 열폭풍을 일으키는 모습을. 핏빛 짐승이 무너지고, 리한 군의관이 허물어지는 모습을 모두.

그 순간이었다.

문득, 허물어지고 있는 리한 군의관의 모습이 익숙해 보였다. 언젠가 본 모습이었다. 언제? 앙부아즈의 이름 모를 평원에서. 불타는 평야에서. 숨 가쁘던 추격전 끝에. 말을 타고 도망치던 그를 떨어뜨렸지, 나는.

그리고 대치했다.

다투었다.

그가 저항했다.

그를 무너뜨리려 애썼다.

냉기의 방패로 버티던 리한 군의관. 매번 무너지던 리한 군의관. 그래. 지금 저 모습과 너무나 비슷했어. 독하고. 악착같고. 그렇게 매번 또 일어섰지. 거짓말처럼. 그리고 끝끝내 나는…….

깨달았다.

내가…… 그를…… 구해야 하나?

“…….”

첫 번째 도약의 직후, 쟈빌론은 멈칫했다.

‘나는…….’

알겠다.

내가 누구인지. 리한 군의관이 누구인지. 그를 향해 달려가는 흑발의 호위가 누구인지. 이곳이 어디인지. 어째서 내가 여기에 있는지.

비로소 모두, 알겠다.

‘나는…….’

쟈빌론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그것은 불현듯 찾아온 깨달음이었다. 수많은 이유와 함께 되살아난 기억과 온전한 정신의 재림이었다.

앙부아즈의 실험실에서 다치고 뒤엉킨 정신. 리한 군의관에 대한 오랜 갈망과 방황. 정신지배. 해방. 마침내 찾은 진짜 리한 군의관. 갑작스러운 빈혈. 헐떡임. 리한 군의관을 위협하는 거대한 핏빛 짐승. 지쳐 쓰러질 것 같은 상황에서의 극한의 전투.

그걸 극복한 지금 이 순간.

리한 군의관의 모습을 본 순간.

마침내, 모두 떠올라 버렸다.

‘쟈빌론, 플랑베르, 앙부아즈.’

그것이 나의 진정한 이름이구나.

나는 지배자이자 학살자이며, 야심가이자 반란자였고, 마침내 몰락한 실패자였구나.

……터억!

도약 끝에 찾아온 착지.

그러나 그는 다시 지면을 박차지 않았다. 대신 망연한 눈길을 들어 올렸다. 그 시선의 끝에 쓰러지고 있는 제국의 황태자가 있었다. 그를 향해 달려가는 호위, 데미안이 있었다.

쟈빌론은 주먹을 꽉 쥐었다.

“…….”

솔직하게 말하자면, 달려가고 싶었다. 저 흑발의 호위보다 먼저 달려가서 리한 군의관, 아니, 제국의 황태자를 낚아채고 싶었다. 그렇게 아무도 찾을 수 없는 곳으로 잡아가서, 자신의 두통을 치료하게 만들고 싶었다.

하지만, 그럴 수가 없겠다.

적어도, 지금은 그렇다.

“…….”

온전해진 정신.

되찾은 이성.

냉철한 계산.

그는 결론을 내렸다.

이곳은 제국의 황도 마젠타, 프론테라 광장이다. 수많은 이들이 운집해 있으며, 나는 이곳에서 온전하지 못한 정신이었을지언정 황태자를 납치하려 들었고 인질극을 벌였다. 시성식을 엉망으로 만들었고, 이 난리의 단초를 제공했다.

그러니까 내가 이곳에 남는다면, 황태자를 구하겠다고 한 걸음이라도 더 달려간다면, 그렇게 도망갈 기회를 포기한다면…….

나는 죽는다.

반드시.

“…….”

제국의 황가는 절대로 나를 살려두지 않을 것이다. 아니, 본보기로 삼아 최대한 성대하게, 공개적으로 나를 죽이고, 나의 죽음을 전시하겠지. 그것이 시성식의 난리를 겪으며 훼손된 황가의 체면을 되살릴 최고의 방법일 테니까.

적어도, 황실을 바라보는 수많은 국제적 시선 때문에라도 황실은 반드시 자존심을 지키려 들 것이다. 그것이 권력이고, 힘의 논리이며, 정치적 순리가 아니겠는가.

다른 이들은 몰라도 나는 안다.

나 또한 한때 왕가의 일원이었고, 왕족으로 자라난 몸이니까. 누구보다도 권력의 속성을 잘 안다. 확실하다. 그러니 나는 지금, 당장, 도망쳐야 한다.

‘황태자…… 아니, 리한 군의관.’

쟈빌론의 떨리는 눈길이 다시금 황태자를 향해 꽂혔다.

순간의 번민.

그는 결심했다.

타닷!

등을 돌리고, 황태자와 반대편으로 뛰었다.

사실은 지금이 유일한 도주의 기회였다. 핏빛의 짐승은 쓰러졌고, 흑발의 호위는 황태자를 향해 달려가고 있으며, 나머지 소드마스터들은 급변하는 상황을 미처 파악하지 못하고 있으니까.

그러니 지금 도망쳐야 한다. 짐승과 함께 사라진 대광장의 결계, 그 바깥에서 수도방위군이 밀고 들어오기 전에. 대광장이 봉쇄되기 전에. 바로 지금!

타앗!

사람들의 주의가 쏠리지 않는 틈을 타서 대광장을 빠져나갔다. 인파 너머로 몸을 숨기기 직전, 그는 뒤를 돌아보았다.

“…….”

완전히 허물어지는 황태자.

그에게 거의 도착한 흑발 호위.

그 모습을 보자 저도 모르게 주먹이 꽉 쥐어졌다. 가슴속에 불길이 피어났다. 아울러 항상 느끼던 두통이 더욱 끔찍한 통증으로 다가왔다.

‘리한 군의관, 다음에는 반드시…….’

날 치료하게 만들 것이다.

어떠한 일이 있더라도, 꼭.

그 생각을 마지막으로 쟈빌론이 대광장을 완전히 떠났다. 그 직후, 황태자를 향해 달려간 데미안이 손을 뻗었다.

‘전하!’

허공으로 도약했다.

한껏 뻗은 손끝.

너머에 무너지고 있는 황태자.

이미 의식을 잃은 옆얼굴.

그걸 보자 아득하게 겹쳐 오는 한때의 기억. 크라노스. 이름 모를 협곡. 그곳에서 추락하던 황태자. 그를 향해 뻗었던 손. 간발의 차이로 놓쳤던 순간들.

그때처럼 놓치고 싶지 않다.

어떠한 일을 겪더라도.

반드시.

……콰악!

데미안의 손아귀가 라키엘의 옷깃을 강하게 움켜쥐었다. 거의 집착에 가까운 몸짓으로 끌어당겼다. 자신의 몸으로 보호하였다.

그 직후, 라키엘의 손을 떠나던 만년설의 냉기 실드가 완전히 사라졌다. 열기의 후폭풍이 용솟음치며 데미안과 라키엘의 전신을 휩쓸었다.

‘……전하!’

형언할 수 없는 열기가 엄습하는 순간, 데미안은 두 눈을 질끈 감았다. 품속의 황태자를 더욱 거세게 감쌌다. 끔찍한 열기가 황태자에게 닿지 않도록. 자신의 몸이 녹아내린 방패가 되는 일이 있더라도. 오직 황태자만이 무사하도록.

그는 몸을 돌렸다. 황태자를 감싼 채로, 자신의 등을 아래로 향하게 하였다. 아래에서부터 솟구치는 후폭풍의 열기를 자신의 몸이 먼저 맞도록 하기 위해서였다.

콰하아악-!

끔찍한 후폭풍이 밀려왔다. 순간 정신이 아득해졌다. 호흡이 불가능해졌다.

하지만 괜찮다.

이미 각오는 마쳤다.

사실은 안다.

내가 황태자의 호위였지만, 실제로 매번 상대를 보호하고 구원한 이는 내가 아닌 황태자였음을. 오히려 내가 항상 그의 손을 잡고 구렁텅이에서 빠져나올 수 있었음을. 어둡고 탁하던 검투장에서부터 지금까지 줄곧, 그러하였음을.

그러니까 괜찮다.

이쯤은.

충분히.

……파앗.

지옥 같은 열기를 얼마나 버텼을까. 그것은 감당키 험난할 억겁의 시간이었을까, 혹은 찰나에 불과한 꿈결이었을까.

파란 하늘이 다시 보였다.

숨 막히던 열기가 거짓말처럼 사라졌다.

동시에 데미안은 깨달았다. 자신과 황태자가 후폭풍의 범위를 벗어났음을. 그리고 어느새 지면이 가까워져 오고 있음을.

그러니까 나는 다시…….

‘착지를…….’

해야 하는데.

그게 쉽지가 않았다.

순간적인 열기에 생각보다 큰 타격을 받은 탓이었을까. 그렇게 균형 감각이 흐트러진 탓이었을까.

데미안은 착지에 실패하였다.

콰그걱!

십수 미터의 도약 끝에 맞이한 추락이었다.

하지만 그 순간에마저도 데미안은 자신의 몸으로 황태자를 감쌌다. 광장의 돌바닥과 충돌하고, 가혹하게 구르면서도 자신의 몸으로 황태자를 충격으로부터 보호했다.

그리고 끝내 쓰러졌다.

“……하아.”

데미안은 사지를 늘어뜨린 채로 누워서 웃어 버렸다.

다시금 보이는 파란 하늘. 아니. 노란색인가. 모르겠다. 다만 확실한 것은, 곁에 나란히 쓰러져 있는 황태자의 호흡이 제법 고르고 안정적이라는 사실이다.

그래.

이거면 됐다.

당신이 무사하면 됐다.

나는 당신만을 위한 호위니까.

괜찮다.

아픈 것쯤은.

정신을 잃는 것도, 모두.

‘괜찮아…….’

그것이 데미안이 의식을 잃기 전, 마지막으로 머금었던 생각이었다. 그 직후, 그는 희미한 미소와 함께 혼절했다. 나란히 쓰러진 황태자와 함께, 깊은 잠에 빠져들었다.

그 모습을 지켜본 대광장의 모든 이들은 똑같은 생각을 떠올렸다.

핏빛의 짐승을 물리친 황태자. 그를 온몸으로 보호한 흑발의 호위. 두 영웅이 탄생한 날을 역사에 길이 새긴다면, 그날이 오늘일 것이리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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