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95화. 뱀파이어 로드의 고민 (1)
알겠다, 이제는.
감이 팍 하고 온단 말이지.
‘아하. 뱀파이어 로드의 정혈을 흡수한 효과가 이런 거였구만.’
병실에서 의식을 되찾고 모두와 감격적인 해후를 마친 다음 날 오후, 라키엘은 흐뭇한 미소를 빵긋 지었다. 그리고 한결 그윽해진 눈길을 들어 앞을 바라보았다.
그곳에 22인의 뱀파이어들이 온몸을 배배 꼬며 앉아 있었다. 부끄러움 때문에? 천만의 말씀. 이쪽과 눈이 마주치자마자 어디 숨을 곳이라도 찾고픈 표정이 된 모습들이었다.
이유는 간단했다.
딩동!
[당신이 흡수한 뱀파이어 로드 ‘힐데르트’의 정혈이 특수한 권능을 부여합니다.]
[일반적인 뱀파이어들은 당신과 마주하는 즉시 거대한 권위와 위압감을 느끼며, 자연스러운 복종심을 품게 될 것입니다.]
그 효과가 제대로 드러나고 있었다. 방금, 뱀파이어들이 옹기종기 수용된 병실에 들어오자마자 말이다.
‘그렇잖아도 이놈들을 어떻게 더 유용하게 써먹을지 고민이었는데.’
사실이었다.
모처럼 생포한 뱀파이어들이었다. 그런데 마냥 가둬만 놓고 주기적으로 송곳니만 뽑는다? 뱀각산 재료 셔틀(?)로만 써먹는다?
그러기엔 좀 아까웠다.
보다 생산적이고 보람찬 용도가 더 있을 거라고 보았다. 이놈들의 자발적인 협조만 이끌어낼 수 있다면 말이다.
하지만…….
‘딱히 뭔가를 시켜먹기가 좀 찜찜했지, 그동안은.’
그것 또한 사실이었다.
비록 생포가 되었다고는 해도, 애초부터 뱀파이어인 놈들이었다. 평범한 인간인 이쪽에게 자연스럽게 복종하길 바라는 건 조금 무리가 있었다.
‘물론 전에 심문을 했던 때처럼 고문하거나 협박을 할 수도 있겠지. 그렇지만 그런 방법으로는 안 돼. 제대로 유용하게 써먹을 수가 없어. 강제로 억눌러 봤자 마음속엔 깊은 반감을 품을 테니까. 언젠가는 칠 테니까. 뒤통수든, 사고든, 뭐든지 간에.’
그래선 곤란하다.
하여 반쯤은 포기하고 있던 터였다. 아쉬우나마 그냥 잡아만 두고 송곳니만 주기적으로 알차게 뽑아먹자고 생각하고 있었더랬다.
그런데 이제는?
상황이 바뀌었다.
‘다들 날 보자마자 껌뻑 죽네?’
라키엘은 다시금 빵긋 웃었다. 그리고 온통 좌불안석인 뱀파이어들의 면면을 차분하게 관찰했다. 확실히 전과는 반응이 달라졌다. 예전엔 자신이 이곳에 오기만 해도 곱지 않은 눈빛을 보내던 뱀파이어들이었다. 음울하면서도 은은한 살기마저 느껴지곤 했다.
그런데 지금은?
주인이 집을 비운 동안에 신발이며 벽지며 다 물어뜯고 사고를 쳤다가 딱 걸린 리트리버 같은 눈빛이었다. 혹은, 엄마 몰래 냉장고 장조림 타파통에서 고기만 쇽쇽 빼먹다가 딱 걸린 아들내미 같달까.
‘내 눈치를 엄청 보는구나.’
만족스럽다. 이제는 이들을 마음으로 복종시키고 따르게 해볼 수 있겠다. 최소한 그럴 건덕지가 느껴진다.
“다들 잘 지냈나?”
드르륵!
일부러 의자를 바닥에 끌리도록 하며 당겼다. 그 소리에 뱀파이어들의 어깨가 희미하게 흠칫하는 사이, 앉아서 여유롭게 다리를 꼬았다.
“다들 배는 고프지 않고?”
“…….”
돌아오는 대답은 없었다.
물론 라키엘은 놈들이 차마 꺼내지 못한 대답의 내용을 알 수 있었다. 당연히 배가 고플 것이다. 이곳에 잡혀 있는 동안 피를 한 방울도 주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덕분에 당장에라도 쓰러질 지경일 테지.
그러나 라키엘은 개의치 않았다.
사실 따지고 보면 이놈들은 중범죄자들이었다. 수많은 사람들의 피를 빨며 변이증을 퍼뜨렸다. 그 때문에 얼마나 많은 이들이 고통을 받았는지. 가히 한여름철에 밤잠을 깨우는 모기보디도 더 가증스럽고 악독한 놈들이 아닌가 말이다.
덕분에 고작(?) 한 달 남짓 굶겼다고 해서 동정심이 들거나 하진 않았다. 대신 그는 챙겨온 서류 가방에서 종이를 꺼내서 내밀었다.
“자, 각자 한 장씩 받아가라.”
“…….”
“어서. 내가 일일이 나눠줘?”
“……!”
눈치를 살피던 뱀파이어 하나가 황급히 움직여서 종이를 가져갔다. 저놈, 제일 처음으로 구조되어 실려 왔던 블라도라고 했나. 나중에 들은 바로는 쟈빌론을 자신들의 아지트로 데려가는 역대급 대형 실수를 저지른 놈이라고도 했는데.
그거야 뭐 어쨌건.
“다들 받은 서류를 읽어보도록.”
이쪽의 말에 눈동자를 바쁘게 움직이는 뱀파이어들. 이내 놈들 사이에서 헉 소리가 나직하게 흘러나왔다.
“이, 이건…… 뭡니까?”
찰랑찰랑 흔들리는 눈동자로 이쪽을 쳐다보는 뱀파이어 블라도. 녀석을 향해 툭 대꾸했다.
“별궁 한의원 계약직 근로 계약서. 제일 위쪽에 큼지막하게 쓰여 있잖아. 글자 읽을 줄 몰라?”
“저, 그건 아니긴 한데…….”
“아니긴 한데?”
“이게…… 내용이…….”
“다 읽어봤나?”
“예…….”
뱀파이어 블라도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계약서로 눈길을 던졌다.
[별궁 한의원 근로 계약서]
[병원장 라키엘 아드리아 마젠타노(이하 ‘고용주’라 함) 와 ___ (이하 ‘근로자’라 함) 은/는 다음과 같이 근로계약을 체결한다.]
[1. 근로계약기간 : 계약일로부터 별궁 한의원의 폐업, 혹은 근로자가 사망할 때까지]
[2. 근무장소 : 별궁 한의원]
[3. 업무의 내용 : 환자에 대한 혈액 검사 및 월별 송곳니 1개 헌납]
[4. 소정근로시간 : 24시간 풀타임 연중 무휴 (휴가, 연차, 월차 없음)]
[5. 임금 : 숙소 제공]
[6. 기타 : 살려주는 걸로 감사해라]
“…….”
이건 폭리다.
더없이 불합리하다.
노예계약이나 마찬가지다.
그러나 블라도를 비롯한 뱀파이어들은 일언반구의 항의도 할 수 없었다. 이곳에 감금된 내내, 자신들의 처지를 뼈저리게 느꼈기 때문이었다.
……살려주는 걸로 감사해라.
저 말이 딱 정답이었다.
그런데 이상한 점이 하나 있었다.
‘예전이었다면 이런 계약서를 받아드는 순간 화가 났을 텐데, 억울함을 느꼈을 텐데…… 그런데…… 어째서지? 왜 화가 안 나지? 억울하지도 않은 거지? 대체 왜?’
솔직히 그랬다.
너무나 불합리한 내용의 계약서였다. 그냥 노예계약이나 다름없는 내용이었다. 그런데 화가 나지 않았다. 아니, 오히려 복종심이 들었다!
‘나…… 변태인가?’
라는 생각마저 들었다.
그런데 자꾸만 이상하게도, 눈앞의 황태자를 보면 전에 느껴지지 않던 권위와 위압감이 저릿저릿하게 온몸을 찔러왔다. 마치, 예전에 섬겼던 주군을 마주하던 때와 같았다. 아니, 사실은 그때보다도 더욱 커다란 복종심이 자연스럽게 샘솟았다.
이분이라면 따를 수 있다.
이분이 시키는 일이라면 충분히!
……라는 마음이 자꾸만 생겨났다.
‘왜?’
이해할 수가 없었다.
그냥 그랬으니까.
그렇듯 뱀파이어들이 잠깐 정체성(?)의 혼란을 느끼는 가운데, 라키엘의 눈앞에는 알찬 메시지가 떠오르고 있었다.
딩동!
[당신이 지닌 뱀파이어 로드 ‘힐데르트’의 정혈이 막강한 권능을 행사합니다.]
[권능에 영향을 받은 일반 뱀파이어들이 당신의 불합리한 제안을 매력적으로 느끼기 시작합니다.]
그런 덕분이었다.
블라도를 비롯한 뱀파이어들의 손이 저도 모르게 펜을 집었다. 사실 더는 망설일 게 없었다.
이미 주군인 아난샤에게 버림받은 이들이었다. 심지어 그 아난샤마저도 죽어 버렸다. 그렇게 뱀파이어들은 마치 홀린 듯이 노예…… 아니, 근로계약서에 서명을 했다.
‘으으읏, 소, 손이 저절로…….’
‘나 이래도 괜찮은 걸까?’
‘하…… 저질러 버렸다.’
하지만 후회되지 않았다. 오히려 후련해졌다. 새로운 직장(?)을 얻었다는 안정감 또한 들었다. 심지어 어떤 뱀파이어들은 스스로를 향해 세뇌에 가까운 자기합리화를 시도하기도 했다.
‘병원에서 환자들의 혈액을 검사하는 일을 하게 되는 거라고? 내가? 그럼…… 그 과정에서 환자들의 피를 조금씩 맛보게 되는 거겠지? 그 맛을 민감하게 감지하고 분석해서 환자의 건강 상태와 각종 질환을 진단하게 되는 거겠지? 그럼 내가 바로 피믈리에인 건가? 생각해보니까, 그거…….’
……멋지잖아?
막상 합리화를 하고 보니 제법 괜찮게 느껴졌다. 뭔가 전문적이고도 스페셜한 직군에 종사하게 되었다는 자부심과 자랑스러움마저 샘솟았다. 그렇게 뱀파이어들이 별궁 한의원에 전문 혈액검사기, 피믈리에로 고용되었다.
그리고 사흘이 지났다.
그동안 라키엘은 정신없이 바쁜 나날을 보냈다. 난리통에 중단되었던 시성식을 다시금 치렀다. 신성교단 오피셜(?) 성인으로 추대되었다.
한편으로는 난리 직후에 잠적한 테러범, 쟈빌론에 대한 현상수배도 내걸었다. 물론 강력한 소드마스터인 쟈빌론이 순순히 잡혀줄 거라는 기대는 하지 않았다. 다만 그 자체로 필요한 일이기는 했다.
“이를테면, 앙부아즈 왕국에 대해 이번 사태의 책임을 묻기 위한 밑밥인 거지.”
“밑밥 말입니까?”
“으음.”
라키엘은 고개를 끄덕였다.
“쟈빌론이 마지막엔 우리와 함께 싸워주긴 했지만, 어쨌거나 시성식장에 난입을 하고 날 인질로 삼아서 위협한 건 맞잖아? 그것만으로도 엄청난 일을 저지른 거지.”
“그리고 그런 일을 저지른 쟈빌론의 관리 책임을 앙부아즈 왕국이 짊어져야 한다는 뜻이겠군요.”
“정확해. 쟈빌론은 반란에 실패한 대가로 앙부아즈 왕국의 수용 시설에 수감된 상태였으니까. 그런데 거기서 탈옥을 했고, 그 끝에 이번 일을 저지른 거지. 말하자면 수용 시설을 제대로 관리하지 못한 앙부아즈 왕가에 근본적인 책임이 있달까.”
“그럼 거액의 배상 요구를 하게 되는 겁니까?”
“나도 모르지, 그건. 아마 황제 폐하께서 앙부아즈 왕국의 대사를 소환해서 책임을 묻고, 협상을 시작할 거야.”
“그렇겠군요.”
“그렇지. 그나저나…… 팔다리는 좀 움직일 만하냐?”
“예, 그럭저럭.”
데미안은 쓴웃음을 머금었다. 난리가 났던 그날, 마지막 순간에 황태자를 구하는 과정에서 왼팔과 오른 다리가 부러졌다. 회복에 최소한 두어 달은 걸릴 정도로 심하게.
그런데 지금은?
거의 다 나았다. 불과 보름도 지나지 않았는데, 뼈가 다 아물고 붙었음은 물론이고 움직이는 데에도 큰 지장이 없어졌을 정도였다.
비정상적인 회복 속도였다.
한편으로는 그 이유를 짐작할 수 있었다.
“제가 인간이 아닌 덕분이겠지요.”
자신은 마계왕이 그릇으로 쓰기 위해 빚은 인형이다. 인간과 비슷한 그 무엇이다. 비정상적일 정도로 빠른 회복 속도도 그 덕분인 거겠지.
“아직은 움직이다가 간혹 쑤실 때가 있긴 한데, 그것만 빼면 불편하진 않습니다.”
“그런가.”
“예.”
“부럽다고 하면 기분이 나쁘겠지?”
“딱히 그렇지는 않습니다.”
“그래?”
“예.”
“부럽네.”
“…….”
“기분 나빠?”
“아닙니다.”
“막상 들으니까 살짝 나빴던 거 같은데.”
“…….”
“미안.”
“괜찮습니다.”
어쨌거나 당신이 무사하니까. 내가 황태자, 당신을 지켜줄 수 있었으니까. 내가 얼마든지 아팠더라도 상관없다. 당신이 무사하면 그걸로 됐다. 충분하다.
데미안은 일부러 화제를 돌렸다.
“그럼 별궁 한의원은 내일부터 다시 문을 여는 겁니까?”
“그래야지.”
“꼭 굳이, 그러셔야 합니까?”
“어. 당연히.”
“…….”
황태자, 당신은 당연하다고 말하지만…… 남들에게는 그게 당연하지가 않습니다. 어쩌면 그래서, 저는 더욱 당신을 존경하게 되는 건지도 모르겠습니다.
데미안의 마음속 존경심이 더욱 커졌다.
다음 날, 예정대로 별궁 한의원이 재오픈을 하였다. 환자가 예전보다 더 많이 몰려들었다. 보름 만의 재오픈 때문인지, 교단의 성인으로 인증받은 황태자의 드높아진 명성 때문인지 모를 일이었다.
한데 그렇듯 몰려든 환자들 중에는 특이할 정도로 고풍스러운 차림의 어느 남자가 있었다.
슥, 스슥…….
남자가 유려한 필체로 작성한 진료접수증.
그곳에는 이런 내용이 적혀 있었다.
- 별궁 한의원 진료접수증 -
[환자 이름 : 힐데르트]
[신분 및 직업 : 뱀파이어 로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