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96화. 뱀파이어 로드의 고민 (2)
세상 뭐든지 한 번 닫았다가 새로 여는 데에는 힘이 드는 법이다.
꿀잠을 자느라 닫았던 눈꺼풀?
열기 힘들다.
변비 때문에 막혀 버린 괄약근?
쉽지 않다.
특히나 삐쳐서 닫힌 사람의 마음을 달래서 여는 일은 너무나 힘이 든다. 그 대상이 와이프 느님이라면 말할 것도 없다. 그저 애도를 표할 뿐.
별궁 한의원 또한 마찬가지였다.
‘후아. 이거 실화냐…….’
정오를 조금 넘긴 시간.
전투 같은 점심식사를 마치고 원장실로 돌아오던 라키엘은 저도 모르게 혀를 내두르며 걸음을 멈추었다. 2층 복도 아래로 펼쳐진 로비의 풍경 때문이었다.
로비 바닥이 잘 보이지가 않았다. 사람 때문이었다. 진료를 받으려고 줄을 선 사람들이 너무나 많아서였다!
라키엘은 정색했다.
“……가르딘 경?”
“예, 전하?”
“저거, 진료 대기하는 환자분들 줄은 누가 세웠어?”
“아, 저건 아마도 로비의 경비를 담당하는 근위병들이…….”
“쯧. 전에도 말했을 텐데. 아파서 찾아온 사람들이야. 누군가는 전염성이 있는 질환을 앓고 있을지도 모르는데 저렇게 빽빽하게 세워두면 어쩌려고 이러는 걸까.”
“……엇, 그건.”
“이러다간 별궁 한의원 로비가 전염병 배양실이 되겠지? 그러니 환자분들 줄 간격 좀 넉넉하게 띄워 줘야 할 거 같아. 가능하다면 50명까지만 로비에 대기시키고. 나머지는 별도의 공간을 만들어서 기다리게 하면 되겠네.”
“어디를 따로 마련하면 좋을까요?”
“으음, 명예의 방?”
“예에? 거긴 전하의 품위 유지에 쓰이는 물건들이 보관되는…….”
“품위는 무슨. 내 한의원을 찾아온 환자들이 제대로 대우받지 못하는 일이 내 품위를 훨씬 망치는 일이야. 게다가 거기가 최적이잖아? 여기 로비에서 가깝고. 공간 넓고. 편안하고.”
“…….”
“거기보다 적당한 곳, 생각나는 데가 있어?”
“없습…… 니다.”
“그렇지?”
“예, 전하.”
“그럼 그렇게 해줘. 바쁘겠지만 부탁할게.”
라키엘이 씨익 웃었다.
가르딘 경이라면 이 정도만 알려줘도 다 알아서 해줄 거다. 충분히 능력이 있는 사람이니까. 거기에 더해서 명예의 방에 머무르게 될 대기 환자들의 편의도 충분히 배려하겠지. 그만큼 착하고 순한 사람이라서.
그런데 조금은 이상한 일이었다.
평소였다면 냉큼 알겠다고 대답했을 가르딘 경이, 어쩐히 묘한 눈초리로 이쪽을 슬그머니 바라보았다. 그러고는 이렇게 말했다.
“저기, 전하? 이런 말씀을 드리기가 외람되지만…… 너무 무리하시는 건 아니신지…….”
“무리? 내가?”
“예, 전하.”
가르딘 경의 표정이 뭔가를 결심한 사람의 것으로 바뀌었다.
“전하께서는 분명 훌륭한 일을 하고 계십니다. 저는 그렇게 생각합니다. 그럼에도 이제는 조금…… 과하지 않으신가 하는 걱정도 동시에 드는 것이 사실입니다.”
“걱정이라. 내가 너무 과로하는 것 같아서?”
“예, 전하.”
가르딘 경이 고집스럽게 고개를 끄덕였다.
“오늘 전하께서도 느끼셨겠지만…… 환자가 너무나 많아졌습니다. 예전처럼 화기애애하게 환자의 이야기를 들어주며 진료를 보는 여유 같은 건 생각도 못 하게 되었을 정도로 말이지요.”
“응, 그렇지.”
확실히 사실이다.
오랜만에 재오픈을 한 탓일까. 혹은 이쪽이 성인으로 시성되며 명성이 더욱 드높아진 탓일까. 그도 아니라면, 프론테라 대광장에서 만인이 보는 가운데 흑마법사를 토벌하는 모습을 보여서일까.
아니, 전부 다겠지.
어쨌건 별궁 한의원을 찾아오는 환자가 너무나 많아졌다. 덕분에 이쪽도, 가르딘 경을 비롯한 각 과의 의사들도, 아니스와 웨어울프 간호사들도 정신없이 바빠져 버렸다.
“게다가 조금 전엔 말입니다. 전하께서는 진료가 밀렸다며 점심식사를 단 5분 만에 끝내셨습니다.”
“그래도 안 남기고 다 먹었는데?”
“그게 문제인 겁니다, 전하.”
“…….”
“꼭꼭 씹어서 드셔야 합니다. 그래야 소화가 잘 되고 건강이 유지가 되는 법입니다.”
“세 번 씹었는데?”
“음식은 물이 아닙니다.”
“음식‘물’이잖아?”
“…….”
“미안.”
“어쨌건 전하. 이대로는 아니 되십니다. 아무리 훌륭한 뜻이 있으시다고는 해도…… 계속 이렇게 무리를 하시는 거라면 제가 전하의 주치의로서 가만히 있을 수가 없습니다.”
“가만히 못 있겠다고?”
“예, 전하.”
“괜찮아. 나도 조치를 취할 거니까.”
“……그, 그렇습니까?”
“어. 당연하지. 내가 변태야? 과로를 즐기게?”
“그럼 어떤 조치를…….”
“마젠타 의료대학. 거기 또 가서 몇 명쯤 더 잡아올까 해.”
“잡아오다니요?”
“신입 의사.”
“…….”
“이번엔 어떤 토실토실한 사냥감…… 아니, 의사들이 걸려들까. 기대된다. 카하하.”
“하지만 의사만 늘린다고 해서…….”
“간호사도 늘릴 거야. 아니스한테 얘기해뒀어. 웨어울프 간호사 보충.”
“…….”
“그럼 됐지?”
“……예, 전하.”
“그럼 이제 뭘 하면 될까?”
“아까 분부하신 바를 시행하겠습니다.”
“그래. 부탁해요, 부원장님?”
“…….”
모처럼 황태자의 주치의로서 존재감(?)을 뿜어보려던 가르딘 경이 일격에 격침되어 터덜터덜 물러났다. 라키엘은 원장실로 바쁜 걸음을 돌렸다. 그리고 한편으로 실감했다. 가르딘 경의 말이 옳다. 늘어난 환자의 규모에 맞추어서, 시설과 인력을 늘려야겠다.
……라고 생각하며 데미안과 함께 원장실로 들어온 순간이었다.
“많이 기다리고 있었네.”
“…….”
처음 보는 남자가 대뜸 말을 걸어왔다. 외관상 나이는 30대 초반 정도. 검정 머리칼에 붉은 눈동자. 옛스러운 뮤지컬에 출연하면 딱 어울릴 법한 고풍스러운 헤어스타일과 복장. 그를 보며 라키엘은 고개를 한쪽으로 갸웃, 기울였다.
“누구신지?”
“아침부터 대기했던 환자일세. 한데 내 순번이 돌아오기 직전에 점심시간이 되더군. 덕분에 그대가 식사를 하러 자리를 비운 바람에 말이지. 밖에서 마냥 기다리고 있기가 적적하여 원장실에 미리 들어와 있었네. 혹시나 내가 무례했다면 너그러이 양해를 하여주게.”
“…….”
미친놈인가.
아니, 그 전에 이 남자는 어떻게 원장실에 함부로 들어왔지? 아니스가 제지를 했을 텐데?
의아하게 여기며 아니스에게 눈길을 돌렸다. 이쪽의 눈치를 받은 아니스가 아주 작게 고개를 저었다. 어쩔 수가 없었다는 난감한 눈빛과 함께였다.
그걸 보니 더욱 의아해졌다. 아니스는 평범한 간호사가 아니니까. 무려 웨어울프니까. 게다가 성격이 단호하기까지 했다. 가끔은 이쪽조차도 눈치가 보일 정도였다. 그런데 이쪽이 없는 사이에 환자를 원장실에 먼저 들어오게 했다고? 아니스가? 원칙을 어겨가면서?
분명, 이유가 있을 것이다.
‘데미안, 잠시만.’
거의 검을 뽑기 직전인 데미안을 제지했다. 그리고 남자를 쳐다보았다.
“거듭 묻겠습니다. 누구신지. 이번에도 제대로 된 대답을 하지 않는다면, 원장실에서 즉시 쫓겨날 겁니다.”
이쪽의 굳은 목소리 덕분이었을까.
남자가 아차, 하는 눈빛이 되었다.
“아, 중요한 걸 밝히지 않았군. 거듭 미안하네. 내 이름은 힐데르트. 뱀파이어 로드일세.”
“…….”
“왜 그러는가? 뱀파이어는 처음 보나?”
“아뇨. 그건 아니긴 한데.”
“허. 일단 내 말을 곧바로 믿어주는 건가?”
“예.”
라키엘은 고개를 끄덕였다.
당연하다.
사실 처음 저 남자가 자신을 로드라고 밝혔을 때는 무슨 귀신 팝콘 튀기는 헛소리를 하나 싶었다. 하지만 그럼에도 경거망동하지 않았다. 문득, 예전에 등갑룡 포르티스가 찾아왔던 때가 떠오른 까닭이었다.
드래곤이 찾아온 적이 있는데, 뱀파이어 로드라고 못 찾아올 이유가 있을까. 그 생각이 들자마자 경혈 스캐닝부터 켰다.
덕분에 볼 수 있었다.
엄청났다.
가히 드래곤에 필적하는, 아니, 어지간한 보통의 드래곤을 능히 압도하는 엄청난 마나의 도도한 흐름이 보였다.
그러니까 이건, 확실하다.
“……뱀파이어의 로드께서, 여긴 무슨 용건으로 찾아오신 겁니까?”
절로 긴장이 되었다.
한편으로는 두뇌가 파파팍 돌아가며 추측의 톱니바퀴가 회전했다. 뱀파이어 로드가 지금 자신을 찾아왔을 이유. 너무나 강력하고도 유력한 이유가 떠오른 덕분이었다.
‘뱀파이어 로드 힐데르트의 정혈.’
혈염의 흑마법사, 아난샤.
최근에 놈을 쓰러뜨리는 과정에서 로드의 정혈 1/3 가량을 흡수해 버렸다. 덕분에 약간의 능력과 뱀파이어들을 위축시키는 권능을 얻기도 했다. 그런데…… 과연 뱀파이어 로드가 이런 상황을 가만히 봐줄까?
‘아니.’
아무리 생각해도 아닐 것 같았다. 라키엘은 가늘어진 눈빛으로 뱀파이어의 로드, 힐데르트를 쳐다보았다.
“혹시 로드께서는 제게서 정혈을 돌려받으러 오신 겁니까?”
“으음? 아닌데?”
“예?”
“정혈이야 먼 과거에 내가 인간 마법사에게 선물로 준 것이긴 하지. 그런데 그건 그거고. 남한테 준 선물이 어떻게 쓰이건 내가 알 바도 아니고. 선물이야 받은 사람 마음대로 쓰는 거지. 거기에 간섭하는 건 오지랖이잖나?”
“…….”
“그런데 보아하니 그대가 정혈의 일부를 품게 됐군. 축하하네.”
“아, 예…….”
“하지만 오해하지 말게. 거듭 말하지만, 나는 정혈이 어찌 되건 관심도 없네. 나는 오로지 순수하게 진료를 위해 여길 찾아온 걸세.”
“그, 그렇습니까?”
뜻밖이다.
뱀파이어 로드가 의외로 너무나 쿨하게 굴어서 오히려 조금은 당황스러웠다. 그런데 로드는 이쪽의 심정을 아는지 모르는지, 자신의 용건만 척척 밝혔다.
“그렇지. 사실은 여기 오기 전에 유능하다는 의사들 몇을 방문했다네. 하지만 영 차도가 없어서…….”
“그 의사들, 살아는 있습니까?”
“당연하지. 자네가 모르고 있나 본데, 나는 인간의 피를 탐하지 않네. 아주 먼 옛날에 어느 은인을 만난 뒤부터 말일세.”
“그럼…….”
“뭘 먹고 사느냐고? 선짓국이 있잖은가. 피를 대신할 훌륭한 음식이 말일세. 특히 딸기향과 민트초코향이 좋다네.”
“…….”
x발 뭐지 대체.
듣다 보니 머리가 이상해지는 것 같다.
뱀파이어 로드의 말이 이어졌다.
“흐음, 잡설이 길었군. 어쨌건, 나는 실력 있는 의사들을 찾아다니던 와중에 제국의 황태자이자 별궁 한의원의 원장인 자네가 사람을 유능하게 치료한다는 소문을 접했지. 그래서 여기까지 오게 된 것이고. 자네에게 진료를 받으러 말일세.”
“대관절 어디가 아프셔서…….”
무려 뱀파이어 로드가 찾아온 걸까. 이쯤 되니 궁금해졌다. 그런데 로드 힐데르트의 눈빛에 살짝 난감함이 배어났다.
“으음, 그걸 밝히기 전에…… 주위를 좀 정리해 줬으면 하는데.”
“예?”
“모두가 듣는 곳에서 말하기가 조금 곤란한 질환이라서 말이야.”
“…….”
진짜로 난감한 듯한 로드의 목소리.
라키엘도 덩달아 난감함을 느꼈다. 대강 뭔지 알겠다. 이런 환자들은 이미 여럿 겪어봤으니까. 그렇기에 그는 겉으로는 난감함을 조금도 드러내지 않았다. 오히려 태연하게, 아무런 일도 아니라는 듯이 건조하게 대꾸했다.
그래야 환자가 느끼는 민망함이 줄어든다는 것을 경험으로 알고 있기 때문이었다.
“괜찮습니다, 로드시여. 여기 데미안은 제 호위이고, 아니스는 별궁 한의원의 수간호사입니다. 둘 다 엄연한 한의원의 정직원이고 의료 인력이지요. 앞으로 로드의 질환을 치료하는 데에 함께 힘을 보탤 이들이기도 하고 말입니다.”
“하지만…….”
“하지만요?”
“자네가 말한 둘 말고 말일세. 하나가 더 있는데?”
“예?”
라키엘은 고개를 갸웃거렸다.
한 사람이 더 있다고? 여기에?
‘귀신이라도 봤나?’
싶었다.
물론 그는 몰랐다.
방금, 로드 힐데르트가 말하는 순간, 마젠타노 황실 특수정보부 소속 3호 요원이 소스라치게 놀랐음을. 자신의 은신이 들켰음을 깨달으며 황급히 자리를 떠났음을. 그걸 감지한 데미안이 로드 힐데르트를 향해 ‘과연 로드…….’라고 내심 감탄했다는 사실 또한.
어쨌건, 기겁한 3호 요원이 자리를 떠났고, 그걸 감지한 로드 힐데르트의 표정도 풀렸다.
“아, 떠나갔군. 신경 쓸 것 없네.”
“……아, 예.”
“그럼 내가 받고 싶은 진료는…… 후우……!”
로드 힐데르트가 크게 심호흡을 했다.
뭘까.
대체 뭐기에 뱀파이어 로드씩이나 되는 분께서 대륙 곳곳의 명의를 찾아다니다 못해서 여기까지 오게 된 걸까. 대관절 무슨 질환이기에 저렇게 각오를 다지며 비장하게 입을 여는 것일…….
“혹시 여기서, 발기부전 치료가 가능한가?”
……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