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00화. 오해도 때로는 실마리가 된다 (3)
자네티스 경.
마젠타노 황가의 궁정마법사.
처음부터 그가 실력을 널리 인정받았던 것은 아니었다. 오히려 그는 마법사계의 흙수저에 가까웠다. 뼈대 있는 마법 가문 출신이 아니었으며, 명망 높은 스승을 사사하지도 못했다. 그저 평범한, 마법에 꿈이 있는, 그러나 현실의 드높은 벽에 짓눌리는 청년에 불과했다.
하지만 그는 모든 역경을 극복했다. 비결은 단 하나. 타고난 성실성 덕분이었다.
항상 성실하게 연구하고, 또 연구에 매달렸다. 그렇다고 마냥 연구에만 골몰한 것도 아니었다. 스승을 극진히 모시기까지 했다. 만약 대한민국의 대학 교수들이 봤다면 당장 대학원으로의 납치(?) 충동을 느꼈을 법한 인재였다.
그렇게 그는 차근차근 성과를 내고, 실력을 키웠으며, 마법사계에서 두루 인정받는 위치까지 올라왔다. 그리고 만년에 이르러 마침내 제국의 궁정마법사가 되기까지 하였다. 그야말로 하급의 젊은 마법사들이 널리 귀감으로 삼을 인물이었다.
오늘 또한 마찬가지였다.
그는 명상에 잠겨 있었다.
멍 때리기?
물론 아니었다.
‘흐음……. 여기서 막히는군.’
가만히 앉아 눈을 감은 채 마나의 흐름을 느끼던 자네티스는 미간을 찡그렸다. 최근 연구 중인 ‘마나 회전 교류 및 입체마법진의 연계생성’의 실마리가 좀처럼 잡히지가 않아서였다.
‘줄여서 입체마법진. 이것만 완성되면 우리 인간도 드래곤에 필적하는 마법을 구사할 수 있게 될 것인데…….’
그는 문득, 최근에 접하였던 어느 고대의 자료를 떠올렸다.
‘용왕 베르키스.’
약 1,000년 전쯤이라 하였던가. 당시 용왕 베르키스라는 존재가 자신의 반려를 위하여 입체마법진을 창안하였다는 기록이 있었다. 그걸 보자마자 느낌이 빡 하고 왔다. 이거다. 수백 년째 한계의 벽에 부딪혀 발전이 정체된 인간의 마법을 한 단계 끌어올릴 비결이 말이다.
그 느낌을 받고서부터였다.
자네티스는 특유의 성실성을 발휘하며 연일 입체마법진 연구에 매달렸다. 비록 아직 성과는 없었지만, 그래도 끈질기게 매달리면 언젠가는 작은 실마리라도 움켜쥘 수 있지 않을까 싶었다.
‘그러니 포기할 수 없다, 절대로.’
그리고 다시 경험할 수는 없다, 최근의 그 굴욕을.
“…….”
황태자의 시성식에서 겪었던 굴욕이 가슴을 저며왔다. 당시 자신은 아무것도 하지 못했다. 대광장을 둘러치던 결계. 그걸 깨기 위해 결계 밖에서 얼마나 많은 마법을 난사하였던가.
그러나 결계를 깰 수가 없었다. 대광장으로 들어갈 수가 없었다. 안쪽에서 벌어지던 황태자와 소드마스터들의 전투를 무력하게 바라볼 수밖에 없었다.
다시는, 그런 무력감을 느끼고 싶지 않다. 그러자면 더욱 강한 마법이 필요하다. 아예 근본부터 차원이 다른 마법을 개발하고, 구사하면 된다. 아니, 꼭 하고 싶다.
그러니 오늘도 더욱 열심히…….
“……자네티스 경! 자네티스 경? 있나?”
벌컥!
돌연, 연구실의 문이 벌컥 열렸다. 그리고 헐레벌떡한 목소리가 고막을 콕 찔러왔다. 대체 아침부터 누굴까. 대관절 누구이기에 이토록 무례하게 궁정마법사의 연구실로 달려 들어오는 것일까.
……라고 생각하며 화를 내고 싶었지만, 자네티스 경은 그럴 수가 없었다. 저 헐레벌떡한 목소리를 듣자마자 누군지 알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황태자 전하?”
“어, 오랜만이야.”
“…….”
불길한데.
자네티스 경은 마음속에 울리는 경보음을 느끼며 황태자를 물끄러미 쳐다보았다. 황태자는 바쁘게 달려왔는지 얼굴이 살짝 상기되어 있었다. 쌕쌕거리는 숨을 몰아쉬며, 그럼에도 어쩐지 반짝반짝한 눈빛으로 이마의 땀을 닦아내고 있었다.
그러니까 저 모습, 저 분위기, 이미 겪어본 적이 있다. 심지어 두 번이나.
자네티스 경은 조심스럽게 물었다.
“저기, 오늘은 제가 누구를 지지거나 얼리면 되겠습니까, 전하?”
“……응?”
라키엘의 눈이 동그래졌다.
“누구를 지지거나 얼리면 되느냐니, 그게 무슨 말이야?”
“전하께서 그런 눈빛으로 벌컥 들이닥치셨을 때마다 그런 부탁을 받은 저는 목숨을 걸고서 황족을 지지고, 얼려야 했으니까 말입니다.”
“…….”
아, 그랬나.
라키엘은 자신이 과거 이곳을 두 차례 방문, 아니, 급습(?)했던 때를 떠올렸다.
첫 번째는 조르쥬라는 아이의 뇌전증을 치료하던 때였나. 그래. 맞다. 당시에 자네티스 경을 처음 찾아오자마자 황태자인 자신을 전격마법으로 지져달라고 했지. 두 번째는…… 뇌졸중으로 중태였던 황제를 얼려달라고 부탁했구나.
그리고 오늘이 세 번째 방문이다. 자네티스 경이 저토록 몸을 사리는 게 이해가 갔다.
“아, 오늘은 그런 부탁을 하려는 건 아니고.”
라키엘은 빵긋 웃으며 오해를 풀 겸, 자신의 용건을 밝혔다.
“우리 대마법사 자네티스 경의 연구자료를 열람하고 싶어서 말이야.”
“……예? 제 연구자료를 말입니까?”
“어. 특히 합성 생명체 키메라에 대한 연구 자료. 있지?”
“있긴 합니다만…….”
“그런데?”
“제 연구자료를 함부로 공개하는 것은 좀…….”
“좀?”
“게다가 전하는 저의 마법을 사사한 학파의 제자도 아닌 남이시라 더더욱…….”
“더더욱?”
“죄송합니다, 전하. 그건 좀…….”
자네티스 경이 난감한 기색을 노골적으로 드러냈다. 뭔가 선을 확 넘는 부탁을 들은 사람 같은 반응이었다. 이쪽이 황족이기에, 황태자이기에 그나마 화를 내지 않고 정중하게 대답을 하는 느낌이랄까.
이어지는 궁정 마법사의 물음도 마찬가지였다.
“송구합니다만 전하? 혹시…… 마법사들의 금기를 알고 계십니까?”
“금기? 마법사들의?”
“예, 전하.”
“뭐, 대강은?”
라키엘은 소설 마검황에서 언급되었던 설정들을 주르륵 떠올렸다. 그러고 보니 그중에 ‘마법사들의 금기’라는 내용도 있었다.
“혹시 그런 건가? 마법사의 연구자료는 학파의 비전에 해당되기에, 함부로 외부인에게 공개하거나 발설을 하여서는 안 된다…… 라는, 뭐 그런?”
“정확하십니다, 전하.”
자네티스 경이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초보적인 실수로 자신도 모르게 무례를 저지른 학부생을 토닥이는 교수님 같은 눈길로 차근차근 말했다.
“전하? 제가 전하의 요청을 받아 마법을 지원해드리는 등의 도움을 드릴 수는 있습니다. 그건 백 번이라도 괜찮습니다. 하지만 제 연구자료는…… 아무리 전하라고 하셔도 절차 없이 열람하실 수는 없으십니다.”
“내가 경의 학파가 아니라서? 외부인이라서?”
“그렇습니다, 전하.”
“흐음.”
알겠다.
그러니까 소설 마검황에 잠깐 나왔던 마법사들의 금기라는 게 사실이었단 거구나. 학파의 비전, 혹은 맛집 비밀 소스 레시피 같은 거라서 ‘외부인’에게는 공개할 수 없다는 거겠지?
‘그럼 뭐, 나한테는 껌이네.’
……촵촵!
상황을 파악한 라키엘의 좌뇌와 우뇌가 손에 손잡고 강강수월래를 추며 파파팍 돌아갔다. 두뇌회전과 연동되는 혓바닥 모터에도 힘찬 시동이 걸렸다.
상대가 밝히는 거부 논리. 그 논리에서 보이는 작은 허점. 그 허점을 찢어발길 이쪽의 전략까지.
모두 세팅 완료.
그리고, 발사.
마침내 라키엘의 입이 뻔뻔하게 열렸다.
“내가 외부인이라. 우리가…… 남이었어?”
“……예?”
뭔 소리냐는 듯 살짝 찡그려지는 궁정마법사의 눈썹. 라키엘은 더욱 태연하게 싹 정색했다.
“내가…… 경에게 남이라고?”
“전하? 하지만…….”
“어. 알아. 알겠어. 경이 무슨 말을 하려는지 말이야. 내가 학파의 일원이 아니니까 남이라는 거겠지. 그런데 우리 한번 생각을 해보자고. 학파의 구성원만 식구야? 그 학파를 돌아가게 돈을 주는 물주는? 그냥 호구인가?”
“예에? 그게 무슨 말씀…….”
“무슨 말씀이기는. 내가 하나 물어볼게. 경은 황실에 소속된 궁정마법사지?”
“예, 그렇습니다.”
“그대가 진행하는 마법 연구, 거기에 돈이 얼마나 들어가는지 알아?”
“저기, 하오나 전하?”
“그 연구비가 어디서 나오는지 알아?”
“…….”
“황실의 국고에서 나오지. 그리고 황실의 국고는 전국에서 걷은 세금에서 비롯되지. 그 세금은? 저 산골짜기의 양떼를 모는 어린아이에서부터, 어촌의 땡볕에서 그물을 고치는 아낙네는 물론이고, 진창길에서 마차를 모는 상단의 마부, 논밭의 잡초를 뽑느라 구슬땀을 흘리는 할아버지 농부까지, 그 모든 남녀노소 만백성이 피땀을 흘려가며 이룩한 노동의 성과에서 나오는 거 아닌가?”
“…….”
“그런데, 그렇게 만백성이 피땀 흘려가며 낸 세금으로, 그 세금을 뚝 잘라서 지원해준 연구비로, 이렇게 쾌적하고 편안한 곳에서 팔자 좋게 명상을 해가며 연구를 해놓고, 그 결과물은 공개하기 싫다고? 게다가 남도 아닌 나한테? 아니, 내가 남이었구나. 아 참. 하. 하. 하.”
“저, 전하……?”
“아 그렇구나. 우리가 남이었구나. 난 몰랐네. 나 혼자만 안 그런 줄 알고 있었네. 내가 잘못했네. 내가 눈치도 없고, 사회성도 없어서 경의 생각도 모르고 나 혼자 오해를 했네. 아주 그냥 내가 몹쓸 놈이었네. 그치?”
“제가 잘못했습니다, 전하…….”
“아니야. 경은 아무 잘못이 없지. 혼자 착각한 내가 멍청하고 나쁜 놈이었던 거지. 우리 사이를 함부로 착각해서 선도 막 넘어 버리고. 그렇지?”
“저, 전하아…….”
“괜찮아, 괜찮아. 그럴 거 없어. 내가 경에게 미안해해야지. 왜 경이 나한테 그래? 이대로 돌아가면 내가 정중하게 사과의 서신을 쓸게. 격식 차려서 제대로 말이야. 물론 그것도 그냥 달랑 건네주면 안 되겠지? 우린 그렇게 친하고 편한 사이 아니니까? 그러니까 사과 서신도 황실 궁내부를 통해서 정식으로 전달할게. 황실 일지에도 공식적으로 남기고. 그러면 되겠네. 자고로 우리처럼 남 같은 사이에는 예의와 절차라는 게 중요한 거거든. 아암, 그렇고말고.”
“제, 제발…….”
“제발, 뭐?”
“제가 어떤 연구자료를 보여 드리면 되겠습니까?”
“……카하.”
“…….”
오싹, 소름이 돋는 건 왜일까. 자네티스 경은 울고 싶어지는 심정을 고이 참아 삼켰다.
“아까 말씀하신 키메라 연구자료를 보여 드릴까요?”
“어, 그래도 되나? 우리 사이에?”
“다, 당연하지요.”
“아까까진 안 당연했던 거 같은데.”
“…….”
“뭐, 그래도 경이 그렇게 보여주고 싶다니까, 좀 봐볼까?”
“…….”
“키메라 연구, 그중에서 혹시 이종 간의 장기조직 이식과 결합에 대한 자료가 있나?”
“아, 예. 있습니다.”
“심장도?”
“물론입니다.”
“당장 보도록 하지.”
그렇게 궁정마법사를 함락(?)시킨 덕분이었다. 자네티스 경이 자신의 평생의 성과가 담긴 갖가지 자료들을 후다닥 가지고 왔다.
그때부터였다.
라키엘은 자료에 파묻혔다.
아까 황제의 조언 덕분에 얻은 뱀파이어 로드의 발기부전 치료 실마리. 그걸 실제로 구현할 방법을 찾고자 자료 검색 노가다에 매달렸다. 상쾌한 오전을 지나, 궁정마법사와 점심을 먹고, 나른한 오후를 거쳐, 저녁을 넘어서, 새벽까지 내내.
그리고 마침내 다음 날 아침의 동이 틀 무렵, 졸지에 옆에서 함께 자료 검색에 동참하게 된 자네티스 경이 눈가에 다크써클을 매달고서 꾸벅꾸벅 졸기 시작했을 무렵.
라키엘은 마침내 발견하였다.
“……찾았다. 뱀파이어 로드의 아침을 ‘튼튼’하게 해줄 맞춤형 치료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