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01화. 수술 준비 (1)
“……찾았다.”
“예?”
“찾았다고, 내가 바라던 자료.”
“…….”
이미 새벽을 지나 아침 동이 트려던 무렵이었다. 졸지에 황태자와 함께 날밤을 꼬박 지새워 버린 궁정마법사, 자네티스 경은 순간 저도 모르게 눈물을 왈칵 쏟을 뻔했다.
‘드디어!’
황태자가 원하던 자료를 찾았단다. 그럼? 지긋지긋하던 자료 탐색도 이제는 끝이다. 팔자에도 없던 날밤 지새우기를 뒤로 하고, 편안한 꿀잠과 숙면을 누릴 수 있겠다.
자네티스 경은 머릿속으로 오늘 하루의 일정을 ‘합법적이고도 명분 가득한 희망찬 병가’로 잡았다.
“그나저나, 전하는 괜찮으십니까?”
“음? 뭐가?”
“어제 아침부터 저와 함께 자료를 뒤적이느라 거의 쉬질 못하셨는데, 괜찮으신지…….”
“어, 으음, 대강은?”
라키엘은 싱긋 웃어 버렸다.
괜찮았다.
정말이었다.
덕분에 스스로도 조금 놀랍긴 했다.
‘전 같았으면 이 정도의 밤샘은 못 버텼을 텐데. 버텼어도 거의 좀비 꼴이 됐겠지?’
눈앞의 자네티스 경이 지금 그러했다. 한데 자신은 그렇지 않았다. 비결은 바로 얼마 전에 얻었던 ‘뱀파이어 로드의 정혈’이었다.
정혈을 흡수한 뒤로 밤이 되면 모든 신체 능력이 1.5배로 증가하게 됐다. 뭐, 그럭저럭 편리한 능력 정도겠거니 싶었다. 그런데 직접 체험(?)을 해보니 상상 이상이었다. 날밤을 지새웠는데도 죽을 정도로 힘들지는 않았다!
‘1.5배의 차이가 꽤 크구만. 뭐, 어쨌건-’
지금은 그게 중요한 게 아니다. 바라던 유형의 자료를 찾아냈다는 점이 중요하다. 라키엘은 방금 자신이 발견한 문서로 눈길을 던졌다. 서류의 제일 위쪽에는 <몬스터를 활용한 인공장기의 생성과 양산에 관한 실험>이라는 글귀가 쓰여 있었다.
‘좋아. 딱 좋아.’
라키엘의 입가에 만족도 100%의 미소가 살포시 맺혔다. 그의 눈길이 바쁘게 움직이며 서류의 내용을 읽어내렸다.
[실험 1일차 : 몬스터로 인공 장기 배양 실험을 시작해보려 한다. 만약 성공한다면, 이는 몬스터를 통한 인공 조직 양산 및 마법 시약 재료 대량 생산의 역사에 길이 남는 업적이 될 것이다.]
[실험 2일차 : ‘오소콘’의 심장 조직 일부를 떼어내서 마력으로 처리된 배양액에 담았다. 이제 열흘간 주기적으로 마력을 주입하려 한다. 내가 수립한 가설이 진짜라면, 열흘 뒤부터 배양액에 담긴 조직에서 변화가 관찰될 것이다.]
[실험 7일차 : 아직까지는 반응이 없다.]
[실험 9일차 : 여전히 반응이 없다.]
[실험 13일차 : 아직도 반응이 없다. 실패인가? 무엇이 잘못된 것일까.]
[실험 15일차 : 조직이 증식되기 시작했다! 아주 조금이지만 확실하다!]
[실험 18일차 : 심장 조직이 확연하게 커졌다. 좁쌀만 하던 크기에서 쌀알 정도로 불어난 것이 관찰된다. 조금만 더 커지면 된다. 목표는 아몬드 크기다. 현재 관찰되는 조직의 성장 속도로 미루어 총 1개월 남짓이면 충분할 듯하다.]
[실험 27일차 : 성장이 순조롭다.]
[실험 31일차 : 조직의 크기가 목표치를 달성했다! 정확히 아몬드에 가까운 크기로 자라났다. 해냈다. 비록 원래 오소콘의 심장에 비하면 수백 배는 작지만, 그럼에도 조직의 성분과 성질은 동일하다. 즉, 오소콘의 심장을 원료로 하는 ‘콘트라’ 시약을 실험실에서 양산할 수 있게 됐다. 남은 과제는 배양 기간 단축과 비용의 절감뿐.]
[실험 32일차 : 폐하께 보고를 올렸다. 젊은 폐하께서 매우 흡족해하셨다. 원래 콘트라 시약은 구하기가 매우 어렵고 비쌌다. 오소콘의 심장 자체가 워낙 고가의 재료라서 그렇다. 하지만 이제는 이야기가 달라졌다. 오소콘의 심장과 동일한 조직을 실험실에서 배양할 수 있게 됐다. 콘트라 시약을 자체적으로 생산할 수 있게 됐다. 아마 폐하의 기쁨은 그 덕분인 것이겠지. 어린 황태자 전하를 괴롭히는 병마를 치료할 희망이 생겼으니까. 충분히 이해가 간다. 아이를 둔 젊은 아비의 마음은 누구라도 그러할 테니까.]
“…….”
읽다가 저도 모르게 멈칫.
라키엘은 실험일지가 작성된 날짜를 살펴보았다. 대략 20년 전이었다. 그럼 젊은 폐하는…… 지금 황제의 젊은 시절을 말하는 거구나. 어린 황태자 전하는…… 라키엘이고.
‘후우.’
저 시절부터 이미 황제는 라키엘을 지극히 아끼고 걱정했던 것이었다. 그럼에도 겉으로는 지배자의 책무와 권위를 지키느라 애써 냉정한 태도를 보였던 거겠지. 그 생각을 하자 가슴 한쪽이 저릿저릿해졌다.
마치, 내가 도둑놈이 된 듯한 기분. 원래 이곳에 있어야 했을 사람을 쫓아내고 그 자리를 빼앗은 뻐꾸기 새끼가 된 느낌.
‘……쯧, 그래도 어차피 내가 이 몸을 차지하지 않았다면 황태자 라키엘은 진즉 비참하게 죽었을 거잖아. 소설에서처럼.’
애써 변명하듯 죄악감을 털어냈다. 한편으로는 라키엘의 원래 영혼은, 한국에 남겨진 자신의 육체는 어떻게 된 걸까 싶기도 했다. 하지만 그러한 잡념 또한 얼른 털어냈다. 고민하며 매달린다고 답이 나올 문제가 아니니까.
지금은 보다 중요하고 시급한 문제가 눈앞에 있으니까.
‘집중하자, 이한.’
그는 다시 실험일지를 살펴보았다.
[실험 35일차 : ……망했다. 심장이 움직인다. 배양액 속에서 열심히 펌프질을 시작했다. 갑자기, 아무런 전조도 없이. 이러면 안 되는데. 큰일이다.]
[실험 36일차 : 심장 박동은 약 7시간가량 지속되었다. 그러므로 결론은 명확하다. 실험은 실패다. 원래의 목표는 오소콘의 심장 조직을 배양하되, 그 조직이 활성화되어 심장이 뛰면 안 되는 것이었다. 오소콘의 심장은 움직이는 즉시 독성을 품게 되고, 그 독성을 중화하는 데에 막대한 비용이 들기 때문이다. 그것이 마법 시료로 쓰이는 오소콘의 심장이 고가에 거래되는 이유이기도 하다. 이번 실험은 그 비용을 절감하며 조직의 양산을 실현하는 것이었는데, 망했다. 조직이 활성화되며 독성이 대량으로 생성되었다.]
[실험 40일차 : 2차 실험 시작. 이번에는 배양 기간을 줄여서 심장 박동의 시작을 저지해 보려 한다.]
[실험 70일차 : 실패했다. 심장 조직이 아몬드 크기로 자라나는 즉시 박동을 시작해 버렸다. 그렇다고 아몬드 크기 이하로 배양을 하면 곤란하다. 그러면 시약에 쓰일 성분이 부족하게 되고, 시약 재료로서의 가치가 없어지니까.]
[실험 192일차 : 거듭된 실패 끝에 깨달았다. 애초에 실현이 불가능한 실험이었다. 오소콘의 심장은 시약 재료로 가치가 있을 최소한의 크기로 배양되는 것과 동시에 박동을 시작하며 독성을 생성했다. 즉, 독성 없는 상태로의 양산이 불가능하다는 뜻이다. 오늘 폐하께 그 사실을 알려드렸다. 폐하께서는 아무 말씀이 없으셨다. 다만 가늘게 떨리는 눈빛으로 보아 실망하신 기색이 역력했다. 아마도 어리고 병약한 황태자 전하를 생각하셨던 것이겠지.]
[실험 203일차 : 실패. 실험 종료.]
“…….”
실험일지는 거기까지였다.
이거면 됐다. 딱 바라던 내용이다. 라키엘은 궁정마법사 자네티스 경을 돌아보았다.
“이 실험일지에서 말하는 오소콘의 심장 말이야. 혹시 지금도 배양할 수 있을까?”
“오소콘의 심장을 말입니까?”
“어. 내가 좀 필요할 것 같아서.”
“그걸 어디에 쓰시려고……. 그건 실패한 실험인데 말입니다?”
“나한테는 아니야. 그걸 어디에 쓸지도 내가 알아서 할 일이고. 어쨌건 당시에 했던 그 배양 실험, 지금도 할 수 있어?”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굳이 할 필요가 없을 듯합니다.”
자네티스 경이 기억을 더듬듯 턱수염을 매만졌다.
“그…… 제 기억에 따르면, 당시에 배양했던 조직 중에 하나를 샘플로 보관해두었습니다. 혹시나 훗날에 다시 쓰일 날이 있을까 싶어서 말이지요.”
“샘플로 보관을 했다고? 그런데, 20년 전에 보관한 샘플의 조직이 아직껏 살아 있을까?”
“아마도 그럴 겁니다. 특수 보존액에 담가뒀으니까 말입니다.”
“그럼 보자.”
“지금 말입니까?”
“당연하지. 그럼 내일 볼까? 그때까지 또 같이 날밤 지새우려고?”
“……아닙니다!”
궁정마법사의 반응이 다급(?)해졌다. 실험실 뒤쪽의 창고로 들어간 그가 한참을 부시럭 덜커덩 드르륵 뒤적뒤적 분주하게 움직였다. 그렇게 5분쯤 지났을까.
“찾았습니다!”
안쪽에서 ‘유레카!’ 같은 외침이 들려오더니 그가 산발이 된 채로 유리병을 들고 나왔다. 그 속에 아몬드 크기의 자그마하고 빨간 덩어리가 동동 떠 있었다. 실험일지에서 언급된, 오소콘의 심장으로 배양한 미니 심장 조직이었다.
‘경혈 스캐닝.’
키이이잉!
[경혈 스캐닝을 발동합니다.]
[스캐닝의 범위 (반경 150m) 이내에 헤모글로빈 기반의 혈액을 지닌 대상이 다수 포착되었습니다.]
[범위 내의 헤모글로빈을 지닌 모든 대상이 자동으로 스캔됩니다.]
조직을 쳐다보며 경혈 스캐닝을 켰다.
다행히 오소콘의 심장 조직도 스캐닝 대상으로 잡혔다. 덕분에 그는 보존액 속의 미니 심장 조직을 자세히 살펴볼 수 있었다.
‘어? 잠깐만. 이거 미쳤는데?’
라키엘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말 그대로 ‘미니 심장’이었다.
크기는 아몬드 정도.
그럼에도 있을 건 다 있었다.
‘2심방 2심실 구조에, 심실사이막(Interventricular septum)도 뚜렷하게 발달이 되어 있고, 삼첨판막(Tricuspid valve)에 대동맥반달판막(Aortic semi-lunar valve)까지 갖췄어? 진짜 있을 건 다 있구나. 게다가 이 조직이 전부 살아 있어.’
당장 신경 신호만 흘려주면 제대로 작동할 것 같았다. 미니 심장을 보는 라키엘의 두 눈에서 탐욕의 꿀이 뚝뚝 떨어졌다.
“저기, 자네티스 경?”
“예, 전하.”
“이거 내가 가져가도 될까?”
“이걸…… 말입니까?”
“으음. 이걸 제대로 활용하면 병마의 고통에 시달리는 누군가가 구원받을 수 있을 듯해서.”
“…….”
궁정마법사, 자네티스 경은 저도 모르게 입을 다물었다. 밤샘을 하며 쌓였던 피로가 확 날아가는 기분이 들었다. 순간 형언할 수 없는 감동이 밀려온 까닭이었다.
‘전하, 당신은 도대체…….’
무엇 때문에 이렇게도 남을 위해 헌신하시는 것입니까?
묻고 싶었다.
솔직히 조금 전까지만 해도 힘들고 성가셨다. 황태자가 또 무슨 바람이 불어서 특이한 자료를 찾나 싶었다. 그런데 지금 와서 보니, 그게 모두 남을 위한 일이었단다. 환자를 위한 헌신이었단다.
‘이미 황족이고, 황태자인 분인데…… 굳이 남을 위해 이러지 않아도 될 분이신데…… 그래도 누구 하나 뭐라고 하지 않을 텐데…… 그런데도…….’
병약한 몸을 이끌고 밤샘을 하는 황태자. 그 끝에 사람들을 병마에서 구원할 방법을 찾았다며 피로도 잊고서 행복하게 웃는 황태자.
어찌 이런 분을 존경하지 않을까. 어찌 이런 분을 우러르지 않을까.
“전하, 그럼 제가…… 감히 한 가지만 여쭙겠습니다.”
“으음?”
“이건 황가의 투자금으로 진행된 실험의 결과물이고, 이것을 외부로 반출하기 위해서는 사유서에 정확한 용도를 작성해야 합니다. 그것이 법으로 정해진 규칙이라서 말입니다. 하여 감히 여쭙자면…… 전하께서는 이 오소콘의 심장을 구체적으로 어디에, 어떤 용도로 사용하려 함이십니까?”
절차를 위해 물었다. 한편으로는 정말로 궁금했다. 솔직하게는 기대감으로 가슴이 두근거렸다.
‘분명 좋은 곳에 훌륭하게 쓰시려는 거겠지. 대가 없는 헌신과 봉사를 위해 쓰시려는 것이겠지. 저토록 열정적으로 만백성을 챙기는 전하이시니…….’
그러할 것이다.
자신의 실패했던 실험 결과물.
그것이 20년의 세월 끝에 좋은 곳에 쓰인다는 사실이 감격스러웠다. 이토록 훌륭한 황태자 덕분에, 자신의 창조물이 세상 한쪽을 조금은 아름답게 수놓을 수 있으리라는 뭉클한 희망 또한 조심스럽게 피어났다.
그리고 기다렸다.
황태자의 감동적인 대답을.
“아, 이거?”
황태자 라키엘이 그의 기대에 부응하듯 훈훈하게 미소 지었다.
“뱀파이어 고환에 장착해 주려고.”
“…….”
“거기 전용 심장. 멋지지?”
“…….”
멋지기는 x발 내 실험결과물 돌려줘요.
자네티스는 울고 싶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