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05화. 은혜 갚는 로드 (1)
딩동!
[당신이 지니고 있던 ‘뱀파이어 로드 힐데르트의 정혈’이 불완전한 상태를 벗어납니다.]
[완전해진 ‘뱀파이어 로드 힐데르트의 정혈’이 당신의 마나써클에 이롭고도 거대한 영향력을 행사합니다.]
[당신의 아스라한 심법과 마나써클이 새로운 형태로 진화합니다!]
‘어?’
생각지도 못한 메시지.
뜻밖의 내용에 라키엘의 눈이 동그래졌다. 메시지가 계속해서 떠올랐다.
딩동!
[스킬 레벨이 상승하였습니다.]
[Lv.2 -> Lv.7]
[스킬명 : 아스라한 심법]
[단계 : 더블 써클 Lv.7]
[마나 증폭률 : 520%]
[스킬 옵션 : ① 써클 슬롯 / ② 격침불가 / ③ HP 변환 / ④ 포식의 밤]
[스킬 옵션 <포식의 밤>이 생성되었습니다.]
[스킬 전용 옵션 ④ : 포식의 밤 - 야간 한정으로, 뱀파이어 로드의 영향을 받은 써클 슬롯이 사악한 흡수의 권능을 발휘합니다. 외부로부터 타격을 받았을 시에, 타격을 준 대상에게 5초 이내로 반격을 하면, 가한 타격만큼의 체력을 즉시 흡수하여 회복합니다.]
‘오?’
실시간으로?
상대의 체력을 흡수?
이거, 잘만 사용하면 난전의 강자가 될 수도 있겠는데.
……라는 생각을 하던 무렵이었다.
“꿈틀거리지 말게.”
“예?”
“지금 힘을 전수해 주고 있잖나. 쫌.”
뱀파이어 로드 힐데르트의 일침(?)이 날아왔다. 뻘쭘해진 라키엘은 얌전해진 몸가짐으로 후속 메시지를 살펴보았다.
변화는 아스라한 심법에 국한된 것이 아니었다.
[당신의 신체에 깃든 ‘뱀파이어 로드 힐데르트의 정혈’이 완전해짐에 따라, 정혈이 당신의 신체에 부여하던 권능이 강화됩니다.]
[조건부 신체 강화]
[매일 밤, 당신의 모든 신체능력과 아스라한 심법이 3배 향상됩니다.]
[보름달이 뜨는 밤이면 당신의 모든 신체능력과 아스라한 심법이 5배 향상됩니다.]
[뱀파이어 로드의 위엄]
[이 세상의 모든 뱀파이어(일반급, 고위급)는 당신과 만나는 즉시 본능적인 위압감과 복종심을 느끼게 될 것입니다.]
“…….”
대박.
보자마자 라키엘은 느꼈다.
심플하고 강력하다.
밤에는 3배 강해진다.
보름밤에는 5배 강해진다.
로드를 제외한 모든 뱀파이어를 복종시킬 수 있게 되었다.
“어때, 만족하나?”
“…….”
문득 들려오는 로드 힐데르트의 목소리. 마침내 힘의 전수가 끝난 걸까. 맞잡은 그의 손을 통해 전해져 오던 열기가 어느새 사라져 있었다. 고개를 들었다. 이쪽을 보며 희미하게 웃는 로드의 얼굴이 보였다.
“고맙네. 하여 이렇게나마 보답을 하고 싶었다네. 내 은인에게 주는 보답치고는 제법 약소하지만, 우선 이것이라도 받아주게나.”
로드의 눈빛, 목소리 가득 배어 있는 진심이 느껴졌다. 세상이 두 쪽이 나는 일이 있어도 무조건 보답을 해야겠다는, 고맙도록 끈적한(?) 눈빛이었다.
그래서였다.
그 눈빛을 보는 순간, 라키엘은 로드에게 더욱 점수를 딸 건덕지를 본능적으로 감지했다. 그리고 곧바로 실행에 옮겼다.
“아이고, 무슨 이런 귀한 걸…….”
온몸을 은근슬쩍 배배 꼬기! 과분한 걸 받아서 부담스럽다는 듯한 표정을 지으면서도 슬며시 입꼬리는 올려서 미소 짓기!
동시에 그는 문득, 한국에서의 추억을 떠올렸다.
어린 시절 설날 세뱃돈을 받을 때가 이랬다. 한의원 시절 거래처 사장님들께 비싼 명절 선물세트를 받을 때가 이랬다. 이럴 땐 은근슬쩍 궁둥짝을 배배 꼬며 ‘부담스럽지만 고맙다’라는 어필을 최대한 해야 한다.
특히, 선물을 주는 상대가 나이 지긋한 어르신일 때가 그러하다. 효과 직빵이다. 대체로 어르신들이 이런 반응을 좋아하니까.
이것이 사회를 살아가는 노련함!
험난한 세상을 항해하는 생존술!
그리고 역시나, 이러한 꼼수는 누구보다도 나이가 지긋한 뱀파이어 로드에게 더더욱 직빵으로 통했다.
“허어? 고맙다고 넙죽 받을 줄 알았더니?”
“아닙니다. 제가 어떻게 이토록 귀한 걸 감히…….”
“그래도 받게. 내 마음일세.”
“제가 그래도…… 되겠습니까?”
“물론이지. 그대에겐 자격이 있어. 안 받아주면 오히려 내가 섭할 걸세.”
“그렇습니까?”
“그렇대도. 그대, 정말 이러긴가?”
“아닙니다. 그럼 로드 님의 마음을 생각해서라도 받겠습니다. 감사합니다.”
“그래. 그렇지. 내 마음을 알아줘서 고맙군.”
“아, 예…….”
마무리로는 칭찬이 살짝 민망하다고 수줍다는 듯이 몸 둘 바를 모르는 미소 발사!
그걸로 끝이었다.
이쪽의 반응이 뜻밖이었던 걸까. 혹은 이런 사회 생존술(?)을 처음 겪어보는 걸까. 로드 힐데르트가 더욱 흡족하게 웃었다. 이쪽의 손을 맞잡은 그의 손아귀에 더욱 힘이 들어왔다.
“그대는, 이제 보니 실력만 뛰어난 것이 아니었군. 설마하니 이토록 훌륭한 인성까지 지녔을 줄이야. 매우 좋아. 훌륭해. 역시 그대를 일족의 동반자로 점찍은 내 눈이 틀리지 않았어.”
“예?”
일족의 동반자?
그게 뭡니까?
라키엘이 휘둥그레진 눈빛으로 물었다.
로드의 미소가 더욱 흡족해졌다.
“전부터 생각했던 것이라네. 그대에게 수술을 받은 다음 날부터 말이야. 이 시간부로, 이 세상의 모든 뱀파이어는 그대를 친구이자 은인으로 대하게 될 것이네. 그대는 나의 은인이니까. 친구니까.”
“…….”
은인…… 친구…….
그럼 그거에 어울리는 뭔가 더, 없습니까?
라키엘은 은근슬쩍 기대했다. 그리고 역시나 로드는 기대(?)를 저버리지 않았다. 마치 숨겨둔 추가 세뱃돈 봉투를 꺼내는 삼촌처럼 웃으며-
“이걸 받아주게.”
뭔가를 품속에서 꺼내어 내밀었다. 받아 보니 수수한 모양의 팬던트였다.
“날 소환할 수 있는 물건일세. 내 힘이나 도움이 필요한 순간이 오면 뚜껑을 열어보게. 그러면 내가 어떤 곳에 있든, 그대가 어떤 상황에 처해 있든, 내가 무조건 소환되어 그대의 곁으로 불려올 걸세.”
“그럼…….”
“아, 1회용이니까 함부로 열어보지는 말고.”
로드가 선사하는 보상은 거기까지였다. 비로소 이쪽의 손을 놓아준 그가 말없이 인사했다. 가슴 앞을 살짝 짚어내는 고풍스러운 손짓. 그 손짓이 끝났을 때 그의 모습은 사라져 있었다. 떠난 것이었다.
“후우…….”
그제야 참았던 숨을 크게 내쉬었다.
이렇게, 치료가 난해했던 환자 하나를 성공적으로 진료했다. 무려 뱀파이어 로드. 불가능한 미션을 완수한 기분이 이런 걸까. 막대한 보상이 기쁘면서도, 한편으로는 하루쯤 푹 쉬고 싶은 기분이 새록새록 피어났다.
하지만 현실은 조금 다르긴 하지.
“다음 환자분! 들어오세요!”
진료실 앞에서 들려오는 수간호사 아니스의 목소리. 그렇다. 지금은 엄연한 진료 시간이다. 라키엘의 잠깐 풀어졌던 표정이 한의사의 그것으로 돌아갔다.
여름날, 바쁜 하루의 시작이었다.
♣
여름밤의 정원은 싱그럽구나.
또한, 은인의 거처는 아늑하구나.
뱀파이어 로드 힐데르트는 고고한 달빛 아래 별궁의 정원을 거닐었다. 사실 그는 라키엘의 앞에서는 사라졌으되, 아직 완전히 떠난 것이 아니었다. 해야 할 일이 남았기 때문이었다.
“왔나.”
그의 나직한 읊조림.
어느새 멈춘 그의 발걸음.
그런 그의 앞에는 20명가량의 뱀파이어들이 한쪽 무릎을 꿇고 있었다. 바로, 한때 아난샤를 섬겼다가 생포되어 별궁 한의원에 피믈리에(?) 혈액 감별사로 취직한 계약직 뱀파이어들이었다.
“이, 일족의 위대하신 로드를 뵙습니다.”
“미천한 이들이 존귀한 분을 뵙나이다!”
뱀파이어들이 벌벌 떨며 극상의 예를 취했다. 그러는 한편으로 그들은 힐데르트를 보자마자 울먹이기 시작하였다.
“진정한 로드시여, 불러주셔서 감사합니다!”
“저희를 구해주십시오.”
“이곳을 벗어나고 싶습니다!”
“저를 데려가 주십시오, 제발!”
하나가 눈물을 보이자마자 일제히 터져 버린 울음보. 다들 그동안 별궁 한의원에서 피믈리에로 재직하며 겪은 설움을 죄다 토해내기 시작하였다.
“로드시여, 저희는 착취를 당하고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이건 엄연한 학대이며 갈취입니다.”
“처음 계약하던 때만 해도 이 정도일 줄은 몰랐는데…… 매일 피를 공짜로 마시게는 해주는데…… 그게 전부 병자들의 오염된 혈액입니다.”
“이렇게 살다간 미각이 사라질 것 같습니다!”
“그것만이 아닙니다. 한 달에 하나씩, 송곳니를 스스로 뽑아서 상납해야 합니다.”
“그런데 월급도, 휴가도 없습니다.”
“살려주는 걸로 감사하랍니다.”
“이건 말이 안 되지 않습니까?”
“제발, 사악한 악덕업주로부터 저희를 구해주세요, 로드시여!”
“…….”
힐데르트는 뱀파이어들의 한이 서린 고발과 토로를 말없이 들었다. 그런데 뱀파이어들을 보는 그의 눈빛은 어쩐지 냉랭하기가 그지없었다. 이내 툭, 떨어지는 그의 선고 또한 그러하였다.
“그대들은 지금 감히. 나와 일족 전체의 은인을 악덕업주 취급을 하였나?”
“……예에?”
뱀파이어들이 흠칫했다.
힐데르트의 냉랭한 말이 이어졌다.
“본디 진짜 뱀파이어는 인간의 피를 함부로 탐하지 않는다. 우리는 혈액을 대체한 선짓국을 사랑하며, 그러한 식성으로 인간과의 평화로운 공존을 꾀한다. 이러한 일족의 율법을 함부로 무시한 이들이여.”
……흠칫.
“그대들은 정상적인 뱀파이어가 아닌, 인간의 흑마법사에 의해 태어나 그들을 섬겼지. 그럼에도 그대들을 뱀파이어 취급해 주는 내게 감사하라. 또한, 그대들은 나의 은인인 라키엘 아드리아 마젠타노에게도 평생 감사하며 살아야 할 것이다.”
“그, 그건 어째서…….”
“어째서? 간단하다. 원칙대로라면 나는 일족의 율법을 어긴 그대들을 이 자리에서 소멸해야 하는 바, 그러나 그대들은 현재 일족의 은인인 라키엘을 섬기고 있지 않은가. 그렇기에 나는, 은인의 아랫사람을 함부로 해할 수가 없다. 즉, 그대들은 현재 라키엘 아드리아 마젠타노를 섬기고 있기에, 그를 방패로 삼아 소멸을 면하고 있는 것이다.”
“그…….”
“대답이나 변명은 필요 없다. 만일, 그대들이 나의 은인 라키엘에 대한 봉사와 헌신을 중단하는 순간, 그를 섬기는 존재가 아니게 되는 순간, 나는 그대들을 찾아올 것이다. 그 용건이 무엇이 될지는 굳이 말해주지 않아도 알겠지?”
“…….”
뱀파이어들의 목울대가 떨렸다.
물론 듣자마자 알겠다.
소멸.
라키엘을 섬기지 않는 순간, 은인의 아랫사람이 아니게 되는 거니까, 그 즉시 소멸시켜 버리겠다는 뜻이다.
“저, 저희는…….”
“대답은 필요 없다고 일렀을 터인데.”
냉랭한 눈빛과 선고.
그걸로 끝이었다.
모처럼 한의원 탈출(?)을 꿈꾸었던 뱀파이어들의 어깨가 축 늘어졌다. 그들은 깨달았다. 죽기 싫으면 무조건 평생 한의원의 노예로 일해야 하는 운명이 되었음을.
하지만 힐데르트는 그들의 절망에 오히려 흡족함을 느꼈다. 그래. 이만하면 되었다. 적어도 이 정도 위협이면 저들이 은인을 배신할 일은 없을 테니까.
‘그럼 은인을 위한 다음 일을 해봐야겠군.’
로드 힐데르트는 별궁 정원을 떠났다. 다만 그림자에 깃들기 직전, 그는 정원 한쪽을 묘한 시선으로 바라보았다.
깊이 잠든 드래곤의 존재감이 느껴졌다. 한편으로 그는, 황태자의 흑발 호위에게서 때때로 희미하게 감지되던 이질적인 기운도 떠올렸다.
“…….”
뭐, 거기까진 내가 상관할 일이 아니겠지. 눈치로 보아 드래곤은 별궁 한의원의 입원 환자인 듯하고, 흑발 호위의 내면에 도사린 무언가는 황태자도 이미 알고 있는 기색이었으니까. 그럼에도 곁에 두는 건 그럴 만한 이유가 있다는 거겠지.
‘지금은 더 중요한, 보금자리로 돌아가기 전에 반드시 만나야 할 이부터 찾아가볼까.’
스르륵……!
로드가 달그림자에 깃들어 사라졌다.
그리고 잠시 후.
그가 황제의 집무실에 모습을 드러냈다. 황태자에 대한 칭찬을 잔뜩 장전(?)하고서. 일족과 제국 황실 사이의 전격적인 혈맹 제안을 품고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