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약 파는 황태자-306화 (306/468)

306화. 은혜 갚는 로드 (2)

‘간다. 간다. 드디어 간다. 저놈이 간다!’

불끈!

마젠타노 황실 특수정보부 소속, 3호 요원은 그림자 속에서 주먹을 불끈 쥐었다. 너무나 기뻤다. 그럴 수밖에 없었다. 최근 자신을 가장 괴롭게 만들었던 존재가, 눈엣가시, 아니, 망막에 달라붙은 고춧가루 같던 존재가 드디어 떠나갈 조짐을 보인 덕분이었다.

‘뱀파이어 로드…….’

3호 요원의 시선이 향하는 곳. 약 200미터 떨어진 거리의 별궁 정원. 그곳에 뱀파이어 로드가 있었다. 정원에서 만난 일반 뱀파이어들을 향해 뭔가 으름장 비슷한 것을 놓고 있었다. 그리고 홀가분한 표정으로 돌아서는 모습이 보였다.

누가 봐도 이제 자기 집으로 돌아가려는 사람의 표정이다. 거리가 아득하게 멀지만, 혹독한 특수훈련을 받은 그는 200미터의 거리에서도 사람의 표정을 식별할 수 있었다.

그러니까 확실하다.

이제 저놈은 간다.

집에 갈 것이다.

제발 좀 꺼져줘. 아니, 좀 가주세요.

‘나도 일 좀 하자고…….’

3호 요원은 저도 모르게 한숨을 푹 내쉬었다. 한편으로는 최근 내내 겪었던 고충을 떠올렸다.

‘저 뱀파이어 로드 때문에 황태자 전하를 제대로 관찰할 수가 없었지.’

처음 로드가 진료실에 왔던 때부터였다. 로드는 오자마자 이쪽의 존재감을 알아차린 듯했다. 그게 거슬렸던 걸까. 로드는 시종일관 이쪽에게 은근한 살기를 보냈다.

단순한 엄포?

아니었다.

더 눈에 거슬린다면, 쥐도 새도 모르게 처리하겠다는 느낌이 소름과 함께 확 다가왔다. 그래서였다. 로드가 황태자 주위에 있을 때면 200미터 이내로는 접근도 할 수 없었다. 당연히 황태자와 로드가 나누는 대화를 들을 수도 없었다.

그것은 큰 문제였다.

황태자는 24시간 관찰되어야 한다. 황태자의 주위에서 일어나는 일은 모두 기록되고, 보고되어야 한다. 그것이 자신과 팀원들의 임무였다. 그 일을 관리하는 것이 자신의 팀장으로서의 책무였다.

그런데 그걸 제대로 수행할 수가 없었다. 하루에 두 시간 정도씩은 관찰의 공백이 생겨 버렸으니까. 상부에 보고를 할 때마다 고개를 들 수도 없었다. 벌써 상관에게 쓴소리도 들었다. 잘못하면 경위서를 쓰게 될지도 모르겠다.

‘그러니까 좀 빨리 가라고…….’

3호 요원은 진심으로 빌었다. 한편으로는 부푼 소망을 살포시 품어보았다. 이제 뱀파이어 로드가 떠나면 황태자 전하를 더욱 알차게 관찰해야지. 디저트 먹는 순서도 살펴봤다가 보고해야지. 생각만 해도 두근두근 설레는 이 기분이란.

……이라고 생각하던 무렵이었다.

스윽…….

뱀파이어 로드가 별궁 정원에서 사라졌다.

“…….”

잠깐 헤실헤실 풀어졌던 3호 요원의 눈빛에 섬광이 떠올랐다. 그는 뛰어난 추적술로 사라진 로드의 기척을 감지했다. 떠난다고 해서 그냥, 아 떠났구나, 하고 보내면 안 되기 때문이었다.

‘어디로 떠났는지를 마지막까지 확실하게 확인해야 해.’

황태자와 밀접 접촉을 했던 주요 인물이다. 그 인물이 황태자의 곁을 떠난 후에 어떤 의도를 품는지. 무슨 일을 하는지도 대략적으로나마 추적하고 확인해야 한다. 그래야 황태자가 보다 안전해질 수 있다.

그러한 일념으로 3호 요원은 모든 감각을 총동원했다. 그리고 마침내 뱀파이어 로드의 희미한 기척을 찾아냈고, 경악했다.

‘뭐야. 왜 황궁으로 가?’

어느새 시가지의 어느 건물 지붕 위에 올라선 3호 요원은 고개를 갸웃거렸다.

뱀파이어 로드의 희미하게 남은 기척. 그 기척이 향하는 방향이 다름 아닌 황궁이었다. 잘못 감지했나 싶었다. 그런데…… 추적을 하고 확인을 할수록…….

‘어? 진짜?’

정말이다.

뱀파이어 로드가 진짜로 황궁으로 향하고 있다. 더 정확히 말하자면, 황제 폐하의 집무실로 직행하고 있다!

‘……미친.’

대체 무슨 일을 벌이려는 걸까. 어쩌면 음습한 의도일지도 모르겠다. 위기감이 확 들었다. 3호 요원의 몸짓이 다급해졌다.

‘상부에 알려야 해!’

타앗!

임무의 우선순위가 변경되었다.

지금은 은밀한 추적보다는, 이 사태를 상부에 알리는 게 우선일 듯하다. 뱀파이어 로드가 황제의 집무실을 침범하기 전에. 만일의 불미스러운 사고가 발생하기 전에!

스파팟!

3호 요원이 소리 없는 바람처럼 내달렸다. 혹독한 훈련과 실전 끝에 체득한 특수한 이동술이었다. 그런데도…… 뱀파이어 로드를 따라잡을 수가 없었다!

‘이, 이런…….’

그는 더욱 경악했다. 황궁으로 향하는 뱀파이어 로드가 상식을 산산조각으로 부술 만큼, 비현실적으로 빨랐다. 전력으로 추월하려 애를 쓰고 있는데도, 따라잡을 수가 없었다. 아니, 따라잡긴커녕 존재감이 멀어지고만 있었다.

‘내가 먼저…… 정보부에 도착해서 이 위급한 사태를 알려야 하는데……!’

안 되겠다.

불가항력이다.

망했다. 아니, ㅈ됐다.

마젠타노 황실 특수정보부 소속의 3호 요원은 마음속 깊이 드리우는 직업적 애환을 느끼며 중얼거렸다.

‘여보, 미안해. 나 오늘도 경위서 쓰고 야근해야 할 거 같아…….’

야근.

낮에 밀린 업무를 그날 내로 처리하기 위해 하는 업무적 행위. 혹은 사람을 더 고용하면 되는 걸 안 해서, 업주의 인건비 절감을 위해 사람을 갈아 넣는 행위. 사실상 직무수행을 위한 감금행위.

이러한 야근의 세계는 냉엄하다.

얄짤도 없고, 자비도 없다.

그 법칙에선 황제도 예외가 아니었다.

“후우…….”

마젠타노 제국의 황제, 아스테리온 테스타로사 마젠타노는 여름밤의 자정에도 집무실의 불을 환히 밝히고 있었다. 오늘 내로 처리해야 할 업무가 너무나 많이 밀려서였다.

‘앙부아즈, 과연 그들이 우리의 요구를 순순히 받을까. 아니. 그건 아니겠지.’

책상 가득 어지러이 놓인 서류. 그중의 하나에 황제의 시선이 꽂혔다. 그 서류의 상단에는 이런 문구가 쓰여 있었다.

[쟈빌론 플랑베르 앙부아즈가 일으킨 난동에 대한 국가적 배상 협상 시나리오 및 로드맵과 앙부아즈 측의 대응 예측 모델]

“…….”

참 길기도 하다.

요약하자면, 지난번 시성식장에 난입한 쟈빌론에 대한 책임을 앙부아즈에 묻기 위한 협상 준비서랄까.

‘요약을 해도 복잡하군.’

황제는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솔직히 말하자면 당장 자고 싶었다. 하지만 그럴 수가 없었다. 아침이 밝으면 앙부아즈의 사신단이 도착할 것이다. 곧바로 배상 협상이 시작되겠지. 거기서 최대한의 이득을 뜯어내려면, 반드시 오늘 밤 안에 이 모든 서류를 검토해야 한다.

“후우. 이래 봤자 무슨 부귀영화를 누리겠다고.”

더 솔직히 말하자면, 협상도 귀찮았다. 그냥 대강 뜯어내고 끝내고 싶었다. 하지만 자신은 황제다. 제국 만민의 이득을 대변하는 사람이다. 게다가 자신을 대체할 다른 이도 없다. 그러니 얄짤없이 야근, 끝까지 다 해야 한다.

“…….”

차라리 빨리 황제직을 내려놓아 버릴까. 연일 야근만 하는 이런 자리 따위, 큰아들 녀석에게 확 물려주고 자신은 은퇴 후의 편안한 노후를 누려?

‘괜찮겠는데?’

은근히 치미는 충동에 황제는 슬쩍 웃었다.

그 순간이었다.

……살랑.

냉방 마법을 유지하느라 닫힌 창가의 커튼이 슬쩍 흔들렸다. 다음 순간, 고요하던 집무실에 처음 보는 고풍스러운 차림의 젊은 남자가 모습을 드러냈다. 커튼의 그림자 속에서, 마치 이쪽 공간으로 스며들어 오듯이.

“……!”

제일 먼저 반응한 이는 황제의 호위 로베르토 경이었다. 황제와 함께 강제 야근 호위를 수행하던 그는 커튼이 흔들리는 순간, 검으로 손을 가져갔다.

스팟!

검이 전광석화처럼 뽑혔다. 홍염이 이글거리는 오러가 검에 맺혔다. 공간을 가르며 침입자를 향해 쇄도했다. 아니, 쇄도하려다가 막혔다.

“잠깐!”

외친 이는 다름 아닌 황제였다. 외침과 동시에 로베르토 경이 검이 멈추었다. 침입자의 목과 불과 반 뼘의 거리를 남겨두고서였다.

침입자는 그때까지도 전혀 동요하지 않은 안색이었다. 아니, 오히려 우아하게 웃었다.

“인간 제국의 황제여, 나를 알아보았나?”

“……대강은.”

황제가 희미하게 고개를 주억거렸다.

“뱀파이어 일족의 정점, 로드가 아니시오?”

“고맙군. 나를 알아보아 주어서.”

“알아볼 수밖에. 연일 내 아들의 주위에 머물던 로드에 대한 보고를 하도 받았어야지 말이오.”

“그랬나?”

“그러하였소.”

황제의 미간에 주름이 생겨났다.

“로드께서는 내 아들에게 모종의 치료를 받으신 듯하던데.”

“설마 어떤 치료인지도 알고 있는 건가?”

“아니. 그건 아니오. 로드께서 하도 우리 정보원들에게 살기를 뿌려대신 덕분에.”

“다행이군. 치료는 잘 끝났다네. 그래서 이제 떠나려던 참이고.”

“한데 여긴 어쩐 일로 들르신 것이오?”

“용건이 있어서 말이지. 인간의 황제, 그대의 아들에 대한.”

“…….”

아들?

라키엘에 대한?

그런데 굳이 여길 찾아왔다고?

‘어째서?’

황제는 은근한 불안감을 느꼈다. 자신이 신변을 위협받을까 봐? 아니었다. 그는 이 순간, 라키엘에 대한 걱정만을 품었다.

‘설마 한의원의 치료가 마음에 안 들었나? 말로는 치료가 잘 끝났다고는 해도, 은근히 불만이 생겼나? 그래서 항의를 하려고? 혹은 내 입을 통하여 라키엘, 그 녀석에게 전할 협박이라도 말하려는 건가?’

불안해졌다.

그 순간, 로드의 입에서 뜻밖의 발언이 나왔다.

“별점 500개. 5점 만점에 500점.”

“……허?”

“그대의 아들, 별궁 한의원에 대한 나의 평점이라네.”

“……허어?”

“행복했지. 아름답고, 충만하였어. 그대의 아들이 운영하는 별궁 한의원, 그곳에서 진료를 받는 모든 순간이 그러하였지. 덕분에 내 삶이 바뀌게 되었어. 더 나은 미래를 꿈꾸며 행복을 건설할 수 있게 되었달까.”

“…….”

“황도를 떠나기 전에, 나를 치료해준 은인의 아비 되는 사람에게 이 말을 꼭, 직접 전해주고 싶었지. 그리하여 굳이 여길 들른 것이라네.”

“허, 허허?”

멍하니 듣던 황제의 입에서 실소가 흘러나왔다. 아니, 그것은 기쁨의 감정을 듬뿍 담은 입술 근육의 종합적인 탭댄스였다.

당연했다.

야근을 하며 피로하던 와중에 진심 연타 아들 칭찬이 가슴에 꽂히면 어떤 아비가 기뻐하지 않을까.

황제가 그러했다.

뜻밖이라서 더 기분이 좋았다.

게다가 뱀파이어 로드의 선물 같은 발언은 거기서 끝이 아니었다.

“그러한 연유로 이런 제안을 드리고 싶군. 인간 제국의 지배자여. 그대의 제국과, 나의 혈족이 혈맹의 관계로 맺어지는 것을 어떻게 생각하는지?”

“좋소.”

황제는 즉답하였다.

듣자마자 어떤 의미인지 모조리 깨달을 수 있었다. 또한, 이것이 얼마나 거대하고 귀한 제안인지도 알아차릴 수 있었다.

‘무려…… 뱀파이어 로드와의 혈맹 제안이라니.’

내심 한편으로는 듣고서도 믿기지가 않았다. 진혈의 뱀파이어 로드, 그는 수백 년 동안 한 번도 사람들 앞에 드러나지 않은 신비의 존재였기 때문이었다.

‘역사상에 공식적으로 기록된 마지막이…… 마룡 카이저투스 토벌전의 참전 기록이었지, 아마.’

황제는 제국 서고의 기록을 떠올렸다.

엄밀히 거슬러 올라가자면, 뱀파이어 로드는 제국의 까마득한 시조와도 약간의 연관이 있다고 하였다.

1,000년 전의 고대 영지, 가펠. 그곳에서 용왕 베르키스를 통해 인연으로 묶인 적이 있었다던가.

‘하지만 그것은 까마득한 과거의 일일 뿐이었지.’

너무나 오래전의 일이다. 이제는 기억하는 이조차 거의 없는 기록일 따름이다. 한데 오늘, 이렇게 자신을 방문한 뱀파이어 로드가 혈맹의 제안을 건네어 왔다. 자신의 아들에 대한 고마움을 표시하며, 그 보답을 하듯이 말이다.

그러니 이 제안은 받아야 한다.

이런 기회를 놓치면 바보다.

“우리 마젠타노는 위대한 뱀파이어 로드와의 혈맹에 적극 동의하는 바이오.”

“그래, 고맙군. 제안을 흔쾌히 허락해 주어서.”

“하면, 혈맹에 관한 협정서를 준비하면 되겠소? 아마 이틀 정도면…….”

“아니. 인간의 서류는 필요 없네.”

로드 힐데르트가 고개를 저으며 웃었다. 그리고 먼 과거, 가펠 영지에서 머리에 꽃을 꽂고 다니던 어느 시골 기사를 떠올렸다. 그 사내의 까마득한 후손인 황제를 보며, 내심 신기한 기분을 느끼며 말했다.

“내가 제안을 하였고, 그대가 동의를 하였네. 그것으로 족해.”

“그렇소?”

“그렇지. 진정한 언약이란 그러한 것이니까.”

용건을 마친 로드 힐데르트는 한 걸음 물러났다. 그리고 커튼 그림자 속으로 스며들듯이 사라졌다.

“언젠가, 그대들이 곤경에 처하면 도우러 오도록 하지. 가능하면 그런 날이 없기를 더 바라고 있지만.”

그 말이 끝이었다.

힐데르트의 모습과 존재감이 완전히 사라졌다. 떠난 것이었다.

“……후우.”

황제의 입에서 참았던 숨이 크게 흘러나왔다. 그가 곁을 돌아보았다.

“로베르토 경.”

“예, 폐하.”

“자리를, 잠시만 비워 주겠는가?”

“……명을 따르겠사옵니다.”

집무실을 떠나기 직전, 로베르토 경은 잠깐 안타까운 눈으로 황제를 바라보았다.

연일 야근에 시달리는 황제. 그러다가 이제는 뱀파이어 로드라는 거대한 존재까지 맞닥뜨려 버린 황제.

그 존재감을 버티느라 힘들었겠지. 로드가 호의적이었다고는 해도, 존재감이 주는 압박 자체가 사라지는 것은 아니니까. 그걸 버텨낸 후의 지친 모습을 주위에 보이기 싫은 것이겠지.

‘아스타. 너는 항상 이랬지.’

남들 앞에서는 강한 척. 여린 속내는 혼자 끌어안고서. 그렇게 거대한 제국을 짊어져 온 자신의 친구.

‘오늘도 힘내길.’

충실한 근위대장은 오랜 친구이자 황제인 사내를 마음으로 격려하며 집무실을 떠났다. 그렇게 황제는 혼자 남았다.

텅 빈 집무실 책상에 두 팔을 괴고서, 고개를 숙이고서, 소리 없이 흐느끼듯 어깨를 떨었다.

대비 없이 감당해야 했던 거대한 존재감의 여파를 견뎌내느라?

아니.

사실은 경박한 기쁨의 세리머니를 참아내느라.

‘후훗, 후후…… 후하핫! 내 아들이, 라키엘, 그 녀석이……! 흐핫, 크하하!’

이제는 무려 뱀파이어 로드의 인정을 받았다! 찬사를 들었다! 심지어 진혈의 일족과의 혈맹까지 맺어내는 국가적 쾌거를 거두었다! 무려! 내 아들! 라키엘이!

장했다.

너무나 대견했다.

황제의 양쪽 콧구멍이 레프트 라이트 16비트 자진모리장단으로 벌렁거렸다.

그렇게, 황제는 무려 30분이 넘도록 소리 없는 어깨춤을 시전하였다. 이후의 야근은 피로도 잊고서 힘차게 소화했음은 물론이었다.

그리고 다음 날 아침.

“……황도 마젠타는 오랜만이군.”

국가적 배상 협상을 위한 사신단 대표, 앙부아즈의 왕녀 아델린이 감회에 젖은 눈으로 황도 마젠타의 거리를 바라보았다. 그리고 한편으로 생각했다.

황태자도…… 오랜만이겠지.

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