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07화. 황태자의 꽃말은 낮져밤이 (1)
아아, 오랜만이다.
이렇게 초저녁의 정원을 걷는 것은.
‘대략…… 한 달이 넘었나?’
라키엘은 고개를 들어 관악…… 아니, 발갛게 물들어가는 저녁노을을 바라보았다. 그리고 최근 자신이 보냈던 시간들을 떠올렸다.
바빴다.
정신이 없었다.
시성식 준비를 하느라.
혼절해서 누워 있느라.
한의원 재오픈 하느라.
‘그동안 너무 바빴지. 덕분에 이런 산책도 오랜만이고. 정령과의 교감 시도도 마찬가지고.’
사실 그는 단순히 유유자적하게 산책만 즐기는 것이 아니었다. 단순한 산책? 솔직히 귀찮았다. 특히 여름이라 조금만 걸어도 꿉꿉하고, 머리칼은 배배 꼬이고, 수시로 날아드는 거미줄이며 날파리 때문에 성가시기만 했다.
하지만 그럼에도 그는 가능하면 정원 산책을 거르지 않았다.
‘후우, 오늘은 성공하자. 정령교감!’
딩동!
[당신은 오장(五臟) 수집퀘스트의 완료자입니다.]
[수집 보상으로 얻은 오행(五行) 순환 시스템에 의하여, 당신은 자연계의 정령에게 큰 호감을 얻으며 소통할 수 있습니다.]
[정령과의 교감을 시도합니다.]
[가까운 거리의 정령을 탐색합니다.]
[탐색 중.]
[1…… 2…… 3……]
익숙한 메시지가 떠올랐다.
크라노스에서 오장 수집 퀘스트를 완료하며 얻은 정령과의 소통 능력. 사실은 그동안 수시로 시도를 해보았다. 정령과의 교감을 이룬다면, 분명 이득이 있을 것이라 여긴 까닭이었다.
하지만 결과는 언제나…….
딩동!
[탐색에 실패하였습니다.]
[정령을 찾으려는 노오력이 부족합니다.]
“…….”
어오.
바쁜 시간 쪼개가며 일부러 산책까지 하고 있는데, 뭘 더 어떻게 노력을 하라는 걸까.
라키엘은 한스러운 눈초리로 메시지를 흘겨보았다. 하지만 어쩔 수가 없겠다. 오늘도 실패다. 지금까지 무수히 그래 왔듯이 말이다.
‘쯧. 이거, 작동이 되긴 하는 걸까.’
한 번도 성공한 적이 없다 보니, 절로 의심이 들었다. 무리도 아니었다. 분명 처음 오장 수집 퀘스트를 완료했을 때의 안내문은…….
[이로써 당신은 자연계에 깃들어 있는 오행의 정령과 소통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오행의 영향을 받는 정령들이 당신에게 크나큰 호감을 갖습니다.]
……저러했다.
저 안내문만 보면 당장 정령 몇 마리쯤은 불러서 오순도순 고스톱도 칠 수 있을 것 같은데. 그런데 현실은 달랐다. 아무리 시도를 하고 탐색을 해도, 정령 쪼가리 하나도 반응을 보이질 않았다.
‘사실은 이 세상에 정령 따위는 없는 게 아닐까. 아니면 내가 받은 수집 퀘스트 보상 이거, 사기거나 하자 있는 불량품인 걸지도.’
그럼 반품이나 환불, 교환 같은 건 안 될까. 되면 참 좋겠다.
그 생각에 오장육부가 즉시 반응했다.
딩동!
[오장육부가 당신의 보상 반품, 환불, 교환 요청에 유감을 표합니다.]
[심장 : 아 손님, 우리 물건은 정상이라구요ㅋㅋ]
[허파 : 허어…… 파하학ㅋㅋㅋ]
[대장 : 손님이 서투르게 쓰시는 거지 말입니다?]
[간장 : 사용설명서는 안 읽? 게다가 손님? 이 물건 벌써 사용하셨잖아요?]
[위장 : 어? 여기여기? 택도 뗐는데?]
[콩팥 : 구입할 때 받은 영수증은 가져오셨어요?]
[비장 : 중고품은 당ㄱ에서 판매하시라고 아ㅋㅋㅋㅋㅋㅋ]
[오장육부가 당신의 보상 반품, 환불, 교환 요청을 일언지하게 잘라 버렸습니다.]
[오장육부가 당신의 정령교감 성공을 기원하며 100 HP를 후원하였습니다.]
[현재 보유 중인 HP : 21,200]
“…….”
성공을 기원하며 딸랑 100 HP?
이것들이 대놓고 나 멕이는 느낌인데.
라키엘은 오장육부를 향한 응징의 셀프 명치샷을 때려볼까 하는 충동을 새록새록 느꼈다. 하지만 그럴 타이밍을 놓쳤다. 때마침 곁에서 물음이 툭 날아왔기 때문이었다.
“그나저나 전하, 안 더우십니까?”
“……음?”
“벌써 한 시간 가까이 걷고 계십니다.”
돌아보니 데미안 녀석이었다. 나란히 걷느라 더웠던 걸까. 특유의 긴 머리칼이 살짝 땀에 젖어서 이마에 착 달라붙어 있었다.
“제가 아는 전하의 체력 상황으로 미루어보자면, 이제 슬슬 쉬셔야 할 듯하고 말이지요.”
“아.”
녀석, 내 걱정을 하는 건가. 솔직히 말하자면 더 걱정이 되는 건 녀석 쪽인데.
“그래. 쉴 때가 되긴 했지. 안 그러면 우리 카이엔 경께서 또 목숨 걸고 날 지켜주려고 무리를 할 테니까?”
“……무슨 뜻이십니까?”
“시성식장에서. 마지막에. 내가 흑마법사 놈을 소각한 직후에 말이다.”
라키엘은 슬쩍 웃었다.
“너, 목숨 걸고 날 감쌌다며.”
“예, 그랬습니다.”
“왜 그랬냐.”
“예?”
“그러다가 너 죽으면, 그게…… 깨어나는 거 몰라?”
“하지만 전하…….”
“다음부터는 조심 좀 해. 기껏 날 구해도 네가 죽으면, 알지?”
“……알겠습니다.”
“그래도 뭐, 나 구해준 건 고맙긴 하고.”
사실은 이 말을 해주고 싶었다. 그동안 너무 바빠서 고맙다는 말도 좀처럼 하질 못한 까닭이었다.
그런데 그냥 말하자니 조금 뭐랄까. 손발이 오글거릴 거 같았다. 어쩌면 그래서인 건지도 모르겠다. 걱정을 해주는 말도 약간 잔소리처럼 꺼내게 되는 것은.
“그나저나, 요즘 아픈 곳은 없고?”
“예. 없습니다.”
“시성식 날엔 컨디션이 좀 안 좋았던 거 같았는데?”
“저도 그래서 걱정이었는데, 지나고 보니 단순한 감기였던 듯합니다.”
“그래?”
“예.”
“어디 아프면 꼭 말하고.”
“알겠습니다. 그런데-”
“그런데?”
“전하께서는 참 솔직하지 못하신 거 같습니다.”
“……음?”
이건 또 뭔 소리람.
데미안 녀석의 말이 정수리를 쿡 찔러왔다.
“앞전에, 전하께서 혼수상태에서 깨어나셨던 직후에 말입니다. 그땐 병실에서 절 보자마자 우셨으면서 말이지요.”
“내가?”
“예.”
“언제? 어디서? 무엇을? 어떻게? 왜?”
“정확히는 19일 전 아침 무렵에, 별궁 한의원 입원병동의 3층 복도 끝 VVVIP 병실에서, 눈물을, 그렁그렁하게, 저와 꼬슴 경 등을 보며 매우 감격하셔서 말입니다.”
“……이걸 져주질 않네.”
“엄연한 사실이니까요.”
“그래서, 지금 내가 고마우면서 괜히 툴툴거리는 걸로 보이신다?”
“정확하십니다, 전하.”
“그렇게 정곡을 찌르면 좋아?”
“예.”
“헐. 어째서?”
“이럴 때 보이시는 전하의 표정이 제법 흥미로우니까 말입니다.”
“쓰읍. 우리 카이엔 경? 많이 컸다?”
“전하께서 키우셨습니다. 넉넉한 월급으로.”
“그래서 감사하진 않고?”
“물론 가슴 깊이 감사하고 있습니다. 넉넉한 월급에 한정해서요.”
“아 그래서 황족 능멸죄를 가뿐하게 저지르셨구나?”
“……예?”
주춤하는 데미안 녀석. 여기서 치사하게 치트키(?)를 쓰느냐는 듯한 힐난의 눈빛이 엿보였다.
라키엘은 피식 웃었다.
“어휴. 다른 놈들 같았으면 당장 교수형 때리고 단두대에 사뿐하게 디스플레이 해버리는 건데. 그랬다가 난리가 날까 봐 그럴 수도 없고. 우리 카이엔 경은 참 운도 좋아.”
“제가…… 운이 좋은 건 맞습니다.”
“그걸 이렇게 받아들이네. 운이 좋아? 어째서?”
“전하를 만났으니까요.”
“…….”
“……죄송합니다.”
“어. 괜찮아. 잠깐 귓구멍에서 토 나올 뻔한 것만 빼면.”
두 사람은 잠깐 말없이 걸으며 잔뜩 오그라진 손발을 풀었다. 그렇게 얼마나 걸었을까.
“그나저나, 오늘 아침에 앙부아즈의 사신단이 도착했다고 하던데 말입니다.”
“어. 나도 들었어.”
데미안이 먼저 화제를 돌렸고, 라키엘이 넙죽 받았다.
“아마도 쟈빌론이 부린 난동 때문이겠지. 그 사태의 배상을 협상하러 온 것일 테고.”
“그렇겠지요.”
“어. 누가 사신단 대표로 왔는지는 몰라도, 황제 폐하께 엄청 시달렸을 거야.”
라키엘은 진심으로 말했다.
사실 황제는 이번 쟈빌론의 난동 때문에 단단히 화가 난 상태였다. 누구에게? 앙부아즈 왕가에게. 그들의 관리 실수 때문에 쟈빌론이 풀려났고, 결과적으로 시성식장의 납치인질극이 벌어졌으니까. 마젠타노 황가의 체면이 땅에 떨어졌으니까.
“그래서 황제 폐하, 모르긴 몰라도 작정하고서 엄청나게 배상을 뜯어내려고 벼르고 계실걸. 그런 황제 폐하를 온종일 협상 테이블에서 상대했을 사람이 참 불쌍하다, 불쌍해.”
이 또한 진심이었다.
따지고 보면 앙부아즈의 사신단 대표가 무슨 죄가 있겠는가. 그 사람이 쟈빌론을 풀어준 것도 아닐 텐데. 이건 대놓고 총대 메고 총알받이 하러 여기까지 온 셈이 아닌가 말이다.
……라고 생각하던 순간이었다.
“네. 온종일 협상 테이블에서 황제 폐하께 시달린 불쌍한 사람이 저랍니다.”
별안간, 뒤쪽에서 누군가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제법 기 세고 호방한 느낌의 여자 목소리. 그리고 또한, 제법 낯익은 목소리이기도 했다.
“어?”
“오랜만에 뵙는군요, 마젠타노의 황태자시여.”
“어어?”
“1년 만인가요? 아니, 조금 더 됐나?”
이쪽을 보며 한쪽 입술로만 웃는 여자.
앙부아즈의 왕녀 아델린이었다.
정말로 오랜만이었다.
그리고 뜻밖이었다.
그녀가 앙부아즈의 사신단 대표로 왔다는 사실도. 이쪽을 보자마자 성큼성큼 다가와 상냥한 목소리와 살벌한 눈빛으로 의미심장한 제안을 꺼내는 상황 또한.
“그래서 하는 말인데, 우리, 대련할까요?”
“……예?”
“대련, 몰라요?”
“물론 알긴 하는데…….”
혹시 앙부아즈에는 오랜만에 만난 반가운 사이에 주먹다짐으로 상대의 안부를 확인하는 정겹고 살가운 풍습이 있었던가?
아니.
그건 아닌 거 같은데.
아무리 기억을 뒤져봐도 소설 마검황 속에 그런 예법이나 설정은 언급된 적이 없었다. 라키엘은 두 눈을 끔벅거리며 왕녀 아델린을 빤히 쳐다보았다. 그녀의 의도를 파악하고 싶었다. 아델린의 입가에 더욱 상냥한 미소가 맺혔다.
“제가 황태자께 조금 드릴 말씀이 있어서 말이죠.”
“하실 말이 있으시면 그냥 입으로 하면 안 될까요?”
“글쎄요. 그렇게 하면 의미 전달에 오해가 생길 것 같아서.”
“주먹이 더 오해충만할 것 같은데 말입니다?”
“그건 상황에 따라서 다른 거고요.”
“…….”
“그래서, 안 내켜요?”
그녀가 고개를 한쪽으로 까딱 기울이며 이쪽을 빤히 쳐다보았다. 그 눈빛을 보며 불현듯 눈치챌 수 있었다. 이유는 잘 모르겠는데, 이쪽한테 뭔가 맺히고 빡친(?) 게 있는 거다. 그러니까 대뜸 만나자마자 일기토, 아니, 대련부터 신청하는 무리수를 던지는 거겠지.
‘대체 왜?’
원래 귀족이나 왕족 사이의 가벼운 대련은 사교 활동의 일환이 되기도 한다. 그러니까 대뜸 이렇게 대련 신청을 하는 것이 마냥 나쁘거나 예의에 어긋나는 일은 아니다.
‘그래도 대체 왜?’
이쯤 되니 궁금해졌다. 그리고 한편으로는 난감해졌다. 왕녀 아델린의 출중한 피지컬과 격투 실력 때문에?
그건 아니고.
라키엘은 서쪽을 힐끗 보았다.
‘쓰읍. 하필이면 지금…… 해 지고 있는데.’
이후엔 밤이 되는데. 그때부터는 내 신체능력과 써클 효율이 3배로 뻥튀기가 될 텐데. 그거, 테스트해봤더니 장난 아니었는데.
‘살살 봐주면서 싸워줘야 하나?’
힘 조절, 아직 안 익숙한데.
라키엘의 때아닌 고민이 깊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