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08화. 황태자의 꽃말은 낮져밤이 (2)
밤.
사람을 쉽게 고민에 빠뜨리는 시간. 오늘도 수많은 이들이 이불을 뒤척이고, 때로는 킥을 하며 잠 못 이루는 어둠과 다크의 시간.
이곳, 황도 마젠타의 별궁 한의원 연무장에도 고민에 빠진 한 남자가 있었다.
‘어오, 미치겠네!’
라키엘은 빠드득 이를 갈았다. 그리고 눈길을 들었다. 평소라면 그저 한적하고 끈적하다고 했을 여름밤의 광경. 어두운 하늘을 수놓는 팅커벨 나방들. 그 사이로 평소에는 못 보던 이질적인 무언가가 다가왔다.
왕녀 아델린의 주먹이었다.
콰하학-!
그냥 뼈와 살로 이루어진 주먹이 날아오는 건데. 그런데 어째서 무정차로 플랫폼을 지나가는 KTX 열차처럼 굉음이 나는 걸까.
‘너무 진심인데?’
어이가 없었다.
아까 대련 요청을 받았을 때는 이럴 줄은 몰랐다. 그냥, 뭔가 이쪽한테 맺히고 빡친 게 있어서 저러는 거겠거니 싶었다. 한데 이 정도로 진심 펀치를 날려댈 줄은 정말로 몰랐다.
결국, 그는 황급히 물러날 수밖에 없었다.
“……흡!”
타앗!
땅을 박찼다.
동시에 뱀파이어 로드 힐데르트의 정혈이 주는 가호가 발동되었다.
딩동!
[밤이 되었습니다.]
[뱀파이어 로드의 가호가 당신의 신체능력을 3배 향상시킵니다.]
[뱀파이어 로드의 가호가 당신의 마나써클 효율을 3배 향상시킵니다.]
한데 거기서 끝이 아니었다.
[보름달이 떠올랐습니다.]
[뱀파이어 로드의 가호 효과가 5배로 향상됩니다!]
투확!
단순히 땅을 박찼을 뿐이었다. 그냥 두어 걸음 재빠르게 물러나려 했을 뿐이었다. 그런데 결과는 그게 아니었다.
후우웅-!
온몸이 뒤로 확 날아갔다. 갑자기 5배로 강력해진 근력 때문이었다. 쇄도해 오던 아델린의 주먹이 순식간에 멀어졌다. 뒤에서부터 불어오는 돌풍이 머리칼을 미친 듯이 헝클어뜨렸다.
그럼에도 착지가 어렵지 않았다.
반사신경과 균형감각도 5배로 향상된 덕분이었다.
촤아아아악-!
연무장 모랫바닥을 갈아엎다시피 하며 착지했다. 그리고 다시 고개를 들었다. 순식간에 6미터쯤 멀어진 왕녀 아델린이 멍하니 서 있는 모습이 보였다.
“지금…… 뭘 한 거예요?”
엄청 놀란 걸까. 그녀가 주먹을 뻗은 자세를 풀지도 못하고서 멍하니 물어왔다.
라키엘은 멋쩍게 어깨를 으쓱거렸다.
“도망친 겁니다?”
“도망이요?”
“아, 갑자기 너무 진심을 담은 정권이 날아와서 나도 모르게 그만.”
“아무리 그래도 어떻게, 그런 식으로 움직인 거죠?”
“위기의식 덕분 아니겠습니까?”
“……그럼 계속 가죠.”
“예?”
반문하는 순간, 그녀가 땅을 박찼다. 과격한 돌격은 아니었지만, 교묘하고도 재빠른 스텝이었다. 순식간에 왼손 2연타가 날아왔다.
슈슉!
짧고 간결하게 끊어치는 더블 잽!
예전이었다면 영락없이 가볍게 얻어맞거나, 얼굴을 감싸 쥐고 방어하기에 급급했을 것이다. 하지만 이제는 아니었다. 날아오는 주먹이 다 보였다. 동체시력과 그걸 분석하는 두뇌의 시각중추 활동도 5배로 향상된 덕분이었다.
“……!”
스슷.
최소한의 고갯짓으로 2연타를 흘려냈다. 아델린의 표정이 굳었다. 설마 이런 식으로 피할 줄은 몰랐던 걸까. 곧바로 날아오는 오른손 스트레이트가 더욱 날카로워졌다. 이 정도면 거의 실전에 가까운 기세다.
‘이건 못 피하겠는데?’
직감적으로 느꼈다.
아무리 신체능력이 향상이 됐어도 한계는 있었다. 특히, 이쪽은 제대로 격투나 검투술을 배운 적이 없기에 동작의 낭비가 심했다. 신체의 중심 이동도 자연스럽지 못했다. 그녀의 스트레이트는 그 허점을 정확하게 파고들고 있었다.
‘그럼 막으면 되지!’
냉큼 만년설을 들었다. 냉기 실드를 전개했다. 그 직후, 강렬한 충격이 실드에 가해졌다.
콰창-!
“……긋!”
만년설을 두드려 오는 강맹한 타격력! 가히 바위를 쪼갤 만한 일격이었다.
어이가 없어졌다.
“나 죽이려는 겁니까?”
“설마요. 이 정도엔 안 죽으실 거 같은데?”
“그런 것치고는 너무 진심 펀치인데 말입니다?”
“황태자야말로 진심으로 사람을 농락하고도 그런 말이 나올까요?”
“예?”
제가요?
농락이요?
뭘요?
묻고 싶었다.
하지만 그럴 틈은 없었다.
“예전에, 우리 앙부아즈의, 내전이 끝나고, 얼마 지나지 않았던 때에.”
툭, 쾅! 콰학, 투콱!
살벌하고도 묵직한 연타가 쏟아져 왔다. 그런데도 느리지 않았다. 아니, 빨랐다. 겉보기엔 평범한 동작들인데, 군더더기가 없고 체중이동이 너무나 자연스러웠다. 그래서 빠져나갈 틈이 없었다.
그저 거북이처럼 방패를 들고서 막아낼 뿐. 그녀가 연타를 날리면서 차분하게 말하는, 그래서 어쩐지 더 오싹하게 들리는 말을 들을 뿐.
“우리, 앙부아즈에서, 보낸, 구혼장에는, 어째서, 답장을, 하지 않았던 거죠?”
콱! 콰직! 콰욱! 투컥! 쾅! 투훅! 쿵!
“억, 겍! 극, 갹, 끙! 그욱! 귧!”
……죽겠다.
아파서? 못 견디겠어서?
아니.
사실은 버틸 만했다. 엄청난 연격이 쏟아지고 있는데도, 그냥저냥 뻐근하다 싶은 정도의 느낌만 왔다. 맷집도 5배로 향상이 되어서, 맞다 보니까 적응이 돼서, 언제고 아까처럼 뒤로 빠져나갈 수도 있을 것 같았다.
하지만 그럴 수가 없었다.
삽시간에 찔린 양심 때문이었다.
‘아, 맞다. 그때.’
떠올랐다.
앙부아즈 내전이 끝난 직후였던가. 각국 왕가와 무수한 귀족가에서 구혼장이 무더기로 날아왔더랬다. 물론 그중에는 앙부아즈 왕국에서 보낸 구혼장도 있었다.
그래서 당시에 나는 어떻게 했더라.
‘……다른 곳에는 초청 답장을 다 보냈으면서, 앙부아즈에만 보내지 않았지.’
사실 이유는 명확했다.
이쪽은 황제가 될 생각이 없으니까. 그런데 황후가 될 것을 기대하고 구혼장을 보낸 가문들과 맺어지는 건 결혼을 이용하는 기만질, 인생 사기질이 될 테니까. 그래서 구혼장을 보낸 이들과 2황자를 맺어주려고 했다.
한데 그런 자리에 앙부아즈의 왕녀 아델린이 오면? 이쪽의 의도가 어그러질 가능성이 너무나 컸다. 애초부터 그녀는 2황자에겐 관심도 안 줄 테니까. 덩달아 모든 이들의 관심이 이쪽에게 쏠려 버릴 가능성이 컸으니까.
그래서 일부러 안 불렀다.
그녀가 싫어서는 아니었다. 개인 감정도 없었다. 정말로 지극히 전략적인(?) 선택이었을 뿐이었다.
한데 지금 생각해 보니…….
‘왕녀 입장에선 빡칠 만했겠네.’
혼자만 구혼장이 씹힌 상황. 다른 이들이 와르르 초청받아서 황도 마젠타로 향하는 모습을 속 쓰리게 구경해야 했겠지. 다 함께 있는 단톡방에서 혼자만 대놓고 말이 씹히는 기분이지 않았을까.
“그, 어, 미안, 미안합니다!”
이건 변명의 여지가 없다. 라키엘은 자신의 잘못을 순순히 인정했다. 하지만 아델린의 도끼눈은 풀리지 않았다.
“미안해요?”
콰앙!
“어윽, 네!”
“진짜로?”
투확!
“겕, 진짜로!”
“…….”
왕녀 아델린은 묘한 눈초리로 라키엘을 바라보았다. 만년설 뒤에 웅크리고서 이쪽의 타격을 버텨내는 황태자. 그 모습을 보고 있자니, 자꾸만 감탄이 나왔다.
‘황태자 이 사람, 전엔 이 정도가 아니었는데.’
대체 어떻게 내 타격을 이만큼 태연하게 버티는 걸까. 아픈 척은 하는데, 사실은 안 아파하는 저런 맷집은 어떤 수로 단련한 걸까. 그리고 아까 같은 움직임은 어떻게 해야 가능한 걸까.
경이로웠다. 아니, 더 솔직하게 말하자면…… 경악감이 들었다.
‘만약 서로가 전력으로 부딪치면, 내가 이길 수 있을까?’
아니.
못 이긴다.
직감적으로 느낄 수 있었다.
황태자가 아량이 넓은 사람이라서 그저 이쪽의 등쌀에 장단을 맞춰주고 있다는 사실도. 만약 그가 진심으로 반격에 나선다면 자신이 수세에 몰리리라는 것도. 그리고…… 자신의 화가 어느샌가 눈 녹듯이 풀려 버렸다는 사실 또한.
“…….”
어이가 없다.
1년이 넘도록 이를 갈았는데. 만나면 대련 사고를 빙자해서 얄미운 명치에 주먹 한 방만 꽂아 버리겠노라고 그토록 벼르고 있었는데. 오늘 드디어 그럴 기회가 왔다고 생각했는데. 자신은 거리낌이 없을 자신도 있었는데.
그런데 얼굴 한 번 봤다고 화가 풀리면 어쩌자는 건지. 어째서 더 화가 나질 않는 건지. 대체 왜 저 움츠린 모습을 보며 하찮고 미안하다는 생각마저 드는 건지.
“하…….”
결국, 아델린은 대련을 멈추었다. 그리고 자신보다 반 뼘은 작은 황태자를 내려다보았다.
“정말로 미안한 거 맞아요?”
“……예?”
“그럼 식사라도 좀 대접하시든가요.”
“식사…… 말입니까?”
“네. 배고프거든요. 오랜만에 제법 움직였더니. 게다가 낮에는 그쪽의 황제 폐하께 협상 테이블에서 종일 시달리기도 했고.”
“설마, 조금 전까지의 주먹질도 스트레스 해소의 일환?”
“황태자께선 그렇게 느꼈어요?”
“내 취급이…… 샌드백?”
“그럼 다시 해요?”
“아뇨. 아닙니다.”
냉큼 만년설을 치우는 황태자.
그 모습에 아델린은 새삼 쓴웃음을 머금을 수밖에 없었다. 황태자, 참 신기한 사람이다. 이쪽을 압도할 만한 저런 힘은 어떻게 얻은 걸까. 그런데도 그걸 사용하지 않는 관대함이라니. 심지어 힘을 숨기는 게 티가 팍팍 나는 어설픔이라니.
‘괜히 고맙고 미안하게 만들어, 사람을 꼭.’
그래서 더 특이하다.
자꾸만 기대하게 된다.
식사 대접하라는 한마디에 정중하게 차려주는 식탁이 20인분쯤 되는 규모라면 더더욱.
“설마, 이걸 다 저보고 먹으라고요?”
실로 기다란 식탁.
그 위에 좍 깔린 음식을 보며 아델린은 기겁했다. 설마 내 취급이 푸드파이터? 하지만 그녀는 자신이 오해를 했음을 깨달아야 했다.
“아뇨. 왕녀님과 사신단의 수행원들이 다 같이 먹을 수 있도록 준비한 겁니다.”
“네?”
“수행원들도 배가 고플 테니까요?”
“…….”
그건 그렇지.
“그리고 저한테 감사하실 게 아니라, 근무 외 시간에 갑자기 불려 와서 20인분의 음식을 정성껏 준비한 별궁 요리사들에게 고마워해 주시면 더욱 감사하겠습니다.”
“아…….”
그건 좀 많이 미안하고 고마운데.
아델린은 내심 민망함과 놀라움을 느꼈다. 자신은 그저 배가 고프다고 말했을 뿐인데, 그 한마디에 황태자는 사신단 일행 전체를 생각하고 배려해 주었다. 정작 자신은 사신단을 대표하면서도 생각지 못했던 부분이었다.
“…….”
그녀는 포크를 깨작거리며 복잡한 심경이 되었다. 황태자 이 사람은 대체 뭘까. 겪을수록 더욱 궁금해졌다.
그렇게 얼마나 있었을까. 식탁 위의 접시들이 반쯤 비워졌을 무렵, 내내 입을 닫고 있던 황태자가 뜻밖의 말을 꺼냈다.
“그런데 왕녀님? 아까부터 왕녀님의 곁에서 근접호위를 하시는 저분 말입니다.”
“네?”
“오늘 잘 데려오셨습니다.”
“무슨?”
잘 데려왔다고?
무슨 뜻?
왕녀 아델린은 라키엘이 가리킨 자신의 근접호위를 돌아보았다. 바로 자신의 당숙이자 앙부아즈의 장군인 하프엘프, 에두아르 앙부아즈였다.
그때, 황태자의 입에서 더욱 뜻밖의 말이 나왔다.
“실은 혹시나 해서, 일부러 모두에게 식사를 대접하고서 아까부터 유심히 지켜보다 느낀 건데 말입니다. 저분, 몇 년 내로 목숨이 위험해질 큰 질환을 앓게 될 겁니다. 아니, 사실은 이미 앓고 있지요.”
“네에?”
그게…… 무슨 소리?
큰 질환을? 목숨이 위험해질 병을 이미 지니고 있다고? 누구보다도 건강하고 강인한 당숙이?
아델린은 경악하며 눈을 동그랗게 떴다. 난데없이 시한부 진단을 받은 앙부아즈의 하프엘프 장군, 에두아르는 눈살을 찌푸리며 황태자를 지그시 쳐다보았다.
물론 라키엘은 그들의 반응에 개의치 않았다.
그의 말이 태연하게 이어졌다.
“만성적인 악성 위궤양(gastric ulcer). 엘프와 인간의 혼혈인 하프엘프라면 유전적으로 겪을 수밖에 없는, 필연적인 태생적 고질병이니까 말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