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09화. 하프엘프의 고질병 (1)
“만성적인 악성 위궤양(gastric ulcer). 엘프와 인간의 혼혈인 하프엘프라면 유전적으로 겪을 수밖에 없는, 필연적인 태생적 고질병이니까 말입니다.”
라키엘의 태연한 말이 식탁을 건너갔다. 지목당한 앙부아즈의 장군, 하프엘프 에두아르의 고막을 톡 건드렸다.
“…….”
장군은 아무 대답도 하지 않았다. 그저 대접받던 식사를 중단하고 가만히 라키엘을 쳐다보았을 뿐. 하지만 그 표정에는 이미 불쾌한 기색이 역력했다.
그러나 라키엘은 장군의 반응에 개의치 않았다.
‘기분이 나쁘겠지. 밥 잘 먹다가 갑자기 이런 이야기를 들으면. 황당하기도 할 거고.’
사실 아까부터 장군 에두아르를 눈여겨보았던 그였다. 언제부터? 왕녀와 대련을 시작하던 때쯤부터. 하프엘프인 장군이 풍기는 독특한 인상과 분위기 때문에? 아니었다.
‘날 엄청 째려봤지, 저 하프엘프 아저씨.’
왕녀와 대련하는 내내 그랬다. 그 눈빛이 마치, ‘우리 델린이 아프게만 해봐라’라고 벼르는 눈빛 같았다.
덕분에 신경이 쓰일 수밖에 없었다. 그렇게 신경을 쓰다 보니 문득 떠오르는 기억도 있었다. 소설 마검황에서 언급된 어느 캐릭터에 대한 이야기였다.
‘그래. 앙부아즈 북방의 하얀 귀신, 에두아르.’
비록 소드마스터는 아니지만, 그에 준하는 실력을 갖추고 있다고 했다. 검술과 정령술을 결합한 독특한 전투 방식을 사용한다고 했던가. 덕분에 원작에서는 앙부아즈의 북방을 든든하게 지키기도 했고.
‘그리고 죽었지. 쟈빌론의 왕위 등극에 반발하다가. 처참하게.’
소설 속에서는 그랬던 사람이 지금은 이렇게 눈앞에 있다. 생생하게 살아서 감정을 내비치고 있다. 이럴 때마다 새삼스럽게 드는 신기한 기분이란.
‘하지만 어쨌건.’
라키엘은 잠깐의 상념에서 벗어났다. 지금은 소설 속 이야기가 중요한 게 아니다. 지금은 보다 중요한 이야기를 할 때다.
“아까부터였던가요. 사실은 에두아르 장군의 안색이 자꾸만 신경이 쓰였습니다.”
“안색이요?”
“예.”
아델린의 물음에 고개를 끄덕이며 찬찬히 대답해 주었다.
“자연스러운 낯빛과는 달랐습니다. 유달리 창백한데 다크써클이 눈가에 퍼져 있더군요. 제 경험상 위 질환이 있는 사람들의 특징과 유사했달까요.”
“그런 걸로 질환을 알아볼 수 있나요?”
“없죠. 그냥 촉만 오는 겁니다. 그래서 식사를 대접했습니다. 장군을 포함한 왕녀님의 수행원들 모두의 식사를 말입니다.”
“아…….”
아델린은 저도 모르게 손으로 입가를 가렸다. 아까는 황태자가 단순히 친절하고 배려 깊은 성격이라 수행원들까지 챙기는 건가 싶었는데, 지금 보니 이유가 있었던 듯했다.
“그래서 황태자께서는…… 제 당숙이 식사하는 모습을 관찰하려고……?”
“예. 맞습니다.”
그러했다.
확인을 해보고 싶었다. 그러자면 음식을 섭취하고 소화하는 모습을 보는 것이 가장 직빵이 아니겠는가. 그래서 먹였고, 관찰했다. 경혈 스캐닝을 사용했다. 덕분에 볼 수 있었다.
‘음식이 위에 들어가는 때부터 위산 분비가 시작됐지. 그런데 그 과정에서 위장과 연관되는 경혈들이 흐트러지기 시작했어. 특히 족양명위경(足陽明胃經)에 속하는 혈들, 응창혈(膺窓穴), 옥예혈(屋翳穴), 그리고 승만혈(承滿穴)과 기충혈(氣衝穴) 등등이.’
그 모두가 위산의 분비 및 위장의 운동에 영향을 주는 경혈들이었다. 한데 그 경혈들이 전부 오밤중에 트월킹을 추듯 불안정하게 흔들렸다.
거기서 끝이 아니었다.
헤모글로빈을 예민하게 감지하는 경혈 스캐닝의 기능에, 출혈 감지 알림이 떴다. 위치는 장군의 위 내부, 특히 십이지장과 이어지는 유문괄약근(幽門括約筋, pyloric sphincter), 유문전정부 소만 부위가 제일 심했다.
전형적인 위궤양이었다.
그런데 정도가 심했다.
‘저 정도 출혈이면 아예 만성은 확정인 거고. 궤양부의 깊이도 상당한 듯한데. 궤양이 위 내벽 점막층은 물론이고 점막근육층까지 깊숙하게 손상시켰어. 저거, 더 심해지면…….’
죽을 수도 있겠다.
어떻게?
궤양부가 마침내 근육층을 뚫다 못해 위 내벽의 동맥을 침식하고 파열시키면서. 대량의 위 출혈과 함께 혈액 구토 증상을 불러오면서. 지혈 같은 건 시도도 못 해보고 대량 출혈이 일어나서 순식간에 사망에 이를 수도 있다.
지금 눈앞의 하프엘프 장군, 에두아르의 상태가 거의 그러기 직전으로 보였다.
“일단은 당장 다른 일들을 멈추시고, 최우선적으로 치료부터 받으셔야 합니다. 특히나 장군의 경우는 잘못된 식습관 등이 아닌, 유전적인 태생적 질환으로 보이니 체질 개선 치료를 받아야 질환의 근본적인 원인을 제거할 수 있을 테고 말입니다.”
“…….”
라키엘이 말했다.
장군 에두아르가 입을 굳게 다물었다. 상대가 제국의 황태자이니만큼 대놓고 반발하는 건 참고는 있는데, 그래도 불쾌했다. 처음 보는 사이에 이쪽에게 치료를 받으라니 마니 참견을 해서?
아니.
그건 상관없었다.
다만, 자신의 태생을 언급하는 자체가 불쾌했다.
‘무례하게…… 내 핏줄을 입에 담아?’
핏줄.
혈통.
그것은 에두아르에게 있어 가장 아픈 손가락이자, 콤플렉스의 근원이었다. 그럴 수밖에 없었다. 그는 현재 앙부아즈 국왕의 사촌 형제였다. 즉, 그는 왕가의 핏줄을 타고 태어났다.
그럼에도 그는 한 번도 공식적인 왕족으로 인정받지 못했다. 이유는 간단했다. 아버지가 왕족이되, 어머니가 엘프인 혼혈이기 때문이었다.
덕분에 어린 시절부터 얼마나 눈치를 보며 자라나야 했던가. 왕가 내부에서 천덕꾸러기 취급을 받아야 했다. 공작인 아버지에게는 서자 취급을 받았다. 심지어 배다른 친형제 사이에서도 마찬가지였다.
아버지를 아버지라 부르지 못하고, 형제들을 형님 아우라 칭하지도 못했다.
그런 편견과 은근한 차별을 극복하고자 피나는 노력을 했다. 그렇게 이 자리까지 바득바득 기어서 올라왔다. 비록 여전히 정식 왕족으로 대우받지는 못하고 있었지만, 순수한 실력으로 북방의 강자로 인정받게 되었다.
그렇기에 그에게 있어서 자신의 혈통이란, 태어나면서부터 이마에 박힌 가시 왕관과도 같았다. 평생을 짊어져야 하는 멍에에 다름이 아니었다.
‘그런데…… 그 혈통 때문에 내가 병을 지닌 것이라고?’
하다 하다 이제는 이런 소리까지 들어야 할까. 장군은 순간 욱하는 기분을 느꼈다. 만약, 그때 마침 조카인 아델린이 가만히 손을 뻗어 어깨를 짚어주지 않았더라면, 그는 정말로 자리를 박차고 떠나는 무례를 저질렀을 것이었다.
‘당숙. 잠시만요.’
“…….”
어깨를 짚어오는 아델린의 손길. 이쪽을 가만히 응시하는 조카의 시선. 분명 뭔가를 알고 있는 사람의 눈빛이었다.
물론 아델린은 알고 있었다.
‘황태자가 저렇게 말한다는 건, 분명 뭔가가 있다는 뜻인 거야.’
그녀는 문득, 예전에 자신이 겪었던 일을 떠올렸다. 처음 황태자를 만났던 때, 그에게 담석 진단을 받았던 때의 자신도 지금 당숙과 비슷했다. 황태자의 말을 믿지 않고 발끈하기부터 했더랬다.
하지만 이제 와서 돌이켜보니, 당시에 황태자가 했던 말이 다 맞았다. 소름이 돋을 정도로. 그러니 지금도 비슷할 것이다.
‘부디 진정하시고, 이야기를 더 들어보세요.’
그런 그녀의 노력 덕분이었다. 에두아르가 흥분을 가라앉혔다. 그리고 처음으로 황태자에게 물었다.
“제국의 황태자시여. 초면에 이런 말씀을 하시는 의도가 무엇이신지.”
“장군께서 건강하시기를 바라기 때문입니다.”
“그게…… 의도란 말입니까?”
“예.”
라키엘은 고개를 끄덕였다.
“너무 갑작스러운 언급이라 불쾌하셨을 겁니다. 우선 그 점을 정식으로 사과드리지요. 하지만 이야기를 꺼내지 않을 수가 없었습니다. 생각보다 궤양의 상태가 좋지 않은 듯해서 말입니다. 그래서 조금 단도직입적으로 이야기를 꺼냈습니다. 그 점 또한 미안합니다.”
“아니, 괜찮습니다. 한데 제국의 황태자시여. 제가 궁금하고 의아한 점은 따로 있습니다.”
“어떤 점입니까?”
“황태자께서는 제 혈통이 병의 원인이라 언급하셨는데…….”
“맞습니다.”
“정확히, 어떤 원인과 이유가 있는 겁니까?”
에두아르는 두 눈을 번득였다.
모국인 앙부아즈에서는 그 누구도, 자신의 앞에서 혈통에 관한 이야기를 함부로 꺼내지 못했다. 그런데 황태자는 초면부터 그걸 거침없이 입에 담았다.
그러니 제대로 된 대답을 듣고 싶었다.
만약 대답이 부실하다면? 말도 안 되는 헛소리가 돌아온다면? 그땐 이 자리를 박차고 떠나야겠지. 에두아르는 내심 벼르는 심정으로 황태자의 대답을 기다렸다.
라키엘의 입이 열렸다.
“원인과 이유는 간단합니다. 장군의 위에서 분비되는 위산이, 위를 보호하는 점액인 뮤신보다 지나치게 강력한 것이 원인입니다.”
“……예?”
장군은 멈칫했다.
위산?
뮤신?
처음 들어보는 말이었다.
라키엘의 말이 이어졌다.
“최대한 간단하게 설명을 드리겠습니다. 위산은 위에 들어오는 음식물을 녹이지요. 고기 등의 조직을 분해하고, 소화합니다. 그런데 안타깝게도 위 내벽도 똑같은 고기지요. 자신의 위산에 소화가 됩니다. 적절한 보호 수단이 없다면 말입니다. 그래서 위는 뮤신이라는 보호점액을 분비합니다. 위산으로부터 위 내벽을 보호하기 위해서 말이지요.”
“…….”
“보통 사람의 경우에는 보호점액이 위산보다 강력합니다. 그래서 위산이 위 내벽을 상하게 하질 못하지요. 그런데 장군은 그렇지 못하십니다.”
“어째서 말입니까?”
“위산은 초육식성인 엘프의 특성을 물려받았고, 보호점액은 잡식성인 인간의 특성을 물려받으셔서요.”
“…….”
상상도 못 한 대답이었다.
라키엘이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고기를 섭취하는 육식동물은 위산이 강력합니다. 엘프도 그렇지요. 장군의 위산도 그렇습니다. 그런데 안타깝게도, 장군은 엘프의 강력한 위산을 지녔으면서, 보호점액은 상대적으로 약한 인간의 것을 지니셨지요.”
“그럼…….”
“예. 보호점액이 뚫리는 겁니다. 매번, 식사를 할 때마다.”
“공격과 방어의 균형이 무너져서 말입니까?”
“적절한 비유로군요. 맞습니다.”
“…….”
장군은 할 말을 잃었다. 그걸 보며 라키엘은 자신의 추론이 맞았음을 확신했다.
‘역시.’
아까 경혈 스캐닝으로 살펴보자마자 바로 떠오른 추론이었다. 엘프와 인간의 식습관 차이. 그 둘 사이의 혼혈이 겪게 될 태생적인 문제. 거기까지 떠올리자 결론도 자연스럽게 나왔다.
“거기에 지니신 혈통 때문에 심적인 고통을 당하셨겠지요. 그 정신적 스트레스 또한 위 건강에 매우 좋지 않은 영향을 줍니다. 그러니 자연히 술도 가까이하셨을 테고 말입니다. 역시나 위장 건강에 가장 해로운 요소이지요.”
“하지만 저는…….”
“예. 그렇게 50년이 넘도록 살아오는 동안 괜찮았다고 말씀하시고 싶으신 거, 압니다. 지금까지는 큰 문제가 없었겠지요. 젊었으니까. 회복력이 쌩쌩했을 테니까. 하지만 문제는 이제부터입니다.”
그러하다.
많은 질환들이 그렇듯이, 회복력이 짱짱한 젊은 시절에는 아픈 줄을 모르고 지낸다. 사실은 속이 곪아가고 있어도 그렇다.
그러다가 나이가 들면서 회복력이 떨어지면? 아픈 티가 바로 난다. 갖가지 증상이 온몸으로 느껴지기 시작한다. 그러고서야 비로소 병원을 찾는다. 그게 보통 사람들의 패턴이다.
눈앞의 하프엘프 장군도 똑같다.
“상복부, 흉골 아래쪽에서 타는 듯한 느낌을 간혹 받으시지요?”
“…….”
끄덕.
에두아르가 흠칫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라키엘의 물음이 이어졌다.
“보통 짧으면 30분, 길면 3시간까지도 그런 작열감이 느껴졌을 겁니다. 특히 명치 끝부분이 말이지요.”
……끄덕.
에두아르의 고갯짓 2스택 적립.
“그리고 수시로 메스꺼움과 구토감을 느끼셨을 겁니다. 신물이 올라오는 때도 많았겠지요?”
“하지만…….”
“아, 그건 다른 이들도 간혹 겪는 증상이라고 말씀하고 싶으신 거겠죠. 하지만 말입니다. 아침마다 남들이 다 누는 컬러ㄸ…… 아니, 정상적인 색깔의 변이 아닌, 시커먼 변을 보시는 건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
그걸 어떻게?
설마 봤나?
장군 에두아르는 내심 경악하며 프라이버시(?)의 위기감을 느꼈다. 사실 종종 새카만 흑색 변을 누는 것은 혼자만의 비밀이었다. 처음엔 그게 비정상인 줄도 몰랐다. 나중에야 알았다. 하지만 딱히 남에게 이야기를 해본 적은 없었다. 할 필요도, 하고 싶지도 않았으니까.
그런데 황태자는 어떻게 그것까지 알고 있는 것인지.
……꿀꺽.
장군의 목울대가 살포시 출렁였다.
그는 인정했다.
이제는 부정하지를 못하겠다. 황태자의 말에 화를 내지도 못하겠다. 그렇게 생각하고 보니, 황태자에게 들은 말이 전부 명명백백하게 맞는 말로 느껴지기 시작했다.
황태자가 뭔가를 스윽 면전에 내민 것도 그 순간의 일이었다.
“그럼 여기, 서명하시죠.”
“……예? 이건?”
“치료, 받고 건강해지셔야죠.”
사심 없이 활짝 웃는 황태자. 그 인심 좋은 웃음 때문이었을까. 에두아르는 저도 모르게, 홀린 듯이, 황태자가 내민 ‘진료접수증’에 서명을 하고 말았다.
덕분에 라키엘의 입가에도 보람찬 미소가 빵긋 피어났다.
‘아 보너스 수명은 못 참지.’
특히, 대용량(?) 수명 셔틀인 하프엘프라면 더더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