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10화. 하프엘프의 고질병 (2)
에두아르 앙부아즈.
하프엘프 남성.
연령은 57세.
“…….”
어느새 아침이 밝은 걸까.
에두아르는 낯선 침대에서 실눈을 떴다. 피곤했다. 잠자리가 바뀌어서? 아니, 침대가 너무 물렁하고 편안해서. 그 편안함에 도저히 익숙해질 수가 없어서.
‘온몸이 쑤시는군.’
귀빈실의 안락한 침대보다, 딱딱하고 불편한 야전침상이 훨씬 익숙한 그였다. 따사롭고 온화한 여름 아침 공기보다, 칼바람이 불어대는 북방의 바람이 벌써부터 그리워지는 그였다.
‘어제저녁엔 내가 무슨 짓을 한 걸까.’
그는 침대에서 몸을 일으키며 후회의 감정을 곱씹었다. 그리고 지난 저녁에 범한 실수를 떠올렸다. 그래. 서명을 했지. 황태자가 내미는 진료? 접수증인지 뭔지 하는 서류에.
‘묘한 분위기에 휘말리고 말았어.’
그는 미간을 찡그렸다.
자신이 거의 매일 시커먼 변을 본다는 사실을 황태자는 어떻게 알고 있던 걸까. 혹시 마젠타노 제국의 첩자들이 자신이 있는 북방까지 와서 조사를 했나? 그럴 일을 없을 텐데.
하여간 당혹스러웠다.
자신의 위장이 오랜 세월 쓰라렸던 것도 사실이었다. 게다가 곁에서는 조카인 아델린이 은근슬쩍 눈치까지 자꾸 주었더랬다. 황태자를 믿으라고. 일단 서명하시라고.
결국, 홀린 듯이 서명을 하고 말았다.
그리고 후회하게 되었다.
“당숙? 설마 협상 테이블까지 동행하시려고요?”
귀빈 숙소에서 출발하려던 무렵이었다. 협상장에서 왕녀를 호위할 수행인원들을 점검하고 있는데, 뒤쪽에서 뜻밖의 물음이 날아왔다.
돌아보니 조카, 왕녀 아델린이 의아한 눈초리로 이쪽을 쳐다보고 있었다.
“당연하지. 사신단의 대표로 오게 된 너를 호위하는 것, 그것이 나의 임무가 아니겠니.”
“하지만 오늘은 아닌 거 같은데요.”
“뭐?”
에두아르는 눈살을 찌푸렸다.
조카는 무슨 말을 하려는 걸까.
“당숙께서는 저와 협상장에 가실 것이 아니라, 혼자 별궁 한의원으로 가셔야죠.”
“……뭣?”
왜?
어째서?
무엇 때문에?
이해가 되지 않았다.
그런데 아델린도 이해가 안 된다는 기색으로 입을 여는 것이 아닌가.
“어째서 그래야 하느냐 묻고 싶으신 거죠? 그런데 당숙, 어제 서명을 하셨잖아요?”
“서명? 진료 무슨, 그거?”
“네. 별궁 한의원의 진료접수증요.”
“그런데 그게 어쨌단 말이니?”
“진료접수증에 기입된 진료 예약 날짜가 오늘 오전이던데요?”
“뭐?”
“기억 안 나세요?”
“…….”
안 난다.
솔직히 얼결에, 뭐가 뭔지도 모르는 사이에 서명을 해 버렸다. 진료 예약 날짜? 그딴 걸 살펴볼 여유는 당연히 없었다. 아니, 사실 자신이 거기에 왜 가야 하는지도 이제는 잘 모르겠다.
“하지만 아델린? 내게는 너를 호위하여야 할 책무가 있지 않겠니.”
“네, 있죠.”
“그럼 내가 너와 함께 협상장에 가야 하지 않겠니.”
“아뇨, 그다지요.”
“……왜?”
“당숙이 건강해져야 저를 더 잘 지켜주실 거니까요?”
“난 건강하단다. 보렴. 이 모습 어디가 병원을 찾아가야 할 사람의 것이겠니?”
“겉으로만 멀쩡하신 거죠.”
“속도 멀쩡하단다.”
“아닐걸요.”
“그걸 어떻게 아니?”
“황태자가 그렇게 말했으니까요.”
“…….”
에두아르는 입을 다물어 버렸다. 전혀 예상치 못한 대답이 돌아온 까닭이었다. 그는 의혹에 찬 눈초리로 자신의 조카를 바라보았다.
“너, 설마…….”
“아. 이런 오해를 살까 봐 자제하려고 했는데. 당숙, 지금 당숙이 생각한 그런 거 아니구요. 사심 섞인 의견 아니구요.”
“그럼?”
“황태자가 사람들을 고치는 모습을 제가 봤거든요. 겪어보기도 했고. 들어보신 적 있죠? 제가 전에 황도에 와서 치료를 받았다던 거.”
“그저 부풀리기 좋아하는 호사가들의 호들갑이었노라 여겼는데.”
“아뇨. 전혀. 조금의 과장도 없는 사실이랍니다.”
“그래서, 너는 끝끝내 황태자의 몇 마디를 믿고서 나를 별궁 한의원으로 보내겠다는 것이니?”
“네. 정확하시네요.”
“…….”
그의 입이 다시금 다물렸다.
왕녀 아델린이 그를 달래듯 말했다.
“당숙. 지금 어떤 생각을 하시는지 알아요. 미덥지가 않으시겠죠. 제가 왜 이렇게까지 황태자를 믿는지도 이해가 잘 안 되시겠죠.”
“솔직히, 그렇구나.”
사실이었다.
별로 신뢰가 가지 않았다.
물론 그도 마젠타노의 황태자에 대한 다양한 풍문을 듣기는 했다. 남들과 구별되는 신묘한 의술로 아픈 사람들을 돌본다고 하였다. 그 실력이 전례가 없는 수준이라, 드래곤마저도 황태자를 찾아온 적이 있노라고도 했다.
하지만 에두아르는 의심이 많은 사람이었다. 기구한 혈통 때문에 어린 시절부터 주위의 눈치를 보며 자라나고, 살아온 자였다. 덕분에 약간은 배배 꼬인 성격이 되어 버렸다. 당연히 황태자에 대한 풍문도 곧이곧대로 믿지 않았다.
‘풍문은 부풀려지기 마련이지. 하물며 다른 이도 아닌, 황태자에 대한 미담이라면…… 마젠타노 제국이 직접 나서서 그걸 더 과장하는 공작질을 벌이기도 하였을 테고.’
그것이 당연한 일이다.
라고 그는 생각했다.
게다가 지난 저녁을 돌이켜보면 더더욱 그러했다. 당시 황태자는 이쪽의 위장 상태를 살펴보기 위하여 의도적으로 수행원 모두에게 식사를 대접했다고 했다.
그런데 생각을 해보면, 정작 황태자는 자신에게 어떠한 진찰 행위도 하지 않았다. 그저 식사를 하는 모습을 멀찍이서 지켜보기만 했을 뿐이었다. 청진기를 사용하지도, 가까이에서 혓바닥을 살펴보거나 눈꺼풀을 뒤집어보는 등의 관찰도 하지 않았다.
그런데 무슨 병을 진단했단 말인가.
위궤양?
엘프의 유전을 받아서 너무 강력해진 위산 분비가 문제라고?
‘그럴듯한 헛소리.’
뭔가 이쪽을 현혹하려는 거다. 그래서 호위 대상인 조카, 왕녀에게서 자신을 떼어놓으려는 술수를 부리려는 것인지도 모른다. 그 술수를 위해 왕녀의 신뢰까지 이용하려는 것이겠지. 생각해 보니 더욱 괘씸했다.
“아델린? 네가 아무리 그렇게 말해도…… 나는 도저히 안 되겠다. 별궁 한의원이라니. 그런 곳에 가느라 너를 호위할 수 없게 된다니. 말도 안 되지 않니.”
“아뇨. 돼요.”
“…….”
“우선 제 당부 좀 듣고 건강해지시자구요. 게다가 다른 호위들은 저와 동행할 테니, 딱히 걱정하실 일도 없고요.”
“하지만 여기는……!”
“황도죠. 마젠타노 제국의. 우리 왕국의 동맹인.”
“…….”
“네. 그래도 정 수긍이 안 되신다면 어쩔 수가 없겠네요. 이렇게까지 하긴 정말 싫었는데. 당숙? 이건 당숙의 조카로서가 아닌, 앙부아즈 사신단의 대표이자 왕위 계승 서열 1위의 왕녀로서 내리는 명령입니다.”
“정말로 이렇게까지…… 해야겠니?”
“네. 가세요. 별궁 한의원으로.”
“……알겠다.”
명령까지 나와 버렸다.
결국, 그는 고개를 끄덕이고 말았다.
그리고 자신을 버려두고서(?) 협상장으로 떠나는 왕녀와 호위대를 망연자실 바라볼 수밖에 없었다. 별궁 한의원으로 향하는 걸음 또한 망연하기는 마찬가지였다.
터덜터덜…….
아침 햇살의 화창함만큼 비례해서 찾아오는 현타!
‘조카야, 내가 너를 얼마나 아꼈는데…….’
그런데 이런 취급이라니. 영광스러운 임무를 수행하지도 못하게 막다니. 팔자에도 없던 별궁 한의원 환자행이라니.
‘내가 어쩌다가.’
이런 곳에 오게 된 걸까.
그는 개탄하며 고개를 들었다. 어느새 가까워진 황도 별궁. 그 정문에 선 근위대 병사들이 보였다. 절도와 위엄? 있었다. 격식과 근엄? 물론 있었다. 친절한 미소와 안내 정신? 그것마저 있었다.
“혹시 별궁 한의원에 내원하신 분이십니까?”
“…….”
친절한 미소와 함께 날아온 근위대원의 질문에 에두아르는 순간 말문이 막혔다. 거 보통, 궁전을 지키는 근위대원이라면, ‘신분과 방문 목적을 밝히십시오’라는 딱딱한 태도가 보통이지 않나? 싶었다.
그런데 이곳의 근위대원들은 달랐다.
자신 외에도 별궁을 찾아오고 있는 수많은 이들을 맞이하고, 안내했다. 방문객 대부분이 평민이었다. 그런데도 얼굴 한 번 찌푸리지 않았다. 아니, 오히려 귀족을 맞이하듯 조심스러워 보이기까지 했다.
‘어째서?’
저 많은 평민들을, 그저 방문한 환자라는 이유만으로, 저토록 헐겁게 별궁에 들여보낸다고? 정말로? 그러면 황태자의 안전은? 호위는?
‘신경 쓰지 않는다는 건가?’
선뜻 이해가 되지 않았다.
만약 저 평민들 중에 흑심을 품고서 황태자를 암살하려는 이가 있다면 어떻게 되는 걸까. 그런 요소에 대한 대책은 갖추어져 있는 걸까. 아무리 봐도 너무 안일하고, 무방비해 보였다.
하지만 그런 에두아르의 생각은 5분 만에 깨지고 말았다. 자신을 안내하는 간호사와 마주하면서부터였다.
‘……강하다!’
작은 체구의, 평범해 보이는 간호사일 뿐이었다. 그런데 마주치는 순간 온몸의 솜털이 쭈뼛 곤두섰다. 자신에 견줄 만한 강자를 만났을 때만 나오는 본능적인 반응이었다.
‘설마…… 저 움직임에서 느껴지는 기색과 체취는…… 웨어울프?’
웨어울프가 간호사라고? 혹시 간호사로 위장한 특별 경비 병력인가?
처음엔 그런 줄 알았다.
한데 보니까 아니었다.
“이쪽으로 오세요, 환자분.”
별궁 복도를 걸으며 마주치는 간호사가 모조리 다 웨어울프였다!
“…….”
저 간호사들만 모아도 어지간한 정예 부대 하나쯤은 찢어 버릴 것 같다. 농담이 아니다. 과장 하나도 안 보탠 진짜다.
그러나 그의 경악 퍼레이드는 이제 시작에 불과했다.
“아, 환자분? 거기 길가에 놓인 풀은 밟지 말아 주세요.”
“음? 어, 어째서 말이오?”
“우루스 경이 먹을 아침식사거든요.”
“아침 식사?”
……이런 풀이?
라고 생각하는 순간이었다.
“누우우우우-!”
“……!”
우레 같은 괴성이 근처에서 울렸다. 어느 던전 깊숙한 곳에서나 울려 퍼질 법한 흉맹한 포효였다. 에두아르는 번개처럼 온몸을 긴장시키며 그쪽을 돌아보았다. 그리고 풀밭에 퍼질러져서 모닝 되새김질을 하고 있는 미노타우로스를 발견할 수 있었다.
“포효성으로 미루어 우루스 경의 기분이 좋은 듯하네요. 어서 가시죠. 원장실은 저쪽입니다.”
“…….”
“아, 그리고 미리 주의사항을 알려드리자면, 혹시나 입원을 하시게 되더라도 저기 보이는 서쪽 정원 구역으로는 절대로 출입을 하시면 안 되세요.”
“기밀 구역인 것이오?”
“아뇨. 드래곤 환자가 입원한 곳이라서요.”
“…….”
여긴 대체 뭘까.
뭐 하는 곳일까.
사람 치료하는 곳 맞나? 아닌데. 암만 봐도 아닌 거 같은데. 그냥 사실은 대륙 정벌을 준비하는 장소 아닐까. 그래서 엄청난 병력을 비밀리에 모으고 있는 거지. 아, 그러고 보니 딱히 비밀스럽게 감추지도 않는 거 같은데.
그래서…… 더 무서운데 좀.
원장실을 향하여 별궁 한의원을 가로지르는 사이, 에두아르의 가슴 속 오해와 의심이 무럭무럭 커져갔다. 마침내 원장실에 당도하였을 때는 비장한 표정마저 깃들었다.
어느덧 눈앞에 마주하게 된 원장실 문. 굳게 닫힌 평범한 문짝이 이제는 마굴의 입구처럼 느껴졌다.
똑똑똑!
“원장님? 예약 환자분 도착하셨습니다.”
“아, 벌써요? 이런…… 앞 환자분 아직 진료 중인데…….”
“기다리시라고 할까요?”
“음, 아뇨. 거의 다 끝났으니 미리 들어와 계세요.”
“알겠습니다.”
안쪽에서 들려오는 황태자의 태연한 목소리. 그와 이야기를 나누는 간호사. 대화의 내용은 평범했다. 하지만 속지 말자고 에두아르는 생각했다.
‘황태자……. 분명 뭔가가 있는 인물이야.’
어쩌면 엄청나고도 위험한 계획을 품은 자일지도 모른다. 방심하지 말자. 말려들지 말자. 오늘 자신을 이곳으로 불러들인 진짜 이유를 반드시 알아내자.
끼이익…….
에두아르가 심호흡을 하는 사이, 원장실 문이 열렸다. 안쪽의 광경이 드러났다. 그 순간, 에두아르는 방금까지 머금었던 비장한 각오를 모조리 떨어뜨려 버리고야 말았다.
‘저게…… 무슨…….’
비로소 드러난 원장실의 실체.
제일 먼저 보인 것은, 상의를 벗고서 침상에 누운 중년의 남자였다. 그런데…… 남자의 온몸에 커다란 가시가 꽂혀 있었다. 족히 수십 개씩이나. 서슴없이. 잔혹하고 끔찍하게.
그때, 황태자가 이쪽을 돌아보았다.
“잘 오셨습니다. 그럼 잠시만 기다려 주시죠.”
더없이 환하게 웃는 황태자의 얼굴. 그 인자한 함박미소가 이렇게 말하는 듯했다.
다음은 네 차례야.
“…….”
엄마. 살려주세요.
앙부아즈 북방의 혹독한 국경을 호령한 용맹한 장군, 에두아르는 저도 모르게 나약한 중얼거림을 머금고야 말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