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12화. 내가 입원이라니 (2)
‘내가…….’
검을 뽑고 2초를 못 버티다니.
새하얀 입원실. 깔끔한 천장. 하늘거리는 커튼. 폭신하고 뽀송한 병상. 모든 것이 안락한 공간.
하지만 장군 에두아르의 마음은 안락하지 못했다. 깔끔한 천장에 머리를 박고서 죽고 싶었다. 하늘거리는 커튼으로 목을 조르고 싶었다. 뽀송한 병상에서 숨이 콱 끊어지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너무나 굴욕적이어서였다.
‘내가…… 내가…… 어떻게…….’
지금 생각해도 이해가 되지 않았다. 분명히 대검을 뽑았다. 먼저 들어가겠다고 선언하며 한 걸음을 내디뎠다.
그것이 기억의 끝이었다.
순간 강렬한 충격을 느꼈다거나, 눈앞이 캄캄해졌다거나, 의식이 흐려지고 절망감을 느끼고 어쩌고 저쩌고 아아 블라블라, 뭐 그런 과정이 하나도 없었다. 그냥 한 걸음을 디뎠는데 눈을 떠보니 입원실 병상에 누워 있었다.
너무 어이가 없어서 졌다는 실감도 나지 않았다. 혹시 뒤에서 누가 찔렀나. 혹은 기습적으로 수면 마법이라도 걸었나. 정신승리라도 하고 싶었다.
그런데 그게 불가능했다.
‘내 옷이…….’
그의 시선이 병실 한쪽에 걸린 자신의 겉옷을 향했다. 왼쪽 어깨에서부터 오른쪽 옆구리까지가 정확하게 잘려 있었다. 마치 가위로 잘라낸 듯이 반듯했다. 보는 순간 알았다. 검격에 의한 상흔이구나, 라고.
한데 자신의 몸에는 아무런 상처가 없었다. 그 사실이 알려주는 바는 명확했다. 옷은 베었으되, 몸은 상처입히지 않고, 딱 적절한 충격만 주어서 의식만 잃게 했던 것이라고.
“…….”
그게 가능할까. 소드마스터쯤 되면 할 수 있을까. 아니. 아무리 소드마스터라 해도 그런 일이 가능할 것 같진 않았다. 그런데 황태자의 호위, 데미안 카이엔이라는 자가 그렇게 했다. 다른 이도 아닌 자신에게. 부정할 수 없는 증거를 새겨 버렸다.
“후우.”
다시 붙는다 해도 다른 결과를 만들어낼 자신이 생기지가 않았다. 졌다. 실감은 안 나는데, 너무나 깔끔하게 져 버렸다. 변명의 여지조차 없어서 더 무자비한 패배다. 그런 생각에 한숨이 절로 흘러나왔다.
그때였다.
병실 문이 조용히 열렸다. 이내 들려오는 목소리.
“어? 깨어나셨군요?”
하얀 가운을 입은 황태자가 병실로 들어오다가 반갑게 웃었다. 장군도 어색한 미소를 애써 입가에 걸었다.
“조금 전에 눈을 떴습니다. 이런 모습으로 제국의 황태자를 맞이하게 되어 매우 송구하게 생각합니다.”
“아뇨. 괜찮습니다. 입원을 하셨으니 당연히 환자복을 입은 모습이어야 하는 건데요, 뭐. 그나저나, 몸 상태는 좀 어떻습니까? 특별하게 아프거나, 뭉쳤거나, 두통이 느껴지진 않나요?”
“아, 예. 그럭저럭…….”
“그렇군요. 다행이네요. 닷새 만에 눈을 뜨신 것치고는 튼튼하셔서.”
“……예?”
장군 에두아르는 흠칫하며 자신의 귀를 의심했다.
닷새?
내가?
무려 닷새 만에 눈을 뜬 거라고?
“제국의 황태자시여. 그게 무슨 말씀이십니까? 저는 방금 대련을 하고 잠깐 깜빡 의식을 잃었던 것이…….”
“아닙니다. 정확히 닷새 동안 누워 계셨습니다.”
“제가요?”
“예.”
“…….”
아무래도 농담이 아닌 것 같다. 빵긋 웃으며 뭔가를 꺼내는 황태자의 모습을 보니 더더욱 그런 것도 같고.
“그래도 마침 적절한 타이밍에 눈을 뜨셨어요. 여기. 장군의 위궤양 치료를 위해 특별히 공수한 약재가 오늘 오전에 도착했으니까 말이지요.”
황태자가 내민 물건.
그건 실처럼 가느다란 뿌리였다. 미처 다 털어내지 않은 흙이 군데군데 묻어 있는, 그냥 평범한 흙투성이 식물 뿌리.
“긴뿌리 감초입니다. 크라노스에서 전략적으로 키우는 특산물이랄까요.”
“특산물, 말입니까?”
“예. 장군이 대련을 마친 직후에 크라노스에 서신을 보냈죠. 양산 농장에서 나온 성과가 있으면 보내달라고. 그랬더니 오늘 답장과 함께 첫 수확물이 도착했고 말입니다.”
라키엘의 입가에 다시금 흐뭇한 미소가 맺혔다. 방금 말 그대로였다. 이번에 장군의 위궤양을 제대로 치료하려면 항생치료가 반드시 필요했다. 그래서 항생 성분이 풍부한 긴뿌리 감초가 필수라는 생각이 들었다.
하여 서신을 보냈더니, 닷새 만에 결과물이 돌아왔다. 긴뿌리 감초 양산 농장의 감독관이 된 좀비 툴룬의 답장과 함께였다.
‘그 양반의 좀비 원샷 오애액…… 구토한 맹물이 긴뿌리 감초의 생장률에 생각보다 뛰어난 영향을 줬다고 했지. 덕분에 예상보다 빠르게 첫 수확을 해냈고.’
물론 덕분에(?) 긴뿌리 감초 냄새를 맡은 인근의 거대 구렁이, 기간토피스들이 연일 호시탐탐 난리를 부린다고도 했다. 덩달아 오크 전사들은 실전형 근육을 단련할 좋은 기회가 생겼다며 매일 환호하고 있다나.
뭐 어쨌건.
“마침 의식을 찾으셨고, 약재도 도착했으니 바로 치료를 시작해야겠지요.”
“그…… 언제까지 말입니까?”
“당연히 완치될 때까지입니다.”
라키엘이 자르듯이 말했고, 장군은 무기징역(?)을 선고받은 사람처럼 울상이 되었다.
그날부터였다.
라키엘은 장군을 위한 특제 탕약을 조제했다.
‘기본 베이스는 삼황사심탕(三黃瀉心湯)으로.’
처척, 척!
간호사들이 미리 손질한 황금(黃芩), 황련(黃連), 대황(大黃)이 차례로 조제실 탁자 위에 놓였다. 바로 삼황사심탕을 이루는 약재들이었다.
‘황자 돌림의 세 가지 약재 모두가 항염증의 대표주자들이지. 특히 황금은 약리학적으로 이담, 완하, 이뇨, 진경과 혈압강하의 효과가 있고, 프로스타글란딘의 생합성을 억제하여 진통, 소염작용을 하기도 하고.’
거기에 황련은 진정, 진경, 건위, 지사, 항소화성궤양의 예방작용이 인정되는 약재였다. 또한, 대황은 혈중 요소질소(blood urea nitrogen : BUN)의 저하와 변이원성억제작용 및 인터페론 유기작용 등등의 효과를 지녔다.
‘거기에 긴뿌리 감초를 추가하면?’
몇 번의 실험을 거쳤다.
가장 적절한 비율을 찾아냈다.
마침내 ‘감황사심탕(甘黃瀉心湯)’을 완성했다.
딩동!
[당신이 직접 조제한 탕약을 감지하였습니다.]
[탕약조제 스킬 옵션 ① : 성분 분석을 발동하시겠습니까?]
[YES / NO]
라키엘은 고개를 끄덕였다.
[탕약조제 스킬 옵션 ① : 성분 분석을 발동합니다.]
[스캔 중]
[3…… 2…… 1…….]
[스캔이 완료되었습니다.]
딩동!
언제 들어도 상큼해지는 소리.
이내 감황사심탕에 대한 분석 내용이 좌르륵 떠올랐다.
[감황사심탕]
[성상 : 황갈색의 액상]
[효능과 효과 : 위 벽세포(parietal cell)의 양성자 칼륨 펌프(Proton potassium pump, H+/K+ ATPase)의 비가역적 억제를 통한 위산 분비 억제 및 위 내부 산성도의 강하, 동맥성 출혈 억제, 염증 완화 및 항생 작용]
[용법, 용량 : 1회 300ml, 1일 3회 식전에 복용]
[사용상의 주의사항 : 골다공증 및 빈혈 환자의 경우 복용에 주의할 것]
[저장 방법 : 1~10℃의 서늘한 환경에서 보관]
[사용 기간 : 제조일로부터 3일]
[제조자 : 라키엘 아드리아 마젠타노]
[보너스 발동 : 본 탕약은 당신이 직접 조제한 것이므로, 탕약조제 스킬(Lv.12)의 보너스를 적용받아 약효가 21% 증가합니다.]
‘……굿.’
결과물을 확인한 라키엘의 입이 귀에 걸렸다. 원하던 기능을 딱 얻어냈다. 특히, 위궤양 환자의 치료에 가장 효과적인 ‘양성자 펌프 억제제’의 효능을 얻어낸 것이 가장 고무적인 성과였다.
‘장군의 경우는 보통 사람보다 훨씬 강력한 엘프의 위산을 지니고 있어서, 그게 가장 큰 문제였으니까.’
어떻게든 위산의 산도를 낮추는 것이 급선무였다. 한데 그 문제를 제대로 저격할 수 있게 됐다. 라키엘은 기쁜 마음으로 탕약을 후후 불어 식히고는 장군에게 달려갔다. 그리고 탕약 그릇을 내밀었다.
“드시죠.”
“……뭡니까, 이 괴상한 냄새가 나는 독약은?”
“독약이 아니라 탕약입니다.”
“탕약이요?”
“예, 이제부터 장군이 드실.”
“…….”
이걸요?
제가요?
왜요?
장군은 묻고 싶었다. 하지만 그럴 틈은 없었다. 황태자가 좌우를 향해 소리 없이 눈짓했다. 웨어울프 간호사 두 사람이 숙련된(?) 동작으로 스르륵 움직였다. 어느새 장군의 좌우를 점하였다. 그리고 양쪽 팔을 단단하게 틀어잡았다.
“엇?”
무방비하게 팔을 붙들린 장군!
뒤늦게 저항해보려 했지만, 쉽지 않았다. 엘프의 핏줄 절반을 이은 그는 기교파의 전사였다. 반면, 웨어울프 간호사들은 깡근력을 지닌 피지컬 깡패들이었다. 양쪽에서 붙잡혀 버리니 벗어나기가 거의 불가능해졌다.
그런데 앞에서는 황태자가 스멀스멀 다가왔다.
“자아, 입 벌려보세요오.”
“으읍! 읍!”
“안 벌리시면 콧구멍 막을 건데.”
“……!”
“아이고 우리 장군님 폐활량이 얼마나 되실까.”
“……끕! 흡! 후으읍.”
“얼굴 벌게지죠? 이제 슬슬 숨 차죠?”
“파하악……!”
“아이쿠 입 벌리셨네. 자아, 쭉쭉 들어갑니다. 츄라이 츄라이.”
“……움컷, 벌컥, 쿰컥!”
앙부아즈의 북방을 호령한 장군, 에두아르. 그는 태어나서 처음으로 미각 세포를 유린하는 오랑우탄 정수리맛을 만끽해야 했다.
하지만 고통(?)은 거기서 끝이 아니었다.
매일 식전마다 낯선 탕약의 엄습에 몸부림치는 것도 모자라, 하루에 한 번씩 꼬박꼬박 전신을 침술에 유린당하기도 했다.
“그걸로 꼭…… 저를 찔러야 하는 겁니까?”
“예.”
“어째서 말입니까?”
“치료, 받으셔야지요.”
“…….”
치료실 침상에 누운 장군 에두아르는 벌렁벌렁 흔들리는 눈동자를 들어 올렸다. 황태자가 들고 있는 가시가 보였다. 뻥 좀 보태서 한 뼘 길이는 되는 것 같았다. 그런데 저걸? 내 몸에 꽂겠다고? 그래도 될까? 무사할 수 있을까?
‘위장이 아픈 거라며. 거기에 병이 있는 거라면서. 그런데 왜 몸뚱이를 찌르는 거지?’
이거, 뭔가 착오가 있는 거 아닌가.
상식적으로 이해가 되지 않았다. 낯선 경험에 불안감이 들었다. 하지만 황태자는 여전히 사람 좋은 웃음만 머금어댔다.
“창칼이 난무하는 전쟁터에서도 눈 하나 깜빡이지 않는 분께서, 이런 작은 가시를 두려워하시는 겁니까?”
“……!”
“그럼 시작합니다?”
톳!
예고도 없이 장군의 둘째 발가락과 셋째 발가락 사이의 뿌리 지점, 내정혈(內庭穴)을 톡 찌른 하얀 가시!
“읍!”
깜짝 놀란 장군의 입에서 앙큼한 소리가 흘러나왔다. 물론 라키엘은 전혀 개의치 않았다.
“안 아파요.”
“…….”
장군의 얼굴이 벌게졌다. 사실 안 아프긴 했다. 다만, 생각지도 못했던 발가락 사이를 가시로 찔리니 깜짝 놀라서 움찔했던 것일 뿐.
‘이거…….’
진짜 치료가 되는 게 맞는 걸까. 이렇게 가시를 몸에 꽂아 넣는 게 무슨 효과가 있다는 걸까. 그런데 어째서 다른 사람들은 다들 평온하게 이런 치료를 받는 걸까.
장군의 시선이 옆 침상을 향했다.
엎드려 있는 꼬부랑 할머니의 등에 가시가 열몇 개쯤 꽂혀 있었다. 그런데도 할머니는 오히려 편안한 기색으로 쌔근쌔근 잠든 모습이었다.
‘후우.’
그 모습을 보자 묘한 경쟁심이 타올랐다. 이름없는 할머니도 태연하게 받는 치료를, 자신이 호들갑을 떨면서 받을 수는 없지 않겠는가.
그래서였다.
그는 이 난관(?)을 극복하고자, 자신의 특기를 살렸다.
‘정령들이여, 나의 오랜 친구들이여, 부디 내게로 다가와 인내심과 평온함의 숨결을 불어넣어 주시게들.’
염원했다.
그에게 깃든 엘프의 혈통이 힘을 발휘하였다. 곧, 그의 부름에 응답한 정령들이 하나둘씩 모습을 드러냈다. 물론 교감을 이루어낸 장군에게만 보이고 들리는 정령들이었다. 아니, 그래야만 하는 정령들이었다.
한데 지금은 조금 달랐다.
장군이 정령 소환에 성공한 직후…….
딩동!
[당신은 오장(五臟) 수집퀘스트의 완료자입니다.]
[수집 보상으로 얻은 오행(五行) 순환 시스템에 의하여, 당신은 자연계의 정령에게 큰 호감을 얻으며 소통할 수 있습니다.]
[이러한 당신의 능력이 발현됩니다.]
[가까운 거리에서 연결 가능한 다수의 정령을 탐지하였습니다.]
‘……어?’
뜻밖의 야물딱진 메시지가 라키엘의 눈앞에 떠오르기 시작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