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약 파는 황태자-313화 (313/468)

313화. 정령이 알려준 진실 (1)

[가까운 거리에서 연결 가능한 다수의 정령을 탐지하였습니다.]

‘……어?’

라키엘의 눈이 동그래졌다. 뜻밖의 메시지가 눈앞을 알차게 채운 까닭이었다.

‘뭐지?’

포착됐다고?

연결 가능한 다수의 정령이?

‘어떻게?’

선뜻 이해가 되지 않았다. 지금껏 제법 오랜 기간을 정령과 소통하려 노력했던 그였다. 대략 크라노스에서 오장 수집 퀘스트를 마쳤을 때부터 틈틈이 시도했다.

그러나 한 번도 성공하지 못했다.

매번 각 잡고 시도를 해보아도 돌아오는 메시지란, ‘탐색에 실패하였습니다’라거나, ‘그것도 못 찾음?’이라거나, ‘노오력이 부족합니다.’같은 따위의 내용밖에 없었다.

한데 지금은 탐색이 됐단다.

딱히 일부러 시도를 하지도 않았는데! 아니, 오히려 다른 일에 집중하고 있었는데! 그러니까, 환자한테 시침하느라 한창 바쁜 와중인데!

‘진짜 뭐지?’

그는 시침을 멈추고 주위를 둘러보았다. 혹시나 드디어 정령이 보일까 기대감을 품고서였다.

하지만 없었다.

다른 침상을 둘러봐도, 천장을 올려다보아도, 하다못해 바지춤을 뒤적여도 정령은커녕 정령 겨드랑이도 보이지 않았다.

소리 또한 마찬가지였다. 주변은 여전히 일상의 소리만이 가득했다. 시침을 받은 채로 침상에 눕거나 엎드린 채 나직하게 코를 골며 잠든 환자들의 숨소리. 그 사이를 능숙하게 오가는 간호사들의 발소리 등등.

‘……쯧. 낚시인가.’

그는 내심 고개를 저었다. 기껏 기대했는데, 정작 보이지도 들리지도 않는 정령이라니. 이쯤이면 시스템 메시지가 사람을 놀리는 건가 싶을 지경이었다.

‘하던 거나 마저 하자.’

그는 잠시 흐트러졌던 집중력을 끌어올렸다. 장군 에두아르에게 시침을 하던 와중이다. 흐름이 끊어지면 시침의 효과도 떨어진다. 그러니 잡생각에 마음을 빼앗기지 말자. 눈앞의 일에 집중하자.

……라고 생각하려던 순간.

‘잠깐.’

뭔가가 떠올랐다.

그것은 바로, 소설 마검황에 짤막하게 지나가듯 언급된 내용이었다.

‘맞다. 앙부아즈의 장군 에두아르. 이 하프엘프 아저씨, 정령술에 조예가 있다고 했지 아마?’

그랬던 것 같다. 정령술과 검술을 결합하여 왕국의 북방 국경을 호령하였다던가. 그 독특한 정령검술 때문에 반란자 쟈빌론도 제법 성가심을 느낀 끝에야 그를 제압하고 죽였다고 했던 것 같다.

그러니까 그 내용으로 짐작을 해보자면 지금 탐색된 정령이라는 게…….

‘이 아저씨가 소환한 거구만?’

라키엘은 침상에 누운 장군 에두아르를 슬쩍 살펴보았다. 방금 발가락 사이에 시침을 받은 장군은 두 눈을 꼭 감고 있었다. 그러고 보니 비장한 표정으로 입술만 살짝 움직이며 뭔가를 웅얼거리고 있기도 했다.

혼잣말?

아니.

“지금 누구에게 말을 건네는 겁니까? 혹시 귀신?”

떠보듯 넌지시 물었다.

흠칫 놀란 걸까.

혹은 불쾌함을 느낀 걸까.

장군이 웅얼거림을 멈추고는 미간을 찡그리며 이쪽을 쳐다보았다.

“귀신이라니요? 당치도 않습니다.”

“그럼요? 조금 전부터 혼잣말을 계속 하는 듯하던데…….”

“정령입니다.”

……역시.

라키엘의 눈이 몰래 반짝였다. 정령술의 고급 사용자가 눈앞에 있다니. 이런 횡재가 또 있을까.

‘대박. 안 그래도 정령술 꿀팁이 절실하던 참이었는데.’

막막했다. 누구한테라도 좀 배우고 싶었다. 2황자궁에 식객으로 머무르는 엘프족 집행자 실비아? 택도 없었다. 실비아는 엘프인데도 정령술에 젬병이었다. 어린 시절부터 추적, 암살 등에만 특화된 훈련을 몰빵으로 받은 탓이었다.

그런데 마침 눈앞에 자신을 가르쳐 줄 존재가 나타났다. 눈앞이 환해지는 기분이었다. 다만, 한편으로는 정령술을 전수받기 위해 넘어야 할 난관도 보였다.

‘소설에서는 그랬어. 정령술은 아무에게나 쉽게 알려주지 않는다고. 자격을 인정받은 이를 까다롭게 엄선한 후에야 조금씩 전수를 해준다고 말이지’

아마 장군 에두아르도 비슷할 것이다. 무턱대고 정령술 팁 좀 알려달라고 하면? 한 큐에 거절당할 확률이 100%겠지.

그러면 어떻게 하면 좋을까.

……위이잉! 치키치키!

그의 머릿속 전두엽 대뇌피질이 칙칙폭폭 재빠르게 돌아갔다.

자신이 아는 소설의 설정들, 장군 에두아르에 대해 언급된 부분들, 그걸 통해 예상할 수 있는 에두아르의 성격과 가치관, 그걸 통해 예상할 수 있는 반응까지.

모든 계산을 차곡차곡 쌓았다.

계산 위에 청사진을 걸었다.

작전이 수립되었다.

그렇다면, 촉촉해진 혓바닥으로 작전 실행.

“예? 장군은 정령을 부를 줄 아는 겁니까?”

짐짓 놀란 척, 장군에게 물었다.

역시나 예상대로의 반응이 왔다.

“그렇습니다, 제국의 황태자시여.”

장군의 입가에 은근슬쩍한 미소가 배어났다. 그 모습이 흡사, 애지중지 키우는 강아지 칭찬을 들은 사람의 아빠 미소 같았다.

“제국의 황태자께서도 아시다시피, 제 피의 절반은 엘프의 것이지요. 그런 덕분일 겁니다. 저는 아주 어리던 시절부터 자연스럽게 정령과 소통하고 교감할 수 있었습니다.”

“그렇군요. 예를 들자면?”

“그들이 제게 다가와 위로를 건네곤 했지요.”

씁쓸하게 변하는 장군의 미소.

방금 말은 사실이었다.

자신을 낳은 엘프 어머니는 젖먹이인 자신을 두고서 금방 떠나갔다. 일족의 금기를 어길 수는 없다는 말과 함께였다던가. 그렇게 자신은 왕국의 공작인 아버지의 슬하에서 자라났다.

아버지는 엄했다.

가문의 규율은 더욱 엄했다.

정식 혼인이 아닌 방식으로 태어난 자신이었기에, 가문의 눈엣가시 취급을 받아야 했다. 아버지는 냉담했고, 배다른 형제들은 냉혹했다. 말 그대로 서자 취급. 한 번도 그들을 아버지나 형제라고 부르지 못하였다.

하지만 어리던 자신에게 다가온 친구들이 있었다. 정령이었다. 남들이 보지 못하는 존재들을 자신은 볼 수 있었다. 그들과 소통했고, 교감하며 익숙해졌다. 마침내 자신의 검술과 모든 생활에 결합하는 경지에 이르렀다.

“덕분에 정령들은 제게 있어 소중한 친구이며 전우이고, 또 하나의 가족이나 다름없습니다. 덕분에 제가 원할 때면 언제든 다가와 위로와 응원을 건네기도 하지요.”

“이를테면 지금처럼 말입니까?”

“예, 제국의 황태자시여.”

“지금이…… 위로나 응원이 필요한 순간이었던 건가요?”

“……예?”

장군은 흠칫했다.

황태자의 물음은 무슨 뜻일까. 그 뜻을 깨닫는 데에는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그냥 이거, 침 몇 대 맞는 건데…….”

“…….”

“옆 침상 할머님도 더 많이 맞고 잘 주무시고 계신데…….”

“…….”

“아까는 9살짜리 어린애도 잘만 맞고 갔는데…….”

“…….”

“그런데 장군께는 친구이자, 전우이자, 가족인 존재들이 우르르 와서 위로와 응원을 건네야 하는 가혹한 시련이었던 거군요. 음, 잘 알았습니다.”

“…….”

잘 알았다니? 뭘?

장군은 애타는 심정으로 묻고 싶었다. 아니, 변명하고 싶었다. 그런 거 아니라고. 마음의 준비도 없이 발가락 사이에 가시가 꽂히고 그러니까 좀 불안하고 이상해서 그랬던 거라고. 자신을 나약한 놈 취급하지 말아 달라고.

말하고 싶었지만, 늦었다.

“시침의 강도를 어린이 코스로 낮춰야겠군요. 쓰읍. 이러면 침빨 떨어지는데.”

“……저기? 제국의 황태자시여?”

“예?”

“안 그러셔도 됩니다.”

“아뇨. 그래야 합니다. 같은 치료를 해도 환자마다 느끼는 고통이나 스트레스의 역치가 다른 법이니까요.”

“그, 하지만…….”

“괜찮습니다. 간호사들한테도 충분히 잘 설명해서 전달해 두도록 할게요. 걱정 마세요.”

“…….”

그런 사태(?)가 걱정되는 겁니다!

장군의 가슴이 뚜뚜빵빵 뛰며 마음이 다급해졌다. 간호사들에게 전달한다고? 충분한 설명과 함께? 그러니까, 장군 에두아르가 시침을 받을 때마다 꼬마애들처럼 질질 짤 수 있으니까 보드랍게 다뤄야 한다, 뭐 그런?

‘……그런 소문이 나게 둘 수는!’

없다.

없는데.

그렇긴 한데.

‘아무리 봐도 이건 뭔가…….’

한편으로는 황태자가 일부러 분위기를 몰아가는 느낌도 슬쩍 들었다. 그래서였다. 그는 다급함에 좁아지려던 시야를 가까스로 붙잡고 확 벌렸다. 그리고 확인하듯 황태자에게 물었다.

“혹시, 제국의 황태자께서는 제게 요구할 것이 있는 겁니까?”

“역시, 제 뜻을 아셨군요?”

“감이 왔으니까 말입니다.”

장군 에두아르의 입가에 쓴웃음이 걸리고 말았다.

“황태자께서는 제 정령술을 탐내시는 거로군요.”

“들켰습니까?”

“마지막에 티가 조금 났습니다.”

“그래서, 장군의 결정은?”

“조금의 실마리 정도는 알려드리겠습니다.”

“정말로요?”

“앙부아즈의 장군이 어린이 시침 코스를 받는다는 소문이 간호사들 사이에 퍼지는 것보다는 나을 듯해서 말입니다.”

“장군께서 그렇게 말씀하시니 꼭 제가 협박범이 된 것 같군요.”

“어느 정도는 사실에 기초한 느낌이실 겁니다.”

“장군의 그 비난, 달게 받아들이지요.”

라키엘은 정중하게 사과했다. 동시에 한편으로는 쾌재의 주먹을 불끈 쥐었다. 역시나 예상 적중. 덕분에 원하는 것을 얻어냈다.

“그럼, 제국의 황태자께서는 정령술의 어떤 실마리를 얻고 싶은 겁니까?”

“일단 좀 보고 싶습니다.”

“예?”

“제게도 다행히 재능이 있는지, 정령이 어렴풋하게 느껴지기는 합니다. 탐색이 된다고 해야 할까요. 그런데 정작 아무리 주변을 둘러보아도 정령이 코빼기도 보이지가 않습니다.”

라키엘은 자신의 상황을 적당히 각색해서 말했다.

장군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교감할 기초가 되어 있는데, 정령의 모습을 볼 수가 없다는 말씀이십니까?”

“예, 정확한 요약입니다.”

“이상하군요. 그럴 리가 없는데…….”

“사실입니다.”

라키엘이 자르듯이 말했다.

“지금도 그렇습니다. 아까 장군이 정령을 불렀노라 말했지요? 덕분에 지금 제게도 정령의 존재감이 느껴집니다. 그런데…… 보이지가 않습니다. 들리지도 않고 말이지요. 그래서 궁금합니다. 왜 제가 그들을 못 보는 것인지가 말입니다.”

“흐음, 그런 경우는 처음 보는데…….”

“그 처음 보는 희귀한 일이 제게 벌어졌고 말이지요. 그래 부탁하는 건데, 혹시 장군께서 정령들에게 물어봐 줄 수는 없을까요?”

“제가 말입니까?”

“예. 저들이 제게 보이지 않는 이유를 좀 물어보고, 대답을 전해주시지요.”

이거다.

이걸 부탁하고 싶었다.

아무리 봐도 자신에게는 딱히 문제가 없었다. 그런데도 정령이 보이지가 않는 거라면, 분명 정령 쪽에 문제나 이유가 있지 않을까 싶었다.

그럴 때는? 당사자(?)들에게 대놓고 물어보는 것이 문제의 직빵 해결법이 아니겠는가. 라키엘은 요구했고, 장군은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습니다. 정령술의 실마리를 하나쯤은 드리겠노라 약속을 했으니 지켜야겠지요.”

“잘 부탁합니다.”

“예, 그럼 잠시.”

장군이 눈을 감았다.

다시 입술만 달싹이며 뭔가 중얼중얼. 그 와중에 미간을 찡그리기도 하고, 고개를 갸웃거리기도 했다. 정령들에게서 뭔가 이해가 안 되는 대답을 들은 걸까.

조금 후에야 장군이 눈을 떴다. 그런데 그의 눈빛이 조금 곤혹스러워 보였다.

“대답을 들었습니까?”

“예, 듣기는 했는데…….”

장군이 조금 난감해진 투로 말했다.

“일단 결론부터 말씀을 드리자면, 정령들이 황태자께 모습을 보이길 싫어하고 있습니다.”

“예?”

“그래서 일부러 모습을 감추고 있는 거라고 합니다.”

“…….”

이거 설마, 수신거부? 차단?

어째서?

“제가 무슨 잘못이라도 한 겁니까?”

물었다.

장군이 고개를 저었다.

“그건 아니랍니다. 다만-”

“다만?”

“저들의 대답에 제가 이해할 수 없는 내용이 있어서 말입니다. 그러니 그 부분은 해석 없이, 정령들의 말을 그대로 옮겨서 전해드리겠습니다.”

장군이 목청을 가다듬었다.

뭘까.

대체 무슨 내용이길래?

……라고 생각하는 순간이었다.

장군의 입에서 생각지도 못한 말이 튀어나왔다.

“그러니까 자신들, 정령들은 ‘한국’에서 온 사람을 싫어한다, 라고 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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