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약 파는 황태자-314화 (314/468)

314화. 정령이 알려준 진실 (2)

“그러니까 자신들, 정령들은 ‘한국’에서 온 사람을 싫어한다, 라고 했습니다.”

장군 에두아르의 입에서 나온 말.

예상도 못 했다.

대비 또한 못했다.

라키엘은 대답을 잃고서 우뚝, 장군을 빤히 쳐다보았다. 1초? 2초? 잠깐 사이에 엄청나게 많은 생각이 떠오르고, 사라지고, 또 떠올랐다. 너무나 놀라서. 그럼에도 뭔가 대처를 해야 하니까.

아니.

‘무대처가 제일 좋겠지.’

라키엘은 거의 본능적으로 지금 가장 적절한 대처법을 떠올렸다. 원치 않게 이곳으로 오게 된 이후, 황태자 라키엘의 몸을 차지하고서 살아오게 된 순간부터, 항상 주위의 눈치를 민감하게 느끼는 것이 습관이 된 덕분이었다.

누군가가 자신을 수상하게 보지 않을까. 의심하지 않을까. 언젠가는 정체를 들켜 큰 곤욕을 치르거나 위험에 빠지지 않을까.

단순한 걱정의 레벨이 아니었다.

그야말로 나름의 생존본능으로 눈치와 기색을 살피며 지내야 했고, 그것이 습관이 되었다. 덕분에 언젠가 의심을 받는 상황이 오게 되면 어떻게 대처할지도 항상 마음속으로 연습을 해두곤 했다.

무대처.

뻔뻔하게 굴기.

그것 또한 그가 평소부터 품고 있던 대처법 중의 하나였다.

“흐음, 아리송한 내용이군요?”

놀라는 기색도, 흠칫한 마음도, 놀란 속내도 드러내지 않았다. 그저 알쏭달쏭한 스무고개 퀴즈를 들은 사람처럼, 혹은 치킨과 에스프레소 같은 괴상한 조합의 점심메뉴 선정을 들은 사람처럼 시치미를 뚝 떼며 물었다.

다행히 장군 에두아르도 이쪽의 속내를 알아보진 못했는지, 비슷한 표정으로 맞장구를 쳤다.

“예. 한국은…… 저도 처음 들어보는 이름이라.”

“조금 더 자세히 물어봐 줄 수 있을까요?”

“이미 물어봤지만, 더 애매모호한 대답만 들었습니다. 그게, 으음, 정령들이 말하길, 한국 출신의 인간과는 소통하기가 싫다고 합니다. 300년쯤 전에 이계의 존재에게 제대로 당한 적이 있다고……. 그 뒤로는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습니다. 그 주제로 더 이야기하고 싶지 않다면서 말입니다.”

“그래요?”

장군의 말에 라키엘은 내심 반색했다. 그 주제로 더 말하고 싶어 하지 않는다고? 다행이다. 탈압박(?)의 길이 살짝 엿보였다.

그는 재빠르게 즉석에서 지어낸 시나리오대로 말했다.

“어쨌건 한국이라. 혹시 지명이나 나라의 이름인 걸까요? 혹은 영혼들이 드나드는, 뭐 그런 곳일지도?”

“어쩌면 그런지도 모르겠습니다, 제국의 황태자여.”

“그렇겠군요. 영적인 세계의 어떤 곳이라면…… 흐음, 혹시 제 영혼이 여기서 태어나기 전에 그곳을 들렀다가 왔다든가, 뭐 그런?”

“듣고 보니 일리가 있습니다. 아마도 황태자께서 내린 추측이 맞지 않을까요.”

“예, 그런 것 같군요. 그래서 더 황당하네요. 저도 모르는 곳을, 제가 들렀는지 기억도 못 하는 곳을 이유로 정령들이 절 거부한다니.”

“죄송합니다, 제국의 황태자시여.”

“으음, 아닙니다. 그게 장군의 탓은 아니니까요.”

라키엘은 짐짓 씁쓸한 미소를 지어 보였다. 다행히 장군이 이쪽의 언론플레이(?)에 휩쓸려 왔다.

하지만 그럼에도 여전히 가슴은 쿵쿵 뛰어댔다. 마치, 엄마나 와이프 몰래 밤새도록 게임을 했는데, 증거인멸도 철저하게 했는데, 다음 날 보니까 이미 다 들켜 있는 듯한 철렁함? 을 체감한 까닭이었다.

게다가…….

‘설마 데미안이나 아니스가 이걸로 의심을 한다거나 황제한테 일러바치는 건 아니겠지?’

사실은 그게 제일 걱정이 되었다.

그러나 데미안과 아니스를 힐끔 쳐다보거나 하는 멍청한 짓을 하지는 않았다. 대신 얼굴에 두른 시치미의 철판을 유지하며 장군에게 물었다.

“어쨌건 그럼, 제가 정령들에게 호감을 얻을 다른 방법은 없는 겁니까?”

“그건 저도 잘 모르겠습니다. 정령들이 대답을 거부하고 있습니다.”

“……후우, 그렇군요.”

내심 아쉬웠다.

한편으로는 억울했다.

이건 척하는 게 아니었다.

‘쯧. 모처럼 정령술 꿀팁 하나 배워보나 싶었는데.’

오히려 자신이 어째서 정령을 못 보는 건지만 알게 되어 버렸다. 한국 출신이라는 게 이유였다니. 그게 까마득한 과거의 다른 인물 때문이라니. 상상도 못 했다. 이건 뭐 얌전히 잘 있다가 지역차별, 인종차별의 애먼 불똥을 맞은 기분이랄까.

‘그럼 어떡하지?’

해결법이 있을까.

일단은 모르겠다. 다행히 장군이나 데미안, 수간호사 아니스가 별다른 의심의 기색을 내보이지 않고 있으니, 지금은 화제를 바꾸는 게 좋을 듯했다.

“알겠습니다. 그나저나, 정령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느라 더 중요한 걸 잊고 있었군요.”

“예? 더 중요한 것이라 하심은?”

“시침, 계속 받으셔야죠.”

라키엘이 빵긋 웃으며 하얀 가시를 들었다. 장군 에두아르의 얼굴이 살포시 창백해졌다.

톳! 토톳!

잠시 중단되었던 시침 치료가 재개되었다. 가시가 꽂힐 때마다 장군의 어깨는 흠칫거렸고, 라키엘의 철렁했던 가슴은 여전히 남몰래 두근거렸다.

그동안 데미안은 말없이 라키엘의 곁을 지켰다.

“…….”

아무래도 이상하다.

데미안 카이엔은 침묵에 잠긴 채 생각했다. 그의 눈길은 장군을 시침하는 황태자, 라키엘을 향해 있었다.

‘당황하고 있어.’

아닌 척하는 황태자. 시치미를 떼는 황태자. 그러나 사실은 많이 놀란 황태자. 물론 그 연기는 거의 완벽했다. 다른 이들이라면 작정하고 관찰해도 잘 모를 것이다.

하지만 자신은 안다.

그만큼 황태자와 오랜 시간을 붙어 다녔으니까. 그의 눈짓, 미세한 움직임까지도 모두 바라보며 곁에서 함께 숨을 쉬고, 먹고, 자며 지냈으니까. 말 그대로 가장 가까운 곳에서 그를 지키기 위해 그림자가 되어 살았으니까.

그렇기에 알아볼 수 있었다.

장군의 입에서 ‘한국’이라는 말이 나오는 순간에 황태자가 얼마나 소스라치게 놀랐는지를.

‘그건 마치…….’

감추고 싶은 사실을 들킨 사람의 놀람 같았다. 아니, 자신이 보기엔 확실했다. 황태자에겐 분명 뭔가가 있다. 가끔 허공을 쳐다보며 누군가와 이야기를 나누듯 중얼거린다거나, 아무것도 없는 곳의 글씨를 읽는 듯한 기색을 보인다거나 하는 행동들 또한.

그저 별난 행동이나 습관?

아닌 것 같다.

하지만…… 상관없다.

‘황태자, 아니, 라키엘 아드리아 마젠타노.’

당신의 진짜가 무엇이건 나는 상관하지 않는다. 설령 당신이 진짜 황태자가 아니라 해도, 가짜라 해도 상관없다.

‘나를 구한 이는 황태자라는 신분이 아닌, 당신 그 자체니까.’

그러했다. 어두운 검투장에서 자신을 건져 올린 이도, 곁에 두며 보살핀 이도, 티 나지 않게 걱정하며 곁에 두는 이도, 모두 저 사람이다. 황태자가 아닌, 저 사람 자체가 나를 건져 올리고, 보살피고, 곁에 두었다.

그러니 상관없다.

당신이 황태자가 아닌 그 무엇이라도 나는 괜찮다. 그저 감사하고 존경하며 따를 뿐이다.

그렇기에…… 걱정이다.

“…….”

데미안은 진료실 천장을 슬쩍 바라보았다. 조금 전까지 황실 특수정보부 3호 요원이 있던 곳이었다. 그런데 지금은 없다. 떠났으니까. 왜 떠났을까. 추측하는 것은 어렵지 않았다.

‘방금 황태자와 장군 사이에 오간 대화를…… 보고하려는 것이겠지. 황제에게.’

어떤 보고가 올라가는 걸까.

황제는 그걸 어떻게 받아들일까.

걱정이 되었다.

솔직히 말하자면, 엄청나게 고민이 됐다. 잠깐 핑계를 대며 황태자의 곁을 비울까. 지금 당장에라도 3호 요원을 추격할까. 그렇게 그를 따라잡고, 멈춰 세우고, 설득을 해볼까. 황제에게 올리는 보고를 미루어 달라고.

“…….”

하지만 아니다.

그러면 너무 티가 난다.

의심하지 말아 달라고 비는 꼴이니까. 그런 행위가 더욱 큰 의심과 확신을 불러올 테니까. 게다가 지금 저런 보고가 올라간다고 해서, 당장 황태자가 위험해지지는 않을 테니까.

‘그나마 저런 발언이…… 타국 장군의 입에서 나왔으니 다행일지도.’

황제라면 저 발언 자체의 진위를 의심부터 할 것이다. 앙부아즈가 장군의 입을 빌려 이쪽 황가를 흔들려는 술수를 쓴다고 여길 수도 있겠지. 제발 황제가 그렇게 여겨주면 좋겠다. 그래서 자신의 황태자가 위험해지는 일이 없으면 좋겠다.

그러나 만약.

정말로 만약에.

황태자가 위험에 처한다면…….

‘저는 목숨을 걸고서라도 당신의 곁을 지키겠습니다.’

아무도 찾을 수 없는 곳으로 데려가 안전한 여생을 보내도록 돕고 싶다. 그것이 자신이 받은 은혜와 보살핌에 대한 보답일 테니까.

데미안은 남몰래 주먹을 움켜쥐며 결의를 다졌다.

……꽈득.

희미하게 들려오는, 주먹 움켜쥐는 소리.

데미안 카이엔 경이겠지.

“…….”

별궁 한의원의 수간호사, 아니스는 가만히 귀를 쫑긋거렸다. 그리고 데미안과 황태자를 눈치껏 곁눈질하며 바라보았다.

그녀는 웨어울프 특유의 야생적인 청각으로 느낄 수 있었다. 황태자의 숨소리가 조금 전부터 불안정해졌다. 내쉬는 숨의 끝에 희미한 떨림이 섞였다. 그건 근처까지 다가온 사냥꾼의 존재를 감지하고 불안감을 느끼는 초식동물의 것과 비슷한 숨소리였다.

‘황태자는 내심 많이 놀랐고…… 데미안 카이엔 경의 숨소리는…….’

뭔가 비장해져 있다.

보통의 인간이라면 감지하지 못했을, 극도로 희미한 숨소리에 불과했다. 아니, 고도로 훈련을 받은 인간이라도 파악하기 어렵겠지.

하지만 자신은 느낄 수 있다. 웨어울프니까. 야생의 피가 선사하는 초감각 덕분에 듣고, 느끼고, 눈치를 챌 수 있다.

‘아까 장군이 했던 발언, 어쩌면 정곡을 찌른 것이었을지도.’

한국.

그곳은 어디일까.

어디길래 정령들이 황태자를 거부하는 것이고, 황태자는 저토록 놀란 기색을 애써 숨기는 것일까. 그리고 데미안 카이엔 경은 그런 황태자를 안타깝게 바라보며 결의를 다지는 걸까.

‘아마 들켜선 곤란한…… 그런 곳이겠지?’

보아하니 그런 듯했다.

분명 뭔가가 있다.

하지만…… 상관없다.

‘황태자, 아니, 라키엘 아드리아 마젠타노.’

당신의 진짜가 무엇이건 전혀 상관없다. 설령 당신이 진짜 황태자가 아니라 해도, 새빨간 가짜라도 아무 상관 없다.

‘나와 우리 종족의 꼬리 문제를 해결해 주고, 우리를 고용해서 당당한 사회의 일원으로 활동할 수 있게 해준 사람이 바로 당신이니까. 황태자라는 신분이 아닌, 당신이라는 사람 자체가 우리 일족의 고용주니까.’

그냥 고용주도 아니다.

고마운 고용주다.

그러니까 저 사람의 정체가 무엇이건 아무 상관 없다. 앞으로도 우리 일족을 고용해주고, 그럼으로써 사회 진출의 기회를 계속 주기만 한다면…… 우리는 목숨을 걸고서라도 평생 저 사람을 따를 작정이니까.

‘그러니까 저 앙부아즈의 장군이 쓸데없는 의심이나 소문을 퍼뜨리지 못하도록…… 단단히 감시해야겠어.’

자신을 위해.

일족의 미래를 위해.

수간호사 아니스는 남몰래 등줄기의 솜털을 곤두세웠다.

그리고 30분 후.

보고를 마친 특수정보부 3호 요원이 창백해진 얼굴로, 식은땀을 뻘뻘 흘리며, 황제 앞에 무릎을 꿇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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