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15화. 정령이 알려준 진실 (3)
짐은 바보다.
또한 아비다.
그 이전에, 제국의 황제이다.
그래야 하는데.
분명 그래야 할 터인데. 손이 끊어지고 팔이 날아가고 사지가 뜯겨도 오직 제국의 존망 하나만을 바라보며 눈 하나 깜빡이지 아니하여야 할 유일한 사람이 짐인데.
그런데 손가락 하나가 자꾸 아프다. 멍이 든 것처럼. 생채기가 난 것처럼. 그 사소한 아픔 하나가 가슴을 저민다. 자꾸만 짐을 제국의 황제가 아닌 평범한 아비로 만들어 버린다.
바로 지금처럼.
이제는 가장 자랑스럽고, 그만큼 아픈 손가락인 너의 소식을 들을 때마다.
“보고는 거기까지이더냐.”
“그렇사옵니다, 폐하.”
“…….”
황제, 아스테리온 테스타로사 마젠타노는 침묵 속의 냉엄한 눈길을 던졌다. 그의 시선 때문이었다. 특수정보부 3호 요원은 긴장감에 마른침을 삼켰다. 저도 모르게 식은땀이 흘러나왔다. 황제가 주는 거대한 압박감 때문이었다.
보고를 받은 황제가 아무런 말이 없었다. 계속. 언제까지고 모를 침묵만 지키며 이쪽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생각에 잠겨서? 아니, 그보다는…….
‘진노하신 건가.’
설마 자신의 보고 때문에 황태자에게 불벼락이 떨어지는 것일까. 3호 요원은 덜컥 걱정이 들었다. 자신이 성급한 보고를 한 것일까 후회도 들었다.
하지만 어쩔 수가 없었다. 황태자의 신변에 관련된 정보를 입수하면 즉시 보고를 해야 한다. 그것이 원칙이다. 자신은 원칙대로 움직인 것이고.
하지만 이번 경우는…….
‘이런 일로 황태자가 곤경에 처하는 건 조금, 싫은데.’
사실 3호 요원은 황태자가 마음에 들었다. 가끔, 아니, 제법 종종 괴상한 짓을 벌이긴 하지만, 덕분에 자신도 덩달아 고생을 하기도 하지만, 그래도 보는 맛(?)이 있었다.
그리고 인간적으로도 마음에 들었다. 특히, 아무 연고도 인연도 없는 이들을 ‘환자’라는 이유만으로 받아주고, 돌봐주는 모습이 그랬다.
그때, 황제의 물음이 떨어져 내려왔다.
“한국이라. 들어본 적이 있는가?”
“없사옵니다, 폐하.”
“하면, 앙부아즈의 장군 에두아르가 하였던 그 발언의 진위는?”
“확인할 길이 없사옵니다.”
“그렇겠지. 정령이 ‘말했다’고 주장하며 전달한 것이 그 발언이니까.”
“그렇사옵니다, 폐하.”
“하면, 특수정보부 요원으로서 내리는 그대의 판단은?”
“……허위일 가능성이 높다고 사료되옵니다, 폐하.”
“이유는?”
꿀꺽.
여전히 착 깔린 황제의 목소리.
의도를 짐작하기가 어려웠다.
화가 난 건지.
차분한 건지.
그래서 3호 요원은 다음 발언을 꺼내며 제법 많은 각오를 품어야 했다.
“발언을 한 에두아르가 앙부아즈 왕가에 지극히 충성을 바치는 인물이기 때문이옵니다.”
“흐음, 앙부아즈가 그의 입을 빌려 우리를 흔들기 위한 책략을 부리는 것이다?”
“예, 폐하. 일종의 견제라고 저는 감히 판단하고 있사옵니다.”
3호 요원은 소신껏 말했다.
“예전에도 이세계에서 온 자들이 있다는 기록이 아주 드물게, 역사에 남기도 했사옵니다. 자신이 그런 존재라고 주장한 이들도 있었사옵니다. 그러나 실상은 그 모두가 이야깃거리를 만들기 좋아하는 자들이 꾸며내고 과장한 야사에 불과했던 것이 현실이옵니다.”
“그러했지.”
“그렇사옵니다, 폐하. 하물며 황태자 전하는 우리의 정보망을 벗어나 어딘가를 다녀온 적이 없사옵니다. 출생하던 시기부터 지금까지 줄곧 말이옵니다.”
“그렇지.”
“예, 폐하. 그렇기에, 장군 에두아르의 발언이 사실이 되려면, 황태자 전하의 영혼이 바뀌었다는 식의, 현실적으로 불가능하고 허무맹랑한 상황만이 합리적 이유가 될 수 있는 상황이옵니다.”
“하면, 그 장군의 발언이 황태자 본인, 혹은 우리를 흔들기 위한 기만책인 것이다? 우리의 정보부가 황태자를 지켜보고 있을 상황을 역이용하려는?”
“송구하오나 저는 감히 그렇게 보고 있사옵니다, 폐하.”
“그럼에도 원칙상 짐에게 즉각적인 보고를 올린 것이고?”
“실로 송구하옵니다.”
“아니, 괜찮도다.”
황제의 입꼬리에 묻어나는 희미한 미소.
하지만 3호 요원은 긴장을 풀지 못했다. 경험상 저런 황제의 표정은…… 진노를 속으로 삭일 때에만 나오는 것이었던 까닭이었다.
“알겠으니 물러가거라.”
“명을 받드옵니다, 폐하.”
3호 요원이 모습을 감추었다.
황제의 나직한 한숨은 그러고도 한참 후에야 흘러나왔다.
“…….”
아프다.
손가락이, 자그마하고 사소한 손가락이, 고작 멍들고 긁힌 정도의 작은 생채기 같은 이 손가락이, 황태자라는 손가락이 너무나 아프다.
그래서 화가 난다.
‘라키엘…….’
나의 아들.
짐의 황태자.
그런 아이에게 생채기를 내려 들다니. 자신의 가슴속에 의심의 잉크를 떨구려는, 이런 식의 은근한 협잡질을 벌인다니.
어찌 감히.
……꾸드득.
창밖을 바라보는 황제의 어금니가 갈렸다. 한편으로 황제는 결심했다. 최근 진행 중이던 앙부아즈와의 협상에 더욱 독하게 임해야겠노라고. 이참에 뜯어낼 것들을 아주 제대로 뜯어내야겠노라고.
그래야만, 자신의 소중한 손가락에 상처를 낸 저들에 대한 울분이 조금은 풀릴 것 같다고.
♣
닷새가 지났다.
다행히(?) 장군의 한국 출신 발언은 생각보다 파장을 일으키지 못했다. 덕분에 라키엘은 며칠 노심초사했던 마음을 내려놓을 수 있었다.
그럼에도…….
울분이 쑴펑쑴펑 샘솟는다.
이건 과장도, 허위도 아니다.
‘정령 이놈들 이거, 아. 생각할수록 빡치네.’
라키엘은 한숨을 푹 내쉬었다. 그리고 눈앞에 떠오른 메시지를 슥 쳐다보았다.
[가까운 거리에서 연결 가능한 다수의 정령을 탐지하였습니다.]
또다.
벌써 닷새째다.
저 메시지, 앙부아즈의 장군 에두아르를 진료할 때마다 어김없이 숑숑 떠올랐다. 지금도 마찬가지였다. 회진을 위해 장군의 병실을 방문하자마자 보이는 저 메시지가 이제는…… 좀 가증스럽게 느껴졌다.
‘아니, 나 비호감이라며. 한국 출신 인간이라서 싫어한다며. 그래서 수신거부 하듯이 모습도 안 보이게 굴면서, 그런데 이런 메시지는 왜 자꾸 보이게 만드느냐고, 이 국가차별 인종차별 ㅃ킹 레이시스트 정령들아. 응?’
라키엘은 내심 이를 바득바득 갈았다.
솔직히 빡쳤다.
마치, 무제한 데이터 요금제를 선택하지 않아서, 이번 달 남은 데이터가 간당간당한 절실한 상황에서, 와이파이가 잡힌다는 메시지는 계속해서 뜨는데 연결은 못 하는 기분 같았다.
혹은, 배고파 죽겠는데, 누군가가 절대로 뜯어지지 않는 강철 포장지로 휘감긴 빵쪼가리를 눈앞에서 흔드는 느낌이었다.
말 그대로 이건 농간이다.
아니, 농락이다!
‘어오, 저 기만자들.’
그는 쓰려지는 속을 다스리며 한의사 모드(?) 미소를 머금었다. 그리고 장군에게 물었다.
“좋은 아침입니다. 간밤에는 좀 어땠습니까?”
“아, 예, 제국의 황태자시여.”
“속이 쓰리지는 않았나요?”
“예, 조금…….”
“여전히 쓰렸습니까?”
“죄송합니다.”
장군이 면목이 없다는 듯 말했다. 라키엘은 서둘러 손사래를 쳤다.
“그건 장군이 죄송해할 일이 아닙니다. 자연스러운 증상인 거고, 오히려 제가 경각심을 가져야 할 일이지요.”
그는 솔직하게 말했다.
그러는 한편으로 경혈 스캐닝을 켜서 장군의 위장을 관찰했다. 여전히 위궤양 부위로 흐르는 경혈의 흐름이 원활치가 않았다. 물론 처음 봤던 때보다는 나아지긴 했는데…….
‘개미 눈곱만큼 나아졌구만.’
라키엘은 미간을 찡그렸다.
장군을 위해 조제한 감황사심탕의 약빨(?)이 생각보다 효과적이지가 않은 듯했다. 꾸준한 시침의 효과 또한 별다를 바가 없는 듯하기도 했다.
‘하긴……. 무리도 아니지.’
사실 위궤양은, 특히나 장군의 것처럼 심각한 수준의 위궤양은 현대 의학으로도 완치에 많은 노력과 시간이 들어가곤 했다.
하물며 한의술로 다스리려면? 더 애를 써야 할 것이다. 당연한 일이다. 본디 한의학이란 병증의 치료보다는 예방을, 특히 체질개선과 원기보양을 통한 병증의 발생 자체를 미연에 방지하는 데에 효과적인 의술이기 때문이었다.
‘쯧. 생각보다 빡쎄. 이거 잘못하면 왕녀의 협상 기간이 끝날 때까지 완치가 안 될지도.’
그러면 안 된다.
왕녀는 자신의 임무인 제국 황실과의 협상을 마치면 앙부아즈로 돌아갈 것이다. 그럼 장군도 당연히 왕녀와 함께 앙부아즈로 돌아가야 한다. 즉, 위궤양을 제대로 완치하지도 못하고서 퇴원을 하게 된다는 소리다.
‘그건 좀 싫은데.’
자존심이 상해서?
아니.
미안해서였다.
책임감 때문이었다.
‘내가 반 어거지로 입원실에 눌러 앉힌 환자야. 그런데 제대로 완치도 못 시키고 입원실 밖으로 내보낸다고? 말도 안 돼. 그건 환자에 대한 기만이고 농간이야. 게다가…….’
보너스 수명을 얻을 기회도 날아갈 것이다. 무려! 최소 300년은 산다는 하프엘프가 선사할! 노다지 같은 보너스 수명을!
‘……그건 못 참지!’
사실 그동안의 노력으로 무려 천 일이 넘는 보너스 수명을 쌓아두게 되긴 했다. 하지만 그거, 따지고 보면 그리 길지는 않은 시간이다. 해봤자 3년 남짓. 냉혹하게 따지자면, 여전히 이쪽은 3년짜리 시한부 인생이란 뜻이다.
그러니 포기 못 한다.
도의적인 미안함.
한의사로서의 책임감.
보너스 수명에 대한 욕망.
그 어느 것 하나도 포기하기 싫었다. 잠깐 고민한 라키엘은 특단의 조치를 떠올렸고, 장군에게 통보했다.
“일단은 알겠습니다. 그러니 오늘부터 제가 이 병실에서 합숙을 해야겠군요.”
“……예?”
합숙을요?
여기서요?
왜요?
장군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묻고 싶은 말은 엄청 많이 떠오르는데, 너무 갑자기 당황하다 보니 입 밖으로는 한마디도 되묻지를 못했다.
그사이에 라키엘의 말이 잘도 이어졌다.
“생각보다 약효가 빠르게 올라오지 않는 듯해서 말입니다. 제가 일전에 입원을 앞두고 말씀을 드렸지요? 위궤양, 특히 장군의 위장에 있는 헬리코박터는 한 번 치료를 할 때에 제대로 박멸을 해야 한다고 말입니다. 그래서입니다.”
“그래서 왜…….”
“장군과 함께 숙식하며 식단에 따른 위장의 소화반응을 살피고, 탕약 복용이 어느 정도의 약효를 불러오는지, 모든 과정을 실시간으로 진맥하고 관찰하면서 진료의 방향을 조정하기 위함입니다.”
“저기, 제국의 황태자시여? 그래도 되는 겁니까?”
“예?”
“굳이 저 하나를 위해서 그렇게까지 하실 여유나 시간이…….”
“있습니다.”
라키엘은 잘라내듯 말했다.
사실은 반쯤 거짓말이었다. 장군과 숙식? 입원실에서? 당연히 하기 싫다. 피곤하고 번거롭다. 하지만 왕녀의 협상이 끝나기 전에 위궤양을 다 고치려면 이 방법이 최선일 듯했다. 그러니까 하는 거다. 최선이니까.
“일단 회복에만 집중하시죠.”
그때부터였다.
라키엘은 자신이 한 말을 정확하게 지켰다. 정말로 장군의 입원실에서 종일 머무르며 장군의 모든 식단과 탕약 복용 상태를 점검하고, 수시로 진맥 스킬과 경혈 스캐닝을 동원해서 관찰했다.
물론 그때마다 가증스러운(?) 정령 감지 메시지가 야물딱지게 떠올랐다. 덕분에 그는 하루에 몇 차례씩은 울분을 삼켜야 했다.
‘후우, 계속 나 차단하고 있을 거면 이런 거나 보여주질 말든가.’
물론 그는 몰랐다.
도의적인 미안함.
한의사로서의 책임감.
보너스 수명에 대한 욕망.
그러한 마음으로 장군의 치료에 집중하는 자신의 모습이 정령들의 마음에 변화의 조약돌을 포심 패스트볼처럼 팍팍 꽂아 넣고 있음을. 입원한 장군의 보호자를 자처하는 정령들의 마음속 비호감을 서서히 호감으로 물들이고 있음 또한.
그리고 마침내 장군과의 합숙 엿새째가 되는 날.
딩동!
[가까운 거리에서 연결 가능한 다수의 정령을 탐지하였습니다.]
[탐지된 정령 중의 하나가 연결을 수락하였습니다.]
[‘캡사이신의 정령’과 페어링을 시작합니다.]
그동안 오매불망 바랐던, 그러나 한 번도 뜨지 않던 후속 메시지가, 마침내 눈앞을 야물딱지게 채우기 시작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