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약 파는 황태자-318화 (318/468)

318화. 왕녀와 미노타우로스 (1)

“그 정도 업무량이면 제법 한계를 느끼지 않나, 보통은?”

“아닙니다, 전하.”

“쓰읍. 휴일에는 늘어지는 게 정상 아니야?”

“역시나 아닙니다, 전하.”

“그래?”

“네, 전하. 저희 웨어울프들은 체력과 회복력이 매우 뛰어나니까요.”

“그래……. 축복받은 유전자구나.”

라키엘은 부러움의 한숨을 푹 내쉬었다. 그리고 원장실 책상에 엎드린 채 수간호사 아니스에게 물었다.

“그래서, 매일 빠듯한 일과에 시달리던 간호사 몇몇이, 지금은 비번인 기회를 살려서 ‘사냥 놀이’라는 걸 즐기는 중이라는 거지?”

“네, 우루스 경과 놀고 있을 겁니다.”

“놀고 있다, 라…….”

“겸사겸사 찌뿌드드한 몸을 푸는 거죠.”

아니스가 살포시 웃었다.

사실 그녀와 같은 웨어울프들에게 별궁 한의원의 생활은 결코 쉬운 것이 아니었다. 매일 몰려드는 환자 때문에? 바빠서? 쉴 틈도 없이 혹사를 당해서?

전혀 아니었다.

실상은 반대였다.

웨어울프들에게 별궁은 너무나 평온했다. 시시각각 목숨을 노리는 적도 없고, 부족의 식량을 걱정하며 사냥을 나서야 할 일도 없었다. 혹은 인간들의 차별에 시달리며 긴장해야 할 필요도 없었다.

너무나 안락한 곳.

그렇기에 오히려 위험해지는 곳.

“다들 너무 풀어져서 지내다 보니까…… 야성을 잃을까 걱정이 많았습니다. 그러다가 최근에 방법을 찾은 것이고요.”

“그게 우루스와 사냥 놀이를 빙자한 대난투극을 벌이는 것이다?”

“다행히 우루스 경도 흔쾌히 동의하더군요. 아마 그쪽도 사정은 우리와 비슷했겠지요.”

“뭐, 그렇긴 하지.”

라키엘은 피식 웃어 버렸다.

아니스의 말대로였다. 야생에서 거칠게 살아오며 무리를 이끌던 우루스였다. 수많은 적과 싸우고, 도전하는 다른 수컷들을 물리치며 군림했던 왕이었다.

한데 별궁에 온 뒤로는 정원에서 뒹굴거리며 되새김질을 하는 것이 일과의 전부가 되었다. 한 번은 그런 무료함에 대한 불만을 우루스가 표현한 적도 있었다.

쌓이고 쌓인 힘이 넘쳤던 걸까. 하루는 돌연 흉포해져선 정원의 나무 다섯 그루를 통째로 뽑아 버렸더랬다.

‘물론 우루스도 자신이 욱하면서 저지른 실수를 인정하긴 했지만…… 그래도 근본적인 대책이 필요하긴 했지.’

하지만 세심하게 신경을 써주질 못했다. 최근에 너무 바쁜 일들이 연달아 터지느라, 정신없는 시간을 보낸 까닭이었다.

그런데 그 사이에 우루스와 웨어울프 간호사들이 스스로 답(?)을 찾아낸 듯했다.

“그럼, 아니스도 그걸 해본 거야? 사냥 놀이를?”

“네.”

“직접 해보니 어땠지?”

“후련했습니다, 전하.”

“그래?”

“네. 그런 느낌은 오랜만이었어요. 광대한 들판을 질주하며 사냥감을 추적하던 조상들의 기분이 이런 걸까 싶기도 했고요.”

“거, 스트레스 제대로 풀었다는 뜻이네.”

“아마 그랬던 것 같습니다, 전하.”

“그래서, 앞으로도 정기적으로 야밤에 우루스와 비번인 간호사들이 우당탕탕 사냥 놀이를 하는 걸 허락해달라는 거지?”

“정확한 요약이십니다, 전하.”

“쓰읍. 시끄럽지 않게 할 자신은 있고?”

“입원 환자들에게 영향이 가지 않도록 장소를 고르겠습니다.”

“뭐, 그건 지금도 요령껏 잘하고 있는 듯하긴 한데…… 알았어. 생각을 좀 해보지.”

“생각을…….”

“최대한 긍정적으로.”

“감사합니다, 전하.”

아니스가 활짝 웃었다. 역시. 황태자라면 좋게 보아줄 줄 알았다. 한편으로는 다른 간호사들이 오늘의 보고를 만류했던 것도 생각이 났다.

괜히 황태자에게 사냥 놀이를 보고했다가, 오히려 금지를 당하는 거 아니냐고 했던가. 아무리 황태자라도 정원에서 벌이는 그런 격한 난투를 허락해줄 리가 없다고 다들 걱정했던가.

하지만 자신은 황태자를 믿었다. 황태자는 다르다고 생각했다. 그는 꽉 막힌 사람이 아니니까. 아니, 지금껏 자신이 본 그 어떤 권력자들보다도 아랫사람을 소중히 아끼고 챙기는 사람이니까.

분명, 합당한 이유를 밝히면 허락을 얻어낼 수 있을 거라고 여겼다. 그래서 왔고, 보고했으며, 긍정적인 답을 얻어냈다.

‘이런 분을 모시게 된 우리는…… 행운아야.’

원장실에서 물러나는 아니스, 그녀의 마음이 한결 포근해졌다.

‘이런 걸 목격하다니, 나는…… 행운아야.’

수풀 뒤에 숨은 왕녀 아델린, 그녀의 심장이 한결 격렬해졌다.

두근……! 두근!

눈앞의 광경을 믿을 수가 없다.

한밤의 정원.

달빛 아래 날뛰는 거대한 미노타우로스. 그 주위를 맴돌며 기회를 노리는 간호사들의 울프팩. 뿔과 송곳니. 근육과 야성. 묵직한 포효와 거친 숨결. 고집스러운 눈빛과 사냥의 본능. 두 힘의 충돌이 이처럼 장관일 수 있을까.

수풀 뒤에 숨은 아델린은 숨 쉬는 것조차 잊고서 주먹을 꽉 쥐었다. 가슴이 뛰는 것은 물론이었고, 전신의 근육에 저절로 힘이 들어갔다. 손끝이 파르르 떨렸다. 할 수만 있다면 당장에라도 저 싸움에 끼어들고 싶었다.

‘하지만…….’

섣불리 끼어들 틈이 보이지 않는다.

저들의 싸움이 너무나 격렬해서? 내가 끼어봤자 따라갈 수가 없어서? 아니. 그건 절대로 아니었다.

저들의 움직임이라고 자신이 못 따라잡을 정도는 아니었다. 충분히 함께 싸울 수준은 되었다. 그럼에도 그녀는 자신이 저들의 전투에 끼어들 수는 없다고 느꼈다.

‘실전이 아니라…… 그저 즐기고 있는 거니까.’

일견 보기에는 엄청나게 격렬한 전투 같았다. 하지만 자세히 보니 아니었다. 미노타우로스와 웨어울프 간호사들은 맹렬한 움직임의 와중에도 엄격한 선을 지키고 있었다.

‘죽일 것처럼 주먹과 발톱을 휘두르다가도, 상대에게 맞기 직전에 힘을 빼고 있어.’

어린 시절부터 격투술에 매진했던 아델린이었다. 덕분에 저들의 사소하지만 중요한 순간의 움직임의 변화가 보였다.

그러니까 지금 한밤의 정원에서 벌어지고 있는 저 전투는 모의전, 혹은 놀이인 것이다. 온전히 저들만이 어우러져 즐기는.

그래서 내가 함부로 끼어들 수가 없는.

……이라고 생각하며 아쉬움을 곱씹던 무렵이었다. 별안간, 바로 옆쪽에서 풀잎 파스락거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크르릉?”

“……!”

어느샌가 웨어울프 간호사 한 사람이 다가와 있었다. 격렬한 놀이를 즐기다가 잠시 숨을 돌리러 빠져나온 걸까. 간호사가 늘어뜨린 새빨간 혓바닥이 유난히 눈에 띄었다.

“헥헥헥!”

“…….”

“헥헥! 크릉?”

“……무슨 말을 하고 싶은 거지?”

당연하게도 아델린은 변신한 웨어울프의 개소리(?)를 알아들을 수가 없었다. 그럼에도 뭔가 느낄 수는 있었다. 이 웨어울프 간호사, 나를 적대하는 건 아닌 듯하다고. 여기서 쫓아내려는 건 더더욱 아닌 것 같다고.

오히려 뭔가를 제안하는 느낌이라고.

과연 그녀의 생각대로였다.

“헥헥!”

웨어울프 간호사도 자신의 실수를 깨달았는지, 바닥에 쪼그려 앉았다. 그리고 손톱으로 흙바닥에 글씨를 썼다.

- 혹시 앙부아즈의 왕녀이신가요?

“맞아. 그런데?”

- 듣기로는 격투술의 실력자라던데, 그럼 구경만 하지 말고 같이 하실래요?

“내가…… 그래도 되나?”

- 아까부터 너무 부러운 눈초리로 구경을 하셔서요.

“…….”

내가 그랬던가.

웨어울프 간호사의 손톱 글씨가 이어졌다.

- 일개 간호사인 저희가 당신처럼 존귀한 분에게 이런 제안을 하는 일이 무례할 수도 있다는 건 알지만, 그렇다고 가만히 두자니 밤이 새도록 구경만 하실 것 같기도 했고요.

“어, 그건…….”

아델린은 그만 피식 웃어 버렸다.

솔직히 부정하지를 못하겠다. 특히 아까부터 미노타우로스의 움직임을 보는 순간 넋이 나가는 것 같은 충격을 느꼈다. 압도적인 힘과 기세. 그걸 보며 자신의 슬럼프를 깨부술 실마리를 어렴풋이 느낀 까닭이었다.

그런데 웨어울프 간호사가 이렇듯 다가와서 동참하자는 제안까지 건넨다?

이건 안 받을 수가 없겠다.

아니, 꼭 해야 한다.

“좋아. 혹시 그대들만의 룰이 있나?”

- 상해를 입힐 정도의 지나친 흥분은 금지. 손톱으로 할퀴거나 깨물기 금지. 그 외의 주먹질이나 발차기, 박치기는…… 우루스 경이 튼튼해서 좋아해요.

“좋아해?”

- 뻐근한 자리가 풀어져서 시원하답니다.

“그래, 다른 규칙은?”

- 즐기시면 되세요.

“좋군.”

아델린은 풀숲을 건너갔다. 일순간 미노타우로스와 간호사들의 전투가 중단되며 모두의 시선이 이쪽으로 몰리는 일…… 같은 건 없었다. 그들은 이쪽의 등장에는 신경도 쓰지 않는 듯, 여전히 포효하며 날뛰었다.

“누우우우!”

“크르릉!”

낄 테면 알아서 끼라는 뜻인가. 즉, 실력이 안 되면 알아서 떨어져 나가란 거겠고.

‘더 마음에 드네.’

아델린의 입가에 사나운 미소가 맺혔다. 워밍업? 이미 완료됐다. 저들의 전투를 보는 것만으로도 온몸이 뜨거워져 버렸으니까. 심장이 날뛰고 있으니까.

이제는, 뛰어들 차례다.

‘이렇게!’

투확!

땅을 박찼다. 어느샌가 그녀는 돌진하는 웨어울프 간호사 셋과 나란히 달리게 되었다. 너무나 자연스러운 합류였다.

“크릉?”

놀란 간호사 하나가 이쪽을 돌아보았다. 그녀는 소리 높여 자신의 합류를 알렸다.

“워우우우!”

“크르릉? 워우!”

울프팩의 일원이 되었다. 함께 땅을 박찼다. 밤하늘로의 도약. 해방감과 고양감. 우루스가 마주 외치는 포효. 괴성을 돌파했다. 목표는 우루스의 미간. 정권을 뻗었다. 바람을 갈랐다.

콰아앙-!

절반의 힘을 실은 정권이 제대로 꽂혔다. 순간 아델린은 흠칫했다. 내가 흥분해서 지나치게 힘을 주었나.

아니.

절대로.

“푸릉!”

우루스의 거친 코웃음이 터져 나오는 순간, 그녀는 자신의 타격이 미미한 수준이었음을 깨달았다. 거대한 철벽을 친 느낌. 덕분에 그녀의 입가에도 웃음이 맺혔다.

‘이거…… 끝내주잖아?’

하지만 웃고만 있을 틈은 없었다. 우루스의 반격이 곧바로 날아왔기 때문이었다.

후우웅-!

“……!”

미노타우로스의 압도적인 신체가 ‘가볍게’ 휘둘러 오는 팔뚝. 그러나 저걸 제대로 맞는다면? 최소 기절일 것이다.

‘그런 꼴사나운 퇴장은 할 수 없지!’

그녀는 두 손을 뻗었다. 우루스의 한쪽 뿔을 잡았다. 당겼다. 온몸으로 훅, 이동했다. 날아드는 팔뚝을 가까스로 피했다. 우루스의 뒷목을 밟으며 뒤통수를 겨누었다.

투쾅-!

팔꿈치로 뒤통수를 내리찍었다. 그러나 역시나 효과는 제로. 오히려 우루스의 뒷목이 시원하다는 웃음만 돌려받았을 뿐이었다.

“푸롱!”

“……!”

우루스가 웃는 순간, 세상이 거꾸로 뒤집혔다. 아니, 한쪽 다리를 붙잡혀 들어 올려졌다. 발버둥을 칠 틈도 없었다.

패대기?

설마 바닥으로?

다행히 그건 아니었다.

……후욱?

우루스는 그녀를 바닥에 패대기치는 대신, 허공으로 ‘가볍게’ 던져 주었다. 덕분에 그녀는 풀밭에 기다란 고랑을 만들며 거칠게나마 착지할 수 있었다.

“후우!”

흐트러진 숨을 몰아쉬었다. 그 어떤 간호사도 ‘괜찮으시냐’라는 식으로 물어오지 않았다. 대신 어깨를 나란히 하며 으르렁거리고, 야성을 불태웠다. 그들만의 방식, 그래서 더욱 가슴이 뛰는 방식.

‘너무 좋잖아!’

타학!

그녀는 다시금 땅을 박찼다. 거대한 미노타우로스를 향해 마음껏 돌격했다. 협상 테이블에서 쌓였던 스트레스를 모조리 불태워 버리듯, 자신을 옭아매던 슬럼프의 고리를 짓씹어 끊어내듯.

달리고, 뛰고, 때리고, 튕겨 나갔다. 완전히 연소될 때까지. 모든 힘을 짜낼 때까지. 마침내 땀에 젖은 전신으로 동이 트는 동쪽 하늘을 바라볼 때까지.

그녀는 거의 밤을 지새우며 사냥 놀이에 동참했고, 마침내 확신을 얻었다. 그리고 우루스 앞에 다가가 한쪽 무릎을 꿇었다.

“우루스 경? 내가 그대를…… 잠시나마 스승으로 모실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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