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19화. 왕녀와 미노타우로스 (2)
“라는 과정을 겪은 끝에, 우루스 경을 임시 격투술 스승으로 모시기로 했어요.”
“…….”
“다행히 우루스 경도 제 제안을 흔쾌히 수락했고요.”
“…….”
“덕분에 기분이 상쾌하네요. 후련하기도 하고.”
“…….”
“앞으로의 훈련도 기대가 되고요.”
“…….”
“저기?”
“…….”
“황태자 님?”
“……아, 예.”
“제 말 듣고 계세요?”
“듣고는 있습니다만…….”
라키엘은 뒤통수를 북북 긁었다.
이른 아침이었다. 이제 해가 뜬 지도 얼마 되지 않은 시간이었다. 아침밥? 당연히 먹기도 전이었다. 아니, 심지어 시녀들이 세숫물도 가져오지 않았다!
그런데 이런 시간에 난데없는 왕녀 아델린의 접견 요청이라니. 심지어 땀내 풀풀 나는 흙투성이 셔츠를 걸친 채로 들어와서는 저런 요상한 소리부터 꺼내다니.
황당했다.
“혹시 왕녀께서는, 밤새 사우나라도 하셨습니까?”
“아뇨.”
“혹은, 정신과 상담을 받고 싶어지신 겁니까?”
“역시 아뇨.”
“그럼 왜 이러시는 거죠?”
진짜로 궁금해졌다. 무슨 황태자의 별궁이 조조 영화 상영하는 멀티플렉스도 아니고, 대체 무슨 용건이길래 저런 모습으로 아침 댓바람부터 접견을 요구한 건지가 말이다.
이쪽의 질문을 받은 아델린이 묘한 웃음을 머금었다.
“용건이라면 방금 말씀을 드렸을 텐데요.”
“우루스를 스승으로 모시게 됐다는 농담 말이죠?”
“농담이 아니랍니다.”
“농담이 아니면, 소설?”
“…….”
“스읍. 요즘엔 소설도 그렇게 쓰면 독자들한테 욕 먹을 텐데. 왕녀가 미노타우로스를? 스승으로? 섬겨? 와 개연성 국밥에 말아먹었네, 하고 말이죠.”
“……네?”
“아뇨아뇨, 혼잣말입니다.”
“혼잣말치고는 너무 대놓고 다 들리던데…….”
“어쨌건 농담은 이쯤 하시고, 왕녀님의 진짜 용건이 뭡니까?”
“말씀드렸잖아요. 농담 아니라고.”
“…….”
“진짜라니까요.”
“정말요?”
“몇 번을 말해.”
“……진짜네.”
“그렇다니깐요.”
“후아.”
라키엘은 웃지 않았다. 왕녀 아델린이 그랬다면, 분명 나름의 합당한 이유가 있었을 테니까. 진짜라는 걸 안 이상, 웃는 것은 실례다.
대신 그는 새롭게 떠오르는 의문을 그녀에게 건넸다.
“목적이 있는 겁니까?”
“물론이죠. 그래서 이렇듯 이른 아침부터 실례를 무릅쓰고 황태자께 접견을 요청한 거고요.”
“우루스와 관련해서 저한테 부탁할 일이 생기신 거로군요.”
“네. 눈치가 빨라서 참 좋아.”
“뭘 부탁하려는 겁니까?”
“매일 밤, 별궁 정원을 출입할 수 있을 허가서를 발급해 주세요.”
“네. 월 주차비는 10만 원입니다.”
“……네?”
“아뇨. 농담입니다. 그런데 매일 밤 별궁 정원을 출입하게 해달라면…… 혹시?”
“짐작이 가셨나요?”
“예.”
라키엘은 고개를 끄덕였다.
“사실 어젯밤 수간호사에게 흥미로운 요청을 들어서 말입니다. 매일 밤, 비번인 간호사들이 우루스와 격한 사냥 놀이를 즐기는 것을 허락해달라는 요청이었죠.”
그의 입가에 미소가 배어났다.
어젯밤 수간호사 아니스가 했던 부탁. 그리고 지금, 밤새 격한 훈련이나 전투라도 치르고 온 듯한 아델린의 몰골. 그녀가 우루스를 격투술 스승으로 삼기로 했다는 소식. 거기에 매일 밤 정원을 출입하게 해달라는 요청까지.
이쯤이면 눈치를 못 챌 수가 없겠다.
“왕녀께서는 그들의 사냥 놀이에 동참하며 격투술 특훈을 하겠다는 거로군요. 맞습니까?”
“네. 그러자면 별궁의 주인에게 출입을 허락받아야 할 테니까요.”
“허락을 해드리면, 그다음은요?”
“저는 특훈을 하며 보람을 느끼고, 황태자께서는 뭔가 이득을 얻을 수 있겠지요.”
“공짜 요청은 아니라는 거군요.”
“당연하신 말씀을.”
“그럼 허락을 해드리면, 왕녀께서는 뭘 해주실 겁니까?”
“별궁 한의원에 대한 의료 인력 지원은 어떨까요?”
“……네?”
예상 못 한 제안이었다.
아델린의 말이 이어졌다.
“앙부아즈의 의사들을 기간부로 별궁 한의원에 지원해드릴까 해요. 인원은 양측의 조율이 필요할 테고, 기간은 대략 10년 정도가 적당하겠죠?”
“아하.”
뭔지 알겠다.
라키엘은 듣자마자 감을 잡았다.
“저는 앙부아즈의 의사들을 지원받아 별궁 한의원의 일손 부담을 덜고, 귀측은 별궁 한의원을 통해 앙부아즈에는 없는, 종합병원의 경험을 10년씩 쌓은 고급 의료인력을 얻게 되고. 서로 윈윈을 하겠다는 거겠지요?”
“눈치를 채신 건가요?”
“뭐, 대략적으로는요.”
“하하…….”
아델린은 감탄한 눈빛으로 황태자를 보았다. 역시 황태자와는 이야기가 빨라서 좋다. 구구절절 설명하지 않아도 금방금방 이쪽의 뜻을 캐치하니까. 매번, 거의 항상 말이다.
그녀는 피식 웃고 말았다.
“황태자께서 그렇듯 콕 짚어 말씀하시니 다른 설명도 필요가 없겠군요. 맞아요. 최근 당숙의 병문안을 위해 별궁 한의원을 드나들며 느꼈어요. 전보다 환자가 많아졌고, 간호사들이 분주해졌다고 말이죠. 아마 의사도 비슷할 테고요.”
“맞습니다. 요즘 일손이 좀 달리고 있었습니다.”
“그럼 제 제안, 어떻게 생각하시죠?”
“좋습니다.”
라키엘은 흔쾌히 고개를 끄덕였다. 이건 서로에게 도움이 되는 일이니, 안 받을 이유가 없는 조건이다. 게다가 왕녀의 별궁 출입을 허락해주는 게 어려운 일도 아니기도 하고.
“별궁 근위대에 알려두겠습니다. 당분간 왕녀의 정원 출입, 프리패스라고 말입니다.”
“고마워요, 황태자시여.”
“별말씀을. 그럼 임시 계약서부터 쓸까요.”
“물론이죠.”
역시나 험난한 세상사, 말로만 하는 약속은 효력이 없다. 무조건 계약서를 써야 한다. 싸인에 도장에 지장까지 콱콱 찍어둬야 최소한의 신뢰를 가질 수 있다. 적어도 일이 어그러졌을 때에 내가 따질 수는 있겠다는, 딱 그 정도의 신뢰감.
라키엘과 아델린.
둘은 같은 생각으로 펜을 쥐었다.
그날 밤부터, 아델린의 미노타우로스식 특훈이 시작되었다.
♣
며칠이 지났다.
“그래서, 요즘 특근대원들이 매일 밤마다 정원으로 ‘출근’을 한다고?”
“예, 그렇습니다. 전하.”
“데미안, 너는?”
“저는 딱히…….”
분주했던 별궁 한의원의 하루 일과가 끝나는 시간, 오후 6시. 황태자의 질문을 받은 데미안은 이제 슬슬 물들기 시작한 서쪽 하늘을 흘끗 쳐다보았다. 그리고 어깨를 으쓱였다.
“왕녀의 훈련을 관전하는 일이 제게는 큰 도움이 되지 않으니까요. 또한, 무엇보다도-”
“무엇보다도?”
“전하께서 유독 저에게만 야간 호위를 전담시키니까 말입니다.”
“전담? 너한테만?”
“예, 전하.”
“언제?”
“매일요.”
“그, 그랬나?”
“예.”
데미안은 확고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는 사실 억울했다. 언제부터였을까, 자신이 황태자의 침실에서 같이 먹고 자며 지내게 된 것이. 기껏 배정받은 자신의 숙소에 좀처럼 가보지도 못하게 된 것이.
“언젠가부터 당연한 듯이 이렇게 됐습니다. 그냥 아예 전하의 곁에 그림자처럼 붙어있게 된 것이 말입니다. 낮이면 다른 특근대원들과 함께 전하의 곁을 지켜드리고. 밤이면 저 혼자 전하의 곁을 지켜드리고. 덕분에 제 숙소에 던져둔 옷가지며 개인 물품들에 곰팡이가 생길 지경입니다. 아니, 벌써 생겼을지도 모르지요.”
“……어, 음. 그래서 억울해?”
“예.”
“와. 숨도 안 쉬고 고개 끄덕이는 거 보소.”
“전하께 감히 거짓을 고할 수는 없는 노릇 아니겠습니까?”
“한 마디도 안 지시겠다?”
“진실을 알려드리고 있을 뿐입니다.”
“그래서 원하는 건?”
“아시잖습니까.”
“임금 인상?”
“역시. 믿고 있었습니다.”
“올려준다는 말은 아직 안 했는데?”
“하실 거라는 사실도 굳게 믿고 있습니다.”
“이거 혹시 가스라이팅?”
“가스라이팅이 뭡니까?”
“그런 게 있어. 아무튼-”
라키엘은 피식 웃었다. 그리고 잠시 삼천포로 빠졌던 화제의 방향을 원래의 위치로 돌렸다.
“왕녀의 훈련이 그렇게나 흥미진진한가? 특근대원들이 죄다 몰려가서 매일 구경할 만큼?”
“예, 그렇다고 합니다. 찾아가는 이들이 특근대원들만 있는 것도 아니고 말입니다.”
“에이, 설마.”
“짐작하신 게 맞으실 겁니다.”
“근위대원들까지도?”
“프란델 경이 종종 찾아간다는 소식도 있었습니다.”
“…….”
대체 뭘까, 왕녀의 훈련은.
‘우루스랑 무슨 짓을 하는 거야?’
혹시 둘이서 기왓장 깨기? 아니, 바위 깨기 훈련이라도 하는 걸까. 어쩌면 생각보다도 더 굉장한 진기명기의 향연일지도 모르겠다.
이쯤 되니 조금은 궁금해졌다.
‘뭐, 나한테도 약간은 도움이 될지도 모르고.’
문득, 얼마 전 왕녀 아델린과 재회하자마자 치렀던 대련이 떠올랐다. 새삼 쭈뼛 소름이 돋았다. 그 깔끔하고 신속하던 스텝과 체중 이동이란. 얼치기로 방패나 들고서 거북이 전법을 쓰는 이쪽으로선 엄두도 못 낼 움직임이었다.
‘어릴 때부터 최소 20년은 훈련하며 몸에 익은 동작들이겠지. 거의 엘리트 스포츠인처럼. 그런 동작들, 익혀두면 나한테도 도움이 될 테고.’
물론 쉽지는 않을 것이다. 하지만 분명 이득이 된다. 나름 그동안 이곳 세계에서 쌓아둔 짬(?)을 통해 절감할 수 있었다.
‘여긴 한국과 달라. 내가 황태자라고 해서 마냥 안전한 세상이 아니야. 지금까지 겪었던 일들만 돌아봐도 그렇지.’
목숨이 간당간당했던 순간들이 얼마나 많았던가. 오히려 한국에서 이름 없는 시민으로 살아가던 때가 훨씬 안전했다. 그러니 호신을 위한 단련은 필수라는 생각이 들었다. 특히, 왕녀 아델린의 것과 같은 체술이면 더할 나위가 없겠다.
‘어쩌면 이건 기회일지도.’
그런 생각에 곧바로 원장실을 나섰다. 저녁을 대강 후루룩 마시듯이 먹고, 그런 식습관에 대한 가르딘 경의 잔소리를 조금 듣고, 소화를 시킬 겸 정원으로 나섰다.
다행히 아델린과 우루스의 훈련장인 정원 공터는 그리 멀지 않았다. 도착해보니 이미 공터 주변은 인산인해였다.
‘뭐냐, 이건…….’
라키엘은 황당해진 눈길로 공터 주위를 둘러보았다. 모인 이들의 숫자가 최소 100명은 넘어 보였다. 죄다 아는 얼굴들이었다. 특근대원들에 근위대원, 심지어 하인들도 몇몇 보였다.
‘저긴 최고참 특근대원인 세르지오고. 허허. 별궁 근위대 지휘관 프란델 경도 있네.’
다들 이쪽의 등장에 눈치를 보는 기색이었다. 그래서 작게 고개를 끄덕여 주었다. 신경 쓰지 말고 즐기던 구경들이나 하라고.
그 후에도 공터로 모여드는 이들의 숫자가 늘어났다. 그리고 마침내 구경꾼의 규모가 대략 200명에 육박했을 무렵, 오늘의 주인공(?)이 등장했다.
“누우우, 푸륵!”
우렁찬 콧김과 함께 우루스가 모습을 드러냈다. 요즘 사냥 놀이에 심취하며 다시 물이 오른 근육을 불끈거리며, 입으로는 되새김질을 하는 모습이었다.
뒤이어 왕녀 아델린도 공터에 도착했다. 그녀의 옷차림은 츄리닝에 가까운 간편한 훈련복이었다. 두 주먹에는 보호용 스트랩이 둘둘 말려 있었다.
‘정권 단련을 하는 건가?’
라키엘은 거북목을 쭉 빼고서 아델린과 우루스를 쳐다보았다. 어느새 공터 중앙에서 마주한 둘은 대체 어떤 내용의 훈련을 하는 걸까. 대체 뭐길래 연일 구경꾼이 모여들었던 걸까.
……라고 궁금해하는 순간.
“항상 했던 것처럼, 오늘도 똑같이 부탁드립니다. 스승님.”
“누우! 푸륵!”
아델린이 선언하며 자세를 잡았다. 전형적인 정권 지르기 자세였다. 그러자 우루스가 전신의 근육을 불끈거리며 자세를 살짝 낮추었다.
그리고…… 돌진을 시작했다.
“누우우! 쿠훅! 푸르륵!”
투콰콰콰쾈-!
우루스가 당장에라도 짓뭉갤 듯이 아델린에게 돌진했다. 그러나 아델린은 피하지 않았다. 오히려 자세를 견고히 하였다. 두 눈을 번득였다.
‘설마 정권 지르기로 우루스의 돌진을 저지하려는 거야? 고작 인간의 주먹으로?’
말도 안 된다.
미친 짓이다.
라고 생각한 순간.
더 미친 짓이 눈앞에서 벌어졌다.
콰아앙-!
잠깐 품었던 생각과 반대로, 우루스의 주먹이 맹렬히 뻗어 갔다. 소형차에 필적할 크기의 주먹이 아델린의 몸통을 후려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