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약 파는 황태자-321화 (321/468)

321화. 추나 받는 왕녀님 (1)

추나(推拿).

흔히들 교통사고를 당하거나, 허리나 목, 골반 등이 좋지 않을 때, 디스크가 생겼을 때 한의원을 찾아가면 들을 수 있는 단어.

사실 추나요법의 역사는 생각보다 제법 길다.

‘공식적으로 발견된 최초의 역사적 기록은 명나라 시대였지, 아마?’

기억으로는 그랬던 것 같다. 명나라의 공운림(龔雲林)이라는 사람이 지은 ‘소아추나비지(小兒推拿秘旨)’에서 추나라는 말이 쓰였던가. 그 이후로는 청나라 건륭(乾隆) 연간에 오겸(吳謙)이 저술한 ‘의종금감(醫宗金鑑)’의 정골심법요지(正骨心法要旨)에도 나온 바가 있다.

‘뭐, 아무튼…….’

아무도 없는 한밤의 원장실. 일부러 데미안도 복도에 내보낸 상황. 혼자가 된 라키엘은 눈앞에 떠올라 있는 메시지를 쳐다보았다.

<개방 가능한 스킬 목록>

[1. 뜸]

[2. 약재 감별]

[3. 약술 주조]

[4. 추나요법]

[목록 중에서 개방을 원하는 스킬을 선택하세요.]

“…….”

생각해 보면 그동안 스킬을 은근 많이 개방했다. 처음 개방했던 진맥도 그렇고, 침술이나 부항, 탕약 조제, 진료비 청구, 약재 감별까지. 덕분에 그동안 맞이했던 수많은 환자들을 효율적으로 진료할 수 있었다.

이번에도 그러하리라.

아니, 꼭 그래야 한다.

‘이대로면 왕녀의 어깨가 완전히 망가질 거니까.’

문득, 아까 살펴본 왕녀 아델린의 어깨 상태가 떠올랐다. 이미 제법 심각한 상황이었다. 딱 봐도 탈구를 한두 번 겪은 게 아니었다. 특히, 어깨 관절의 앞쪽 아래를 감싸고 있는 링 형태의 섬유조직인 전하방 관절와순의 손상이 제법 보였다.

아니, 사실은 제법이라는 말은 너무 낙관적인 건지도 모른다. 이미 파열의 전조가 드러나며 어깨 관절이 덜렁거리고 있으니까.

‘저거, 그대로 놔뒀다가 관절와순이 완전히 파열되면? 그때부터는 일상생활에까지 지장이 생기겠지. 상완골 관절 아래를 받치는 와순이 무너지는 상황이니까. 극단적으로 말하자면, 잘못 움직이는 순간 중력 때문에 관절이 스르륵 빠져 버리기도 하거든.’

그렇게 되면 거의 정상으로 돌아가기 어렵다고 보면 된다. 평생 장애를 안게 되는 셈이다. 평생 격투술을 익힌 왕녀에게 그런 상황은 사형선고나 마찬가지겠지.

그건 안 좋다.

특히나 왕녀가 앙부아즈 내에서 친 마젠타노 제국파의 대표적 인물인 점을 생각하면 더더욱 그렇다. 가능하면 그녀가 건강하고 멀쩡한 상태로 앙부아즈의 왕위를 이어줘야 이쪽에게도 이득이다.

‘후우. 그럼 해보자.’

라키엘은 심호흡을 했다.

그리고 선택했다.

‘내 선택은 4번, 추나요법.’

[목록 4번. 추나요법을 선택하셨습니다.]

[스킬 개방 (4회차) 비용 : 14,000 HP]

[14,000 HP가 소모되었습니다.]

[현재 보유 중인 HP : 7,700]

“…….”

아이고 그동안 야물딱지게 모아둔 내 HP.

눈앞에서 쑴펑 깎여나가는 HP를 보자니 절로 비분강개(?)의 심정이 솟구쳤다. 하지만 어쩔 수 없다. 지금은 깎여나간 HP보다 더 중요한 게 있었다.

‘자, 성능을 보자.’

라키엘은 스킬 개방 결과가 떠오르기를 기다렸다.

딩동!

[당신은 한국에서부터 추나요법의 지식과 기술을 보유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추나요법은 시술자의 체력과 근력을 요구하는 기술이기에, 당신이 얻은 라키엘 아드리아 마젠타노의 허약한 신체로 구현하기에는 뚜렷한 한계가 있었습니다.]

“…….”

아하.

그래서 처음 이곳에 왔던 때에는 개방 가능한 스킬 목록에 추나요법이 없었던 거였구나.

[하지만 이제는 상황이 달라졌습니다.]

[그동안 당신은 꾸준한 원기회복, 자양강장, 활력증진을 통한 체질개선을 이루어냈습니다. 또한, 아스라한 심법과 뱀파이어 로드의 정혈을 통하여 야간의 신체 능력 증대라는 영구적 버프 또한 획득하였습니다.]

[이러한 일련의 변화들이 당신의 추나요법 획득에 커다란 긍정적 영향을 주었습니다.]

[스킬 ‘추나요법 (Lv.1)’이 개방됩니다.]

[스킬명 : 추나요법 Lv. 1]

[환자의 신체에 알맞은 힘을 가하여 관절의 비틀림, 근막의 경직 등을 해소하여 구조적, 기능적 문제를 치료합니다. 본 스킬은 환자의 상태에 맞춤형으로 제공되는 다양한 종류의 추나 코스를 지원합니다.]

‘허?’

라키엘의 눈이 동그래졌다.

환자의 상태에 맞춤형으로?

‘이건 좀 뜻밖인데?’

그저 추나요법의 효과를 조금 향상시키는 정도를 기대했다. 그걸 통해 왕녀의 틀어진 골반과 신체의 밸런스를 맞추어서 어깨 탈구의 근본적인 원인을 방지해 주려 했다.

그런데 맞춤형 코스가 제공된다고?

그의 눈동자가 이어지는 메시지를 재빠르게 훑었다.

[추나 코스 안내]

[1. 기본 모드 - 추나요법에 소모되는 힘이 20% 절약됩니다.]

[2. 릴렉스 모드 - 부드러운 이완을 통하여 꿀잠을 유도합니다.]

[3. 우두둑! 모드 - 우두둑! 시원한 소리가 나는 ‘고속저진폭기법(HVLA : High Velocity Low Amplitude)을 발동하여 상쾌한 감각을 선사하며, 신체 교정 효과를 30% 향상시킵니다.]

[4. 스페셜 콜라보레이션 모드 - 아스라한 심법과 뱀파이어 로드 정혈의 특성을 추나요법에 결합합니다. 아스라한 심법의 마나 발출 기능과, 뱀파이어 특유의 흡수 능력이 밀물과 썰물처럼 번갈아 환자의 신체에 적절한 마나적 자극을 가합니다. 이를 통하여 환자의 자가치유력을 극대화합니다. 이는 특히 손상된 연골 부위의 보존적 치료와 회복에 커다란 도움을 줄 것입니다. (주의) 이 모드는 야간에만 사용이 가능하며, 모드 사용 후에는 시전자의 체력이 완전히 고갈될 것입니다.]

“어…….”

라키엘의 입이 쩍 벌어졌다.

미쳤다.

이건 진짜.

‘……대박.’

그는 14,000 HP를 쏟아부은 보람(?)을 느끼며 추나 코스 안내를 거듭 살펴보았다. 특히 마지막 코스인 ‘스페셜 콜라보레이션 모드’의 내용을 볼수록 미쳤다는 생각, 아니, 확신이 들었다.

‘추나요법을 해주면…… 마나가 밀물과 썰물처럼 환자의 몸을 드나들면서 자가치유력을 올려준다고? 덕분에 손상된 연골 부위의 회복이 촉진된다고? 정말?’

말이 안 된다.

원래는 그렇다.

연골이라는 건 쉽게 회복이 되지 않는 부위이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연골 수술은 정말 필요한 경우가 아니면 마지막까지 미루는 경우가 많으니까. 괜히 잘못 수술을 했다가 오히려 평생 통증과 불편함을 달고 살게 될 수도 있거든.’

실제로 그러했다.

연골 부위의 수술은 신중하게 결정해야 한다.

디스크나 손목의 삼각섬유연골 등의 수술이 특히 그렇다. 한국에서 알고 지내던 지인 중에도 비슷한 사례가 있었다. 지인의 친구였던 웹소설 작가 백경 씨였던가. 그분이 손목 삼각섬유연골을 다쳐서 수술을 고민하다가 포기했다던 이야기가 얼핏 떠올랐다.

‘제법 오래 고생을 하면서도 수술 대신 보존적 치료를 했다고 했지. 덕분에 별다른 후유증 없이 잘 회복이 됐고.’

물론, 반대로 수술이 권장되는 경우도 있다. 대표적으로는…… 왕녀가 겪는 습관성 어깨 탈구가 그렇다.

‘그래서 고민이었는데.’

이쪽이 보존적 치료를 해줄 수는 있다. 하지만 어깨 관절 수술은? 못 한다. 그건 가르딘 경이라도 불가능하다. 현대적 장비의 도움이 없는 상태니까.

그래서 내심 수술은 포기하고 있었다. 최대한 보존적 치료로 어깨의 회복을 도우면서 추나요법을 써주려 했다. 그렇게 틀어진 신체의 균형을 바로잡아서 탈구의 근본적 원인을 고쳐주려 했다.

그 정도면 될 거라고. 격렬한 격투까지는 무리겠지만, 일상생활 정도는 소화할 수 있게 될 거라고. 아쉽지만 그게 왕녀가 기대할 수 있을 최대의 치료 성과일 거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그런데…….

‘이러면 이야기가 달라지는데?’

어쩌면 수술 없이도 완치가 가능할 수 있겠다. 일상생활은 당연하고, 예전처럼 격렬한 격투나 훈련까지 소화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그럼 당장 확인부터.’

미룰 때가 아니다. 게다가 스페셜 콜라보레이션 모드라는 거, 야간에만 쓸 수 있다고 하니까 더더욱 미루어서는 안 되겠다.

라키엘은 원장실 밖의 데미안을 불렀다.

“부르셨습니까, 전하.”

“어. 너도 불렀고, 왕녀도 부를 거고.”

“……예?”

“야간 담당 간호사에게 전달해줘. 앙부아즈의 왕녀님을 지금 당장, 원장실로 데려와 달라고.”

“이런 한밤중에 말입니까?”

“응. 이런 한밤중이니까.”

“자고 있을 텐데요?”

“깨우면 되지.”

뭐가 문제?

라는 뻔뻔한 눈빛을 돌려주었다.

덕분에 데미안은 생각했다.

아, 또 우리 황태자가 뭔가 이상한(?)데 결과적으로는 좋은 일이 되는 짓을 하려는 거구나, 라고.

“……알겠습니다.”

이미 이런 식의 기행은 여러 번이었다. 그는 황태자의 명을 간호사에게 전달했고, 10분 후에 졸음에 겨운 눈으로 원장실에 입장하는 왕녀의 모습을 볼 수 있었다.

“……흐아암, 이 밤중에 무슨 일이죠? 안 그래도 어깨 때문에 뜬눈으로 있다가 겨우 잠들던 참이었는데.”

“왕녀님의 어깨 때문에 불렀습니다.”

라키엘이 싱긋 웃었다.

왕녀가 반문했다.

“어깨 때문에요? 설마 이 시간에 치료를?”

“네. 이 시간에만 가능한 치료법이 있어서요. 일단 누워보시죠.”

“……네에?”

아델린은 고개를 갸웃거렸다.

“아까 제가 말했지요? 추나요법.”

“아, 네.”

“이제부터 그걸 매일 밤마다 할 겁니다. 자, 이쪽으로.”

“…….”

너무나 자연스러운 안내 때문이었다. 그녀는 얼결에 라키엘이 가리키는 진료용 침상에 누웠다. 그러고서야 의문을 떠올렸다.

‘왜 밤에만 이걸 해야 하는 걸까?’

이상했다.

남들이 보면 안 되는 거라서? 혹은, 뭔가 괴상한 이유가 더 있는 걸까? 그도 아니라면…….

‘설마.’

그녀의 가슴이 저도 모르게 콩, 하고 살짝 뛰었다. 황태자의 손길이 뻗어왔다.

“긴장 푸시고. 안 아프니까 힘 빼세요, 왕녀님.”

머리와 목덜미에 살짝 닿아오는 황태자의 손길. 격투로 단련된 자신의 손과 다르게 부드러웠다. 가느다란 손가락의 감촉은 또 얼마나 나긋한지. 그리고 목덜미를 가볍게 어루만지는 감각은 또 얼마나 간지러운지.

‘이거, 치료가 맞을까?’

의문이 들었다.

이상한 기분도 들었다.

이런 느낌은 처음이었다.

그때였다.

“그럼, 시작하겠습니다?”

귓가에 닿아 오는 황태자의 의미심장한 목소리. 저도 모르게 가슴속 기대감이 살포시 부풀었다. 그 순간, 머리와 목덜미를 잡은 황태자의 손이 재빠르게 움직였다. 그리고 복날 장닭 모가지 비틀듯이 사정없이 돌려 버렸다.

와드득!

“……!”

왕년의 액션스타 스티븐 시걸도 기립박수를 칠 기똥찬 파괴적 소리가 그녀의 3번 경추에서 상큼하게 울려 퍼졌다.

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