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약 파는 황태자-323화 (323/468)

323화. 추나 받는 왕녀님 (3)

마젠타노의 황제, 아스테리온 테스타로사 마젠타노. 그는 복잡해진 눈빛으로 보고서를 바라보았다.

[황태자의 호위, 데미안 카이엔과 마계왕의 위험성에 대한 종합 보고서]

“…….”

황제의 눈이 가늘어졌다.

사실은 이미 어젯밤에 받은 보고서였다. 당연히 읽었다. 거듭해서. 수차례나. 아예 외워 버렸을 정도로.

그럼에도 아직 믿기지가 않는다. 그렇기에 다시 샅샅이 읽는다. 부정하고 싶은 심정으로. 아니, 이 경우에는 재난을 막기 위한 선택적 긍정이라 말해야 할까.

황제의 눈길이 보고서를 훑었다.

[개요 : 데미안 카이엔의 내재적 위험성에 대한 보고]

[목적 : 제국 황실과 황태자의 안전 도모]

[내용 : 황태자 라키엘 아드리아 마젠타노(이하 황태자라 칭함)의 특이한 언행이 때때로 감지되었습니다. 황태자는 호위인 데미안 카이엔(이하 데미안이라 칭함)의 건강을 지나칠 정도로 의식하였으며, 데미안의 건강이 위협을 받을 시에 ‘마계왕’이라는 존재가 깨어날 수 있다는 언급을 하였습니다. 본 정보부는 황태자가 언급한 ‘마계왕’이 일종의 두 사람만의 은어라고 판단하였으나, 단지 그것만으로는 황태자의 집착에 가까운 걱정을 해석할 수 없다고도 보았습니다.]

[사례 : 황태자의 다음과 같은 발언을 포착함]

[사례 1. 아마도 마계왕은 지금도 널 죽음의 위기로 몰아넣고 싶어서 안달일 거야. 그런데 외부적으로는 그걸 할 방법이 없으니까, 네 몸에 불치병을 일으킬 거고.]

[사례 2. 다음부터는 조심 좀 해. 기껏 날 구해도 네가 죽으면 세상이 다 끝장이니까.]

[사례 3. 어. 그러니 뭔가 몸이 불편하다, 어디가 좀 이상하다 싶으면 바로 알려줘. 그래야 최대한 일찍 치료를 시작할 수 있으니까.]

[사례 4. 그러다가 너 죽으면, 마계왕이 깨어나는 거 몰라?]

[사례 5. 어휴. 다른 놈들 같았으면 당장 교수형 때리고 단두대에 사뿐하게 디스플레이 해버리는 건데. 그랬다가 마계왕이 깨어날까 봐 그럴 수도 없고. 우리 카이엔 경은 참 운도 좋아.]

[분석 개요 : 상기의 발언들은 크라노스 사태 이후에 추가로 투입된 특수정보부 2호 요원이 장거리 청음 기술로 포착하였습니다. 기존의 3호 요원은 데미안에게 존재가 발각되어 정보 수집에 명확한 한계가 발생하였기에, 데미안의 이목을 흐리기 위한 허수아비로 활용 중입니다.]

[분석 내용 1. 마계왕이라는 단어가 교묘한 비유이거나 둘만의 은어일 경우, 데미안의 건강 및 생존과 직결되는 잠재적 위험 요소가 무엇일지에 대한 추가적인 조사와 판단이 필요할 것으로 사료됩니다.]

[분석 내용 2. 마계왕이라는 단어가 발언 그대로의 뜻인 경우, 특수한 조치 및 적극적 위험 방지책이 필요할 것으로 사료됩니다.]

[첨부 : 본 정보부는 본 보고서의 신뢰성을 51%로 예측함]

[보고자 : 마젠타노 황실 특수정보부 1호]

“…….”

51퍼센트.

‘거의 사실로 간주한다는 뜻이로군.’

황제의 고갯짓이 무거워졌다. 특수정보부의 1호 요원은 자신이 처음 황제로 등극하던 때부터 활동한 자였다. 지금껏 그에게서 수많은 특급 보고서를 받았다. 덕분에 1호 요원의 확률 표기가 어떤 식으로 이루어지는지를 그 누구보다도 잘 아는 황제였다.

49퍼센트는 신뢰하기 어려운 정보.

50퍼센트는 의혹은 있으나, 관망이 필요한 정보.

51퍼센트는…… 사실로 간주하여도 무방한 정보.

‘마계왕이라.’

까마득한 옛날이야기, 혹은 신화에나 나올 이름이다. 한데 그런 존재가 황태자의 호위에게 깃들어 있다니. 호위가 죽으면 깨어나게 될 것이라니. 만약 보고를 올린 이가 특수정보부 1호 요원이 아니었다면, 보고서를 읽자마자 그저 웃어 버렸겠지.

물론 지금은 아니었다.

‘흐음.’

황제는 고민에 잠겼다.

가장 먼저 떠오른 방안은, 데미안을 어딘가에 유폐하거나 추방하면 어떨까 하는 생각이었다. 하지만 그는 곧바로 고개를 저었다.

데미안이 그렇게 고분고분한 자일까? 아니. 그보다도, 유폐된 데미안의 건강이 나빠진다면? 혹은 추방되어 종적을 찾아낼 수 없는 상태에서 건강이 악화된다면?

‘대책이 없어지겠지.’

그는 보고서에 쓰인 황태자의 발언들을 다시금 살펴보았다. 비로소 황태자가 어째서 데미안을 항상 끼고 다녔던 것인지 이해가 되었다. 그리고 어찌하여 정치적인 효용이 없을 별궁 한의원을 자꾸만 발전시키는 것인지도 알 것 같았다.

그 모든 일들이 데미안을 위한 것이었다. 호위의 건강을 챙기기 위함이었다. 그리하여 황실과 세상의 안녕을 도모하려는 큰 뜻이었다.

‘황태자여.’

나의 아들이여.

너는 언제부터, 어디까지를 알고 있기에 홀로 이런 준비를 갖추고 있던 것이었더냐. 정녕, 너는 누구이기에…….

“…….”

황제는 잠시 입술을 깨물었다. 잠시 떠오른 말도 안 되는 생각을 황급히 억눌렀다. 한국. 앙부아즈 장군의 입에서 나왔던 그 발언. 어쩌면 그것과 호위 데미안의 내면에 도사리고 있다는 마계왕이 모종의 연관을 지닌 것일까.

아직은 알 수 없다.

그러나 확실한 것은 있다.

“…….”

황제의 손이 펜을 집었다. 이내 그의 손길을 따라, 특수정보부에 하달하는 은밀한 명령서가 작성되기 시작하였다.

[황태자의 호위, 데미안 카이엔에 대한 보호 등급을 황태자와 동등한 최상위로 상향할 것.]

일단은 지켜야 한다.

황태자도.

그의 호위도.

짐의 제국 또한.

일단은 지켜야 한다.

무엇보다도 내 건강부터.

그런데 오늘도 그게 생각보단 쉽지가 않을 것 같다.

“후우, 시작하실까요.”

어김없이 찾아온 한밤의 진료실.

라키엘은 비장한 어투로 말했다.

아델린이 어깨를 으쓱였다.

“그런데 황태자님? 제가 궁금한 게 있는데…….”

“네. 뭐죠?”

“황태자께서 해주시는 이 추나요법 시술 말이죠. 이거, 꼭 밤에만 해야 하는 건가요?”

“예.”

라키엘은 숨도 안 쉬고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야 제가 편합니다.”

사실이었다.

추나요법은 힘들다. 순수한 기교와 근력으로 환자의 몸을 조율해 주어야 한다. 게다가 자칫 실수라도 하면 환자가 다칠 수도 있다. 그렇기에 끝까지 집중력을 유지해야 하니, 그것 또한 만만치가 않은 일이었다.

그러니 밤이 편했다. 모든 신체 능력을 3배로 뻥튀기시켜주는 뱀파이어 로드의 정혈 버프를 받을 수 있기 때문이었다.

게다가…….

‘왕녀한테 해주는 추나 시술은 연골 부위의 회복이 최우선이니까.’

그건 오직 추나요법 스킬의 스페셜 모드만이 제공하는 능력이다. 그런데 스페셜 모드는 오직 밤에만 사용할 수 있다.

하지만 라키엘은 그걸 곧이곧대로 말해주진 않았다. 말해봤자 안 믿어줄 거니까. 오히려 이상한 놈 보는 시선만 잔뜩 받을 테니까. 그러니 입술 촵촵 적시고. 구라 한 스푼, 발사.

“저도 편하고, 왕녀님의 회복도 더욱 촉진될 겁니다.”

“그, 그런가요?”

“네. 확실히.”

“흐음, 유난히 강조하는 모습을 보니까 뭔가 다른 꿍꿍이가 있으신 거 같은데.”

“꿍꿍이라뇨?”

“음, 예를 들자면-”

“들자면?”

“사람들의 시선이 의식되신다거나?”

“그걸 의식했다면 밤마다 왕녀님을 진료실로 부르지는 않았겠지요. 남들이 보기엔 이게 더 수상한 상황일 테니까.”

“아.”

“원래 사람의 몸은 밤에 회복력이 좋아지는 법입니다. 일찍 잠자리에 들어서 푹 자고 일찍 일어날 때 컨디션이 좋아지는 이유이지요.”

“그런가요…….”

“네. 실제로 왕녀님도 추나요법, 거의 자면서 받잖습니까?”

“그렇죠.”

“그러니까요.”

얼굴 가득 티타늄 철판 좍 깔고 밀어붙였다.

“밤에는 이렇게 추나 시술을 받으시고, 낮에는 재활훈련을 하시고. 그게 현재로서는 최고의 방법입니다.”

“역시…… 그런가요.”

“네. 조금 갑갑하시겠지만.”

“갑갑한 건, 네. 사실이긴 해요.”

아델린의 입가에 씁쓸한 미소가 배어났다. 솔직히 갑갑했다. 엄청나게 답답하고 불편했다. 오른팔을 아예 봉인하고 지내는 요즘이었다. 잘 땐 오른쪽으로 돌아눕지도 못했다.

하지만 참아야 했다.

이래야 재활이 된다고. 완치할 수 있다고. 연무장으로 달려가고 싶어질 때마다 평생 격투술과 담 쌓고 싶느냐는 황태자의 단호한 당부를 떠올리며 충동을 억눌렀다.

“그럼 오늘도 잘 부탁드립니다. 제국의 황태자시여.”

왕녀 아델린은 진료대에 누웠다.

추나 시술이 시작되었다.

역시나 시작은 전날처럼 상쾌한(?) 우두둑!으로 장식했다.

꼬두둑!

“……!”

그래.

이 맛이야.

이 느낌 때문에 추나 하는 거지.

왕녀는 내심 환호하며 주먹을 쥐었다. 황태자의 손길이 목을 꺾고 허리를 뒤틀 때마다 너무나 시원했다. 이러다가 중독되는 게 아닌가 걱정이 될 지경이었다.

아, 물론 걱정되는 게 하나 더 있기는 했다.

“또 갑니다. 숨 내쉬세요. 후읍!”

우드득!

“…….”

이쪽의 전신을 풀어주고 꺾어주고 하느라 벌써부터 얼굴이 벌게진 황태자. 설마 오늘도 시술이 끝난 뒤엔 녹초가 되어 버리는 걸까. 아마도 그렇겠지. 매일 그랬으니까. 그만큼 이 추나요법이라는 거, 쓰러질 정도로 힘이 드는 시술인 거겠지.

‘황태자, 당신은…….’

대체 무슨 이유로 내게 이렇게 잘해주는 걸까. 어째서 자꾸 이런 기분이 들게 만드는 걸까. 태어나서 처음 느껴보는, 살며시 생소한, 무언지도 모르는, 설명할 수가 없는, 어쩐지 자꾸만 헷갈리는 이런 기분을.

“그래서, 오늘도 쓰러지시면 제가 곁을 봐드려야 하는 건가요?”

“네? 시술 중엔, 말씀하지, 마세요흡!”

우둑!

“읍, 그래도 궁금하고 불안하잖아요?”

“뭐가, 불안하다는, 말입니까?”

뚜둑!

“흡, 그게, 밤을 함께 보내고 아침이 될 때마다 황태자께서 녹초가 되어 버리니까, 사람들이 그걸 어떻게 볼지가…….”

“치료입니다, 치료.”

우두둑!

라키엘이 힘주어 강조했다.

“자꾸 말씀하시면 안 돼요. 제가 누를 때 호흡 내쉬는 거, 안 잊으셨죠?”

“……네.”

“그럼 다시 갑니다.”

오드득!

“…….”

이 사람, 사심이라곤 전혀 없구나.

그래서 모르겠다.

고마운 건지.

혹은…….

서운한 건지.

왕녀 아델린은 복잡해진 눈길을 던졌다. 라키엘은 아랑곳 않고 시술에만 집중했다. 우두둑 모드에 이어서 릴렉스 모드, 마지막으로는 스페셜 모드까지. 자신의 모든 역량을 깔끔하게 쏟아부었다.

덕분에 동쪽 하늘이 어스름하게 밝아올 무렵, 오늘도 어김없이 라키엘은 녹초가 되어야 했다.

딩동!

[추나요법 코스 4. 스페셜 콜라보레이션 모드를 종료합니다.]

[스페셜 모드를 사용한 대가로 당신의 체력이 고갈됩니다.]

[경고 : 탈진 상태로 진입합니다.]

[조속한 휴식을 권장합니다.]

……후우욱.

전원 코드가 뽑힌 풍선인형이 이런 기분인 걸까. 눈앞에 떠오르는 메시지와 함께 온몸에서 썰물처럼 힘이 빠져나갔다.

그래도 처음이 아니라 익숙했다. 라키엘은 메시지가 뜨자마자 숙련된(?) 동작으로 비틀비틀, 미리 준비해둔 안락의자에 몸을 구겨 넣었다.

‘좋아, 성공이다.’

안락의자에 늘어진 그는 미소를 머금었다. 오늘도 추나 시술은 매우 성공적이었다. 왕녀의 어깨 연골이 약 1% 정도 회복되었다는 메시지도 떴다. 좋다. 이렇게 계속 박차를 가하면 3개월쯤 뒤엔 완치까지 볼 수도 있겠다.

……라고 뿌듯하게 생각하던 무렵이었다.

딩동동!

[당신은 환자 : 아델린 보아르네 앙부아즈의 어깨 탈구를 치료하기 위하여 연일 적극적으로 추나요법 스킬을 사용하였습니다. 또한, 스킬을 사용할 때마다 자신의 체력을 바닥까지 소모하는 스페셜 모드의 활용을 주저하지 않았습니다.]

[이러한 적극적인 진료 자세 덕분에 대량의 스킬 경험치가 누적되었습니다.]

[추나요법의 레벨이 상승합니다.]

[스킬명 : 추나요법 Lv.6]

[큰 폭의 레벨 상승에 따른 특전으로 <추나요법> 스킬에 새로운 옵션, <레고 조립술>이 활성화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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