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약 파는 황태자-324화 (324/468)

324화. 심야 진료 스캔들 (1)

딩동!

[추나요법의 레벨이 상승합니다.]

[스킬명 : 추나요법 Lv. 6]

[큰 폭의 레벨 상승에 따른 특전으로 <추나요법> 스킬에 새로운 옵션, <레고 조립술>이 활성화됩니다.]

‘……어?’

원래 기력이 다 빠져서 다이렉트 혼절로 접어들던 무렵이었다. 한데 난데없는 메시지가 탱탱한 명란처럼 알차게 눈앞을 채웠다.

처음엔 멍하니 보다가.

나중엔 정신이 번쩌덕.

‘어어?’

잠이 확 깼다.

마치 보이지 않는 손이 영혼의 머리끄댕이(?)를 잡아당기는 느낌이었다. 그렇게 수면 위의 세상으로 강제 들어뽕 당하는 기분이랄까.

라키엘은 세차게 고개를 흔들어 졸음을 털어냈다. 그리고 가까스로 맞춘 안구의 초점으로 다음 메시지를 읽어내려 갔다.

[스킬 전용 옵션 ① : 레고 조립술 - 원하는 대상의 관절을 마음껏 조종할 수 있습니다. 탈구와 접골이 보다 능수능란해지며, 추나요법에 들어가는 힘의 소모가 50% 절약됩니다. 이 기술은 궁극의 경지에 달할 시, <척추교체술>로 발전할 수 있습니다. (참고 : 본 스킬은 상시 적용되는 패시브형이므로 따로 발동이 필요하지 않음.)]

뭘까, 이건.

‘원하는 대상의 관절을 마음대로 농락할 수 있다고? 레고 조립하듯이?’

게다가 뭐?

척추교체술?

“…….”

라키엘은 그만 헛웃음을 머금어 버렸다. 오늘 무리를 한 탓일까. 스페셜 모드로 추나요법을 너무 열심히 사용한 까닭일까. 그래서 지나친 피로감 때문에 머리 한쪽이 이상하게 된 건지도 모르겠다.

‘잠이나 자자.’

라키엘은 잠깐 털어냈던 졸음을 다시 받아들였다. 눈꺼풀이 삽시간에 감겼다. 이쪽을 복잡한 눈길로 바라보는 왕녀 아델린의 모습이 얼핏 비쳤다. 덮어줄 모포를 가지고 오는 데미안도 보였다.

잠들기 직전, 라키엘은 잊고 있던 당부를 간신히 꺼냈다.

“……아, 왕녀님? 그, 뭐냐…… 오전에 예정됐다는…… 황제 폐하와 협상 일정이 끝나면…… 점심 드시고…… 여기 꼭 다시 오셔야 합니다…… 재활치료…… 잡아놨…….”

거기까지였다.

힘겹게 말을 이어가던 라키엘의 눈이 감겼다.

완벽한 혼절, 혹은 꿀잠이었다.

꿀잠의 시간은 굵고 짧았다.

“전하? 정말로 괜찮으시겠습니까?”

“응? 뭐가?”

별궁 한의원의 아침 진료 시작을 준비하며 가운을 걸치던 라키엘은 뒤를 돌아보았다. 그곳에 걱정 가득한 표정의 가르딘 경이 있었다.

“카이엔 경에게 들었습니다. 오늘도 어스름이 밝을 무렵에야 녹초가 되어 겨우 잠이 드셨노라고…….”

“어. 그랬지.”

“그럼 겨우 세 시간 남짓 눈을 붙이신 거 아닙니까?”

“응 아니야. 두 시간이야.”

“……괜찮으신 겁니까?”

“아니. 안 괜찮아.”

라키엘은 가운을 마저 걸치며 피식 웃어 버렸다. 사실은 안 괜찮다. 진짜로 피곤하다. 솔직하게 말하자면, 당장 한의원이고 뭐고 다 집어치우고는 온종일 뒹굴거리며 낮잠이나 퍼질러 자고 싶었다.

하지만 그럴 수는 없다.

‘내가 여기 원장이니까.’

한국에 있던 때도 그랬다. 어떤 일이 있어도 진료 시작 시간은 지켰던 자신이었다. 한의원만의 특수성 때문이었다.

‘어르신 환자분들이 많으셨지. 대개 어르신들은 아침에 부지런하셔서, 한의원 진료 시작 시간에 딱 맞춰서 오는 분들이 많으셨거든.’

그렇기에 1분이라도 문을 늦게 열면 안 된다고 생각했다. 고객들과 약속한 시간을 지키는 것. 그것이 의료인이자 자영업자로서 반드시 지켜야 할 첫 번째 원칙이라 여긴 까닭이었다.

‘덕분에 뭐…… 휴가나 명절 연휴 빼고는 거의 쉬지도 못했고.’

간호사 쌤들이야 아프거나 개인 사정이 있으면 쉬시라고 했지만, 자신만은 감기몸살로 고열이 펄펄 나도 진료 시간만은 꼭 지켰다.

그놈의 코로나 때문에 망하던 날까지, 쭈욱.

“…….”

잠깐 떠오른 울적한 생각은 얼른 치우자.

라키엘은 본인의 멘탈 건강을 위해 잡념을 후다닥 털어냈다. 그리고 가르딘 경을 돌아보았다.

“괜찮아. 다 조절하면서 하고 있어. 그러니 너무 걱정하진 말고.”

“하지만 전하, 저는…….”

“알고 있어. 내 하나뿐인 주치의.”

“…….”

“그러니 이 정도쯤 걱정해 준 것만으로도 주치의로서 해야 할 책무를 충분히 이행한 거야, 경은.”

라키엘은 싱긋 웃어 버렸다. 가르딘 경의 마음은 항상 알고 있다. 그래서 미안하고, 한편으로는 또 고맙고.

그 말을 끝으로 바쁜 하루가 시작되었다.

오전에는 일반 환자들을 진료했다. 전쟁 같은 점심 식사를 했다. 역시나 음식을 급하게 드시면 안 된다는 가르딘 경의 잔소리와 함께였다.

점심 후에는 대망(?)의 왕녀 재활치료 시간이 다가왔다. 라키엘은 미리 준비해둔 대형 계획표를 펼치며 왕녀를 맞이했다.

촤락!

“……이게 뭔가요?”

“시기별 재활운동 계획표입니다. 총 12주 동안의.”

“12주……라고요?”

“네.”

라키엘이 계획표를 탁, 짚었다. 그가 짚은 자리에는 <1단계(0~3주) : 최대 보호 기간>이라는 머리말이 쓰여 있었다.

“우선 3주 동안은 재활 운동을 할 때를 제외하고는 무조건 어깨 보조대를 착용하셔야 합니다. 거기, 탁자 위에 놓인 물건 보이시죠? 황실 대장장이에게 주문 제작한 겁니다. 물론 공짜는 아니지만.”

“…….”

“착용법은 차차 배우도록 하고. 아픈 어깨 쪽으로는 돌아누워서 자면 안 되고. 무엇보다도-”

“무엇보다도요?”

“절대로, 재활 외의 목적으로 어깨를 바깥 방향으로 돌리거나, 벌리거나, 펴면 안 됩니다. 무조건, 절대로, 이유 불문하고, 나라가 망하는 일이 있더라도.”

“남의 나라라고 예시를 막 편하게 던지시네요.”

“우리나라 아니니까 괜찮습니다.”

“…….”

“자, 다음은 재활운동 내용입니다? 우선은 지팡이 운동(T-bar, wand exercise)부터. 잘 보면서 따라 해 보세요.”

라키엘은 미리 마련된 적당한 길이의 막대를 들었다. 막대 양쪽 끝을 양손으로 잡고서 어깨뼈의 정렬을 맞추었다.

“이렇게, 손바닥 중심으로 막대의 양쪽 끝을 누르듯 잡습니다. 그리고 이렇게. 어깨뼈 정렬을 유지한 채로 팔꿈치를 90도로 하고서 옆구리에 붙이시고.”

“이렇게요?”

“잘했어요. 그럼 다음은 멀쩡한 왼쪽 팔을 써서 막대를 천천히 밀어줍니다. 아픈 오른쪽을 향해서.”

“……으읏.”

“스톱스톱. 아픈 지점까지 밀면 안 됩니다.”

“그럼 이 정도만요?”

“예. 거기서 정지. 오른 어깨에서 약간 당기는 느낌이 나죠?”

“네. 조금…….”

“그럼 딱 거기까지만. 거기가 지금 상태에서 어깨가 무리 없이 움직일 수 있는 가동범위인 겁니다. 그 지점을 꼭 지켜야 해요.”

“후우…….”

“예, 그렇게요. 팔꿈치 각도 유지하시고. 옆구리에서 벌어지지 않도록 하시고.”

“그럼 이걸 얼마나?”

“한 세트에 10회씩, 3세트로 하루 5회 정도를 해주면 됩니다.”

“저기, 그렇데 황태자님?”

재활운동을 따라 하던 아델린이 미간을 찡그렸다.

“이 동작, 너무 감질나는데…….”

“원래 재활이 그런 겁니다. 운동 같지도 않게 느껴지는 거.”

그때부터였다.

실제로 전방 어깨탈구 환자들의 재활 프로그램을 차근차근 알려주었다. 안쪽 돌림(internal rotation), 굽힘(flexion), 진자운동(pendulum), 도르래(pulley), 뒤쪽 관절 주머니 스트레칭(posterior capsule stretching)까지.

한데 설명을 다 들은 아델린의 표정은 그리 밝지 못했다.

이유는 간단했다.

“이거, 너무 지나치게 간단한 동작들 아닌가요? 이런 건 마치…….”

“네. 지팡이 짚고 다니는 어르신들이 하는 운동 같죠? 혹은 이제 막 걸음마 하는 아기들이 하는 운동이라거나.”

“정확해요.”

“이런 감질나는 식으로 깨작거려서 어느 세월에 치료가 될까 싶죠?”

“네. 솔직히 그래요.”

“그런 생각이 든 거면, 오늘 재활을 잘 수행한 게 맞습니다.”

라키엘이 만족스럽게 웃었다.

“이건 운동이 아니라 말 그대로 ‘치료’니까 말입니다. 12주에 걸쳐서 차근차근, 가동범위를 늘려나가고, 통증을 줄여가고, 궁극적으로는 완전한 정상 상태로 돌아가게 만들 거니까요.”

“그런……가요?”

“예. 혹시 뭐, 아플수록 빡쎄게 단련하는 극기의 정신으로 부상을 털어내고 부활! 이런 말도 안 되는 상상을 하고 있던 건 아니죠?”

“…….”

“헐 맞았네.”

“그럼 안 되나요?”

“당연히 안 됩니다.”

“어떤 경우에도요?”

“무슨 일이 있어도 안 됩니다.”

“황태자님이 위험에 처했는데 옆에 저밖에 없는 상황이라도요?”

“그런 상황은 없을 겁니다.”

“사람 인생 모르는 거잖아요?”

“아뇨. 안 바꿔줘요. 돌아가.”

“……쯧, 사람이 눈치가 없어.”

“예?”

“아뇨. 혼잣말이에요. 그보다는 다음 설명은 더 없나요?”

“그건 3주차가 지났을 때 합시다. 일단 지금은 방금 설명한 운동부터 설렁설렁.”

“설렁설렁…….”

“명심해요. 빡쎄게 하면 망하는 겁니다.”

“저기, 그런데-”

다시금 운동을 시작하려던 참이었다. 왕녀가 뭔가가 떠올랐는지, 고개를 번쩍 들며 물어왔다.

“이거, 재활이 12주나 걸리면 제 협상은요?”

“아, 그거.”

역시나 의문을 표할 줄 알았다.

라키엘은 빙그레 웃으며 말했다.

“이미 폐하께 상황을 알려드렸습니다.”

“……네?”

“오늘 오전에요. 왕녀께서 폐하와 협상을 이어가던 도중에 제 보고를 받으셨을 겁니다. 아마 그때쯤부터 왕녀를 대하시는 폐하의 태도가 조금은 달라지셨을 텐데요?”

“아…….”

아델린은 저도 모르게 탄성을 내뱉었다. 생각해 보니 정말로 그랬다. 오전 협상의 중간 시점에 양측이 20분쯤 휴식을 가졌더랬다. 그런데 휴식이 끝나고 협상을 재개했던 때부터, 황제의 태도가 미묘하게 바뀌었던 것 같다.

“조금 덜 까칠해지셨던…….”

“아마 그러셨을 테지요.”

“뭐라고 보고를 올리셨길래?”

“왕녀께서 제 환자가 되었으니 좀 살살 밟으시라고요.”

“…….”

“요약하자면 대강 그런 내용이긴 한데, 어쨌건 왕녀님의 다친 어깨와 필요한 치료 과정을 상세히 보고했습니다. 그만큼 시간이 필요하다는 의견도 함께 말이지요.”

“그래서, 답을 받으셨나요?”

“예.”

팔랑!

라키엘이 품에서 돌돌 말린 작은 서신을 꺼냈다. 거기에는 ‘황태자가 청한 바를 모두 허하노라’라는 간단하지만 묵직한 의미의 글귀가 쓰여 있었다.

“덕분에 마젠타노와 앙부아즈의 ‘쟈빌론의 난동에 따른 국가간 배상 협상’은 잠정적으로 무기한 연기가 되는 것으로 결론이 났습니다?”

“그럼……?”

“당분간 입원해서 치료에만 전념하시죠.”

“잠깐, 그런데 그런 결정을, 왜 황제께서 협상장에서 제게 알려주지 않은 거죠?”

“저한테 전하라 하시더라고요.”

“네?”

“그분 속을 제가 어떻게 알겠습니까.”

라키엘의 입가에 쓴웃음이 피어났다. 말은 그렇게 했지만, 사실은 황제의 속을 알겠다. 이참에 밀어줄(?) 테니 왕녀와 더 긴밀한 사이가 되라는 뜻인 거다. 어쩌면 앙부아즈와의 정략결혼까지 염두에 둔 것일지도 모르고.

‘하지만 그건 좀.’

그는 내심 고개를 저었다. 왕녀와 자신이? 한 번도 생각해본 적 없었다. 어울린다는 생각을 품어본 적도 딱히 없고. 게다가 의료인인 입장에서 환자와 정분이라니. 곤란하다. 아암, 그렇고말고.

“각설하고, 이제부터는 치료에 집중합시다.”

라키엘은 선을 딱 긋듯이 단호하게 말했다. 그리고 체계적인 치료 프로그램에 박차를 가했다.

오후에는 재활운동을, 저녁에는 만년설과 만년필의 도움을 받아서 냉탕온탕 물리치료를, 밤에는 추나를 진행했다. 어김없이 스페셜 모드를 사용했고, 아침과 함께 녹초가 되었다.

덕분에 며칠 뒤부터 별궁에 오묘한 소문이 돌기 시작했다.

매일 밤 진료실에 들어갔다가 아침이면 초 상큼 개운한 얼굴로 나오는 왕녀와, 덜 마른 행주처럼 늘어져서 실려 나오는 황태자에 대한 소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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