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30화. 강력한 지원군 (2)
드래곤.
신을 가장 닮았다고 일컬어지는 지상 최강의 생명체. 그들의 기원을 아는 이는 없다. 누군가는 신이 세상을 창조하며 새긴 보석이라 말하고, 혹자는 거대한 섭리가 낳은 실수라 일컫기도 한다.
‘그래. 실수 맞지. 이런 개사기 치트키 종족이 세상에 존재하는 게 말이나 돼?’
라키엘은 한숨을 푹 내쉬며 고개를 들었다.
그의 눈앞에 언덕이 있었다. 아니, 언덕 같은 드래곤이 누워 있었다. 가까이서 보니 새삼 참말로 컸다. 자신이 있던 한의원 상가 빌딩보다 더 큰 것 같다. 그런데 이런 덩치가 코까지 골아대며 숨을 내쉬고 있으니, 눈앞의 현실이 비현실처럼 느껴졌다.
하지만 지금은 이런 감상이 중요한 때가 아니다.
“포르티스 님?”
라키엘은 자신의 방문 목적을 되새기며 드래곤의 이름을 불렀다. 그가 이름을 불러 주었을 때, 대장내시경 맹장수술을 받은 드래곤은 비로소 꽃이 되……지는 않고 몸을 뒤척거렸다.
“크롸라아아아…… 퓌유으……!”
쿠쿵!
작게 몸을 들썩거렸을 뿐인데도 지진처럼 흔들리는 지면!
라키엘은 한숨을 푹 내쉬었다.
“포르티스 님? 수술 후의 회복기라서 숙면 중인 건 알겠는데 말입니다. 잠시만 눈을 좀 떠보시죠.”
아까보다 목청을 높였다.
그러나 반응은 없었다.
거대한 등갑룡은 실눈조차 뜨지 않고서 꿈나라 싱크로나이즈 스위밍을 즐기는 데에만 여념이 없었다.
“쯧.”
이러면 곤란한데.
라키엘의 미간에 깊은 골이 파였다.
‘곤란하지. 곤란하고말고.’
그는 문득, 30분 전의 일을 떠올렸다. 그때 들었던 뱀파이어 로드, 힐데르트의 제안 또한.
♣
“하니 말일세. 내가 도움을 못 주는 대신에 이 일에 나보다 훨씬 도움이 될, 나보다 훨씬 전능한 존재를 그대에게 소개해 줄까 하는데.”
“예에? 그런 존재가 있습니까?”
“물론.”
“누구……입니까?”
과연 얼마나 대단한 존재이길래, 무려 뱀파이어 로드씩이나 되는 자가 저런 말을 할까. 놀라웠다. 한편으로는 궁금했다.
이내 로드 힐데르트의 입에서 나온 대답은…….
“용왕, 베르키스.”
“예?”
“처음 들어보는가?”
“아뇨. 처음은 아닙니다.”
기억을 더듬으며 고개를 주억거렸다. 용왕 베르키스. 들어본 적이 있다. 언제였더라. 그래. 충수염에 고통받던 등갑룡 포르티스가 처음 진료를 받으러 왔던 때에. 당시에 잠깐 언급한 적이 있었지.
‘그리고…….’
품속을 뒤적였다.
손에 익은 물건을 꺼냈다.
“제가 가지고 다니는 이 만년필이라는 마법 무구 말입니다. 이게 용왕 베르키스의 여동생이 만든 아티팩트라더군요.”
“아아. 꽃분…… 아니, 플로레스 양 말인가.”
“꽃분이요?”
“그건 아명일 뿐이니 잊게. 아무튼, 그대가 용왕의 존재를 알고 있다니 설명이 쉬워지겠군. 말 그대로 그는 세계의 모든 드래곤을 다스리고 조율하는 자일세. 뭐, 실제로 복잡한 조율까지 직접 하는 건 아니지만.”
“그럼요?”
“그가 존재하는 것만으로도 다른 드래곤들이 함부로 행동하지 못한다고나 할까. 덕분에 최소 천 년 동안은 인간이 드래곤의 습격을 받은 일이 없기도 했고.”
“그건 참 대단한 일이군요. 그런데 로드시여?”
“궁금한 점이 있으면 묻게.”
“예. 방금 로드께서는 데미안의 치료를 위해 용왕 베르키스를 소개해 주겠노라 하셨는데 말입니다. 그래서 염려되는 부분이 있습니다.”
“염려라. 어떤 부분이?”
“그를 찾아갔다가 오히려 죽는 거 아닐까요?”
“어째서?”
“전에 제게 진료를 받으러 왔던 다른 드래곤이 있었습니다. 등갑룡 포르티스라고. 그 드래곤이 그러더군요. 용왕 베르키스에게 치료를 부탁하러 찾아갔다가 죽을 뻔했다나.”
“아, 그거?”
로드 힐데르트가 피식 웃었다.
“추천장 없이 그냥 찾아갔구만. 그래서 죽을 뻔했던 듯한데.”
“……추천장이요?”
“으음.”
로드가 고개를 끄덕였다.
“용왕 베르키스는 매우 강력하면서도 동시에 엄청나게 조용한 존재지. 아주 조용해. 당연한 일이야. 항상 잠만 자니까. 일어나지도, 눈을 뜨지도, 심지어 귀찮아서 손가락 하나도 까딱하지 않고서 언제나 누워만 있으니까. 1년이고 10년이고 말이지.”
“…….”
거, 방구석 백수 아닙니까 그거?
차마 그런 물음을 입에 담지는 못했다. 그 사이, 로드 힐데르트의 설명이 이어졌다.
“그래서일세. 그는 자신을 귀찮게 하는 이를 극도로 싫어해. 당연히 함부로 찾아와 도움을 요청하는 자 또한 싫어하고.”
“그런데 추천장이 있으면 그나마 괜찮아지는 겁니까?”
“그렇지. 이해가 빨라서 좋군.”
“그럼, 로드께서 제게 추천장을 써 주시겠다는 거로군요?”
“아니지. 그건 내가 못 해.”
“……예?”
“대신 그대에게 추천장을 써 줄 존재가 이곳 정원에 있는 걸로 보이는데.”
“설마.”
“눈치챘나?”
“예. 등갑룡 포르티스. 맞습니까?”
“역시. 이래서 그대와의 대화가 편해.”
로드가 만족스럽게 웃었다.
“오직 드래곤이 쓴 추천장만 용왕에게 효력이 있지. 나머지는 쓰레기일세. 그런데 마침 자네는 드래곤을 치료하여 도움을 준 적이 있고, 그 드래곤이 여전히 별궁 정원에서 몸조리를 하는 중이지. 추천장을 받기에 이보다 훌륭한 조건이 또 있겠나?”
……라는 조언을 받은 덕분이었다.
곧바로 정원으로 나왔다. 등갑룡 포르티스가 몸조리를 하는 구역으로 헐레벌떡 건너왔다. 그리하여 지금, 등갑룡에게 추천장을 얻기 위해 목청을 높이는 것이었다.
“포르티스 니임-! 눈 좀 떠보십쇼!”
“……드르렁.”
“야! 포르티스!”
“퓌유으…….”
“불이야!”
“드르렁, 푸르르…….”
“…….”
힘껏 소리 질러 불렀지만 반응이 없다. 여전히 쿨쿨 드르렁 잘만 잔다. 혹시 드래곤은 다 이런 건가? 아니면 용왕을 존경해서 다들 닮아 버린 걸까.
알 수가 없었다.
다만 확실한 것은, 지금 이 잠탱이 등갑룡을 깨우지 못하면 상황이 심각해질 수도 있다는 점이었다.
‘이 거북이 드래곤을 깨워야 추천장을 받고, 용왕 베르키스의 도움을 받고, 데미안의 1형 당뇨를 치료하고, 마계왕의 강림을 저지할 수 있으니까!’
……뭔가 참 거창해지는 것 같기는 한데, 어쨌건.
‘안 되겠어.’
그냥 소리치는 것만으로는 안 되겠다. 때릴까? 하지만 인간의 하찮은 주먹질 발길질로는 아무것도 못 느끼겠지. 진드기가 더듬이로 때린다고 깊은 잠에서 깨어나는 인간이 없듯이.
‘어떡하지?’
잠깐 고민했다.
방법은 어렵지 않게 떠올랐다.
‘그래. 내 친구의 지인 백경 씨. 그분이 쓸개를 떼어내는 수술을 받고서 입원했던 때에 겪었다던 경험담.’
언젠가 친구가 농담처럼 알려주던 이야기가 떠올랐다. 친구의 지인인 소설가 백경 씨는 원래 올빼미과였다고 했다. 매일 밤을 새고 아침엔 늦게 일어나는 게 습관이었다던가.
그런데 입원을 하면서 그게 싹 바뀌었단다. 어떻게? 매일 아침 5시 30분이면 어김없이 단잠을 깨우던 간호사님들 덕분에.
‘곤하게 자고 있는데 난데없이 팔뚝이 뜨끔했다고 했지. 놀라서 깨보니 팔뚝에 이따만 한 주사기가 박혀 있고, 피를 쭉쭉 뽑아가고 있었다고.’
새벽마다 피를 뽑아가거나.
혹은 다른 주사를 놓거나.
어쨌건 그런 식으로 며칠 시달리니 아침잠이 싹 달아났다고 했다. 덕분에 아침형 인간으로 개조(?)까지 완료됐다고 했던가.
‘그걸 써먹어봐야겠네.’
라키엘은 경혈 스캐닝을 켰다. 등갑룡의 거대한 몸체를 모조리 스캔했다. 역시나 보고 또 봐도 엄청나게 튼튼한 몸이었다. 상처를 낼 수가 없어서 셀프 충수염 수술을 할 수 없었다던 고충이 새삼 이해가 되었다.
‘가시로 찌르는 침술은 못 해. 너무 단단하니까. 하지만…… 뜨거운 것도 참을 수 있을까?’
아니.
그건 별개의 감각이다.
확신을 얻은 라키엘은 움직였다. 등갑룡의 오른쪽 앞발로 다가갔다. 앞발 셋째 손가락. 그곳에 인간으로 치면 수궐음심포경(手厥陰心包經)의 중충혈(中衝穴)에 해당하는 기혈이 있었다.
그리고 경혈 스캐닝으로 살펴본 결과, 드래곤의 중충혈도 인간의 것과 거의 같은 역할을 한다는 사실이 보였다.
‘좋네. 잠 깨우기 딱 좋아.’
라키엘은 만년필을 꺼냈다.
그리고 조준했다.
드래곤의 셋째 손가락 끄트머리. 즉, 손톱과 말랑한 살갗 사이. 아니, 정확하게 말하면 가시에 손톱 아래를 푹 찔리면 엄청나게 아파서 엄마 아빠 조상님까지 두루두루 찾게 되는 자리. 심지어 고문에도 쓰이는 바로 그 자리!
중충혈에 만년필을 갖다댔다. 슬쩍 약하게 조절된 마나를 투입했다. 그러자 만년필이 반응을 보였다.
……부글부글! 치이이익!
펜촉에 시뻘건 잉크가 맺혔다. 거의 용암에 필적할 열기가 느껴졌다. 화상을 입을세라 재빨리 만년필을 움직였다. 포르티스의 중충혈에 용암급 잉크를 쿡 찍어 발랐다. 바르자마자 더욱 재빠르게 후다닥 물러났다.
그리고 기다렸다.
하나, 둘, 셋.
마침내.
“……앗뜨흐이얇↗”
등갑룡이 손을 부여잡고 오열하며 깨어났다.
그래. 뜨겁겠지. 따끔하고 정신이 확 들겠지. 원래 중충혈이 졸음을 깨우는 데에는 직빵인 자리니까. 그런데 그 효과라는 거, 사실은 ㅈ나게 아파서 나오는 효능이 아닐까.
“크워어어어억! 후욱! 후우우!”
잘 자다가 봉변(?)을 당한 등갑룡이 다급하게 손가락을 불어댔다. 그제야 따끔함이 조금은 가신 걸까. 혹은 뒤늦은 분노가 치민 걸까.
“누구냐! 감히!”
포르티스가 울분에 찬 포효를 내질렀다.
고막이 터질 뻔했다.
하지만 참았다.
대신 태연하게 대꾸했다.
“접니다, 포르티스 님?”
“……엇?”
“자고로 동의보감에서 이르길, ‘재수중지지단거조갑여구엽함중(在手中指之端去爪甲如韭葉陷中), 수궐음맥지소생위정(手厥陰脉之所生爲井)’이라 하여, 중지의 말단에 위치한 중충혈은 수궐음심포경맥이 생(生)하는 곳인 정혈(井穴)이 된다고 하였습니다. 그만큼 매우 중요한 혈맥이라는 뜻이지요.”
“…….”
“하여 그곳에 적절한 조치를 취하였습니다. 포르티스 님을 위해서 말입니다.”
“날 위해서? 방금 한 짓이?”
“짓이 아니라 뜸입니다.”
“고문……이 아니고?”
“뜸입니다.”
“…….”
“원래는 한 푼 깊이로 시침을 하고 3회 숨을 쉴 동안 꽂아두는 법이 황제내경(黃帝內經)에서 이르는 정석이기는 한데, 포르티스 님의 외피가 워낙 단단해서요. 가시를 도저히 꽂을 수가 없었습니다.”
“…….”
“하여 부득이하게 뜸으로 시침을 대신하였습니다. 혹시, 많이 뜨거우셨는지요?”
“그, 그건…….”
“역시. 그리 뜨겁진 않으셨겠지요. 세상 어떤 드래곤보다도 튼튼한 등갑룡, 포르티스 님이시니까 말입니다.”
“어? 그, 그렇긴 하지.”
“과연! 훌륭하십니다.”
“…….”
뭐지.
인간의 황태자 놈.
뭘 하려는 거지?
포르티스는 의심스러운 눈빛으로 라키엘을 슬며시 굽어보았다.
“저기 말이다. 혹시, 나한테 뭔가 원하는 게 있나? 그래서 날 깨운 건가?”
“옙.”
“뻔뻔하기까지.”
“전 포르티스 님의 주치의이자, 은인이니까요?”
“……그래서, 뭘 원하지?”
“추천장을 좀 써주십시오.”
“추천장?”
“옙.”
라키엘이 숨도 안 쉬고 냉큼 말했다.
“제가 사정이 생겨서 용왕 베르키스 님의 거처를 방문하려 합니다. 그래서 포르티스 님께 추천장을 부탁드리고 싶습니다.”
“결국 목적이 그거였구만…….”
“제가 은인이잖습니까. 허허허.”
“허허허.”
은인만 아니었으면 이 인간을 그냥…… 콱찍.
하지만 포르티스는 성을 내진 않았다. 대신 라키엘의 부탁을 순순히 들어주었다. 그가 거대한 앞발을 들어 올렸다. 허공에 마나로 새겨진 글귀를 썼다. 그리고 라키엘에게 흘려보냈다.
……파아앗.
마나로 새겨진 추천장이 라키엘의 가슴에 스며들었다.
“원하던 추천장이다. 뭐, 그게 있다고 해서 쉽게 만나줄 분은 아니긴 하지만.”
“용왕 베르키스 님이 말입니까?”
“만날 수는 있겠지. 죽지는 않겠지. 한데 그다음이 문제라서 말이야.”
“그다음이 문제라시면……?”
“그건 직접 봐야 알 것이다. 지금 아무리 설명해봐야 소용없어.”
포르티스는 피식 웃었다.
사실이다.
용왕 베르키스는 그런 존재니까.
“그럼 용건이 끝났으면 나는 이만. 다시 숙면에 들까 하는데.”
“예. 그러시지요. 감사했습니다.”
“뭐, 다음부터는 필요한 진료가 아니면 가급적 깨우지는 말아주고.”
“어이쿠, 여부가 있겠습니까.”
라키엘의 얼굴 가득 피어나는 영업용 미소!
마침내 드래곤의 추천장을 얻어냈다. 이로써 용왕 베르키스를 만날 준비가 끝났다.
‘그럼 이젠 서두르자.’
라키엘은 별궁 본관으로 돌아가는 걸음을 빠르게 하였다. 1형 당뇨의 치료는 시간과의 싸움이다. 한시도 헛되게 보낼 수 없다. 그래서 다소 과격한 방법까지 써가며 등갑룡을 깨웠던 것이고.
하니 이제 곧바로 데미안의 병실로 가야지. 그곳에 있을 뱀파이어 로드와 함께 용왕을 만나러 출발해야지. 황제에게 보고? 그건 금방 다녀온 뒤에 하면 될 테고.
“데미안, 출발하자!”
호기롭게 병실 문을 열었다.
그리고 뜻밖의 사람과 마주쳤다.
“황태자는 병상에 몸져누운 유능하고 귀한 호위를 버려두고서, 이 야심한 시각에 어딜 혼자 쏘다니다가 이제야 오는 것이더냐?”
“……예?”
여기, 데미안의 병실.
이곳에 올 일이 제일 없을 거라 생각했던 황제가, 속을 알 수 없는 눈빛을 던져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