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31화. 용왕 베르키스 (1)
“황태자는 병상의 귀한 호위를 버려두고서, 이 야심한 시각에 어딜 혼자 쏘다니다가 이제야 오는 것이더냐?”
“……예?”
여기, 데미안의 병실.
그러니까 별궁 한의원.
이곳에 올 일이 제일 없을 것 같은 사람을 다음 보기 중에서 고르시오, 라는 설문지를 받는다면? 답은 뻔할 것이다. 선택지를 보기도 전에 냅다 ‘황제!’라고 대답할 것 같다.
실제로 그러하니까.
제국의 수많은 사안을 처리하고, 정치적 균형을 유지하며, 국제적 파워 게임을 조율하는 자가 황제니까. 그만큼 황제는 바빴다. 이런 별궁 한의원에 일부러 찾아올 거라는 상상은 들지도 않을 만큼.
‘게다가 심지어, 데미안의 병문안을?’
이건 뭔가 있다.
라키엘은 머릿속에 비용비용 울리는 경고음을 느끼며 서둘러 예를 갖추었다.
“황태자 라키엘 아드리아 마젠타노가 이 땅의 합당한 주인이신 황제 폐하를 뵙사옵니다.”
“마음에도 없는 인사는 되었고.”
“…….”
“말해 보거라, 황태자여. 너는 어찌하여 이런 소식을 자진하여 짐에게 알리지 않았는가.”
“예? 이런 소식이라시면…….”
“제국의 가장 유망한 소드마스터가 중병을 얻어 병상을 전전하고 있다는 안타깝고도 긴급한 소식 말이다.”
“…….”
아뿔싸.
라키엘은 내심 뜨끔했다.
그리고 최근 1형 당뇨병과의 시간 싸움에 몰두하느라, 인슐린 제조를 위한 악전고투를 벌이느라 자신이 놓치고 있던 점을 깨달았다.
‘그래. 데미안이 시성식장에서 공개적으로 엄청난 활약을 했지. 황실이 보유한 두 소드마스터보다도 강력한 실력을 선보였고.’
황제도 분명 그 모습을 보았다.
아마도 그래서일 것이다.
‘황실에서 데미안을 전략 무기, 자원으로 분류하고 있던 거구나.’
문득, 소설 마검황 속 세계관 설정이 떠올랐다. 이곳 세상에서 소드마스터는 매우 귀한 존재다. 어지간한 왕국은 한둘을 보유하는 것이 최대다. 마젠타노 제국? 국경을 지키는 변경백까지 다 합쳐도 여섯 명에 불과하다. 아니, 데미안까지 더하면 일곱.
‘즉, 이곳 세계에서 소드마스터란…….’
현대 세계의 핵무기와 비슷한 지위를 지니고 있다.
만약 두 나라 사이에 전쟁이 났는데, 한쪽에 소드마스터가 없다면? 못 막는다. 소드마스터가 상대국의 지휘부로 난입해서 칼춤을 추는 즉시, 상대국의 국왕이고 지휘관이고 모조리 당금마켓에서 묫자리를 알아봐야 하는 사태가 생긴다.
그렇기에 모든 국가는 소드마스터를 하나라도 더 확보하기 위해 언제나 혈안이 되곤 했다. 여기 마젠타노 제국도 마찬가지이고.
‘그런데 시성식장에서 일반적인 소드마스터 이상의 신위를 선보인 데미안이 중병에 걸려서 골골거린다면, 그건…….’
보유 중인 핵무기에 결함이나 고장이 발생한 것과 같은 상황인 셈이다. 즉, 국가적인 관리와 조치가 필요한 긴급 사안이라는 뜻이다.
거기까지 생각한 라키엘은 새삼스러운 눈으로 황제를 바라보았다.
‘이 양반, 그래서 왔구만.’
그러고 보니 자신은 데미안을 치료하기 위해서만 몰두했지, 황제에게 데미안의 투병 사실을 공식적으로 보고하지는 않았다. 아마도 그래서일 것이다. 황제가 이런 병실까지 친히 병문안을 온 것은. 그리고 이쪽을 꾸짖듯 말하는 것은.
역시나 그런 추측이 들어맞은 것일까. 황제의 눈썹이 까칠함 레벨 3의 각도로 꿈틀거리는 게 보였다.
“말해보라. 황태자여. 너는 어찌하여 이토록 중요한 사안을 짐에게 보고하지 아니하였는가?”
“……선조치 후보고를 생각하고 있었사옵니다.”
“선조치 후보고?”
“예, 폐하.”
라키엘은 사실 그대로를 말했다.
“데미안 카이엔 경은 발병 즉시 치료가 시급한 상태가 되었으며, 따라서 저는 적절한 치료 시기를 놓치지 않기 위한 노력을 기울이던 중이었사옵니다.”
“그 정도로 급하였느냐?”
“예, 폐하. 지금 이렇듯 폐하에게 뒤늦은 보고를 올리는 이 시간조차도 금쪽처럼 느껴질 따름이옵니다.”
“진료를 방해하지 말라는 뜻인가?”
“그리 느껴지시었다면 실로 송구한 일이옵니다.”
“……그래. 어차피 이 황실의 어의들도 카이엔 경을 더 잘 치료할 수는 없겠지.”
“과찬이시옵니다, 폐하.”
“마음에도 없는 소릴.”
황제가 혀를 차며 물었다.“
“하면, 카이엔 경의 상세는 어떠한가.”
“일단 시간은 벌어두었사옵니다.”
“황태자가 최근 황소를 수십 마리나 잡아가며 만들었다는 약물 덕분에?”
“소식을 들으셨사옵니까?”
“당연하지. 덕분에 별궁의 근위대와 특근대, 간호사와 시종 시녀들마저 연일 소고기만 먹다 못해 질려간다는 소식 또한.”
“……아, 예.”
“어쨌건, 그리하여 시간을 벌어두었다는 것은 무슨 뜻이더냐.”
“말 그대로 보다 안성맞춤인 근본적 치료가 필요하다는 뜻이옵니다.”
“방법은 찾았고?”
“다행히 그렇사옵니다.”
“말해줄 수 있겠느냐?”
황제가 물어왔다.
대답 못 할 이유가 없다.
딱히 숨길 이유 또한 없다.
라키엘은 솔직하게 말했다.
“용왕 베르키스를 찾아가 도움을 청할 계획이옵니다.”
“…….”
황제는 흠칫한 걸까.
무표정이라서 알아보기가 어려웠다. 다만, 약간은 당황한 게 확실한 듯했다.
“……크흠, 흠! 용왕 베르키스라. 하면 언제 출발할 생각이더냐?”
“지금 당장 출발할까 하옵니다.”
“호위는 필요하지 않느냐?”
“예?”
“1천 기의 최정예 친위대를 비상소집하여 붙여주면 어떻겠느냐.”
“예에?”
이번에는 이쪽이 흠칫했다.
처음엔 황제가 농담이라도 하는 줄 알았다. 한데 황제의 눈빛을 살펴보니, 농담을 하는 따위의 기색은 1그램도 느껴지지 않았다.
진심인 거다.
라키엘은 황급히 고개를 저었다.
“말씀만은 실로 성은이 망극하오나, 대규모의 친위대는 필요가 없을 듯하옵니다.”
“어찌하여?”
“용왕 베르키스 앞에서는 1천의 친위대와 날파리 한 마리가 똑같은 의미를 지닐 것이기 때문이옵니다.”
그건 사실이다.
1천의 친위대건 날파리 하나건 손짓 한 번에 파사삭, 한 많은 세상의 한 줌 다이옥신이 되어 승천하는 결말은 똑같을 테니까.
“하면, 그분과 함께 움직일 생각이더냐.”
황제가 한쪽으로 눈길을 주었다. 그의 시선이 닿은 곳, 병실 한구석. 그곳에서 내내 조용히 있던 뱀파이어 로드 힐데르트가 어깨를 으쓱였다. 눈치로 봐선 황제와 뱀파이어 로드는 이미 구면인 듯했다.
“그렇사옵니다, 폐하.”
“……그래, 하면 당장 움직이도록 하라.”
“명을 받들겠사옵니다, 폐하.”
혹시나 방해나 태클이라도 받으면 어쩌나 싶었는데 다행이었다. 오히려 빨리 가라고 재촉하는 황제가 고맙기까지 했다.
물론 라키엘은 몰랐다.
자신을 바라보는 황제의 무심한 듯한 눈빛. 그 속에 담긴 희미한 착잡함과 염려를. 황제가 애써 숨기며 삼키는 깊은 한숨을. 까맣게 모르고서 라키엘은 냉큼 움직였다. 데미안을 병상에서 일으켜 부축했다. 로드 힐데르트의 옆에 찰싹 붙었다.
“로드님? 가시죠.”
“그러도록 하지.”
로드 힐데르트의 두 손에서 마력의 물결이 피어났다. 주위의 공간이 일렁거렸다. 두 발이 허공에 뜨는 느낌. 혹은 출렁이는 파도 위의 서핑보드에 탑승한 기분.
……파아아앗, 후욱!
약간의 메슥거림이 몰려왔다. 눈앞이 캄캄해졌다가 번쩍거렸다가. 1초에 수백 번씩 눈꺼풀을 깜빡이는 듯 망막이 유린을 당했다가.
갑자기 모든 것이 정상으로 돌아왔다.
터억!
깔끔한 병실 카펫이 아닌, 흙바닥을 딛고 서게 되었다. 동시에 속이 확 뒤집혔다.
“……오애애액-”
어쩔 수 없는 멀미의 엄습!
라키엘은 헛구역질을 하며 주위를 둘러보았다. 장소가 완전히 바뀌었다. 새하얀 병실은 온데간데없이, 웬 숲 속 풍경만이 가득했다. 그리고 앞쪽에는 거대한 암벽과 동굴이 보였다.
‘공간이동…… 텔레포트 마법을 쓴 건가.’
그럼 눈앞의 암벽과 동굴이 용왕의 거처?
아무래도 그런 것 같았다. 라키엘은 데미안을 부축한 손길을 추켜올리며 힐데르트에게 물었다.
“우리, 도착한 겁니까?”
“아니. 전혀.”
“……예?”
“우린 지금 황도 외곽의 인적 없는 숲에 잠깐 들렀을 뿐일세.”
“어째서요?”
“어째서긴.”
로드 힐데르트가 황당하다는 듯이 대꾸했다.
“그대는 텔레포트 마법을 만능이라 여기는 것인가?”
“네?”
“텔레포트라는 것은 말이야. 이 광대한 우주의 어느 한 지점에 존재하는 그대라는 존재의, 육신과 영혼을 모두 포함한 엔트로피를 빼내서 특정한 공간과 시간의 좌표에 새로이 새겨넣는 일련의 작업을 말하는 것일세. 설마 자네는 그게, 쉬운 일로 보이는가?”
“…….”
“쉽지 않지. 그렇고말고. 만약에 말일세. 그대의 섣부른 생각처럼 수백, 수천 킬로미터를 단숨에 이동하는 텔레포트가 손쉬웠다면, 예전의 내가 전국 방방곡곡의 의사들을 그토록 힘들게 찾아다녔을까?”
“…….”
“그런 텔레포트가 가능한 존재는 용왕 베르키스와 몇몇 드래곤 정도밖에 없겠지. 나는 불가능하네.”
“그럼…….”
설마.
에이 설마.
라키엘은 현실을 부정하고 싶은 심정으로 물었다.
“용왕 베르키스의 거처까지 가려면…… 방금 같은 텔레포트를 몇 번이나 더 해야 합니까?”
“으음, 대략 80에서 90회 정도?”
“…….”
“최선을 다하면 70회 이내로 끊을 수도 있겠군. 대신 최소 며칠은 마나 고갈에 시달려야겠지만.”
“…….”
“표정이 왜 그런가? 가기 싫나?”
“아, 그게…… 아뇨.”
울고 싶다.
귀ㅁ테라도 챙겨왔어야 했나.
라키엘은 체념하며 웃고 말았다. 그리고 데미안을 단단히 붙잡았다.
“가시죠.”
“안 그래도 그럴 참이었네.”
뱀파이어 로드가 마력을 전개하였다.
……후우욱! 오애액-?
텔레포트 마법과 함께 광대한 우주의 무수한 시간과 공간에 헛구역질 퍼레이드가 메아리처럼 새겨졌다.
♣
다행히(?) 텔레포트는 67회로 끝이었다.
“……후우, 후욱!”
“구역질을 끝냈나?”
“아, 아뇨. 오애애액-”
“…….”
“죄송합니다, 이런 건 처음이라서.”
“그러게 말일세. 아파서 병상에 누워 있던 환자도 멀쩡한데, 그 환자를 부축하던 자가 이렇게 멀미에 시달릴 줄은 나도 몰랐으니까.”
“…….”
라키엘은 억울해졌다.
데미안이야 강력함을 타고난 존재이고, 자신은 병약가련(?)의 결정체인 것을 누구한테 따져야 할까. 하지만 지금은 그런 시시콜콜한 것이나 따질 때가 아니었다.
“그런데 말입니다, 힐데르트 님?”
“으음?”
“우리, 용왕 베르키스의 거처에 도착한 것이 맞습니까?”
그는 심각한 의문을 품고서 물었다. 그럴 수밖에 없었다. 이곳은 여전히 외딴 숲이었다. 용왕의 웅장한 거처는커녕, 낡아빠진 오두막 하나도 보이지 않았다.
로드 힐데르트가 그렇게 물을 줄 알았다는 듯이 피식 웃었다.
“정확히 말하자면 거처 ‘근처’에 도착한 것일세.”
“예?”
“용왕의 보금자리인 마룡굴은 텔레포트 금지 구역이거든. 일종의 방해 마법진이 펼쳐져 있어서, 함부로 텔레포트로 진입하려다간 온몸이…….”
“온몸이……?”
“분해되어 마구잡이로 재조립될 것일세.”
“…….”
“혹시 혓바닥이 발가락으로 대체되면 좋겠나?”
“……그건 사양합니다.”
“동감일세. 그러니 조금만 걷지. 입구가 멀지 않은 곳에 있을 걸세.”
“아, 예.”
로드 힐데르트를 따라 숲길을 걸었다. 처음엔 속이 뒤집힌 여파 때문에 몰랐는데, 걷다 보니 숲속 공기가 참으로 청량하게 느껴졌다.
“후우…… 역시 자연이 좋군요.”
“자연이 좋다고?”
“예. 계속 북적거리는 도시에만 있다가 이런 외딴 숲에 오니 가슴속이 맑아지는 기분입니다.”
“흐음, 글쎄? 여기가 그렇게까지 외딴곳은 아닌데?”
“예?”
“엄밀히 말하자면, 여긴 트리벤트 왕국의 왕도에서 마차로 30분 남짓한 곳의 산속일세.”
“예에?”
“저기 아래쪽 오솔길로 내려가면 왕도 트리반까지 운행하는 마차가 하루에 스무 대쯤 다니고 있지.”
“예에에?”
“용왕이라고 해서 무조건 황량하고 외딴곳에 머물 거라는 건 크나큰 착각이고 편견일세. 정기 운행 마차 같은 대중교통이 얼마나 편리한데.”
“…….”
“그래서 역세권이 중요한 걸세. 자네도 기억해두게.”
“…….”
아, 예…….
라키엘은 머릿속이 이상해지는 기분을 만끽하며 계속 걸었다. 다행히 용왕의 거처라는 마룡굴 입구는 그리 멀지 않았다.
‘약간 크기만 한, 평범한 동굴이네.’
그것이 마룡굴 입구를 본 첫인상이었다. 입구 크기는 딱 수도권 외곽순환도로 의정부 방향에 있는 터널 입구쯤? 그러한 크기 외의 별다른 인상은 없었다.
심지어…… 함정도 없었다.
“이거, 그냥 들어가도 되는 겁니까?”
“당연하지.”
이쪽의 물음에 힐데르트가 피식 웃었다.
“용왕일세. 그의 거처에 보안이나 경비 장치가 필요할까?”
“아…….”
생각해보니 일리가 있었다.
용왕은 드래곤 중에서도 최강의 존재. 어쩌면 이 세계의 생명체 중에선 가장 강력한 존재일 것이다. 그렇기에 오히려 경비 따위는 필요가 없는 거겠지. 용왕 본인이 세상에서 제일 강력한 안전 대책, 그 자체일 테니까.
‘역시, 몸이 강하면 머리가 고생을 안 하는구나.’
압도적인 힘이 있으면 구태여 머리 굴려가며 함정이니 뭐니 만들지 않아도 된다. 새삼스러운 진리(?)를 깨달으며 라키엘은 마룡굴로 입장했다.
마룡굴 내부의 구조도 심플하기 그지없었다. 꼬불꼬불 갈림길? 없었다. 그냥 쭉 뻗은 1자 통로가 길게 이어져 있을 뿐.
통로의 끝에 거대한 공간이 펼쳐졌다. 야구장이나 축구장 10개 정도를 합친 광활한 규모의 공동. 그곳의 중앙에 덩그러니 놓인 소파.
소파에 누워 있는, 아니, 늘어진 존재가 보였다.
그건 마치…….
‘……방구석 백수?’
이 광활한 우주 한구석에서 아무 존재가치도 없이 나풀거리는 비닐봉다리. 그것이 용왕 베르키스와 조우하며 라키엘이 받은, 강렬한(?) 첫인상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