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약 파는 황태자-332화 (331/468)

332화. 용왕 베르키스 (2)

방구석 백수.

그런데 돈이 많은 백수.

우리 모두의 가슴속 깊이 산삼 뿌리처럼 야물딱지게 틀어박힌 야망, 혹은 워너비 드림.

그건 라키엘 또한 마찬가지였다. 한국에서 열심히 살았다. 나름 한의원을 차리기도 했다. 나쁘지 않은 삶이었다. 그럼에도 언제나 부러웠다. 누가? 건물주 아저씨가.

‘그 아저씨 인생이 진짜 꿀 빠는 삶이었지.’

한의원을 개원하고 얼마 지나지 않은 때였던가. 건물주 아저씨와 우연히 엘리베이터를 함께 탔던 날이 있었다. 그날 건물주 아저씨의 하루 일과를 살짝 들었다.

아침 9시 기상.

10시쯤까지 대강 씻거나 아침 먹고.

11시에 스크린 골프장으로 고고.

1시에 점심 먹고 상가 빌딩 한 바퀴 둘러봄. 그런데 실제로 건물 관리는 전문 업체에 맡겨둬서 본인이 하는 일은 없음. 심지어 업체 급여 지급이나 법인 세금 정산 등도 전부 세무사한테 맡김.

거기까지가 끝이었다.

오후엔 누구 만날 약속이 있거나 골프 칠 일이 있으면 거기로 가고, 없으면 뚜껑 열리는 뽀르슈 999.mk2 스포츠카를 타고서 드라이브를 하거나 집에서 영화를 본다고 했던가.

“…….”

개부럽다.

지금 생각해도 침 고인다.

그런데 당장, 눈앞에 널브러져(?) 있는 용왕 베르키스도…… 비슷해 보였다.

‘비슷해. 확실히 비슷해. 아니, 저건 건물주 아저씨의 아득한 상위호환인가.’

아무래도 그런 것 같다. 마룡굴의 광활한 공동 중앙에 덩그러니 놓인 소파. 그곳에 성의 없게 던져둔 수건처럼 용왕 베르키스가 나뒹굴고 있었다.

물론 겉으로만 보면 그냥 평범한 인간 남성처럼 보였다. 청은색 머리칼 아래 초점 없이 멍 때리는 눈동자만 보면 영락없는 방구석 백수였다.

하지만 그와 조우한 순간, 뱀파이어 로드가 빛의 속도로 인사를 올렸다.

“오랜만에 뵙습니다, 용왕이시여.”

“…….”

각이 딱 잡힌 인사.

그런데 용왕은 아무런 대꾸도 없었다. 눈동자는커녕 속눈썹 하나도, 볼따구의 모공 하나 까딱하지도 않았다. 그런데 어쩐 일인지, 뱀파이어 로드는 용왕의 노골적인 무시에도 아무렇지 않아 했다.

아니, 오히려…….

“축하하네. 용왕께서 그대의 마룡굴 입장을 허락하셨네.”

“예?”

“인사를 올렸는데도 죽이지 않았으니까.”

“예에……?”

이건 또 무슨 소리일까.

하지만 뭔가를 물어볼 시간은 없었다. 뱀파이어 로드가 묘하게 다급한 투로 재빠른 당부를 우다다다 쏟아냈기 때문이었다.

“이제부터 잘 듣게. 그대는 마룡굴 입장에 성공을 했네. 손님으로 인정을 받았다는 뜻이지. 그러니 이제부터 이곳 마룡굴의 식당이건 숙박 시설이건 모든 것들을 그대의 집처럼 원하는 대로 이용할 수 있을 걸세. 말 그대로 손님이니까. 아, 그리고 등갑룡에게 받아온 추천장은 딱히 보여줄 필요가 없을 걸세. 용왕이시라면 이미 감지하셨을 터이니. 혹시 더 궁금한 것이 있나? 없다고? 알겠네. 그럼 난 이만. 아, 그리고-”

“뎃……?”

“이번에 그대가 날 소환한 일 말일세. 내가 딱히 직접적인 도움을 주지는 못하였으니, 내 도움을 받을 찬스를 소모하지 않은 것으로 치도록 하세. 즉, 날 소환할 펜던트를 다시 한 번 사용할 수 있을 거란 뜻일세. 고맙지? 나도 그렇게 생각하네. 그럼 진짜로 이만. 다음에 보세.”

“어, 그, 저…….”

퍼엉!

뭔가 말을 붙여보기도 전이었다.

자기 할 말만 잽싸게 마친 로드 힐데르트가 박쥐로 변신했다. 그리고 순식간에 마룡굴 출구를 향해 날아가 버렸다.

혹은, 도주라고 해야 할까.

‘뭐지.’

분명 뱀파이어 로드, 방금 엄청 불안해하는 것 같았다. 그것도 딱, 용왕 베르키스와 조우하던 때부터 정확하게.

혹시 용왕한테 찔리는 거라도 있나. 아니, 그것보다는 뭐랄까. 언젠가 소개팅에서 내 얼굴 보더니 빛의 속도로 사라지던 어느 여자분과 비슷한 느낌의 다급한 스피드인데.

“…….”

우울해지는 비유는 괜히 하지 말자.

라키엘은 살짝 치밀어오르는 울적한 기억과 지금 상황의 당혹감을 탈탈 털어냈다. 그리고 여전히 소파에 널브러져 있는 용왕 베르키스를 바라보았다.

뱀파이어 로드가 도주한 건 조금 당황스럽지만, 일단 인사부터.

“처음 뵙겠습니다, 위대한 용왕이시여. 저는 인간 라키엘 아드리아 마젠타노라고 합니다.”

정중히 고개를 숙였다. 나름 거슬리지 않을 무난한 멘트로 용왕의 고막을 콕콕 두드렸다. 그리고 돌아올 용왕의 화답을 기다렸다.

“…….”

기다렸다.

“…….”

기다렸다.

“…….”

기다리는데.

“…….”

어째서 아무 반응이 없지?

“…….”

고개를 숙인 채로 눈길만 힐끗.

용왕을 살펴보았다.

그런데 그대로였다.

‘씁. 아까랑 변한 게 없는데?’

용왕은 여전히 덜 마른 수건처럼 소파에 널브러진 자세 그대로였다. 단순히 안 움직인 정도가 아니었다. 눈꺼풀의 열린 정도와 초점 없는 시선도, 아무렇게나 늘어뜨린 팔다리와 발가락의 각도마저도 아까와 똑같았다.

인사를 받기 전과 받은 후.

두 모습으로 틀린 그림 찾기를 하면 달라진 곳이 아예 없을 것 같았다.

‘뭐지? 왜 아무 반응이 없지? 혹시 내가 뭘 잘못했나?’

슬며시 걱정이 고개를 치밀기 시작했다. 아무래도 인간과 다른 드래곤이니까. 그중에서도 최강의 존재인 용왕이니까. 뭔가 용왕에게만 특별하게 올리는 예법이나 인사가 따로 있는 건가 싶었다.

하지만 라키엘은 이내 고개를 저었다.

‘아니. 그건 아니야.’

특별한 예법이나 멘트가 있는 거라면, 뱀파이어 로드가 알려줬을 것이다. 아니, 본인부터 그걸 사용하며 인사를 올렸겠지.

하지만 아까 뱀파이어 로드는 그러지 않았다. 떠나면서 인사법에 대한 당부를 해주지도 않았다. 그러니 설마 당부를 까먹은 것도 아닐 테고.

‘쓰읍. 진짜로 뭐지?’

라키엘은 여전히 고개를 숙인 채로 용왕의 눈치를 살폈다. 그렇게 3분쯤? 침묵 속에서 눈알만 데굴데굴 굴리며 기다렸을까.

안 되겠다 싶어서 다시 인사를 올렸다.

“미천한 인간이 위대하신 존재를 영접하여 실로 영광입니다, 용왕이시여!”

괄약근에 힘 딱 주고서 묵직한 바리톤 음성을 내질렀다. 그러나 용왕은 여전히 아무런 반응이 없었다.

“…….”

설마 죽은 건 아니겠지.

혹시나 싶었다.

슬며시 일어났다.

용왕에게 다가갔다.

경혈 스캐닝? 써볼까 싶었지만 참았다. 아무래도 마나를 탐지하는 기술이기에, 마나의 최고 전문가인 용왕이라면 자신이 스캐닝을 받는다는 사실을 감지할 우려가 있어서였다.

‘초면부터 허락 없이 탐지하고 그러다가 들키면 좀, 그렇지.’

최악의 경우엔 용왕의 분노를 살 수도 있다. 그러니 다짜고짜 스캐닝은 금지. 대신 조금 가까이에서 살펴볼까.

‘조심조심.’

행여나 용왕의 심기를 거스를까. 혹시나 용왕에게 미운털이 박힐까. 한밤중에 엄마 몰래 냉장고 속 메추리알 장조림 타파통으로 진격하듯, 1초에 1센티씩 살금살금 움직였다. 그리고 3미터 정도 거리까지 다가갔다.

그곳에서 안구에 힘을 빡 주었다.

용왕의 콧구멍을 향해 모든 시력을 집중했다. 그러자 보였다. 용왕 베르키스의 콧구멍 안쪽에 난 솜털. 그게 호흡에 따라 아주 미세하게 살랑살랑 움직이고 있었다.

‘쓰읍. 죽은 건 아닌데.’

확인만 마친 그는 감히 용왕을 건드리지는 못하고서 재빠르게 물러났다. 머릿속이 한결 복잡해졌다.

‘뭐지. 왜 아무런 반응이 없는 거지?’

혹시 무시하는 건가. 아니면 일종의 시험인 걸까. 아니, 그러고 보니 문득 떠올랐다. 예전에 등갑룡에게 들은 적이 있었다. 뱀파이어 로드도 그랬지. 용왕 베르키스는 낮잠을 너무나 사랑한다고.

“…….”

설마 진짜로 방구석 백수 모드라서, 이쪽을 본체만체하는 거?

그런 생각이 들던 무렵이었다.

“……으읍.”

데미안에게서 심상치 않은 소리가 들렸다. 돌아보니 녀석의 안색이 좋지 않았다. 덜컥, 심장이 내려앉았다.

‘혈당 트러블?’

아무래도 그런 것 같았다. 얼른 진맥부터 했다. 역시나. 별궁 한의원에서 출발하여 이곳까지 오는 그 사이에 혈당이 확 튀어 올라 있었다.

“따끔할 거야.”

배낭에서 꺼낸 인슐린 주사를 녀석의 복부에 꽂아주었다. 데미안은 어떤 기분인 걸까. 녀석이 아랫입술을 질끈 깨물었다.

“……면목이 없습니다, 전하.”

“아니. 그보다는 괜찮아?”

“예, 조금. 다만…….”

“다만?”

“여전히 어지럽습니다.”

“그렇겠지. 일단 이것도 좀 먹고.”

품속에 챙겨온 초콜릿을 먹여주었다. 인슐린 주사를 맞은 까닭에 이번에는 저혈당 쇼크가 올 위험이 있기 때문이었다.

‘이게…… 1형 당뇨병 환자들의 가장 큰 고통이지.’

인슐린을 제때 맞지 못하면 혈당이 엄청나게 튀어 오른다. 간이며 신장이며 가릴 것 없이 몸속 장기가 온통 만신창이가 되고 온갖 합병증에 노출되어 버린다.

그래서 인슐린을 맞으면?

끝이 아니다.

이 병은 그렇게 만만한 상대가 아니다.

인슐린을 맞으면 혈당이 뚝 떨어지며 이번에는 저혈당 쇼크의 위험에 노출된다. 그냥 조금 어지럽고 마는 정도가 아니다. 까딱하면 죽는다. 어느 정도냐면, 인슐린을 맞은 후에 잠을 자다가 저혈당이 와서 사망하는 사례가 드물지 않을 정도다.

‘중간이 없는 거지. 생명을 위협하는 고혈당과 저혈당 사이를 끝없이 왔다 갔다 하면서 위태로운 외줄타기를 해야 하는 거야. 그것도 평생을.’

그런데 하필이면 데미안 녀석이 이런 신세가 되어 버렸다. 원작 마검황에서는 이렇게까지 절박하게 내몰리진 않았는데. 어쩌다가 이렇게 된 걸까.

라키엘은 씁쓸한 기색을 숨기며 당부했다.

“천천히 먹으려고 신경 쓰지 말고, 편하게 씹어서 삼켜도 돼. 초콜릿은 함유된 지방 때문에 혈당을 올려주는 속도가 완만하니까. 그래서 이걸 먹이는 거고.”

“……알겠습니다.”

“그래. 그럼 일단 편하게 쉴 곳을 찾아보자.”

라키엘은 데미안을 부축했다. 그리고 한편으로는 용왕 베르키스를 힐끗 쳐다보았다. 용왕은 여전히 아무런 반응이 없었다. 그냥 아까와 완벽하게 똑같은 모습이었다.

저 게으름을 깨부술(?) 방법이 있을까.

조금 막막해졌다.

당사자에게 물어라도 보고 싶었지만, 대답이 돌아올 리가 없으니 답답하기만 했다. 솔직히 말해서 조금 얄미웠다. 할 수만 있다면 일어나라고 뒤통수를 한 대쯤 팍!

“…….”

지금은 급한 일에 집중하자.

라키엘은 거칠어지려는 멘탈을 바로잡으며 데미안에게 물었다.

“괜찮아? 걸을 수 있겠어?”

“예……. 전하 덕분에…….”

“그래. 조금만 참자.”

일단은 데미안을 쉬게 하는 것이 급선무다. 그리고 식당도 좀 찾아봐야겠다. 아무래도 저 귀차니즘에 절어 있는 용왕의 도움을 받아내는 일이 쉽지 않을 듯하니까. 생각보다 제법 시간이 걸릴지도 모르겠으니까. 데미안에게 먹이려고 챙겨온 음식이 먼저 동날 수도 있으니까.

‘그런데…… 식당은 어디에 있지?’

마룡굴 내부를 둘러보았다.

이곳 공동은 실로 광활했다. 용왕이 드래곤 본신의 모습으로 움직일 때 편리하도록 만들어진 거겠지.

문제는 거대한 공동 둘레를 따라 수많은 문이 보인다는 점이었다. 그 숫자는 대강 세어봐도 100개는 넘어 보였다.

“……쓰읍.”

저걸 다 열어봐야 하나. 그 뒤로 이어져 있을 통로까지 일일이 확인하려면 최소 하루나 이틀은 걸릴 것 같았다. 아득한 기분이 들었다.

그런데 그때였다.

“코롱?”

뒤쪽에서 낯선 소리가 들렸다.

뭔가 짐승이 크릉거리는 것 같기도 하고. 혹은 말을 걸어오는 것 같기도 하고. 동시에 뭔가 거대한 물체가 스윽 다가오는 특유의 기척이 느껴지기도 하고.

‘뭐지?’

반사적으로 돌아보았다.

그리고 덜컥 마주쳐 버렸다.

“코로롱?”

“어?”

새하얀 갈기.

8미터의 덩치.

거대한 마수, 만티코어가 이쪽을 내려다보며 입맛을 츄릅, 다시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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