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약 파는 황태자-333화 (332/468)

333화. 용왕 베르키스 (3)

“코롱?”

“어?”

어느새 온몸을 뒤덮은 그림자. 돌아보니 우뚝 서 있는 엄청난 덩치.

‘사자?’

아니. 만티코어다, 저건. 언젠가 별궁 서고에 굴러다니던 마수 도감에서 본 기억이 났다.

어쨌건, 새하얀 갈기의 만티코어가 이쪽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그런데 컸다. 엄청나게. 언젠가 동물원에서 본 코끼리? 그것보다 더 컸다. 머리 높이만 최소 2층 건물 창문쯤은 되는 듯했다. 게다가…….

‘뚱뚱해!’

엄청나게 뚱뚱했다. 얼핏 보면 복실복실한 흰색 짐볼로 착각할 정도로. 그런데 문제는 따로 있었다. 저 엄청나게 거대한 만티코어가 이쪽을 향해 거침없이 다가오고 있다는 점이었다. 그것도 너무 빠르게!

“으읏!”

피할 수 있을까.

너무 늦은 듯한데.

당장 반격을 해야 하나.

‘만년필, 아니, 만년설부터.’

다급히 품에서 꺼내려 했다. 저 커다란 마수의 공격에 맞으면 한순간에 온몸이 인수분해 될 테니까. 혹은 잘못 조립했다가 떨어뜨리는 레고 꼴이 되겠지.

‘젠장!’

한쪽 팔로는 데미안을 부축하느라. 허약한 몸으로 그 무게를 지탱하느라. 그 상태에서 남은 손으로 품속의 물건을 꺼내는 일은 쉽지 않았다.

그 사이에 만티코어가 거침없이 거리를 좁혔다. 당장 공격이 가능한 거리까지. 위기감에 가슴이 쿵쿵 뛰었다.

그때였다.

“코로롱? 코롱!”

끼이익!

마치 급브레이크를 밟듯이, 만티코어가 이쪽과 딱 한 걸음 남은 거리에서 돌진(?)을 멈추었다. 그러고는 여전히 이쪽을 내려다보며 웅장하게 포효했다. 아니, 저건 포효라기보다는…….

“코롱! 코로로롱!”

“…….”

말을 거는 거 같은데.

암만 봐도 그런 듯한데.

라키엘은 엉거주춤한 자세로 눈치를 살폈다. 역시나 만티코어는 이쪽을 공격하지 않았다. 대신 몸통만큼이나 커다란 머리를 이리저리 갸웃거렸다. 그리고 또 ‘말했다.’

“코코롱? 코로롱! 코롱?”

“…….”

“코롱! 코! 롱!”

“아, 저기…….”

“코로롱?”

“진짜로 나한테 말을 거는 거야? 아니, 겁니까?”

“코로롱! 코롱! 코!”

“아, 그렇게 이야기를 하셔도…….”

“코롱?”

“제가 알아듣지를 못하겠는데 말입니다.”

라키엘은 솔직하게 말했다.

그리고 금방 후회했다.

어쩌면 방금 자신은 희대의 실언을 한 것이 아닐까. 어쩌면 엄청난 행운과 우연히 겹쳐서 마수 만티코어가 자신에게 말을 걸어준 걸 텐데, 그걸 못 알아듣고 있다는 걸 괜히 알려줘 버린 건 아닐까.

그래서 기껏 운 좋게 얻은 호의가 호로록 날아가고, 만티코어의 공격을 받고, 가정이 흔들리고, 사회가 무너지고, 온몸이 인수분해가 돼서 칠성장어 승천댄스를 추며 이승과 안녕을 고하고, 그대로 배 터져서 대자연의 품에 안기게 되는 걸까.

‘쓰읍.’

영혼의 뿌리까지 착잡해졌다. 자책감과 위기감이 6번 경추를 타고 쑴펑쑴펑 솟구쳤다. 그러나 다행스럽게도, 솔직하게 입을 놀린 대가로 만티코어 앞발에 원샷 참수형을 당하는 사태는 벌어지지 않았다.

“……코로롱?”

만티코어는 공격을 하는 대신 이쪽을 안타깝게 쳐다보았다. 그리고 나름의 깊은 고민에 잠겼다. 그걸 어떻게 아느냐고. 뻔하지. 저 커다란 덩치로 바닥에 엎드리고서, 푹 숙인 고개를 앞발로 감싸쥐는 자세가 고민 모드 말고 뭐가 있겠어.

“아, 저기…… 하는 말씀을 못 알아듣긴 하지만 말입니다. 대강 제가 눈치로 봐서는, 혹시, 이곳 마룡굴의 수호 마수이신 겁니까?”

“코롱?”

만티코어가 고개를 반짝 들었다. 초롱초롱해진 눈빛과 표정으로 보아선 아무래도 이쪽의 짐작이 맞았나 보다.

“아, 그럼 용왕 베르키스 님의 충신이신 거로군요?”

“……코롱?”

그런가?

라는 듯이 갸웃거리는 고갯짓.

뭐, 충신까지는 아니라고 생각하나 보다.

어쨌건 지금은 그게 중요한 게 아니고.

“그럼 혹시 저를 안내해 주실 수 있겠습니까?”

“코로롱?”

“식당 말입니다. 음식을 먹는 곳.”

“코롱?”

“제 일행이 몸이 조금 아파서 말입니다. 제때 식사를 적절하게 하질 못하면 금방 목숨이 위험해질 수가 있습니다. 물론 그런 사태를 대비해서 음식을 넉넉하게 준비해오긴 했는데, 그것만으로는 오래 버티기가 곤란할 듯합니다.”

“코……롱?”

“그래서 부탁드리는 겁니다. 혹시 식당을 좀 안내해 주실 수 있으실까요?”

“코롱!”

이쪽의 부탁을 알아들은 걸까. 만티코어가 두 발로 번쩍 일어섰다. 그리고 거대한 앞발 젤리로 자신의 핑크색 뽕뽕한 탈모 뱃살을 촙촙 두드렸다.

“코로롱!”

이쪽으로!

라는 듯이 앞장서는 만티코어.

그 뒤를 열심히 따라갔다.

어느 통로로 진입했다. 통로는 제법 길었다. 만티코어를 따라 걷는 사이에 다른 마수들도 여럿 마주칠 수 있었다.

“삐가각? 삐각!”

통로를 철컥철컥 순찰하던 갑옷 인형, 리빙아머가 만티코어를 향해 경례하듯 인사했다. 그런가 하면 통로 건너 어딘가에선 ‘꼬이?’ ‘더더덕!’ ‘뚜둔?’ 등등의 다른 마수 소리들도 얼핏 들리곤 했다.

그렇게 얼마나 더 열심히 따라갔을까. 마침내 통로가 끝났다. 넓은 공간이 펼쳐졌다. 식자재 창고를 겸한 주방이었다. 그런데 주방 한쪽 귀퉁이의 풍경이 조금 뜻밖이었다.

“어?”

한쪽 바닥에 빨간 고추가 좌악 정돈되어 놓여 있었다. 그러니까 저거…….

‘고추 말리는 거?’

어릴 때 할머니 집에 가면 마당에 널어서 말리던 빨간 고추가 떠올랐다. 지금도 시골에 가면 종종 볼 수 있는 광경이기도 하고.

‘그런데 왜? 마룡굴에 이런 게 있는 거지.’

내가 혹시 헛것이라도 보나.

조금 어이가 없어졌다.

귓가에선 알림음이 울려댔다.

딩동!

[당신과 페어링 상태인 <캡사이신의 정령>이 눈앞의 광경에 환호합니다.]

“…….”

헛것 아니네.

진짜 고추 맞네.

‘이게 무슨.’

혹시 마룡굴 주방 담당이 한국 출신 할머니나 아주머니이신가. 라키엘은 잠깐 떠오른 말도 안 되는 추측을 툭툭 털어냈다. 그리고 만티코어를 올려다보았다.

“감사합니다. 생각보다 주방의 규모가 크군요. 이 정도면 제법 오래 버틸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코로롱! 코롱!”

“예. 무어라 말씀하시는지는 모르겠지만, 그래도 감사합니다. 그럼 저는 이제 식자재들을 조금 살펴보…….”

“코롱!”

“엇?”

인사를 하며 식자재 창고를 둘러보려던 참이었다. 만티코어의 거대하고도 뚱뚱한 앞발이 훅 뻗어와 앞을 가로막았다. 만티코어가 말했다.

“코로롱! 코롱? 코! 코롱!”

“예?”

“코롱코롱! 코!”

“어, 저기…… 따로 하실 말씀이 있는 겁니까?”

“코롱!”

“하지만 저는 말씀을 알아듣지를 못해서요.”

“코로롱!”

“…….”

조금 난처해졌다.

왜인지는 모르겠는데, 만티코어는 하고 싶은 말이 있는 듯했다. 혹시 이곳에 대한 중요한 단서를 말하려는 걸까. 그럼에도 저 말을 알아들을 수가 없으니, 한편으로는 난감해졌다.

한데 그때였다.

“……꼬슴?”

품속에서 느껴지는 자그마한 꼼틀거림. 꿍얼거리는 듯한 속삭임. 꼬슴이였다. 혹시 만티코어의 우렁찬 말소리에 잠이 깬 걸까.

“꼬슴!”

꼬슴이가 눈곱을 닦아내며 자그마한 얼굴을 안주머니 밖으로 뾱 내밀었다. 그러더니 이쪽이 말릴 틈도 없이 만티코어를 올려다보며 말했다.

“꼬스슴? 꼬슴?”

만티코어가 대답했다.

“코로롱! 코롱!”

대답을 들은 꼬슴이가 이쪽으로 까만 눈망울을 돌렸다.

“꼬스슴? 꼬슴?”

“……어?”

“꼬슴!”

“설마, 꼬슴아? 넌 만티코어의 말을 알아듣는 거야? 그래서 나한테 통역을 해주는 거고?”

“꼬슴!”

고개를 끄덕이는 꼬슴이.

그때부터였다.

꼬슴이가 만티코어를 향해 꼬슴꼬슴 물었다. 만티코어가 코롱코롱 대답했다. 그런 문답이 한참 이어졌다. 그리고 꼬슴이가 다 알아들었다는 듯이 이쪽에게 만티코어의 이야기를 전해주었다.

“꼬슴! 꼬스슴! 꼬!”

“뭐어어?”

들으면서 어이가 없어졌다.

꼬슴이가 통역한 만티코어의 이야기 내용은, 마룡굴의 주인인 용왕 베르키스와 그의 아내에 관한 이야기였다.

“그러니까, 용왕 베르키스는 원래부터 움직이기를 끔찍하게 싫어하는 초 극단적인 귀차니스트인데, 평범한 인간 출신인 그의 아내는 반대로 엄청나게 부지런한 살림꾼이라고?”

“꼬슴!”

“그래서 덕분에 용왕 베르키스는 항상 아내의 바가지에 시달리며 행복하게 지냈고, 한편으로는 빈틈만 보이면 게으름을 피우려고 호시탐탐 기회만 노렸고?”

“꼬슴!”

“그러던 도중, 보름쯤 전에 용왕 베르키스의 아내, 그러니까 용왕비님이 10년 치 김장 준비를 하러 3개월짜리 쇼핑을 떠났다고?”

“꼬스슴!”

“헐. 잠깐만, 잠깐.”

“꼬슴?”

“정리 좀 해보자고. 용왕비님이 10년 치 김장에 쓰일 최고의 배추 등등을 사기 위해, 그 와중에도 한 지방에서 사재기를 하는 민폐를 끼치지 않기 위해 3개월의 대륙 일주 쇼핑을 떠났고…… 덕분에 용왕 베르키스는 10년 만에 3개월짜리 자유를 얻은 상태고?”

“꼬슴!”

“그럼 난, 망했네?”

“꼬슴!”

“…….”

이젠 조금 알겠다. 어째서 용왕 베르키스가 이쪽의 인사에 아무런 반응이 없던 건지.

모처럼의 게으름 찬스를 얻은 남자인 것이다, 용왕은. 그렇기에 방문객이고 추천장이고 배째라를 시전하며 맹렬한 방구석 백수 모드로 진입한 거겠지.

‘쓰읍. 하필이면 방문 시기가 엄청 좋지 않네.’

그러고 보니 떠올랐다.

예전에 등갑룡 포르티스도 치료를 부탁하러 용왕을 방문했다가 죽을 뻔했다고 했지. 죄명은 용왕의 낮잠을 방해한 죄였다고 했나. 게다가 뱀파이어 로드도 비슷한 말을 했다. 용왕은 낮잠을 너무나 사랑한다고.

‘어쩐지 뱀파이어 로드 그 양반, 인사만 홀라당 올리고 잽싸게 튀더니 그래서였구만!’

용왕의 낮잠을 방해한 죄.

그걸로 미운털이 박힐까 도망친 거다.

“하아.”

설마하니 용왕이 이 정도로 막장 백수 집돌이일 줄은 몰랐는데. 이젠 어떡하지. 용왕비가 돌아올 때까지 2개월 반을 버티며 기다려야 하나.

‘아니.’

라키엘은 고개를 저었다.

암만 봐도 그건 아니었다.

데미안의 상태는 지금도 별로 좋지 못하다. 아무리 자체공정으로 만든 인슐린이 있어도, 2개월이 넘는 시간을 더 버티다간 상태가 악화될 것이 자명하다. 합병증이 생겨날 위험마저 있다.

‘게다가 마계왕이 그 사이에 또 다른 불치병을 추가로 끼얹을 수도 있어. 만약 1형 당뇨와 합병증에 시달리는 상태에서 또 다른 불치병마저 겹친다면…… 그땐 정말로 못 막아.’

그런 최악의 경우를 맞이하고 싶진 않았다. 라키엘은 맹렬히 궁리했다. 저 방구석 백수 모드로 널브러진 용왕의 관심을 끌어낼 방법. 그가 마침내 움직여 이쪽을 돕게 할 방법. 뭐가 있을까. 머리를 부여잡았다. 뇌세포를 풀가동했다. 오장육부와 상의했다.

딩동!

[오장육부가 당신의 고민 상담에 응답합니다.]

[심장 : 게으른 놈팽이 용왕을 움직이게 만들 확실한 방법? 을 좀 알려달라고? 그걸 우리가 어떻게 알어?]

[허파 : ……허파학ㅋㅋ;]

[대장 : 똥침을 해보면 어떻지 말입니까?]

[간장 : 성능 하나는 확실할 듯ㅋㅋㅋㅋㅋ]

[위장 : 정지 상태라서 조준도 쉽겠네ㅋㅋㅋ]

[콩팥 : 명중률, 보복으로 사망 당첨확률 모두 100%임ㅋㅋㅋ]

[비장 : 사실상 자살 아니냐고 아ㅋㅋㅋ]

……이것들이 진짜.

‘좀. 나 심각하거든?’

인상을 팍 썼다.

그러자 오장육부가 색다른 대답을 내놓았다.

딩동!

[오장육부가 조금 더 진지한 태도로 상담에 임합니다.]

[심장 : 쓰읍. 그럼 용왕의 고충을 좀 덜어주는 방향은 어떨까? 허파 생각은 어떰?]

[허파 : 헙! 팝!]

[대장 : 저도 그게 좋겠지 말입니다?]

[간장 : 그런데 온종일 누워서 뒹굴거리는 백수한테 딱히 고충이 있을까? 떠오르는 거 있음?]

[위장 : 배 출출한 거?]

[콩팥 : ㄴㄴ 진정한 놈팽이는 밥 차려먹는 것도 귀찮아함.]

[비장 : 근데 아까 보니까 용왕이 한쪽으로 누워 있던데, 저렇게 오래 있으면 팔에 피 안 통하지 않음?]

‘……뭐?’

비장의 말을 듣는 순간이었다.

라키엘의 머릿속에 전구 100개가 반짝 켜졌다. 실마리가 떠올랐다. 어떤 수를 써도 반응하질 않는 놈팽이. 저 귀차니스트 용왕의 관심과 호의를 끌어낼, 자신만이 시도할 수 있는 방법이.

그 가능성이.

‘그거, 어쩌면?’

저도 모르게 벌떡 일어났다. 꼬슴이에게 물었다.

“꼬슴아?”

“꼬슴?”

“만티코어 님한테 내 질문 통역 좀. 할 수 있지?”

“꼬슴!”

“그럼, 흠흠! 만티코어 님? 이제부터 제가 용왕 베르키스님의 팔뚝과 목덜미, 등짝에 침을 좀 놓아드릴까 하는데, 괜찮겠습니까? 아마도 용왕께서는 너무 오래 한쪽으로만 누운 채로 안 움직여서 팔뚝에 피가 몰려 쥐가 난 상태이실 것이고, 그 쥐가 풀리는 순간 전기가 확 통하는 느낌을 받으실 것이며, 그런 감각이 싫어서 더 안 움직이고 있으실 가능성이 보여서 말이지요.”

그러하다.

용왕이 저렇게 누워 있었던 시간은 약 15일.

그 보름치 원ㄱ옥처럼 꽉꽉 쌓인 쥐가 한꺼번에 풀리면 느껴질 전기(?)는 얼마나 강력하겠는가. 용왕도 그게 싫은 거다. 그래서 더 안 움직이고 있는 거다. 회복 마법? 용왕의 성격상 사용할 생각도 안 하는 거겠지. 귀찮으니까.

‘그러니까, 그걸 내가 대신 풀어주면 점수를 왕창 따낼 수 있다는 뜻이지!’

바로 그거다.

데미안의 죽음을 막기 위해.

마계왕의 강림을 막기 위해.

세계 멸망을 저지하기 위해.

용왕의 팔뚝에 난 쥐를 풀면 된다는 현타! 아니, 확신을 느끼며 라키엘은 준비를 서둘렀다.

덕분에 용왕 베르키스는…….

……저 ㅅ낀 뭐지.

귀차니즘과 어이없음이 짬짜면처럼 공평하게 담긴 눈빛으로 라키엘을 관찰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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