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약 파는 황태자-334화 (333/468)

334화. 용왕님의 한의사가 되었습니다 (1)

‘……이놈은 대체 뭐지.’

용왕 베르키스.

이 세상 모든 드래곤의 선도자.

가장 강력하며 위대한 드래곤.

말 그대로 드래곤 그 자체.

……는 아니고.

사실은 어쩌다가 너무 강력하게 태어나 버린 존재. 그러나 움직이는 것을 세상에서 가장 싫어하는 드래곤. 하여 그 누구보다도 낮잠을 사랑하는 영혼.

그는 모든 것이 귀찮았다.

눈을 깜빡이는 것도. 공기의 흐름을 느끼는 것도. 소리를 듣는 것도. 자는 것도. 깨는 것도. 발가락을 꼼지락대는 것도. 침을 삼키는 것도. 심지어 가끔은 숨을 쉬는 것조차도!

모든 것이 귀찮았다.

아무것도 안 하면서 살고 싶었다. 오직 그것만이 그의 장래희망이고, 소망이자, 빛이며, 광휘이고, 유일한 기적이었다.

밍기적, 밍기적.

그렇기에 10년에 한 번.

아내가 김장 쇼핑을 하는 시간이 그에겐 너무나 소중했다. 오직 그 3개월 남짓한 시간 동안에만 아내의 잔소리를 피해 마음껏 밍기적거릴 수 있기 때문이었다. 행복했다. 따스했다. 포근했다. 아아 이대로 시간이 멈추어 버렸으면. 아니 그러면 아내를 못 보니까 그건 좀 아니고.

아무튼.

오늘도 그는 누구보다도 열심히, 맹렬하게 밍기적거리고 있었다. 그래서 방문객의 존재를 감지했을 땐 귀찮았다. 콱 죽여 버릴까 싶었다. 하지만 그만두었다. 귀찮아서였다. 한편으로는 구면인 뱀파이어 로드의 존재감이 느껴지기도 했고.

그래서 방문객을 냅두었다.

알아서 볼일 보다가 가겠거니 싶었다. 신경도 쓰지 않았다. 귀찮았으니까. 그냥 잤다. 그런데…… 점점 이 방문객이 요상한 짓을 한다.

“…….”

이놈, 진짜로 뭐지.

용왕 베르키스는 실눈을 살며시 돌렸다. 눈꺼풀을 적정 각도까지 들어 올리는 것도, 안구를 데구륵 움직이는 것도 너무나 귀찮았다. 하지만 살펴보지 않기엔 너무나 신경이 쓰였다. 궁금하기도 했다.

그러니까 왜소한 체구의 은발 방문객 인간은…… 자신 앞에서 고슴도치 환상종의 가시를 톡톡 뽑아내고 있었다.

그것도 너무나 태연하게!

“꼬슴아? 괜찮아? 안 따끔해?”

“꼬슴!”

“다행이네. 그나저나, 쓰읍. 아무리 봐도 신기하단 말이지.”

“꼬스슴?”

“네 가시 말이야. 따지고 보면 평균적으로 하루에 100개는 넘게 뽑는 것 같은데. 그런데 계속 실시간으로 리필이 되면서 쑥쑥 자라는 걸 보면 참.”

“꼬스스슴?”

“잘만 연구하면 탈모 치료의 실마리가 풀리지 않을까?”

“……꼬?”

“응? 아니아니. 혼잣말이야.”

“꼬스음……?”

“자아, 우리 꼬슴이 착하지. 가시 뽑자아.”

뾱!

라키엘은 인심 좋게(?) 웃으며 꼬슴이의 가시를 야물딱지게 뽑았다. 목적은 단 하나. 용왕 베르키스의 팔뚝에 난 쥐를 풀어주는 것이었다.

‘할 수 있을까.’

꼬슴이에게서 뽑아낸 가시를 정돈하며 슬쩍 경혈 스캐닝을 켰다. 그러자 잠든 용왕 베르키스의 경혈이 보였다.

아니.

이 경우엔 본다는 말이 적합하지가 않은 것 같다. 사람은 맨눈으로 태양을 똑바로 쳐다보면 안구에 큰 손상을 입거나 실명하게 되니까.

용왕 베르키스의 경혈이 그랬다.

너무나 강렬했다.

똑바로 쳐다볼 수가 없었다. 마치 태양 같았다. 바라보는 즉시 안구가 타 버릴 듯했다. 지금까지 대단한 존재들의 경혈을 제법 봤지만, 이런 경우는 처음이었다.

‘등갑룡 포르티스? 비교도 안 돼. 뱀파이어 로드도 마찬가지고.’

그들의 경혈을 보면서는 도도한 바다 같다는 생각을 했다. 반면, 용왕 베르키스는 뭐랄까…….

‘하늘. 아니, 그 너머의 우주.’

깊이를 가늠할 수가 없었다.

너비를 헤아릴 수도 없었다.

당연히 경혈의 흐름을 세세하게 살피는 것도 불가능했다. 이런 경우는 처음이었다.

하지만 그렇다고 경혈을 아예 파악하지 못하는 건 아니었지만.

“…….”

라키엘은 용왕 베르키스를 똑바로 쳐다보는 대신, 그가 누워 있는 소파 등받이를 바라보았다. 그곳에 용왕의 전신에서 뿜어져 나온 엄청난 경혈의 존재감이 그림자처럼 찍혀 보였다. 이런 경우 또한, 처음이었다.

‘진짜 존재감 미쳤네.’

당사자는 아무것도 안 하고 누워만 있는데, 그 누워 있는 소파 등받이에 경혈의 흐름이 그림자가 비치듯, 혹은 사진이 인화되듯 찍혀서 보인다니. 직접 보면서도 믿기지가 않을 지경이었다.

그러나 지금은 그런 일에 신경 쓸 때가 아니었다. 더 중요한 목적이 따로 있으니까.

‘집중하자.’

소파 등받이를 향한 라키엘의 눈빛이 날카로워졌다. 그곳에 그림자처럼 찍힌 용왕의 경혈 흐름. 그 속에 엄청나게 뭉친 기혈 덩어리가 하나 보였다.

위치는 팔뚝.

내내 한쪽으로만 누워 있어서.

그 상태로 하도 안 움직여서.

그래서 뭉친 쥐였다.

짐작대로였다.

‘저러고 어떻게 누워 있었냐.’

보는 것만으로도 이쪽의 팔뚝 감각이 사라지는 듯했다. 그만큼 뭉친 쥐의 규모(?)가 실로 엄청났다. 아니, 이 경우엔 초월적이라는 말이 더 어울릴 것 같다.

보통 사람들이 엎드려서 낮잠을 자다가 팔에 피가 안 통해서 생기는 쥐가 불꽃놀이 할 때 던지는 콩알탄 수준이라면?

저건 핵폭탄이다.

아니.

짜르봄바다.

역사상 가장 강력했다는 핵폭탄. 너무나 강력해서 충격파가 지구를 몇 바퀴나 돌았다는 그 핵폭탄. 가히 그 정도로 강력한 기운이 한낱 팔뚝에 뭉쳐진 쥐에게서 느껴졌다.

그럼, 저게 풀리면 느껴질 찌르르 전기 같은 감각은 또 얼마나 엄청날까.

“…….”

왜 겨우 쥐를 풀어주는데 폭탄해체반의 기분이 느껴지는 건지. 라키엘은 불현듯 찾아온 현타(?)를 얼른 털어내며 조심스럽게 움직였다. 용왕에게 다가가서 구두를 살며시 잡았다.

“그럼, 진료를 위해 잠시 신발을 벗겨드리겠습니다아?”

“…….”

역시나 용왕은 아무런 반응이 없었다.

다행이다.

안도의 한숨을 몰아쉬며 구두를 벗겼다. 양말도 벗겼다. 로라시아 대륙의 일반인 최초로 용왕 베르키스의 맨발을 직관하는 영광(?) 속에서 가시를 들었다. 용왕의 발등을 조준했다.

‘팔뚝의 뭉친 기혈을 풀어주기 위한 첫 시침 자리는 충양혈(衝陽穴).’

그는 시력 보호를 위해 경혈 스캐닝을 껐다. 그리고 용왕 베르키스의 발등 위쪽을 노려보았다.

둘째 발가락뼈를 타고서 발등으로 쭈욱 이어지는 라인. 발목을 당길 때 발목이 접히는 지점에서 발끝 방향으로 손가락 한 마디 반쯤에 위치한 자리. 둘째 발허리뼈(second metatarsla bone)와 중간쐐기뼈(intermediate cuneiform bone)가 딱 만나는 곳.

그곳에 족양명위경(足陽明胃經)의 원혈인 충양혈이 있었다.

‘일단 여기서 긴장된 신경을 풀어주고.’

곧바로 다른 혈과 함께 시침하면?

적절한 자극의 조합이 혈행의 막힌 순환을 해소함과 동시에, 지나치게 자극적인 찌릿찌릿한 감각을 덜어줄 것이다.

……라고 확신하던 순간이었다.

뚝!

충양혈을 향해 가볍게 꽂으려던 가시가 부러졌다.

“…….”

이거 설마.

용왕이 빡쳐서 발등에 힘을 준 건 아니겠지? 잠깐 눈치를 살폈다. 다행히(?) 자신의 짐작이 틀린 듯했다. 그냥 발등 자체가, 아니, 온몸이 단단해서 가시가 들어가지 않는 듯했다.

‘후우. 그렇다면.’

가시가 안 되면 뜸으로!

라키엘은 배낭에 챙겨온 쑥뜸봉을 야물딱지게 꺼냈다. 그리고 잠깐 고민했다. 뜸의 열기가 피부로 은은하게 전해지는 간접구를 쓸까? 아니. 이 경우엔 무조건 피부를 대놓고 지져야겠지. 튼튼한 용왕이니까. 그래야 필요한 자극이 들어갈 테니까.

‘직접구 방식으로.’

쑥뜸봉을 용왕의 발등 충양혈에 올려놓았다. 만년필을 꺼냈다. 폭탄 심지에 불을 붙이는 심정으로 쑥뜸봉을 태웠다.

이윽고 구수한 쑥 향기가 마룡굴을 채웠다.

화르르륵!

삽시간에 화끈화끈 데워지는 용왕님의 발등!

라키엘은 거기서 멈추지 않았다. 쑥뜸봉에 불을 붙인 순간, 이미 돌아갈 수 없는 강을 건넌 셈이니까.

그는 하느님이랑 인생 다시보기 시청각을 잡는 심정으로 쑥뜸봉 세 개를 더 꺼냈다. 그리고 각각 용왕의 발목에 있는 해계혈(解谿穴), 그 인근의 중봉혈(中封穴), 종아리 앞쪽 중간 어름의 풍륭혈(豊隆穴)을 지지기 시작하였다.

덕분에 용왕 베르키스는 분노……하지는 않았다. 대신 황당함을 느꼈다. 한편으로는 뜻밖의 상쾌함 또한 느꼈다.

‘이놈, 진짜로 뭐지?’

당장 일어날까 싶었다.

너님 혹시 은은하게 359도쯤 돌으셨어? 라고 묻고도 싶었다.

하지만 그러기엔 너무 귀찮았다. 그리고 상쾌했다. 어디가? 역대급 쥐가 나서 감각이 멸종되어 있던 팔뚝이. 1 마이크로미터만 꼼지락거려도 파멸적인 찌릿함이 느껴질 것 같던 팔뚝이.

사르르 풀리는 기분이 들었다.

짜르르 전기가 통하는 불쾌한 감각? 거의 없었다. 신기할 정도로 팔뚝이 따스해지며 모든 감각이 정상적으로 돌아오고 있었다. 정작 뜸은 팔이 아닌 발등과 종아리에 놓여 있는데!

‘호오.’

이런 경험은 기나긴 용생에서도 처음이었다. 뜻밖의 상쾌함 때문이었을까. 용왕 베르키스는 저도 모르게 기분이 살짝 좋아졌다. 덕분에 그의 오른쪽 콧구멍이 아주 미세하게 씰룩거렸다.

그리고 라키엘은, 그 미세한 반응을 놓치지 않았다.

‘……됐다!’

라키엘은 속으로 환호했다.

봤다.

분명히 봤다.

용왕의 콧구멍이 아주 살짝 씰룩거렸다.

그걸 감지한 비결?

간단했다.

그는 한의사였다. 자신의 진료를 받는 환자의 반응에 그 누구보다도 예민한 사람이었다. 사실 한의사는 누구나 그렇다. 환자의 아주 미세하고도 짧은 순간의 반응을 예리하게 감지하지 못하면, 한의사로 살아남을 수가 없는 까닭이었다.

‘그게 한의사의 핵심이자 최대의 애로사항이지.’

진료 현장에서 시침을 하고, 뜸을 놓고.

그 와중에 환자의 반응을 잘 봐야 한다. 단순히 아파하거나 불편해하는가의 여부가 아닌, 환자의 몸이 보이는 피드백을 민감하게 느껴야 한다. 사람마다 체질이 다르고, 그에 따른 시침법과 진료 방향을 적절하게 적용해야 하기 때문이었다.

‘게다가 한국에서 한의원 진료를 볼 때는…… 경혈 스캐닝이나 아스라한 심법 같은 게 없기도 했고.’

자신도, 다른 한의사분들도 모두 그랬다. 순수한 손끝의 감각, 피부와 공기로 느껴지는 약간의 변화를 실시간으로 느끼고, 곧바로 진료에 적용해야 했다. 그런 감각을 익히기 위해 무수히 애를 썼고, 제법 많은 경험을 쌓아야 했다.

그런 덕분이었다. 방금, 라키엘은 용왕이 무의식중에 보인 미세한 반응을 통하여 깨달을 수 있었다.

용왕이 쑥뜸에 매우 만족하고 있노라고. 그리고…… 자신을 지켜보고 있노라고.

‘후우. 긴장되네.’

무려 용왕이 이쪽을 관찰하며 평가하고 있다. 그 생각만으로도 부담감이 콱 몰려왔다. 하지만 그는 부담감에 무너지지 않았다. 오히려 이 순간을 기회라고 여겼다.

그때부터였다.

……촵촵!

라키엘의 혓바닥이 찰진 워밍업과 함께 입술을 적셨다. 그리고 본격적인 야바위의 12기통 바이터보 슈퍼차저 엔진에 시동을 걸었다.

목표인 용왕 베르키스에게?

아니.

옆에서 구경하던 만티코어에게.

“저기, 그런데 만티코어 님? 사실은 제가 아까부터 느낀 건데 말입니다…… 이런 말씀을 어떻게 드려야 할지는 모르겠지만, 으음, 우리 만티코어 님께서 안색이 다소 좋지가 못하신데 말이지요.”

“……코롱?”

영업의 첫째 원칙.

절대 초장부터 영업 대상에게 적극적으로, 부담스럽게 들이대지 말 것. 들이대려면 간접적으로, 돌려서 깎아치기(?)를 시전할 것.

“혹시 요즘 불면증이 있거나, 깊은 잠에 들지 못해서 몇 번씩 깨거나 하진 않으십니까?”

“코롱?”

“그런 증상에 쓰기 딱 좋은 약을 제가 지어드릴 수 있는데 말입니다?”

“코로롱?”

“숙면대보탕(熟眠大補湯)이라고, 혹시 들어보셨습니까?”

“……코롱?”

만티코어가 무슨 소리냐는 듯 고개를 갸웃거렸다.

동시에 용왕의 귀가 남몰래 쫑긋했다.

그렇게, 한국의 한의원에서 환자들에게 때때로 탕약 영업(?)을 하던 그의 짬이 빛을 발휘하기 시작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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