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35화. 용왕님의 한의사가 되었습니다 (2)
숙면.
사람이 밤잠을 푹 자는 것은 중요하다. 몸에 활력이 생기고, 혈액순환이 개선되며, 소화가 잘되고, 쾌변을 경험하며, 눈빛에 힘이 돌고, 피부마저 탱탱해진다.
그것은 드래곤도 마찬가지였다.
용왕 베르키스 또한 예외가 아니었다.
‘아. 그때가 그립다.’
베르키스는 잠시 1,000년 전쯤의 어느 사건을 떠올렸다. 한 번은 어쩌다가 함정에 걸린 적이 있었다. 그냥저냥한 함정이 아니었다. 한 국가의 광활한 영토 전체를 마법진으로 삼은 함정이었다.
국가구급 마법진.
그 마법진의 마법은 지극히 단순했다. 수면 마법이었다. 하지만 강력했다. 단순해서, 국가 전체를 마법진으로 삼아서. 그렇기에 더욱 강력했다.
덕분에 꿀잠을 잘 수 있었다.
함정을 만들어준 이가 얼마나 고맙던지. 용생을 통틀어 그렇게 편안하고 깊은 숙면을 이룬 적이 없을 지경이었다. 무려 천 년이 지난 요즘에도 그때 생각이 종종 날 정도였다.
‘그런데…… 뭐? 숙면대보탕?’
마시면 꿀잠에 빠지는 마법의 물약이 있다고? 그걸 만들어줄 수 있다고? 이 인간이?
“…….”
베르키스는 저도 모르게 귀를 쫑긋거렸다. 그리고 눈앞의 인간 방문객이 만티코어에게 떠드는 소리를 한 음절도 놓치지 않으려 노력했다. 그동안 인간 방문객, 라키엘의 혓바닥 모터는 잘도 돌아갔다.
“그러니까 숙면대보탕이라는 건 말입니다.”
“코롱?”
“기존의 산조인탕(酸棗仁湯)과 삼물황금탕(三物黃芩湯)의 약재를 결합하여 제가 만든 레시피입니다.”
“코로롱?”
“보통 잠을 설치는 분들을 보면 신경이 예민해져 있는 경우가 많거든요. 특히 교감신경이 굉장히 많이 치솟아 있는 케이스가 대다수지요. 마치…… 만티코어 님의 솟아오른 갈기처럼 말입니다.”
“……코로롱?”
“솔직히 말씀드리자면, 아까 처음 뵙던 순간부터 알았습니다. 아, 이분이 잠귀가 밝으시구나. 그래서 항상 작은 소리에도 민감하게 반응하느라 도통 숙면을 이루질 못하셨구나. 맞습니까?”
“코로, 롱?”
만티코어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자신의 잠귀가 밝았던가.
평소엔 전혀 생각지 않았던 부분이었다. 딱히 신경을 써본 적도 없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눈앞의 인간이 떠드는 말을 듣자니, 어쩐지 자신에게 그런 증상이 있었던 것도 같다는 기분이 들었다.
‘당연하지!’
라키엘은 만티코어의 솔깃하는 눈빛을 놓치지 않았다. 지금 만티코어의 심리는 사실 간단하다.
누구나 병원에 들렀다가 약 타러 약국에 가면 비슷한 경험을 해보았을 것이다. 약국 벽면을 따라 주욱 놓인 온갖 건강 영양제와 그 위의 멘트들. 어떤어떤 증상이 있는 분들에게 좋다는 솔깃한 문구들.
그걸 보며, ‘어? 나도 저런 거 같은데?’라거나, ‘으음, 저거 나한테 필요할지도……?’라는 생각은 누구나 한 번쯤 해보는 거니까.
‘평소엔 그런 생각을 안 하다가도 약국 가서 보면 꼭 그런 생각들을 한단 말이지. 그러다가 약국에서 나오면 또 그런 생각들을 싹 다 까먹어요. 원래 사람 심리가 다 그렇거든.’
예로부터 약장사(?)가 흥하는 이유가 있다.
지금 만티코어도 마찬가지다.
그리고…… 용왕 또한 그렇고.
“…….”
용왕 베르키스의 귀가 분명 쫑긋거리고 있다. 확실하다. 그러니까, 히얼 위 고. 용기를 얻은 라키엘의 혓바닥이 더욱 힘찬 매혹의 윈드밀을 돌았다.
“역시. 제 짐작이 틀리지 않았군요. 그래서 애석합니다. 그동안 얼마나 말 못 할 고충이 많으셨을지. 역시나 이 넓은 던전을 수호하는 일이 쉬운 건 아니죠. 그만큼 책무도 막중하셨을 테고.”
“코롱?”
“그러니 이렇게 잠귀가 예민해지신 거겠지요. 애석하고, 한편으로는 참 다행이구나 싶습니다. 이런 분을 돕기 위해서 제가 숙면대보탕을 개발했던 건가 싶기도 하고 말입니다.”
“코코롱?”
“아마도 이런 게 인연이라는 건가 봅니다. 심신이 지쳐서 잠이 오지 않는 분, 잠귀가 밝아 신경이 예민하고 쇠약해지신 분, 얕은 잠에 꿈만 많이 꾸느라 아침에도 머리가 무거우신 분, 수시로 손발이 거북하게 달아올라 이불 밖으로 사지를 내밀고서야 비로소 조금은 편해지는 통에 밤새 뒤척이는 분, 이런 분들을 위해 수많은 밤을 지새우고 아침에 뜨는 해를 충혈된 눈으로 바라보며 개발했습니다, 제가, 숙면대보탕을.”
“……코로옹?”
“아, 물론 강요하는 건 아닙니다. 어디까지나 조심스러운 추천일 뿐이지요. 그러니 만약 생각이 나신다면, 언제든지 말씀을 주세요. 일단 숙면대보탕을 3일 정도만 복용을 하면서 수면의 질이 어떻게 달라지는지, 아침이 얼마나 상쾌해지는지 등등의 과정을 가볍게 살펴본 후에…….”
“그거, 얼마나 원샷하면 되는 거니?”
불쑥, 말허리를 자르고 들어온 나른한 물음.
그 순간 라키엘은 깨달았다.
‘……왔다!’
용왕이다.
베르키스가 입을 열었다!
하지만 그는 경거망동하지 않았다. 영업의 절대원칙, 부담스럽게 들이대지 말기를 안면근육 전체로 시전하며 들뜨려는 정신줄을 꽉 붙잡았다. 그리고 짐짓 1초쯤 얼떨떨한 상태로 있다가 한 박자 늦게 아래쪽의 베르키스를 향해 눈길을 던졌다.
“……엇?”
그래 완벽해.
연기 점수 100점.
“이, 일어나셨습니까?”
“그래. 일어났지. 너님이 하도 솔깃한 이야기를 떠들어대서.”
“그건…….”
“죄송하지? 당연히 죄송해야지. 나님의 잠을 깨웠는데, 너님이.”
“실로 송구…….”
“됐고. 숙면대보탕. 내놔.”
“예?”
“숙면에 좋다며.”
“그, 그렇습니다?”
“그럼 내놔야지.”
“…….”
라키엘은 잠시 할 말을 잃었다.
용왕 이 사람, 아니, 이 드래곤 뭐지.
방금 전까진 빨랫줄에 잘못 걸린 비닐봉다리처럼 늘어져 있더니. 아무리 말을 걸고 인사를 올려도 시체처럼 반응조차 안 하더니. 그런데 입이 열리자마자 이렇게 급발진(?)을 하는 통에 영 적응이 되지가 않았다.
하지만 한 번 열린 용왕의 입질은 청산유수와 정확, 그 자체였다.
“속이 뻔히 보이거든. 나님 취향에 맞춘 미끼를 흔든 거잖나. 나님한테 도움 좀 받아보려고. 맞지?”
“예, 맞습니다.”
“부정을 안 하네?”
“이제 와서 그래 봤자 기만질일 테니까요?”
“하. 마음에 들어. 그래서 숙면대보탕은? 언제 줄 수 있지?”
“어, 그건.”
엄청나게 스트레이트구나, 용왕.
라키엘은 당혹감을 털어내면서도 용왕이 저러는 이유를 어렴풋이 깨달을 수 있었다. 귀찮아서 저러는 거다. 괜히 말 빙빙 돌리면 귀찮으니까. 그래서 입을 연 김에 스트레이트로 가장 낭비 없는 대화를 추구하는 거다.
‘…….’
컨셉 확실하구만.
라키엘은 용왕의 기다리는 귀찮음을 덜어주기 위해 최대한 잽싸게 대답했다.
“약재만 갖추어진다면 당장 달여드릴 수 있습니다.”
“그럼 약재는 어디에 있지?”
“그건 황도 마젠타의 별궁 한의원 약재 보관 창고에…….”
“좋네. 그럼 당장 5분 안에 다녀와 버리렴.”
“예?”
딱!
뭐라 반문할 틈도 없었다.
용왕 베르키스가 다짜고짜 손가락을 딱 튕겼다. 동시에 사방에서 마법진이 일어나 전신을 휘감아 왔다. 두 발이 허공에 두둥실 떴다. 은근히 속이 더부룩해지며 멀미 기운이 몰려왔다. 그러니까 이 감각은…….
‘텔레포트?’
심장이 철렁 내려앉았다.
아까 뱀파이어 로드에게 들었던 말이 떠오른 까닭이었다.
‘그, 용왕이 기거하는 마룡굴엔 텔레포트 방해 마법진이 있어서 함부로 공간이동 마법을 쓰면……!’
“전신이 누리호처럼 3단 분리될까 봐 그러는 거야? 괜찮아. 그 방해 마법진도 내 거야.”
“…….”
“그러니까 안전하게 얼른 다녀와 버리렴?”
화아악-!
온몸이 전송되는 기이한 기분.
사방이 캄캄해졌다. 별빛이 외치며 달려왔다. 멀어졌다. 과거의 기억들이 아지랑이처럼 두 손에 얽혀 왔다. 아니, 저게 내 기억인지도 모르겠다. 판단하기엔 너무 짧은 순간이라서. 마치, 잠깐 눈을 감았다가 뜬 것처럼.
털푸덕!
“……구왁!”
삽시간에 어둠이 사라졌다. 전혀 다른 바닥에 내동댕이쳐졌다. 허겁지겁 일어나며 보니, 익숙한 모양의 선반들이 죽 늘어선 광경이 보였다. 너무나 낯익은 실내와 냄새.
별궁 한의원의 약재 보관 창고였다.
“허. 허허.”
진짜로 여기까지 보내 버렸네.
그것도 한 큐에.
‘뱀파이어 로드는 수십 번이나 공간 마법을 써서야 마룡굴 근처까지 갔는데.’
엄청난 차이가 느껴졌다. 하지만 감탄만 하고 있을 시간은 없었다. 용왕이 텔레포트 마법을 시전하기 직전에 했던 말이 떠오른 까닭이었다.
- 그럼 당장 5분 안에 다녀와 버리렴?
“…….”
아마도 딱 5분의 시간을 준다는 뜻이겠지.
그걸 파악한 순간부터였다.
라키엘은 은행털이범처럼 후다닥 움직였다. 보자기를 챙기고, 선반 사이를 뛰어다니며 숙면대보탕에 쓰일 약재들을 쓸어담았다.
하필이면 종류도 적지 않았다.
산조인탕에 쓰이는 산조인(酸棗仁), 복령(茯苓), 지모(知母), 천궁(川芎)에다가 삼물황금탕에 들어가는 지황(地黃), 황금(黃芩), 고삼(苦蔘)을 보자기에 최대한 꽉꽉 쑤셔 넣었다.
두 번의 기회가 없을 것이기 때문이었다.
‘용왕은 엄청난 귀차니스트야. 그런데 만약 내가 빠뜨린 약재가 있다면? 그래서 다시 황도에 보내주십사 한다면? 그 부탁을 들어줄까? 천만에. 두 번이나 텔레포트를 사용해 주는 일은 절대로 없겠지.’
이 기회뿐이다.
빠뜨리는 약재가 있으면 안 된다. 양이 모자라서도 안 된다. 그러니까 신속하고 정확하게.
‘탕약기도 챙기고!’
마지막으로 손에 익은 탕약기를 향해 손을 뻗었다. 손잡이를 잡았다. 그 직후, 약재 보관 창고의 문이 열렸다.
“……어?”
간호사 아니스였다.
약재를 가지러 내려온 걸까.
그러다가 뜻밖에 이쪽과 덜컥 마주친 아니스의 눈이 휘둥그레지는 순간.
화아악-!
다시금 사방에서 빛의 마법진이 생성되었다. 용왕이 주었던 5분의 시간이 끝났다. 전신이 허공에 부웅 떴다. 이쪽을 부르는 아니스의 목소리가 순식간에 멀어졌다. 사방이 캄캄해졌다. 깡통에 갇혀서 쉐킷쉐킷 흔들리는 딱정벌레의 심정을 만끽했다.
그리고 다시.
털푸덕, 촤아악!
“……구엑!”
안면으로 착지, 아니, 의도치 않았던 장렬한 헤드퍼스트 슬라이딩을 선보이며 마룡굴로 돌아왔다.
“그, 으, 어, 으, 억…….”
어디 부러진 건 아닐까. 전신이 다 아팠다. 하지만 엄살을 부릴 틈은 없었다. 겨우 잠탱이 모드에서 벗어난 용왕이다. 그런데 조금만 늘어질 시간을 주면? 다시 잠들어 버릴지도 모른다. 그럼 언제 또 깨어날지 아무도 모르는 거고.
라키엘은 의지의 한국인을 증명하듯 벌떡 일어났다.
“다, 다녀왔습니다!”
“응. 그래. 얼른 달여보렴, 숙면대보탕.”
“아, 옙.”
다행히 용왕은 잠들지 않았다. 대신 이쪽을 보자마자 재촉부터 했다. 라키엘은 그런 용왕의 심리를 조금은 알 것 같았다.
‘저거저거, 움직이는 김에 일거리 싹 다 묶어서 처리하려는 거…… 딱 집순이 집돌이 종특인데?’
그러하다.
움직이기 귀찮은 영혼들. 집에서 그저 뒹굴거리는 게 행복한 사람들. 그들 집순이 집돌이들이 그렇다. 어지간해선 나오기를 싫어한다. 그런데 살다가 피치 못하게 집 밖으로 나와야 하는 일이 생기면?
그때는 모드가 달라진다. 나온 김에 그동안 쌓인 일을 모조리 묶어서 처리하려 든다. 이유는 간단하다. 그래야 다음에 나올 일이 적어지니까. 덜 귀찮아지니까.
지금 용왕도 똑같은 것 같았다.
‘기왕 깬 김에 숙면대보탕 맛도 보고, 효과도 체험하고, 다 해보려는 거네.’
그럼…… 대신 내가 받을 도움은?
확인을 해보고 싶었다.
아니, 이건 짚고 넘어가야 한다.
안 그랬다간 자칫 용왕이 숙면대보탕을 마시고 꿀잠 모드로 바뀔 수도 있다. 이쪽에게 도움을 주기도 전에!
‘그건 안 되지!’
그러니 미리 약속을 받아야겠다. 숙면대보탕을 마시기 전에 도움부터 달라고. 결심한 라키엘은 심호흠을 한 뒤 작정하고 용왕에게 말했다.
“저기, 그런데 위대하신 용왕이시여?”
“응?”
“숙면대보탕을 달여드리기 전에 말입니다. 우선, 말씀드리고 싶은 것이 있습니다.”
“응. 너님 도와달라고?”
“아, 예.”
“응. 그런데 어떤 도움을 받을지도 궁금하다고?”
“옙.”
“응. 그럼 한국에 다녀오면 되겠네.”
“예?”
“한국. 거기 가서 왕창 챙겨오면 되잖아? 제약 공장에서 제대로 제조한 인슐린.”
“……뎃?”
듣고도 믿기지가 않는, 용왕이 제시하리라고는 상상도 못 했던 도움의 방법에 라키엘의 고막이 영덕대게 트리플악셀을 퐁당퐁당 뛰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