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36화. 익숙하여 아련한 (1)
“응. 그럼 한국에 다녀오면 되겠네.”
“예?”
“한국. 몰라?”
“아, 압니다?”
“잘됐네. 거기 가서 왕창 챙겨오면 되잖아? 제약 공장에서 제대로 제조한 인슐린.”
“…….”
듣고도 믿기지가 않았다. 한국? 인슐린? 용왕이 저걸 어떻게 아는 거지?
그런 이쪽의 찰랑찰랑 흔들리는 눈빛을 본 걸까.
용왕이 피식 웃었다
별거 아니라는 듯이.
“나님이 그걸 어떻게 알았느냐고?”
“예, 옙.”
“쉬워. 너님 인생을 통으로 살펴봤거든. 조금 전에. 마법으로.”
“옙?”
“인간의 인생이야 길어봤자 100년 내외니까. 너님의 경우는 대략 1,327,865,339초쯤 되더라?”
“그, 그렇습니까?”
“응. 그래서 5,000만 배속으로 살펴봤지. 덕분에 26.5초 만에 정주행을 완료했고.”
“…….”
“어릴 때 냉장고에서 장조림만 제법 쇽쇽 빼먹었더구만.”
“…….”
“초등학교 4학년 때는 소풍 간다고 받은 용돈을 따로 꿍쳐놨다가 몰래 만화책 샀지? 소년ㅊ프? 그런데 나름 머리를 쓴답시고 그걸 옷장 서랍에 숨겨놨어. 하필이면 엄마가 제일 자주 열어보는 양말 넣는 칸에.”
“…….”
“하루 만에 딱 걸렸지. 그리고 엄청나게 혼났고.”
“…….”
“그리고 고등학교 1학년 봄에는 처음으로 고백…….”
“그만! 거기까지!”
“그만?”
“…….”
“너님, 방금 반말했니?”
“아, 아뇨. 그만해 주십시오.”
“쓰읍. 방금 나님이 들은 말은 그런 뉘앙스가 아니었는데.”
“…….”
“잘하면 한 대 칠 것 같았는데.”
“죄송합니다. 제가 잘못했습니다. 기억을 다 봤다는 말씀 믿을 테니까. 거기까지만 해주시죠. 제발.”
“응. 그래. 나님은 관대하니까.”
“…….”
저거, 용왕만 아니면 진짜.
라키엘은 쓰려지는 속을 달랬다.
용왕 베르키스가 싱긋 웃었다.
“어쨌건 그렇게 너님의 기억을 탐색한 덕분에 다 알겠더군. 마계왕, 그놈이 무슨 꿍꿍이를 꾸미고 있는지도.”
“예. 그래서 심각한 상황입니다.”
“맞아. 지금 너님 실력으로는 죽었다 깨어나도 원시적인 인슐린 이상을 만들 수는 없을 테고. 그러니까 방법은 간단하지. 한국에 가서 인슐린을 가져와. 원하는 약품 딱 하나만. 그러면 내가 그걸 복사해 주지.”
“보, 복사를 말입니까?”
“그렇지.”
베르키스가 고개를 끄덕였다.
“내 마력을 동원하면 최소 3년은 버틸 분량까지는 복사가 가능할 테지. 미안하지만 그 이상은 불가능해. 물질 복사 자체가 차원의 엔트로피 법칙을 정면으로 거역하는 행위라서. 그나마 나님이니까 그 정도 분량까지 복사를 해줄 수 있는 거고.”
“저기, 그렇지만 말입니다.”
“아. 무슨 말 하려는지 알겠다. 유통기한?”“
“예.”
라키엘이 말했다.
“말씀처럼 3년 치 분량의 인슐린을 복사해서 주신다고 해도 크게 의미가 없을 수도 있습니다. 보통 인슐린 약품의 유통기한은 개봉 전을 4주, 28일로 잡는 터라…….”
“유통기한을 정지시키면 되겠네.”
“예?”
“복사하면서 서비스로 물질 변성을 막아주겠다고.”
“그게 가능합니까……?”
“원래는 불가능에 가까운 일이지. 그 또한 법칙을 거스르는 행위라서. 그럼에도 가능한 이유는 뭐, 나님이니까?”
“…….”
미쳤다.
용왕의 능력은 대체 어디까지인 걸까. 감탄하던 라키엘은 문득 새로운 가능성을 떠올렸다.
“저기, 그럼 용왕님? 혹시…… 데미안을 그냥 치유해 주실 수는 없겠습니까?”
어쩌면 가능할지도 모른다.
차원의 법칙을 막 거스르고!
물질도 복사하고!
그런 능력을 지닌 용왕이니까 1형 당뇨병쯤은 손짓 한 번에 파팟, 낫게 하지 않을까.
……라는 희망이 쑴펑쑴펑 피어났다.
하지만 돌아오는 용왕의 반응은 실망스러운 것이었다.
“흠, 그건 불가능.”
“예? 어째서요?”
“어째서긴.”
용왕 베르키스가 찌푸린 눈살로 데미안을 힐끗 쳐다보았다.
“저놈, 마계왕이 깃든 존재잖나.”
“예.”
“그러니까 안 되지. 내 마력을 느끼자마자 마계왕이 발악을 하면서 저항할 텐데.”
“제압하실 수는 없는 겁니까?”
“할 순 있지. 그런데 무리가 있어. 아마도 나님이 마계왕을 제압하기도 전에 저놈의 육신이 3분도 못 버티고 걸레짝이 될 거다. 한낱 그릇의 몸으로 나님과 마계왕이 벌이는 전쟁을 감당해야 할 테니까. 그럼 마계왕은? 목적을 이루는 거야. 옳다구나 하고 저놈 몸에 강림하겠지. 3분 카레보다 더 빠르게.”
“얼…….”
“게다가 설령, 기적적인 확률로 저놈의 육신이 그 전쟁을 버텨낸다고 해도 또 다른 문제가 있어.”
“어떤 문제입니까?”
“시간. 마계왕이 만만한 놈은 아니라서. 아무리 나라도 50년은 걸릴 테지. 제압을 하려면.”
“그, 그렇게 오래 걸립니까?”
“당연하지. 그래서 귀찮아.”
“…….”
“예쁘지도 않은 마계왕 따위와 50년이나 쎄쎄쎄? 내가 미쳤어?”
“죄송합니다…….”
“그래. 죄송한 줄을 알아야지. 지금 이렇게 이야기를 나누는 것도 귀찮아 죽겠는데.”
베르키스는 진심이었다.
다시 눕고 싶었다.
고이 잠들고 싶었다.
숨도 쉬기 귀찮았다.
그런데 일어나서 입 근육을 움직이며 말까지 해야 한다니. 그것도 아내가 자리를 비운 황금 같은 탈압박 시즌에. 이런 서글픈 비극이 또 있을까.
‘후우. 진짜 확 죽여 버리고 흔적까지 싹 없앨까.’
잠깐잠깐 파괴적인 충동이 들었다.
하지만 참았다.
죽이는 것도 귀찮고. 눈앞의 인간에게 깃든 드래곤의 추천장 흔적을 없애는 건 더 귀찮고. 예민한 잔소리쟁이 여동생의 이목을 속일 정도로 철저하게 증거를 없애는 건 더더욱 귀찮고. 게다가 결정적으로…….
‘만티코어 녀석이 이 인간을 봐 버렸어. 그런데 내가 이 인간을 슥삭 처리했다간…… 후폭풍이 몰아치겠지.’
만티코어가 돌아오는 아내에게 반드시 고자질을 할 것이다. 그럼 자신은? 엄청나게 혼나겠지. 도움이 필요하여 추천장을 들고서 찾아온 사람을 내치는 것도 모자라 해함은 군자의 도리가 아니어요 어쩌고저쩌고 쫑알쫑알.
“…….”
그런 사태는 맞이하고 싶지 않다. 베르키스는 필사적인 인내심을 발휘하며 귀찮음을 억눌렀다.
“어쨌건 그러니까 한국으로 가서 인슐린 약품을 가져와. 복사할 샘플로 딱 하나만.”
“…….”
라키엘은 입을 다물었다.
한편으로는 이런 도움을 주는 용왕이 고마웠다. 하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난감함도 느껴지는 것이 사실이었다. 용왕의 말대로 복사할 인슐린 샘플 하나를 가져오려면 무슨 짓을 해야 하는지를 깨달은 까닭이었다.
‘인슐린 약품 하나를 훔쳐야 하는 건가.’
의약품 절도.
그건 큰 죄다.
단순한 감기약도 아닌 인슐린 약품이라면 더더욱 그렇다. 인슐린 약품은 1형 당뇨병 환자에겐 말 그대로 생명줄이나 다름없는 존재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그걸 훔쳐야 한다니.
다른 이도 아닌, 한국에서 의료인이었던 자신이? 직업적 양심과 책임감을 버리고?
……꿀꺽.
잠깐 생각을 정리했다. 머리를 굴렸다. 약품 절도 외의 다른 방법은 없을까. 열심히 궁리를 해보았지만, 별다른 뾰족한 수가 떠오르지가 않았다.
‘인슐린은 전문의약품이니까. 반드시 의사의 처방전이 있어야만 구입할 수 있으니까.’
그런데 지금 이 상태로 한국에 가면? 처방전을 받는 건 고사하고 병원 접수도 못 할 것이다. 신분증이 없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
철판, 한 번 깔아볼까.
라키엘은 용왕의 눈치를 슬쩍 살폈다. 그리고 다짐했다. 약국에 침입해서 의약품을 절도하는 것보다는, 차라리 여기서 미운털 한 번 박히거나 쓴소리를 듣는 쪽이 훨씬 낫겠다는 판단에서였다.
“저기.”
“의약품 절도를 하는 게 꺼려지니 다른 도움이 될 방법을 알려주거나 유용한 도구를 달라는 거면 자, 여깄다.”
“…….”
“너님의 속을 어떻게 알았느냐고?”
“어, 옙. 혹시 마법으로 제 생각을 읽으신 겁니까?”
“아니. 천만에.”
“그럼 대체 무슨 수로…….”
“뻔하지.”
용왕 베르키스가 피식 코웃음을 쳤다.
“눈으로 다 말하고 있잖나. 이러이러한 사정이 있으니 좀 도와달라고.”
“…….”
“이런 말을 하면 어떻게 생각할진 모르겠는데, 나님이 인간의 눈치나 기색을 살피는 데에는 나름 도가 텄거든. 마스터 등급을 아득하게 초월했달까.”
“비, 비결이 있는 겁니까?”
“응. 인간 아내 눈치를 천 년 동안 보면서 살면 자연스럽게 이렇게 돼.”
“…….”
“왜 불쌍하게 쳐다보는 건데.”
“아, 아닙니다.”
“쯧. 됐고. 이거나 받아라.”
휙.
용왕이 품에서 꺼낸 뭔가를 휙 던졌다. 얼결에 받아들고 보니 유리로 만든 신용카드 비슷한 물건이었다.
“이건 뭡니까?”
“1회용 물질 복사기.”
“……예?”
“나님 여동생이 심심해서 만든 거야. 너님도 비슷한 거 갖고 있는 듯한데? 만년설, 만년필.”
“아.”
“어쨌건 그거, 복사할 물건에 붙여두고서 탁, 타닥, 탁탁탁. 이 박자로 세 차례 반복해서 두드리면 돼.”
“그럼 복사가 되는 겁니까?”
“으음. 대신 조건은 가로, 세로, 높이 각각 30센티미터 이하의 물건만 복사가 가능할 거야. 어쨌건 그 아티팩트를 쓰면 양심에 스크래치가 생기는 절도행위를 안 해도 되겠지?”
“……감사합니다!”
라키엘은 넙죽 인사했다.
1회용 물질 복사 아티팩트라니. 이거면 된다. 인슐린 약품을 ‘잠깐만’ 훔치거나 손에 넣고서 복사를 한 뒤에, 원본을 제자리에 돌려놓으면 되겠지. 그러면 결과적으로 피해를 입는 사람이 없어질 테고.
비로소 마음의 짐(?)이 덜어졌다.
용왕이 성가시다는 듯 손사래를 쳤다.
“감사 따윈 됐고. 다녀와서 약속대로, 알지?”
“옙. 숙면대보탕, 책임지고 달여드리겠습니다.”
“그래. 그럼 귀찮으니 이만 꺼져 버리렴. 돌아오고 싶을 때는 ‘귀향’이라고 외치면 된단다?”
딱!
용왕이 손가락을 튕겼다. 경쾌한 소리와 함께 사방에서 마법진이 입체적으로 일어났다. 이쪽과 데미안을 한데 묶으며 감쌌다.
샤아아아아……!
기하학적인 도형과 문자가 빛나며 얽혔다. 다차원적 구조를 형성했다. 사방을 감싸고, 휘돌고, 메아리치다, 마침내 점멸했다. 아득한 우주가 하나의 점에서 탄생했던 때처럼. 그 언젠가 태초의 빛무리가 공간을 형성했던 것처럼.
모든 것이 뒤집혔다.
아니, 뒤섞였다.
요동쳤다.
“……!”
우렁찬 섬광, 짜디짠 굉음, 뾰족한 어둠, 검정색 간지러움, 소리치며 달려오는 달달함, 삽시간에 떠나가는 어린 시절의 나, 그 언젠가 기울어지던 술잔, 틈새로 비치는 수많은 나, 나, 나, 눈빛과 눈빛들, 모두가 이쪽을 향하고, 모두가 입을 모아 말하고.
“……!”
얼결에 외쳤다. 그러나 입에서 나오는 소리가 들리지 않았다. 수많은 차원의 틈에서 이쪽을 향하는 눈빛과 목소리가 무슨 뜻인지 알 수가 없었다. 저게 전부 나일까. 혹은 허상일까. 더 관찰할 틈도 없었다.
차가운 보도블록의 갑작스러운 환영을 받아야 했기 때문이었다.
털썩!
“……어악!”
누가 내동댕이를 친 것처럼 바닥을 굴렀다. 어지러웠다. 고개를 흔들었다. 10분쯤 눈두덩이를 누르고서 맹렬히 비빈 듯이 시야가 엉망이었다. 눈을 떠도 초점이 좀처럼 잡히질 않았다. 그 와중에 한 가지는 어렴풋이 알 수 있었다.
누군가가 다가오고 있었다.
“저기, 괜찮으세요?”
걱정되는 듯 살짝 허리를 굽히고서 물어오는 사람. 그 사람의 실루엣을 향해 초점을 모으려 애를 썼다. 눈에 힘을 주었다. 시력이 조금씩 정상으로 돌아왔다.
비로소 보였다.
평범한 40대 중반의 아저씨였다. 하얀 마스크를 썼고, 두툼한 파카를 입었고, 목도리를 걸쳤고, 한 손에는 휴대폰을 쥐고 있는, 너무나 평범한.
“…….”
잠깐만.
휴대폰?
라키엘은 흠칫하며 눈길을 다른 곳으로 돌렸다. 비로소 익숙한, 그리운, 그런데 한편으로는 오랜만이라서 어쩐지 낯선 광경이 시야 가득 들어왔다.
빵빵-!
어디선가 들려오는 자동차 경적 소리. 눈 쌓인 보도블록 곁 도로를 달리는 자동차들, 그 너머로 우뚝 서 있는 상가 빌딩, 빌딩, 또 빌딩.
‘여긴…….’
비로소 그는 자신이, 너무나 익숙한 곳으로 도착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자신의 한의원이 있던 근처. 대한민국 경기도 고양시, 일산 마두동의 학원이 밀집한 상가 거리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