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약 파는 황태자-337화 (336/468)

337화. 익숙하여 아련한 (2)

“전하?”

“어.”

“여기가 어디인지 아십니까?”

“아니. 몰라.”

나직하게 들려오는 데미안의 물음. 라키엘은 냉큼 고개를 저었다.

당연히 거짓말이었다.

사실은 안다. 너무나 잘 안다. 당연하다. 자신이 살던 근처니까. 한의원이 있던 근처니까. 너무나 익숙한 거리니까.

“…….”

설마 용왕은 이쪽의 기억을 토대로 일부러 여기로 보낸 걸까. 어쩌면 그런지도 모르겠다. 기왕 한국에 와서 움직이는 거라면, 익숙한 동네가 조금은 편할 거라 본 것일지도.

‘이걸 고마워해야 하나.’

라키엘은 남몰래 쓴웃음을 머금었다. 그리고 주위를 둘러보았다. 익숙한 도로와 상가 거리. 계절은 한겨울이었다.

덜 녹은 시커먼 눈이 보도블록 구석구석 쌓여 있었다. 사람들의 걸음은 칼바람을 피하듯 바빴다.

한데 그 와중에도 눈빛만큼은 이쪽을 꼭 쳐다보며 지나가곤 했다.

호기심? 아마도 그렇겠지. 이 한겨울에, 낯선 스타일의, 계절에 맞지 않는 옷을 입은 외국인 두 사람이 오들오들 떨면서 걷는 모습을 본다면 누구라도 궁금해할 테니까.

“전하, 사람들이 이쪽을 쳐다봅니다. 혹시 위화감을 느끼는 것일까요.”

“글쎄. 불쌍해하는 것 같은데.”

“제가…… 아파 보이기 때문입니까?”

“글쎄다.”

라키엘은 다시금 쓴웃음을 머금어 버렸다.

“일단 우리가 무슨 목적으로 여기에 온 건지는 너도 알겠지?”

“예. 용왕과 나누시는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그래. 우리는 이곳 세상에서 제대로 만들어진 인슐린을 찾아서 복사해야 해.”

“그게 어디에 있는지 아십니까?”

“어.”

라키엘은 또다시 거짓말을 했다.

“아까 차원이동 마법이 발동되던 도중에 용왕이 나한테만 살짝 귀띔해서 알려주더라. 약국이라는 곳으로 가면 된다고.”

“약국이요?”

“어. 저기. 저거 같은데?”

도로를 따라 죽 늘어선 수많은 상가 빌딩들. 그중에 하나를 가리켰다. 그곳 1층에 약국이 하나 보였다. 기억 속에 있던 약국 그대로였다.

‘다행이다.’

그는 데미안과 함께 약국 쪽으로 걸으며 주위를 살펴보았다. 너무나 익숙한 거리. 기억 속 그대로의 모습이었다.

점심 먹으러 종종 찾던 돈까스집. 저기 돈까스랑 제육을 같이 시키면 진짜 맛있었는데. 그 옆에는 가끔 들르던 카페와, 로또를 사러 들르던 편의점도 보였다.

“…….”

그러고 보니까 양화대교에서 떨어지기 이틀 전에 저쪽 편의점에서 로또, 자동으로 5천 원어치를 샀던 기억도 났다.

사소한 일이라 까먹고 있었는데, 그거 어떻게 됐을까. 그래 봤자 이젠 소용도, 상관도 없는 일이겠지.

저쪽으로 조금 더 걸어가면 있을, 내 한의원이 있던 건물도 물론, 이젠 나와 아무 상관 없는 곳이 되어 있겠지.

‘쯧.’

그는 씁쓸해지는 잡념을 털어내며 약국 문을 열었다.

딸랑.

“어서 오……세요?”

약사 아주머니가 습관적인 손님맞이 인사를 하려다가 흠칫했다. 아마도 이쪽의 낯선 외양 때문인 것 같았다.

“헤, 헬로?”

외국인만 보면 자동으로 긴장을 하면서도, 끝끝내 영어로 대화를 걸어주는 한민족의 따스한 친절함이란!

라키엘은 쓴웃음을 삼키며 물었다.

“저기, 여쭤볼 게 있어서 왔는데요.”

“어? 어어? 한국말, 잘하네요?”

“아, 예…….”

“그런데 어쩐 일로……. 일단 마스크부터 좀 써 주시겠어요?”

“아, 예?”

“마스크요. 마스크.”

“……어엇.”

라키엘은 화들짝 놀랐다. 제법 오랜 시간 저쪽 차원에만 있었더니 마스크를 쓰는 습관을 완전히 잊고 있던 탓이었다. 그는 황급히 셔츠 목깃을 당겨서나마 코와 입을 가렸다.

“어, 죄, 죄송합니다. 깜빡하고 그냥 나왔네요.”

“외투도 깜빡한 거 같은데…….”

“아, 예……. 급하게 나오느라.”

살짝 의심스러운 걸까. 약사 아주머니가 이쪽의 위아래를 노골적으로 살펴보는 게 느껴졌다.

“…….”

당장 나가야 할까.

다행히 그런 일은 벌어지지 않았다. 약사 아주머니는 평소의 손님맞이 모드(?)로 돌아간 듯이 물어왔다.

“처방전 가져오셨어요?”

“아뇨. 그건 아니고요.”

내심 안도한 라키엘은 염두에 두던 인슐린 이름을 재빨리 물었다.

“혹시 ‘트레제오’가 있나 해서요.”

“아, 인슐린 주사요?”

“네. 혹시 있나요?”

아마도 있겠지.

기대하며 물었다.

그런데 돌아오는 대답은 뜻밖의 것이었다.

“아. 트레제오요? 그거 요즘 구하기 어려운데.”

“……네?”

저건 또 무슨 소리일까.

약사 아주머니의 말이 이어졌다.

“몰랐어요? 법이 바뀌는 바람에. 생물학적 제제 배송 규정. 안 그래도 요즘 그거 때문에 난리도 아녜요.”

“어…….”

라키엘은 흠칫했다.

잠깐.

생물학적 제제 배송 규정?

그거 아는데.

예전, 한국에 있던 때의 기억이 어렴풋이 떠올랐다. 때마침 약사 아주머니가 설명을 해주었다.

“독감 백신 냉장 보관에 문제가 생겨서 법이 개정됐어요. 뭐라더라? 사람이나 다른 생물체에게서 유래된 원료나 재료로 만든 의약품을 운송할 때는, 무조건 자동 온도 기록장치가 설치된 수송 용기나 차량을 써야 한다나요. 게다가 유통 관련 기록을 2년 동안이나 보관하는 것도 필수가 됐고요.”

“그렇……습니까?”

“네. 아무튼, 그거 때문에 난리가 났어요, 아주. 의약품 유통회사 입장에서는 그렇지. 갑자기 돈 들여서 비싼 수송 용기랑 시설을 마련해야 하잖아요? 그걸 해도 유통 마진은 그대로고. 그러니까 유통사 입장에서는 괜히 비싸게 돈 들여가면서 손해 보길 싫어하는 거지.”

“약품 유통을 안 하는 겁니까, 그래서?”

“…….”

라키엘은 할 말을 잃었다.

자신이 양화대교에서 떨어지기 전에도 이랬다. 의약품 유통에 관한 법이 바뀌면서 난리가 났더랬다.

그 때문에 인슐린이 생존 필수품, 아니, 공기나 다름없는 1형 당뇨병 환자들의 고통이 이만저만이 아니라던 소식이 기억났다.

그런데 그게 아직도 해결이 안 되고 있었다니.

‘큰일 났네.’

철렁 내려앉으려는 가슴을 애써 수습하며 물었다.

“그럼 혹시 트레제오가 있는 다른 약국이라도 알려주실 순 없나요?”

“으음, 미안해요. 아마 근처 다른 약국들도 비슷할 건데. 차라리 주문이라도 해둬요. 처방전 가져오면 주문 넣어둘게요.”

“그럼 언제쯤 받을 수 있는 거죠?”

“그건 약품이 와봐야 알죠. 벌써 대기 올려둔 사람들도 제법 있어서.”

“아, 예…….”

미치겠네.

상황의 심각성이 피부로 느껴지기 시작했다. 이건 너무 뜻밖의 상황이었다.

‘내가 양화대교에서 떨어지고 저쪽 세상으로 넘어간 게 벌써 2년이 다 돼가는데, 이 문제가 아직도 해결이 안 됐을 줄이야.’

설마 이럴 줄은 몰랐다.

난감해졌다.

‘어떡하지?’

약국에서 나오니 한겨울의 칼바람이 다시금 이쪽을 맞이했다. 한결 막막해졌다. 원래 생각하던 계획이 왕창 어그러진 까닭이었다.

‘어지간한 약국에 가도 트레제오는 있을 줄 알았는데.’

인슐린 약품인 트레제오가 있는지만 확인하고, 밤에 약국에 들어가서 복사를 하려 했다.

들어가는 방법? 쉽다. 요즘 어지간한 상가 약국은 전부 1층에 있고, 문이 유리로 되어 있으니까. 그냥 깨고 들어가려 했다.

돌이든.

만년필이든.

뭐든지 써서 유리문을 부수고, 안으로 들어가서 재빨리 복사만 하면 된다.

경찰? CCTV? 그게 무슨 대수일까. 복사를 마친 직후에 용왕이 알려준 대로 차원 귀환 마법만 발동하면 만사 오케이였을 것이다.

부숴 버린 유리문에 대한 배상? 옷에 달린 순금 단추 몇 개를 떼어서 카운터에 넣어두려 했다. 그거면 유리문 수리비를 하고도 최소 몇 배는 돈이 남을 테니까.

완벽한 먹튀.

그게 원래의 계획이었다.

한데 이제는 그 계획에 심각한 차질이 생겼다.

‘트레제오 자체를 구하기가 어려워졌어. 아니, 시간이 있다면 어떻게든 구할 수는 있을 텐데 문제는…… 그때까지 버틸 현금이 없다.’

라키엘은 주머니를 뒤적였다.

물론 그런다고 해서 대한민국의 현금이 나올 리는 없었다. 신용카드? 당연히 없고. 휴대폰도 없고. 신분증도 없고. 말 그대로 이건…….

‘생긴 것만 멀쩡한 거지꼴이네.’

아니, 거지는 차라리 옷이라도 두툼하지. 지금 자신과 데미안은? 겨울에 입기엔 제법 얇은 옷을 걸친 채 길바닥에서 와들와들 떨고 있으니, 어찌 보면 거지보다도 못한 신세라 할 수 있겠다.

‘어떡하지?’

돈이 있어야 모텔이든 찜질방이든 가서 머무를 수 있을 텐데.

쌩쌩 불어오는 바람이 차가워질수록 막막해졌다. 당장 금은방에라도 가서 금붙이 장식을 팔아볼까도 싶었다.

하지만 이내 고개를 저어야 했다. 금은방에서 금을 매매할 때는 신분증이 있어야 하니까.

‘망할.’

하지만 포기할 수는 없었다. 마침 익숙한 동네니까, 그나마 덜 헤맬 수는 있겠다. 그런 일념으로 계속 움직였다.

기억을 더듬어가며 최적의 동선으로 상가에 분포한 약국들을 차례차례 방문했다.

그러나 어느 곳에서도 목표로 하는 인슐린 약품인 트레제오를 구할 수가 없었다.

어느 약국에서는 난감한 기색을 보였고, 또 어느 약국에서는 처방전도 없이 인슐린 약품을 물으러 다니는 외국인에 대한 경계심을 보이기도 했다.

그렇게 시간은 흘러가고.

뚜렷한 성과는 없고.

점점 해는 지고.

바람은 더 차가워지고.

희망이 사라지는 자리에 위기감이 불쑥 커져 갔다.

“괜찮아?”

“예, 전하…….”

“안색이 안 좋은데?”

“아닙니다. 괜찮습니다…….”

“…….”

데미안이 애처로울 정도로 떨고 있었다. 이미 불사복치 뽀복이를 옷 속에 품고 있을 텐데. 불꽃 지느러미가 손난로 역할을 해줄 텐데. 그럼에도 춥겠지. 옷마저 얇고, 병을 얻은 신세니 더하겠지.

라키엘은 탄식했다.

‘여길 떠나기 전에 산 로또 용지만 있었어도…….’

최소한 당첨 확인을 해볼 수는 있었을 것이다. 4등이면 5만 원, 아니, 5등짜리 5천 원이라도. 그거라도 있었으면 편의점에 들러서 따끈한 컵라면 국물로 잠시나마 몸을 데울 수 있었을 것이다.

그는 처절해지려는 기분을 누르며 말했다.

“후우. 일단 약국 한 군데만 더 들렀다가 바람을 피하자.”

“알겠습니다.”

라키엘은 익숙한 방향으로 걸음을 옮겼다. 그곳에 너무나 낯익은 건물이 보였다. 바로 자신의 한의원이 있던 상가 건물이었다.

그걸 보자마자 한숨부터 푹 나왔다.

‘여기만큼은 오고 싶지 않았는데.’

그런데 어쩔 수가 없겠다.

이곳 상가 거리에서 방문하지 않은 마지막 약국이 1층에 있기 때문이었다.

‘딱 저기만 들러서 물어보고, 그래도 트레제오가 없으면 바로 비상구 계단으로 올라가는 거야. 거긴 사람들 눈에는 띄지 않으면서 바람을 피할 수 있고, 그나마 계단에 앉을 수도 있을 테니까.’

거기서 바람을 피할 겸 휴식을 취하며 앞으로의 계획을 점검해봐야겠다.

그는 약국으로 들어갔다.

1층 약국의 풍경은 낯익었다. 기억 속의 모습 그대로였다.

머리가 벗겨진 약사 아저씨의 모습도, 한쪽에 놓인 티브이도, 티브이에서 흘러나오는 스포츠 뉴스 리포터의 목소리도 그러했다.

- 다음은 영국 프리미어 리그 토트넘 핫스퍼의 경기 소식입니다. 지난밤 한국 시간으로 오후 11시에 시작된 프리미어 리그 19라운드에서 토트넘 핫스퍼가 셰필드 유나이티드 FC를 3 대 1로 기분 좋게 격파하며 전반기 일정을 마무리 지었습니다. 특히 토트넘의 손흥민 선수는 전반 5분 코너킥을 통해 득점에 결정적인 영향력을 발휘하며 승리를 견인하는 데에 일조하였으며…….

……어?

라키엘은 흠칫했다.

토트넘? 19라운드? 셰필드전?

듣자마자 뭔가 쌔하면서도 전기에 감전되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

‘뭐야. 19라운드 셰필드전? 그거…… 내가 보려고 기다렸던 경기였는데?’

무심코 기억이 났다.

자신이 양화대교에서 떨어지던 날. 거기서 하루 뒤가 경기 예정일이었던 게 생각났다. 그런데 지금 티브이에서 그 소식이 나오고 있다고? 하루 전 경기라고? 그게?

‘설마…….’

올해도 프리미어 리그 경기 일정이 그때 시즌과 복붙인 걸까.

그럴 리가 없는데.

그때였다.

“저기, 헬로? 무슨 일로 오셨어요?”

약사 아저씨의 떨떠름해하는 물음이 들려왔다. 라키엘은 아저씨를 돌아보았다. 그리고 물었다.

“저, 죄송한데, 오늘이 며칠입니까?”

“……예?”

“오늘 날짜가…… 언제죠?”

“어, 음, 1월 18일인데요?”

“년도……는요?”

“그걸 왜 물어요?”

“년도, 언제입니까.”

“…….”

약사 아저씨가 인상을 찡그렸다. 그리고 별 이상한 사람 다 보겠다는 듯이 대꾸했다.

“21년입니다, 21년 1월 18일. 그래서 처방전은요?”

“…….”

라키엘은 대답하지 못했다. 대신 그는 머리를 부여잡고 싶은 기분을 가까스로 참아야 했다.

비로소 지금, 이쪽 세상의 시간이 언제인지를 명확하게 알게 된 까닭이었다.

‘그러니까…… 지금 여기 시간이…… 내가 양화대교에서 떨어진 지 겨우 3일이 지난 시점이라고?’

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