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38화. 익숙하여 아련한 (3)
‘그러니까…… 지금 여기 시간이…… 내가 양화대교에서 떨어진 지 겨우 3일이 지난 시점이라고?’
처음엔 장난인 줄 알았다.
그런데 아니다.
이쪽을 보는 약사 아저씨의 성가셔하는 표정이 그렇다. 티브이에서 흘러나오는 소리 또한 그렇다. 아니, 이게 사실이 아니길 바라는 게 내 솔직한 심정인 거겠지.
“…….”
그럼 내 원래 몸은 어떻게 된 걸까. 살아는 있는 걸까. 아니면 그냥 죽었나? 만일 양화대교에서 떨어진 그날 내가 죽은 거라면, 그럼 오늘이 장례식이 끝나고 발인이 되는 날일 텐데.
어지러워졌다.
눈앞이 핑 도는 기분이 들어 고개를 세차게 흔들었다.
‘정신 차려, 이한.’
이럴 때일수록 흔들리면 안 된다. 감상에 빠져 허우적거려도 곤란하다. 어려울수록 그 속에서 기회를 붙잡을 수 있도록 눈을 부릅떠야 한다. 지금 같은 순간이 그렇다.
그는 멘탈을 수습하려 애썼다.
‘침착하자. 생각을 하자. 이거 따지고 보면 유용한 정보를 얻은 거야. 지금이 양화대교의 그날에서 3일밖에 안 지난 시점이라면 써먹을 수 있는 것이…… 그래. 그거다.’
번득.
섬광처럼 떠오른 생각. 지금의 곤경을 극복할 묘수가 번득였다.
‘내 원룸!’
이곳 근처에 살던 집이 있다.
걸어서 대략 15분 정도 거리밖에 되지 않았다. 지금이 양화대교 데이(?)에서 3일 뒤인 시점이라면, 분명 당시에 살던 원룸도 그때 상태 그대로 남아 있을 것이다.
‘집에 가면 돼. 현관 비번이야 당연히 기억나고. 항상 비상금으로 꿍쳐놨던 현금 30만 원도 있을 거고. 당장의 추위를 피할 수도 있고. 냉장고에 반찬도 있어. 씻고, 먹고, 쉴 수 있는 거야. 특히 데미안이.’
한겨울의 추위에 돈도 없이 길거리를 방황하느라 얼마나 힘들었던가. 그 어려움을 간단하게 해결할 수 있다. 집에 가기만 하면 된다. 게다가…….
‘집엔 인터넷도 되니까. 트레제오가 어느 약국에 있는지 검색해볼 수도 있지.’
생각할수록 기가 막힌 수였다. 한편으로는 묘한 감상이 슬며시 고개를 치켜들긴 했지만.
“…….”
여기 건물 3층, 올라가 볼까. 아니. 그건 좀. 한의원에 있던 짐이나 집기는 진즉에 정리하고 다 뺐으니까. 휑한 공실만 날 맞이할 거니까. 괜히 그런 거 봤다가 기분만 더 이상해지겠지.
그러니까…….
“아, 21년 1월 18일. 알겠습니다. 감사합니다.”
미심쩍은 눈길을 보내는 약사 아저씨에게 인사하고는 약국에서 나왔다. 뒤따라 나오는 데미안의 얼굴에는 수심이 서려 있었다.
“역시. 여기에도 전하께서 찾으시는 약품은 없는 겁니까.”
“어. 아마도. 하지만 다른 방법은 떠오른 것 같다.”
“어떤 방법입니까?”
“그게, 으음…….”
대답하려던 라키엘은 입을 다물었다. 집으로 가서 지금의 모든 곤경을 해결하겠다는 묘수. 그것 자체는 좋긴 했다. 그런데 막상 데미안에게 그걸 말하려니 마음에 걸리는 부분이 있었다.
‘그랬다간 나, 들킬 거 같은데.’
데미안의 기색을 살폈다.
녀석은 바보가 아니다.
아니, 똑똑한 편이다.
눈치도 은근 빠르다.
사실 오늘 몇 시간째 이곳에서 돌아다니며 약국을 전전한 모습으로도 녀석이 의심을 품기엔 충분했다.
‘당연하지. 다른 차원에 온 것치고는 내가 너무 자연스럽게 행동했지. 나름 어색한 척을 하고는 있지만…… 그래도 제법 티가 날 거야.’
그건 어쩔 수가 없다.
몸짓. 눈빛. 호흡. 그 밖의 모든 기색들까지. 사람에게서 배어나는 무의식적인 태도와 분위기라는 게 있는 거니까.
아마 오늘의 이쪽도 마찬가지였을 것이다. 오랜만에 평생을 살던 곳에 돌아왔다.
하필이면 익숙한 거리를 내내 돌아다녀야 했다. 그러는 동안에 이쪽이 1초의 빈틈도 없이 일류 배우의 연기력을 선보였을까?
아니.
그건 아니겠지.
아무리 애를 써도 잠깐씩은 빈틈이 있었겠지. 그 틈으로 조금씩은 티가 났을 거고. 눈치가 빠른 데미안은 이미 뭔가가 이상하다고 여기고 있을지도 모르겠다.
‘그래서 좀.’
쌔했다.
이미 조금씩 티가 나고 있는 상황에서 녀석을 이쪽의 집에까지 데려가면? 그러면 끝이다. 무조건 들킨다.
들킬 수밖에 없다. 아무리 얼버무려도, 뻔뻔하게 철판을 깔아도, 상황이 그쯤이 되면 더는 숨길 수가 없게 된다.
자신이 살던 집에 돌아온 사람의 태도와 분위기를 이쪽이 감출 수는 없을 테니까. 아무리 감추려 애를 써도 데미안의 눈치라면 충분히 감을 잡을 테니까.
‘후우…….’
그렇게 만일, 녀석이 이쪽의 정체를 알면 어떻게 되는 걸까. 이쪽에 대한 충성을 철회할까. 혹은 지금까지 자신을 속였느냐며 황제에게 보고할까. 모르겠다. 예측이 되지가 않았다. 그래서 불안했고, 망설여졌다.
그때였다.
데미안 녀석이 뜻밖의 말을 꺼냈다.
“괜찮습니다, 전하.”
“……어? 뭐가?”
“전하께서도 제 비밀을 숨겨주셨으니까 말입니다.”
“뭐……?”
“제가 인간이 아니라는 걸, 마계왕이 빚어낸 한낱 그릇에 지나지 않는다는 걸, 아무에게도 밝히지 않고서 홀로 감당해 주셨지 않습니까.”
“…….”
희미하게 웃는 데미안은, 뭘 말하려는 걸까.
“전부터 종종 생각했던 겁니다. 입장을 바꾸어서 제가 전하였다면, 자신의 호위가 사람이 아닌 그 무언가의 존재라는 걸 알았을 때 어떻게 반응했을지를 말이지요.”
“그게, 나는…….”
“전하께서는 아무 반응도 보이지 않으셨습니다. 저를 향한 태도를 바꾸지도 않으셨지요. 마치, 그게 어때서? 라고 말하는 듯이 말입니다. 아마도 저라면, 그렇게는 못 했을 것 같습니다.”
“…….”
사실 그건 그럴 수밖에 없었다. 적어도 이쪽의 입장에서는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다. 한데 데미안이 받아들이기엔 조금 달랐나 보다.
“고마웠습니다. 그때부터였습니다. 전하. 아니, 당신이 누구이든, 그 무엇이든 상관하지 않겠다고 마음을 먹은 것은 말입니다.”
“무슨 소리를 하는 거야, 지금.”
“전하께선 망설이실 필요가 없다는 뜻입니다.”
“뭐?”
“여긴 황제의 눈과 귀가 닿지 못하는 곳이니까요.”
“…….”
눈치, 채고 있었구나.
데미안의 미소를 보는 순간 깨달을 수 있었다. 더는 숨기는 게 의미가 없겠다는 사실을. 그리고 이쪽이 어떤 존재이건 상관하지 않겠다는 녀석의 말이 진심이라는 것도.
고마웠다.
그런데 그걸 티 내기는 싫었다. 어쩌면 그래서였을 것이다. 믿어주어서 고맙다는 말 대신 어처구니가 없다는 듯이 웃어 버린 것은.
“허허. 오늘 우리 카이엔 경께서 왜 이러실까. 그러면 내가 뭐, 고마워할 줄 아셨나.”
“딱히 고마워하시길 바란 건 아닙니다만.”
“조금 느끼했던 건 알지?”
“……그랬습니까?”
“어. 귓구멍에서 토 나올 뻔.”
“아깝군요. 조금 더 분발하는 건데.”
“분발할 힘은 있고?”
“그닥. 없습니다.”
“딱 그래 보이긴 하네. 그럼 가자.”
“어디로 말입니까?”
“쉴 수 있는 곳으로.”
천천히, 데미안이 쓰러지지 않도록 조심조심 걸었다. 평소 걸음으로 15분이면 도착할 거리를 30분을 걸려 움직였다.
마두동 학원가와 풍산역 사이의 주택가. 그곳에 이쪽이 살던 원룸이 있었다.
빌라 건물은 기억 그대로의 모습이었다.
분리수거 쓰레기를 내놓는 너저분한 공간도. 그 곁의 눈치싸움이 치열한 좁은 주차장도. 심지어 1층 복도의 우편함에는 이쪽 앞으로 온 우편 봉투도 서너 개나 꽂혀 있었다.
‘하.’
잠깐 뽑아서 볼까 하다가 관뒀다. 봐봤자 어차피 따사로운 내용의 편지 따위는 없을 테니까. 죄다 은행, 혹은 카드사에서 날아온 것들이겠지.
대체적으로 돈 내놓으라는 내용을 간결하고 무미건조하게 채워둔. 그래서 어떤 의미로는 더 무서운.
하지만 이제 이쪽과는 상관이 없는 것들이다. 그냥 지나쳤다. 데미안을 부축하며 제법 가파른 2층 계단을 올랐다.
현관 앞에 서자 저도 모르게 가슴이 두방망이질 쳤다. 잠깐이었지만 불길한 상상이 떠오른 까닭이었다.
“…….”
만일, 양화대교에서 내 원래의 몸이 죽은 거라면? 그래서 오늘이 발인 날짜인 거라면? 그럼 그 사이에 누군가가 원룸에 다녀갔을까.
아니. 가족이라곤 한 명도 없으니까 그럴 리는 없을 거고. 친구놈들이 뒷정리를 하러 온다고 해도 최소 며칠은 더 지난 뒤가 되겠지.
달칵.
전자도어 커버를 올렸다. 낡은 번호판을 따라 손가락이 습관처럼 움직였다.
띠띠띠- 띠, 딱히 기억을 살리려 애쓰지 않아도 저절로 움직이는 손길을 따라 도어 잠금쇠가 철컥, 전자음과 함께 열렸다.
“들어가자.”
두꺼운 현관문 안쪽은 너저분했다. 기억 그대로의 모습이었다.
현관엔 슬리퍼와 낡은 운동화 두어 개가 자유분방하게 굴러다니고 있고, 그 안쪽 원룸은 정리되지 않은 날것 그대로의 상태였다.
하긴 그럴 법도 하다.
양화대교의 그날 직전, 며칠 동안의 이쪽은 정상인 상태가 아니었으니까. 거의 술에 절어서 지냈으니까. 맨정신으로 버티기엔 당시의 상황이 너무나 서글펐으니까.
……라고 변명할 틈은 없었다.
“너저분하군요. ‘누가’ 살던 곳인지는 몰라도.”
원룸 상태를 둘러본 데미안 녀석이 냉정한 평가를 날려 왔다.
“마치 돼지우리 같습니다. ‘누가’ 살던 곳인지는 모르겠지만.”
“…….”
“어찌 보면 빈민굴의 풍경처럼 보이기도 합니다. ‘누가’ 살던 곳인지는 정말로 알 수가 없지만.”
“…….”
“힘들게 사셨군요.”
“쯧.”
라키엘은 쓴웃음을 머금고 말았다.
원래는 이렇게까지 엉망인 생활은 아니었다. 제법 괜찮은 투룸에서 살기도 했다. 하지만 어쩔 수가 없었다.
코로나 때문에 한의원 매상은 바닥을 기는데, 대출 이자와 한의원 임대료, 거기에 간호사 쌤들 월급까지 안 밀리고 주려니 제 살을 깎아 먹는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그런 변명, 이제 와서 무슨 소용이 있을까.
“됐고. 얼른 누워. 여기.”
“거기에 말입니까?”
“어. 안 지저분하거든? 나름 20일쯤 전에 빤 이불이거든?”
“웩.”
“…….”
“그럼 또 주사, 놓아주실 겁니까?”
“그래야지. 일단 혈당부터.”
“……알겠습니다.”
데미안은 침대에 누웠다. 그리고 자신의 상태를 진단하느라 여념이 없는 라키엘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차가운 칼바람.
낯설고 거대한 건물들.
빠르게 오가는 괴상한 마차.
그 속에서 추위에 떨며 반나절을 방황했다. 그럼에도 괜찮느냐고 말을 걸어주는 행인이 아무도 없었다.
그런 세상인가 싶었다, 이곳은. 이런 곳에서 이토록 악착같이 살았나 싶었다, 이 사람은.
‘당신은…….’
그 생각을 마지막으로, 데미안은 급격한 피로감을 느꼈다.
갑자기 들어온 따뜻한 실내. 조금은 퀴퀴하지만 포근한 이불. 존경하는 이가 놓아주는 주사. 모든 것이 그의 긴장감을 무너뜨렸다. 잠이 쏟아졌다. 저항할 수가 없었다.
“후우.”
데미안이 완전히 잠든 후에야 라키엘은 뒤늦은 한숨을 내쉴 수 있었다. 그 사이 집에 아무도 다녀가지 않아서 다행이었다.
조심조심 일어난 그는 현관 비번부터 바꾸었다. 그리고 컴퓨터를 켰다.
인터넷 검색은 오랜만이었지만 쉬웠다. 그는 얼마 지나지 않아 목표물(?)을 찾아낼 수 있었다.
‘있다……!’
어느 당뇨병 환우들의 커뮤니티를 뒤적이던 그는 인슐린 약품 재고 현황을 공유하는 게시물을 찾아냈다.
그곳에 온종일 찾아 헤맸던 ‘트레제오’를 보유한 약국의 리스트가 있었다.
그중에서 제일 가까운 곳은…….
‘운정 신도시? 산내마을? 그럼 여기 일산에서 근처네.’
됐다.
이 정도 거리면 오늘 바로 움직일 수 있겠다. 희망과 함께, 아무에게도, 어떠한 피해도 주지 않으며 약품을 복사할 방법 또한 떠올랐다.
“그러니까 꼬슴아?”
“꼬슴?”
그는 품에서 꺼낸 꼬슴이를 보며 싱긋 웃었다.
“이번엔 네 활약이 좀 필요할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