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39화. 꼬슴이의 미션 임파서블 (1)
이곳의 익숙한 거리는 마주할 때마다 나를 미치게 만든다. 이곳을 보아도, 저곳으로 눈을 돌려도, 모든 길목에 기억이 묻어 있다.
추억이 배어 있다. 이제는 아무런 쓸모도 없어진 일상의 추억과 시간들이 자꾸만 엉겨붙어 온다.
이쪽의 의사와는 아무런 상관 없이.
‘하…….’
라키엘은 끝까지 끌어올린 롱패딩 지퍼 사이로 목을 움츠렸다. 그리고 한숨처럼 번지는 새하얀 입김 사이로 손을 들어 올렸다.
그러면 사람을 자꾸만 묘한 감상으로 몰아가는 이곳의 풍경으로부터 멀어질 수 있을 듯이.
다행히 들어 올린 손길에 화답이 왔다. 지나가던 택시 한 대가 속력을 줄이면서 다가왔다. 도망치듯 택시 2열 시트에 몸을 구겨 넣었다.
“운정신도시 산내마을 햄플러스 정문이요.”
“예에. 어이구? 외국분이신가?”
“…….”
굳이 대답하지는 않았다. 택시 기사님도 머쓱해졌는지 그 뒤로는 운전에만 집중했다.
그동안 물끄러미 창밖을 보았다. 휙휙 지나치는 시가지. 그걸 보니 기분이 다시금 묘해졌다.
나는 저곳 세상에서 2년 남짓한 시간을 보내다가 왔는데, 그런데 이곳의 시간은 고작 3일이 지났을 뿐이라니. 마치 과거의 추억을 강제로 대면하는 기분이 들었다.
반갑고도 서글펐다. 지금 이 순간, 이 땅 어딘가엔 한때 이한으로 살았던 내 시신이 남아 있을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어서.
그런 내 시신을 보며 슬퍼할 친구들이 멀지 않은 곳에 있을 거란 사실이 떠올라서. 녀석들을 보러 가볼까 하는 충동마저 들었다.
하지만, 그래서는 안 된다.
‘정신 차려, 이한.’
이제 나는 이한이 아닌 라키엘이다. 완전히 다른 몸에 깃들어 살아가는 사람이 되었다.
이제 와서 친구들을 찾아간들 날 알아보기나 할까. 미친놈 취급을 받기에 딱 좋겠지. 그나마 가족도, 친척도 없던 외톨이 신세였던 게 다행이었달까.
그러니까…….
‘지금은 할 일에 집중하자. 감상은 나중에. 당장은 필요한 일부터.’
마음속의 가지를 쳐내듯 감정의 싹을 도려냈다. 쉽지는 않았다.
사거리를 하나 지나칠 때마다 택시 기사님께 ‘디지털미디어시티역으로 돌려 주세요’라고 말하고픈 충동을 참아야 했으니까.
아주 잠깐은 친구네에 들렀다가 가도 괜찮지 않을까, 싶은 생각마저 들었으니까.
얼토당토않은 헛짓을 참아내는 데에는 오장육부의 도움도 컸다.
딩동!
[오장육부가 당신의 치솟는 스트레스 지수에 동요하고 있습니다.]
[심장이 부정맥 발동 버튼을 부여잡고 있습니다.]
[허파가 말없이 담배에 불을 붙입니다. 쁩!]
[대장이 괄약근으로 줄넘기를 하려다 스텝이 꼬여 넘어집니다.]
[간장이 난닝구 차림으로 소주병을 땁니다.]
[위장이 콜라 마시고 체해서 손가락을 땁니다.]
[콩팥이 쉬야 생산 파업을 선언합니다.]
[비장이 니들 왜 직장 다니는 사람처럼 어둡고 비관적이게 변한 거냐고 일갈합니다.]
“…….”
아 이놈들이 진짜.
저도 모르게 쓴웃음이 나오고 말았다. 모처럼 잡던 분위기가 다 날아갔다. 그래도 덕분에 묘한 감상과 우울감의 엄습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그 사이에 택시가 목적지에 도착했다.
“13,800원이요.”
“예, 감사합니다.”
따끈하던 택시에서 내리자 서늘한 칼바람이 다시금 몰아쳤다. 덕분에 정신이 맑아졌다.
그나마 남아 있던 감상이 죄다 얼어붙어 쓸려갔다. 그 빈자리에 목표 달성을 위한 냉철한 계산만 남겼다.
‘가자.’
인터넷 검색으로 찾아낸 약국. 그곳까지 가는 길은 어렵지 않았다. 택시에서 내린 사거리. 그곳에서 길 건너편에 아파트 단지가 보였다.
약국은 아파트 단지 정문 쪽 상가 1층에 있었다.
라키엘은 멀찍한 곳에서 약국을 보며 롱패딩 앞섶을 살짝 열었다. 따끈한 품속. 그곳에 가시를 눕히고서 작전 대기 중인 꼬슴이가 있었다.
“꼬슴아? 잘 들어.”
“꼬슴!”
“어, 너무 크게 대답하진 말고. 살살.”
“……꼬슴.”
“좋아. 아까 내가 말해준 작전, 기억하고 있지?”
“꼬꼬슴.”
“그래. 몇 번이나 반복해서 들으며 외웠을 테니까. 믿을게. 출력해준 트레제오 포장지 사진, 가지고 있지?”
“꼬슴슴.”
“응, 잘했어. 1회용 물질 복사기도 잘 챙겼고?”
“꼬스슴.”
“후우. 좋아. 그럼 준비 완료. 작전 시작한다?”
“꼬슴……!”
결의를 다지는 꼬슴이.
녀석을 품고서 걸음을 옮겼다. 약국으로 들어갔다. 동네 약국이라서 그런지 손님이 없었다.
“어서 오세……요?”
기계적으로 인사하던 약사 아주머니가 흠칫했다. 역시나 라키엘의 외모는 이곳에선 너무 튄다. 저도 모르게 나오려는 쓴웃음을 억누르며 말했다.
“혹시 트레제오, 있나요?”
일단은 인터넷에서 찾은 정보가 맞는지 확인부터.
다행히 약사 아주머니의 대답은 예스였다.
“……아, 네. 있긴 한데…… 처방전 받아오셨어요?”
이쪽의 유창한(?) 한국어가 뜻밖이었는지, 아주머니가 약간 당황하며 물어왔다. 됐다. 있다. 라키엘은 내심 안도하면서 천연덕스럽게 대꾸했다.
“처방전은 이따가 가져오려고요. 요즘은 트레제오 찾기가 너무 어려워져서……. 그나저나, 파스는 어디에?”
“파스요?”
“아, 그건 저쪽 선반이요.”
괜한 질문을 막기 위해 파스를 찾는 척했다. 다행히 아주머니는 별다른 의심 없이 한쪽 선반을 가리켰다.
자연스럽게 그쪽으로 가서 몸을 낮추었다. 제법 다양하게 걸린 파스 종류 중에서 뭘 고를지 고민하는 듯이, 그렇듯 자연스럽게.
약사 아주머니의 시선을 피하며 품속의 꼬슴이를 꺼냈다. 꼬슴이가 납작 엎드린 포복 자세로 꼬쇼쇽 재빠르게 움직였다.
동시에 이쪽은 파스와 마스크를 대강 집어들었고, 몸을 일으켜 카운터로 걸어갔다.
덕분에 아주머니의 시선이 이쪽으로 쏠렸다. 물건을 계산하는 틈에 꼬슴이는 약국 선반 구석진 곳으로 쑉 들어가 숨었다.
‘됐다.’
이제 뒤는 너에게 맡긴다.
라키엘은 약국을 나서며 꼬슴이를 마음속으로 응원했다. 꼬슴이도 그런 라키엘을 향해 구석에서 소심한 따봉을 날렸다.
성공적인 잠입이었다.
♣
‘꼬슴, 꼬스슴!’
잠입이 성공적으로 이루어진 직후였다. 라키엘이 약국 밖으로 떠난 것을 확인한 꼬슴이는 온몸의 가시를 힘껏 누그러뜨렸다.
그러지 않으면 긴장한 나머지 저도 모르게 밤송이가 되어 버릴 테니까.
‘꼬스슴? 꼬?’
일단은 더 확실하게 숨을 곳을 찾아야 한다. 마침 약사 아주머니는 카운터 아래의 무언가를 정리하느라 여념이 없는 모습이었다.
꼬슴이는 그 틈에 움직였다. 약국 선반 제일 아래 칸을 따라 도도도 움직였다.
그리고 먼지가 제일 많이 쌓인 구석진 약상자를 찾아냈다. 보자마자 깨달았다.
아, 이게 이 약국에서 제일 안 팔리는 물건이구나. 확신하며 그 약상자 뒤로 몸을 숨겼다. 그런데 약상자 뒤쪽에는 뜻밖의 불청객(?)이 더 있었다.
콩벌레 두 마리.
커플이었다.
“…….”
퍽퍽퍽!
커플은 응징해야 제맛!
꼬슴이는 찹쌀떡 같은 손바닥으로 콩벌레 커플의 등짝을 후려쳤다. 갑작스러운 습격에 깜짝 놀란 콩벌레 커플이 몸을 동글동글 말아서 허겁지겁 도망쳤다.
그것으로 약상자 뒤쪽을 온전하게 독점하게 됐다. 비로소 안도감과 뿌듯함이 무럭무럭 샘솟았다. 이거면 됐다. 우리 라키엘이 부탁한 작전을 제대로 수행할 수 있겠군, 훗.
그 뒤부터였다.
꼬슴이는 낡은 약상자 뒤에 웅크린 채 꾸벅꾸벅 졸았다. 그동안 열몇 명의 손님이 더 약국을 들락거렸고, 소화제며 두통약이며 하는 약들을 사 갔다.
그때마다 잠깐씩 촉각을 곤두세웠지만, 다행히 몸을 가려주는 낡은 약상자가 팔려가는 일은 없었다.
그렇게 시간이 잘도 흘러갔다.
한겨울의 짧은 해가 똑 떨어졌다.
형광등이 켜지고, 얼마 지나지 않아 하품을 하던 약사 아주머니가 약국 문을 닫았다.
끼이익, 철컥.
약국 문이 잠기고 어둠이 찾아왔다.
동시에 꼬슴이는 깨달았다.
이 몸이 활약할 때가 왔다고.
‘꼬스슴, 꼬슴!’
반나절의 은신을 끝낸 꼬슴이가 기지개를 켜며 상자 뒤에서 나왔다. 역시나 아무도 없었다.
안전을 확인한 꼬슴이는 곧바로 약국 카운터 뒤쪽 공간으로 들어갔다. 그곳에 약 조제실과 약품 창고가 있었다.
좌악 늘어선 선반.
선반마다 가득한 약 상자.
잠깐 현기증이 올 것 같았다.
하지만 꼬슴이는 의지의 한국인으로 빙의하며 정신을 바짝 차렸다. 그리고 아까 낮에 라키엘이 집에서 프린트해준 작은 출력물을 꺼냈다.
뽀시락?
이쪽이 알아보기 쉽도록 크기를 줄여서 출력한 사진이 보였다. 바로 인슐린 약품, ‘트레제오’의 포장지 사진이었다.
그러니까 할 수 있다.
‘꼬슴!’
제일 가까운 선반으로 끙차끙차 기어 올라갔다. 선반 사이를 뛰어다니며 사방을 훑어보았다. 뇌세포를 풀가동하며 사진 속 포장지를 찾기 시작했다.
그렇게 얼마나 선반 사이를 뽈뽈뽈 돌아다녔을까.
‘……꼬슴!’
꼬슴이의 까만 눈망울에 섬광이 떠올랐다. 유레카! 꼬슴이는 눈앞의 약 상자와 사진 속 모습을 수차례 대조하며 확인했다.
똑같았다.
트레제오였다.
꼬슴이는 오른쪽 옆구리 가시 틈에 끼워두었던 1회용 물질 복사 아티팩트를 꺼냈다. 트레제오 포장박스 겉면에 촵 붙였다.
그리고 라키엘이 알려준 박자대로 복사 아티팩트를 두드렸다.
톡, 토독, 톡톡톡.
이걸 반복해서 3회.
두드리자, 반응이 왔다.
……화아악!
트레제오 포장박스에 카드처럼 달라붙은 복사 아티팩트가 빛을 머금었다. 분해되며 수많은 빛가루로 흩어졌다.
이윽고 그 빛이 사라졌을 무렵, 완벽하게 복사된 새로운 트레제오 박스가 모습을 드러냈다.
‘꼬슴!’
이로써 용왕에게 가져갈 샘플 확보까지 완료!
그때부터였다.
꼬슴이는 복사한 샘플 박스를 깠다. 내용물만 챙겼다. 다시 약국 매장으로 나왔다.
낮에 숨어 있던 선반 구석진 자리, 먼지 쌓인 약상자 뒤쪽 공간으로 몸을 숨겼다. 그리고 트레제오 샘플을 끌어안고서 뿌듯하게 기다렸다.
기다리고.
또 기다리고.
마침내 아침이 밝았다. 약사 아주머니가 출근을 했다. 약국을 오픈했다. 그걸 숨어서 지켜보는 꼬슴이의 작은 심장이 콩당콩당 뛰었다.
약속대로라면 이제 라키엘이 아침 첫 손님으로 약국을 방문할 것이다. 그럼 자신은 샘플을 가지고 라키엘의 롱패딩 밑단에 쏙 매달리면 된다.
……라고 생각하던 무렵.
딸랑!
약국 문이 열렸다.
그리고 라키엘이 들어오……지는 않고 다른 사람이 약국에 불쑥 들어왔다.
“언니? 오늘 어쩐 일이래? 벌써 문을 다 열고?”
다른 아주머니였다.
앞머리엔 핑크색 롤을 말고 있었다. 품에는 새하얀 말티즈 강아지를 안고 있었다.
혹시 여기 아파트 주민인 걸까. 혹은 약사 아주머니와 친한 단골인 걸까. 핑크롤 아주머니의 전격적인 등장(?)에 약사 아주머니가 반갑게 웃었다.
“어. 왔어? 오늘 우리 아저씨가 일이 있어서 좀 일찍 출발했거든. 그러는 김에 나 여기까지 태워주고 갔지 뭐.”
“어쩐지. 평소보다 30분 일찍 문 열었구나 했다.”
“그래서 지나가다 들른 거야?”
“어. 우리 뽀미가 아침부터 자꾸 보채서.”
“산책?”
“겸사겸사?”
그때부터였다.
두 아주머니의 모닝 수다가 시작되었다. 그런데 문제는, 핑크롤 아주머니가 안고 있는 말티즈 강아지였다.
“……킁킁? 킁킁? 킁?”
얌전히 안겨 있던 강아지가 뭔가를 느꼈는지 허공에 대고 냄새를 맡기 시작했다.
킁킁대는 코가 점점 이쪽, 구석진 선반 방향으로 향해 오기 시작했다. 그러더니 어느 순간, 강아지의 인상이 팍 찡그려졌다.
“왈왈! 멍멍멍! 왈왈!”
이쪽을 보며 맹렬하게 짖기 시작하는 말티즈!
핑크롤 아주머니가 당황했다.
“어어? 얘 왜 이래? 뽀미야? 뽀미야아?”
“월월월월월월월!”
“뽀미야? 얌전!”
“월월월월우러우렁월월월! 아우우우우!”
“언니? 얘 이상한데? 저기 뭐 있는 거 아냐?”
“그러게……?”
힘껏 말려도 더 우렁차게 짖는 말티즈! 참지 않는 말티즈! 그 모습에 고개를 갸웃거리며 이쪽 구석을 의심스러운 눈빛으로 바라보는 두 아주머니!
“얌전한 애가 왜 그런대? 진짜 여기 뭐가 있나……?”
급기야 약사 아주머니가 이쪽으로 다가오기 시작했다. 그 모습을 본 꼬슴이의 심장이 철렁 내려앉았다.
위기다.
망했다.
그럼 이제 어떡해야 하지?
‘꼬슴……!’
순간, 꼬슴이는 왼쪽 옆구리 가시 틈에 항상 끼우고 다니는 비상용 빨간 해바라기 씨를 향해 손을 뻗었다.
그리고 결심했다. 아무래도 들킨 것 같다. 이거라도 먹고 왕창 커져서 도망쳐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