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40화. 꼬슴이의 미션 임파서블 (2)
다가온다.
거대한 손길이 다가온다.
그런데 피할 수가 없다. 숨을 수도 없다. 여긴 막다른 구석이니까. 차라리 저항을 할까. 가시를 세워 볼까. 깨물어 버릴까.
아니. 그러다가 힘도 못 쓰고 제압당하면? 기껏 힘겹게 얻은 샘플을 빼앗기겠지. 그리고 손가락질을 받겠지.
도둑놈이라고.
‘꼬…… 꼬슴!’
약국 선반 구석진 자리에 숨어 있던 환상종, 꼬슴이의 자그마한 심장이 철렁 내려앉았다.
도둑놈으로 비난이라니. 억울하다. 말도 안 된다. 실제로 훔친 물건이 없으니까. 그저 인슐린 약품 트레제오를 ‘잠깐 꺼내서’ 복사만 했으니까. 원본은 제자리에 돌려놓았으니까.
하지만 저 약사 아주머니가…… 그런 사실을 알아줄까?
아니.
절대로?
‘꼬슴……! 꼬스슴!’
위기감이 무럭무럭 피어났다. 그 사이에도 약사 아주머니는 고개를 갸웃거리며 이쪽으로 다가오고 있었다.
“뽀미가 왜 자꾸 짖는대? 저기 진짜 뭐가 있나?”
“그러게? 얘 이렇게 안 짖는 앤데? 혹시 바퀴벌레? 언니? 바퀴벌레 약 가져올까?”
“잠깐만 기다려봐. 뭐가 있는지부터 좀 보고.”
‘……꼬슴!’
이쪽의 몸을 숨겨주고 있는 낡은 약상자. 그 너머로 아주머니의 깜장 슬리퍼가 보였다.
두 걸음 앞이다. 이제 곧이다. 들킬 거야. 이대로는 안 돼. 탈출각이 안 나와. 샘플을 빼앗기겠지. 그러면 인간 친구 라키엘이 슬퍼하겠지. 데미안은 아야 할 거야. 마계왕이 크아앙 깨어날 거고.
가정이 흔들리고. 사회가 무너지고. 행성이 뽀개지고. 별궁 창가 틈새에 야물딱지게 숨겨둔 도토리, 땅콩, 호두, 피스타치오, 아몬드 조각도 가루처럼 우주의 먼지로 화하겠지.
‘꼬슴!’
그건 안 된다.
꼬슴이는 거대한 결단을 내렸다. 찹쌀떡 같은 손바닥을 왼쪽 옆구리로 뻗었다. 그곳 가시 틈새에 비상용으로 끼우고 다니는 빨간 해바라기 씨가 있었다.
이걸 먹으면 된다. 뿌왕 커질 수 있을 거다. 약사 아주머니를 놀래킨 틈에 도망칠 수도 있을 거다.
그 사이, 약사 아주머니의 커다란 손이 뻗어 왔다. 이쪽의 몸을 숨겨주던 약상자를 붙잡았다! 치우기 직전이다! 치우면 들킬 거다! 그러니까…… 어서 빨간 해바라ㄱ……!
그때였다.
“……어엇!”
돌연, 우렁찬 외침이 쩌렁쩌렁 울리며 약국을 가득 채웠다. 익숙하고도 반가운 목소리, 라키엘이었다.
그가 약국 문을 열면서 들어오다가 눈이 휘둥그레져서는 잽싸게 한쪽을 가리키는 게 보였다.
“저기! 저쪽이요!”
라키엘이 약국 안쪽 어느 선반을 가리키며 외쳤다. 사실 그는 당초의 작전보다 제법 서둘러 근처에 도착한 터였다.
혹시나 모르니까. 우연히 누군가가 자신보다 먼저 약국의 첫 손님으로 방문할 수도 있으니까. 그런 모든 돌발상황을 없애기 위해 부지런히 움직인 것이었다.
한데 정작 30분이나 일찍 아파트 정문에 도착해서 보니?
약국이 벌써 문을 연 채였다.
정해진 오픈 시간보다 훨씬 일찍!
보자마자 쌔한 느낌이 들었다. 택시에서 허겁지겁 내려서 후다닥 달려왔다. 약국 문을 대뜸 열었다. 열자마자 약사 아주머니의 모습이 보였다.
구석진 선반 쪽을 향해 쪼그려 앉은 아주머니. 그녀의 손이 집은 낡은 약상자. 그 뒤로 언뜻 보이는, 오들오들 떨고 있는 흰색 가시.
꼬슴이가 들키기 직전이다!
보자마자 깨달았다.
뇌세포를 풀가동했다.
재빠른 기지를 발휘했다.
“어어? 어어어? 저기! 바퀴벌레요! 어엄청 커요! 빨리!”
꼬슴이가 숨은 곳과 반대편의 선반을 가리키며 외쳤다. 다급함이 가득 담긴 외침 덕분이었을까. 약사 아주머니가 화들짝 놀라며 반대쪽 선반으로 고개를 돌렸다.
“어, 어디요? 어디?”
“저기요! 저거저거, 초록색 약상자 뒤쪽으로 기어들어갔는데요.”
“아이구, 바퀴벌레였어요?”
“네. 네. 빨리 찾아보세요.”
뻔뻔하게 혼신의 연기력을 발휘했다. 다행히 약사 아주머니와 단골 아주머니의 주의력이 그쪽으로 확 쏠렸다.
두 아주머니는 심각한 표정으로 분주히 움직이며 있을 리 없는 바퀴벌레를 찾기 시작했다.
라키엘은 아주머니들의 주의가 돌려진 틈을 타서 재빨리 몸을 낮추었다.
슥샥, 쪼그려 앉으며 내민 손바닥에 까슬까슬한 감촉이 느껴졌다. 이쪽의 임기응변을 보고서 재빠르게 호응한 꼬슴이였다.
‘나이스!’
자그마한 환상종 친구의 눈치를 칭찬하며 꼬슴이를 품속에 챙겼다. 녀석이 야물딱지게 끌어안고 있는 트레제오 샘플과 함께였다.
그는 아주머니들을 향해 천연덕스럽게 물었다.
“찾으셨어요?”
“어, 으음, 아뇨. 안 보이는데?”
“그거 선반 틈새로 들어간 걸 수도 있어요. 워낙 납작한 놈들이라서.”
“그렇겠죠? 어쩌지? 세스큐라도 불러야 하나.”
졸지에 고민에 잠긴 약사 아주머니.
그 모습을 보며 조금은 미안한 생각이 들었지만, 어쩔 수 없었다. 라키엘은 철판을 깔고서 마스크를 하나 집어들었고, 계산을 마치고는 약국에서 유유히 빠져나왔다.
“……후아.”
그제야 참았던 숨이 터져 나왔다. 심장도 터질 뻔했다. 만약 자신이 1초만 늦었으면? 꼬슴이가 꼼짝없이 들켰겠지. 녀석이 안고 있던 샘플도 탄로 났을 거고.
생각만 해도 아찔했다.
“그렇지, 꼬슴아?”
“꼬스슴, 꼬!”
롱패딩 안주머니를 살짝 열어보니, 꼬슴이가 자랑스럽게 웃고 있었다. 라키엘은 녀석의 무사함부터 확인했다.
“그래. 어디 다친 곳은 없고?”
“꼬!”
“밤에 약국에서 춥진 않았어?”
“슴!”
“혹시 바퀴벌레나 다른 쥐 같은 애들이랑 마주치거나 괴롭힘당한 건 아니지?”
“꼬꼬슴! 꼬!”
“콩벌레 커플을 응징했다고?”
“슴!”
“그래. 잘했어.”
“꼬슴!”
뿌듯한 몸짓으로 약품 샘플을 뽀잇 들어 보이는 꼬슴이. 트레제오가 제대로 복사되어 있었다.
그 모습을 보니 다시금 마음이 푸근하게 놓였다. 한편으로는 안심이 되었다. 됐다. 해냈다.
‘샘플 확보 성공!’
처음 용왕 베르키스에게 미션(?) 내용을 들었을 땐 솔직히 좀 막막했다. 아니, 암담했다.
1형 당뇨병 환자들에게 생명줄과도 같은 귀한 인슐린 약품을 도둑질? 생각만 해도 아찔했다.
현실적인 가능성은 둘째 치고, 의료인으로서 품어온 책임감과 양심을 스스로 짓밟아야만 하는 일이기에 더욱 참담했다.
그런데 해냈다.
아무에게도 피해를 입히지 않고서 인슐린 샘플을 확보했다.
물론 저 약국의 약사 아주머니는 해충 퇴치 업체를 불러야 하나를 고민하게 됐지만, 눈치로 보아 바퀴벌레 한 마리 때문에 업체까지 부르지는 않을 듯했다.
그러니 만사 오케이다.
모두가 해피해진 성공이다.
“그럼 집에 가자.”
“꼬슴!”
“아, 근데 말이야.”
“꼬슴?”
“그냥 들어가긴 좀 그러니까…… 우리, 맛있는 거라도 좀 사갈까?”
“꼬?”
“치킨.”
“슴!”
오랜만에 온 한국이었다.
아마 이게 마지막이겠지.
이제 집으로 돌아가서 데미안과 함께 차원 복귀 마법을 발동하고 용왕에게 돌아가면 끝일 거다. 다시는 돌아올 일도 없을 것이고.
그냥 떠나려니 아쉬웠다. 마침 원룸에 비상금으로 꿍쳐두었던 현금도 제법 남아 있었다. 그러니…… 치킨은 못 참겠다.
그는 지난밤에 미리 검색한 근처 상가로 갔다. 그곳에 아침부터 문을 여는 옛날통닭집이 있었다.
통닭 한 마리를 사고, 그 옆의 죽 전문점에 들러서 전복죽도 한 그릇 샀다. 데미안에게 먹일 죽이었다.
“그럼 이제 진짜로 가자.”
택시에 몸을 싣고 돌아오는 길은 어찌나 뿌듯하고 후련한지. 한편으로는 씁쓸한지. 어째서 나는 흘러가는 창밖의 풍경에서 눈을 뗄 수가 없는 건지.
“…….”
진짜로 끝인가보다.
찌푸린 이곳 하늘도. 조금은 매캐한 공기도. 출근길의 빽빽한 차량 행렬도. 그 사이를 오가는 사람들의 모습도. 익숙한 거리와 앙상한 겨울 가로수, 그 사이로 배어나는 일상의 기억들도. 전부, 이렇게 마지막을 고하려는 건가 보다.
쓸데없는 감상이 자꾸만 가슴 한쪽을 옥죄었다. 애써 티를 내지는 않았다.
집 앞에 도착을 하고, 택시비를 내고, 집주인과 마주칠까 주의하며 계단을 오르고, 현관문을 열었다.
그리고 뜻밖의 모습과 마주하게 되었다.
“……뭐하냐, 너?”
데미안이 컴퓨터 앞에 앉아 있었다. 모니터를 노려보는 녀석의 눈길이 진지하고 심각했다. 이쪽을 돌아보는 녀석의 표정 또한 그랬다.
“아.”
녀석이 이쪽을 향해 말했다.
“일어나 보니 저만 혼자 있어서 말입니다.”
“어. 그래서?”
설마.
에이 설마.
하드디스크에 모셔둔 옛날 오글거리는 일기나 내 SNS 사진첩을 발견한 건 아니겠지? 그것들, 은근 흑역사 퍼레이드인데.
다행히 그건 아니었다.
녀석이 피식 웃었다.
“조금은 궁금했습니다. 어제 전하께서 이 물건을 다루시는 모습을 봤거든요.”
“어, 그랬어?”
“예. 자다가 깨어 보니 어둠 속에서 여기에 앉아 뭔가에 몰두하고 계시더군요.”
“아, 그거. 아침 겸 점심 겸 한국 방문 기념 최후의 만찬으로 사 올 먹거리 검색 좀 하느라고.”
피식 웃으며 통닭과 전복죽 봉다리를 들어 올려 보였다. 데미안 녀석도 피식 웃었다.
“그랬군요. 어쨌건, 혼자 있던 김에 전하께서 다루시던 이 물건을 저도 좀 만져 보았습니다. 그런데…….”
“그런데?”
“너무 어렵습니다. 복잡하고. 여기 뭔가가 엄청나게 나오기는 하는데 뭐가 뭔지도 모르겠고. 머리도, 눈도 전부 어지럽고 아프군요.”
녀석의 옆으로 슬쩍 다가가서 모니터를 보았다. 온갖 인터넷창과 폴더와 팝업창이 혼돈의 카오스처럼 수십 개씩 떠올라서 화면을 점령하고 있었다.
보아하니, 어젯밤에 이쪽이 마우스를 움직였던 걸 보곤 따라해 봤나 보다.
어색한 마우스질로 이것저것 죄다 딸각대며 눌러봤겠지. 그런데 창을 끄는 방법을 몰라서 애를 먹었을 테고.
“비켜봐. 내가 정리할게. 슬슬 최후의 식사를 즐기고 돌아가자고.”
“용왕에게로 말입니까?”
“어.”
“그럼 샘플은…… 성공하신 겁니까?”
“그러니까 내가 웃는 거 아니겠어? 안 그래?”
“꼬슴!”
꼬슴이와 함께 엄지를 치켜들어 보였다. 일단 데미안 녀석의 혈당을 체크하고, 밥상부터 폈다. 통닭과 죽이 약간 식어 있었다.
그건 안 된다. 따끈한 음식은 중대사항이니까. 한국에서의 마지막 식사일 테니까. 서둘렀다. 일단 전자레인지를 돌려놓고 컴퓨터를 정리했다.
화면 가득 떠오른 창을 차례로 닫았다. 그러다가 우연히 뭔가가 눈에 들어왔다.
데미안이 켜둔 수십 개의 창들 중에 하나. 시리즈톡 PC 버전. 훤하게 열린 단톡방 대화창이 보였다.
친구들 단톡방이었다.
수백 개나 쌓인 대화.
창에 떠오른 대화의 마지막 부분. 읽지 않으려 했는데, 저절로 눈에 읽혔다.
[은수 : 한쓰는 좀 어때? 눈은 떴고?]
[원호 : 아니 아직 의식은 못 찾았다. 의사쌤이 그러는데 자가호흡은 가능해져서 오늘 중으로 일반 병실로 올라갈 수 있다 그러네. 퇴근하고 올래?]
[은수 : 어 알았다. 이따 퇴근하고 연락하께.]
“…….”
원호. 은수.
친구들의 대화가 그곳에 있었다.
그런데 저놈들이 부르는 한쓰. 아직 의식을 못 찾았고, 오늘 중으로 일반 병실에 올라갈 거라는, 내 친구들이 말하는 한쓰.
저게…… 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