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43화. 거짓보다 파괴적인 진실 (1)
“…….”
미심쩍다.
아무래도 내가 생각하는 지금 이게, 맞는 것 같다.
……라고 생각하며 데미안은 비좁은 원룸을 휘휘 둘러보았다. 다 식은 전복죽은 이미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대신 그의 눈길을 사로잡은 것은, 원룸 한쪽을 온통 차지하고 있는 덩치 큰 책장이었다.
온갖 책이 빼곡하게 꽂혀 있었다. 특이한 점이라면, 특정한 책들이 유독 손을 탄 흔적이 많다는 것이었다.
‘저거, 재미있는 책인가.’
그래서 자신이 모시는 황태자, 저 사람이 여기서 살던 시절에 종종 읽었던 걸까. 알 수가 없었다.
다만 손때가 많이 묻은 책들엔 공통점이 있었다. 딱 봐도 확연히 두꺼웠다.
궁금하다.
더는 못 참겠다.
데미안은 손을 뻗었다.
‘당신이 이곳에서 어떤 사람이었는지, 조금은 더 알고 싶으니까요.’
개중에 제일 손때가 많이 묻은 책을 꺼냈다. 묵직했다. 펼쳤다. 알 수 없는 문자가 좌르륵 펼쳐졌다.
물론 실망하지는 않았다. 대강 예상했으니까. 대신 책에 수록된 그림은 충분히 알아볼 수 있었다.
‘이건…….’
상의를 벗은 남자가 반듯하게 누워 있는 그림이었다. 한데 그림 속 남자의 상체 곳곳에 무수한 점이 찍혀 있었다.
왜일까.
어째서 저 점들의 위치가 익숙할까.
사라락, 사락.
데미안은 페이지를 계속 넘겼다. 그림, 그림, 모두가 인체의 특정 부위를 묘사하고, 곳곳에 점을 찍은 그림이 가득했다.
그걸 보며 데미안은 서서히 깨달음을 얻을 수 있었다.
‘침술……!’
이거다.
그림에 표시된 점들.
전부 황태자가 평소에 가시로 푹푹 찔러대던 자리들이다!
‘그럼 설마?’
데미안은 다른 책을 꺼내서 펼쳤다. 그리고 저도 모르게 흠칫하고 말았다.
아무 생각 없이 펼친 페이지. 그곳에 크고 아름다운 쑥뜸봉 사진이 떡하니 있었기 때문이었다.
“…….”
그래. 아직도 잊을 수 없지. 지하 검투장에서 황태자와 처음 만났던 날. 다짜고짜 당했던(?) 첫 쑥뜸봉의 화끈하고 쓰라리던 감각은 지금도 선명하니까. 솔직히 고문받는 줄 알았으니까.
그런데 그게…….
‘전부 여기서 익힌 의술이었군.’
문득, 지금껏 황태자가 몇 번이고 구렁이 담 넘듯이 둘러댔던 말들이 떠올랐다.
이런 신기한 의술을 어디서 익혔느냐는 질문을 받을 때면 황태자는 종종 이렇게 말하곤 했지. 황궁 서고에서 봤다고. 지금은 사라진 고대 왕국의 의술이었다고. 등등등.
게다가…….
‘가르딘 경에게는 꿈에서 신비한 존재가 다가와 의술을 알려준다는 이야기도 했다지, 아마?’
물론 가르딘 경도, 자신도 그 말을 믿지는 않았다. 그저 황태자가 뭔가를 밝히길 꺼린다는 느낌만 받았을 뿐.
한데 이제 보니 역시나였다.
진실은 따로 있었던 거다.
“당신은…… 이곳에서도 사람을 치료하는 이였군요.”
그런데 어째서 이토록 비좁고 퀴퀴한 거처에서 살았던 걸까. 뭔가 사연이라도 있었던 것일까. 궁금증을 담고서 데미안의 눈과 손이 움직였다.
다음으로 그가 꺼내 든 것은 가죽으로 장정된 책이었다.
펼쳤다.
이내 흠칫했다.
사진을 보았기 때문이었다.
“…….”
너무나 사실적인 그림이다. 마치 지금 당장 눈앞에서 살아 움직일 정도로 생동감이 넘친다. 이걸 그린 화가는 누구일까. 천재가 아닐까. 아니, 그건 둘째 치고…….
‘혹시?’
데미안은 사진 속 사내아이를 빤히 관찰했다. 다섯 살쯤 되었을까. 부모에게 안겨 활짝 웃고 있었다.
페이지를 넘겼다.
사내아이가 성장했다.
여섯 살, 일곱 살, 유치원 시절, 초등학교 입학, 소풍, 운동회, 졸업, 다시 중학교 입학, 처음 입어보는 어색한 교복, 수학여행, 수능시험, 군대, 전역, 한의대 입학, MT, 썸 타던 시절, 친구들, 졸업, 그리고 한의원 개원 기념샷까지.
찬찬히 바라보았다.
비로소 알 수 있었다.
‘이곳에서 태어난 당신은…… 이런 모습으로 살아왔던 것이로군요.’
한편으로는 더욱 궁금해졌다. 한 번쯤은 이야기를 듣고 싶다는 생각도 들었다.
하지만 궁금증은 여기까지. 남의 사생활을 계속 들추는 건 별로 좋은 취미가 아니니까. 앨범을 접었다. 그때였다.
툭.
앨범 제일 뒤쪽 페이지에 끼워져 있던 무언가가 흘러나와 떨어졌다. 뭘까. 무심결에 집어들던 데미안은 저도 모르게 눈을 휘둥그레 뜨고 말았다.
“내 모습이 왜…… 여기에 있지?”
그가 집어든 사진.
아니, 일러스트.
그 뒷면에는 ‘마검황 애독자 이벤트 당첨자 : 람보콧구멍 독자님, 감사합니다’ 라는 작가의 말과 친필 사인이 새겨져 있었다.
♣
“누구……세요?”
느닷없이 열려 버린 병실 문.
대비 없이 마주쳐 버린 얼굴.
지금 같은 상황에서는 절대로 마주하고 싶지 않은 1순위의 대상과 마주쳐 버렸다.
친숙하고 익숙해서. 너무나 반가워서. 하지만 날 알아보지 못할 거라서. 오히려 이상하게 여길 듯하여서. 그래서 마주치고 싶지 않았던 존재.
“저기요?”
어린 시절부터의 친구였던 원호가 이쪽의 위아래를 미심쩍은 눈길로 쳐다보았다. 저놈이 어떤 반응을 보일지 확 예상이 되었다. 그래서 먼저 선수를 쳤다.
“헬로우 안 하셔도 됩니다. 한국말, 압니다. 죄송합니다. 병실을 착각한 거 같네요.”
“아, 예…….”
그제야 원호의 경계심이 풀렸다. 다시 의심을 사기 싫어서 자연스럽게 물러나 복도 반대편으로 걸어갔다.
뒤쪽에서는 멀어지는 녀석의 발소리가 들려왔다. 아마도 간호사실에 뭔가를 말하러 가는 길이었던 듯했다.
그때까지도 심장이 덜컹덜컹 뛰어댔다.
‘후우.’
솔직히 말하자면 마주쳤다고 해서 이쪽의 정체를 들킬 일은 없을 거다.
외모부터가 완전히 다른 사람이니까. 티를 내지 않으면 절대로 모르겠지. 아니, 일부러 티를 내면 오히려 미친놈 취급이나 받겠지.
그러니 이렇게 가슴 졸일 필요가 없는데. 그저 태연하게 철판만 깔면 될 일인데. 그게 생각보다 어렵다. 그 어느 때보다도 더.
‘얼굴, 많이 상했네.’
잠깐 본 원호의 얼굴이 뇌리에서 떠나지가 않았다. 원래 피부가 좋은 편은 아닌 놈이었는데, 그 사이에 더 상한 게 보였다.
세월을 정통으로 맞아서? 아니, 그것보다는 여기 병원에 붙어 있느라고 잠을 제대로 못 잔 탓이겠지. 아직도 의식을 찾지 못하는 내 원래 몸 때문에 걱정이 많은 때문이겠지.
‘미안하다, 친구야.’
괜히 민폐만 끼친 것 같았다. 간호사실에서 돌아오는 친구의 발걸음과 병실로 들어가는 무거운 표정을 보니 더욱 그랬다.
한편으로는 초조해지기도 했다.
‘여기 복도에서 계속 서성거리면 의심을 받을 텐데.’
낯선 이방인의 외모를 지닌 상태라서 더 그렇다. 솔직히 조금 조마조마했다. 하지만 다행스럽게도, 병실에 들어갔던 원호가 금방 다시 나오는 게 보였다.
“여보세요? 아, 예. 예. 죄송합니다. 제가 지금 병원이라 통화를 하기가…… 잠시 5분쯤 후에 제가 다시 전화를 드려도 되겠습니까? 아, 예. 감사합니다.”
아무래도 거래처나 일 쪽 전화가 왔나 보다. 엘리베이터 쪽으로 바쁘게 걸어가는 원호의 뒷모습이 보였다.
‘빙고.’
드디어 디펜스, 해제!
원호의 모습이 완전히 사라질 때까지 기다렸다가 자연스럽게 병실로 들어갔다. 2인용 병실에는 다른 환자가 없었다.
오직 한 사람, 이쪽이 지녔던 원래의 몸이 의식을 잃은 채 잠든 듯이 누워 있을 뿐이었다.
“…….”
나, 이렇게 생겼었구나.
오랜만에 보는 모습이 낯설었다. 아니, 타인의 눈을 통해 보는 나의 모습이 낯선 걸까. 자꾸만 묘한 기분이 치밀었다.
한편으로는 덜컥 불안감이 떠올랐다. 내 몸의 상태가 생각보다 더욱 멀쩡해 보여서였다.
‘만약에 내 원래의 몸이 눈을 뜨면…… 나는 어떻게 되는 걸까.’
짐작이 되질 않았다.
다시 원래의 몸으로 돌아가는 걸까. 지금 당장 이한의 삶으로 되돌아가면, 나는 그걸 받아들일 수 있을까.
아니.
어쩌면 기쁘지 않을 것 같다. 그냥 여기서 걸음을 돌려 도망치는 게 나을지도 모르겠다.
그런데 어째서 나는 원래의 내 몸을 향해 손을 뻗는 걸까. 맥을 짚어보는 걸까.
‘직업병 진짜.’
여기까지 온 이상, 원래의 몸이 어떻게 된 건지를 직접 확인하고 싶었다. 쓴웃음과 함께 되뇌었다.
‘진맥.’
스킬을 발동했다.
딩동!
[진맥을 시작합니다.]
[스캔 중]
[3…… 2…… 1……]
[……스캔 중]
[3…… 2…… 1……]
[…………스캔 중]
[3…… 2……]
‘어?’
뭔가 이상했다.
결과가 나오질 않았다.
설마 렉이라도 걸린 걸까.
원래라면 카운트 뒤에 나와야 할 [진맥 결과가 나왔습니다]라는 안내문구가 도통 뜨질 않았다. 마치, 고장이 나거나 정체불명의 잡음이 끼어든 것만 같았다.
‘뭐지?’
지금껏 수백 번쯤 진맥 스킬을 사용했지만, 이런 경우는 처음이었다. 당황스러웠다.
그때였다.
- ……느냐?
익숙한 안내문구 대신에 정체 모를 메아리가 희미하게 들려왔다.
어디로부터? 내 원래의 몸, 안쪽에서부터. 저 깊은 곳에서부터. 누군가의 애타는 목소리가 아득하게 울려 퍼졌다.
- ……도 없느냐?
느냐, 냐아, 아아……!
어딘가 절박하게 도움을 원하는 듯한 음성. 익숙한 이의 목소리는 아니었다. 말투도 조금 특이했다.
마치 고풍스러운 시대극 영화나 연극에서나 쓰일 법한 말투랄까. 혹은, 별궁을 방문하는 귀족 환자들에게나 어울릴 듯한 억양이었다.
‘뭐지?’
나는 진맥 스킬을 사용했는데, 어째서 나와야 할 종합검진표는 안 나오고 이따위 괴상한 목소리가 아득하게 들려오는 걸까.
의아해졌다.
하지만 이쪽의 의아함과 별개로, 정체 모를 목소리가 점점 또렷해졌다. 혹은 가까워졌다. 마치, 이쪽의 존재를 알아차리고서 반갑게 달려오기라도 하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아니, 실제로도 그런 듯했다.
- 아, 거기 누가 있느냐? 잘 되었구나!
허겁지겁 달려오는 듯한 기색.
한결 생생하게 가까워지는 목소리.
- 마침내 용감한 이가 날 구하러 와주었구나. 잘되었다. 참으로 잘되었어!
얼마나 반가우면 저러는 걸까. 거의 울먹임에 가까운 환호성이었다. 한편으로는 저러는 와중에도 기품은 잃지 않으려 노력하는 기색이 느껴지기도 했다.
물론 이쪽 입장에서는…….
‘뭐지. 어이가 없네.’
난 그냥 진맥 스킬을 쓴 건데.
어째서 이런 뚱딴지같은 목소리가 이쪽의 원래 몸뚱이 안쪽에서부터 달려와 반갑게 호들갑을 떨어대는 걸까. 이 상황이 이해가 되지 않았다.
혹시 내가 헛것을 보거나 귀신 소리라도 듣는 건가 싶었다.
한데 저 목소리도 이쪽의 투덜거림을 들어 버렸나 보다.
- ……무어라? 어이가 없다니? 감히, 나를 구하러 와놓고 그런 소리를 하는 것인가?
이쪽을 향해 따지는 걸까.
아니, 그보다는 혼내려는 것 같은데.
더 어이가 없어져서 대꾸했다.
‘구하러 오긴 누가 누굴 구해.’
- 어허, 무엄하다. 너는 내가 누구인지나 알고서 함부로 입을 놀리는 것이더냐?
‘댁이 누군데, 대체.’
이쯤 되니 궁금해졌다.
정체 모를 목소리가 엄격, 근엄, 진지한 투로 대꾸했다.
- 이 몸으로 말할 것 같으면 광대한 제국의 합당한 지배자이신 아스테리온 테스타로사 마젠타노의 유일하고도 적법한 후계자이며, 차기의 황위를 물려받게 될 라키엘, 아드리아, 마젠타노로다. 그러니 그대는 조속히, 나를 이 비좁고 괴상한 몸뚱이에서 꺼내달라. 당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