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약 파는 황태자-344화 (343/468)

344화. 거짓보다 파괴적인 진실 (2)

라키엘 아드리아 마젠타노.

이제는 나의 것이 된 이름.

그러나 사실은 훔친 것.

누구에게서?

소설 속 초반에 요절하여 퇴장하는 비운의 황태자에게서. 그에게서 훔쳤다. 나의 것으로 삼아, 그인 척 살아왔다.

가끔은 때때로 궁금해하기도 하였다. 진짜 라키엘은 어떻게 되었을까. 나에게 육신을 빼앗긴 그의 영혼은 어디로 갔을까, 하고.

그런데 여기에 있었다.

내 원래 몸속에, 있었다.

‘이게…… 맞아?’

가슴이 철렁했다.

제일 처음 든 감정은 미안함과 죄책감이었다. 어쩌면 그래서였을 것이다. 듣고도 믿기지가 않았다. 아니, 사실은 믿고 싶지 않았다.

하지만 이쪽의 원래 몸속에서 들려오는 목소리는 분명 헛것이 아니었다.

- 이게 맞느냐니? 지금 나에게 물은 것인가? 그나저나, 나를 구하러 온 경은 누구인가? 어느 가문의 자제이지? 말투로 보아 그리 고상한 교육은 받지 못한 듯한데.

“…….”

나 한의대 나온 사람인데.

나름 전문직이었는데.

라키엘은 가출하려는 어처구니를 붙잡아 앉혔다. 그리고 자신이 황태자라고 주장하는 목소리를 향해 물었다.

‘이쪽이야말로 좀 물어봅시다. 당신, 진짜로 라키엘 아드리아 마젠타노가 맞아?’

- 무엄하다, 감히!

‘아니, 무엄이고 뭐고. 따질 건 따지고 확인할 건 확인을 해야지. 안 그래? 댁이 어? 내가 제국의 황태자임! 이러면 내가, 아이고 전하아, 이러면서 떠받들어야 하는 건가? 아무 확인도 안 하고서?’

- 그, 그건…….

‘증명을 해보시라고. 나도 지금 황당하니까.’

아니, 사실은 당황스러웠다.

내 원래의 몸이 어떤 상태인지 보려고 진맥을 한 건데, 이렇게 진짜 황태자와 떡하니 마주치게 될 줄은 꿈에도 몰랐다.

설마하니 내가 헛것을 보거나 헛소리를 듣는 걸까. 아니. 그건 아닌 듯하고.

‘그러니까 당신 누군데. 진짜 황태자 라키엘 맞아?’

- 당연하지! 내가…… 내가 얼마나 고생을 했는지 그대는 아는가?

‘아니. 몰라요.’

- …….

‘모르겠으니까 말을 해보라고 좀. 승질만 내지 마시고.’

그러하다.

모름지기 교양인이라면 벌컥 목청만 높이는 것보다는 대화를 통해 입장을 풀어야 함이 마땅하지 않겠는가.

라키엘은 물었고, 황태자로 추정(?)되는 목소리는 그제야 흥분을 가라앉혔다.

- 나는…….

‘댁은?’

- 제국의 황태자 라키엘 아드리아 마젠타노다.

‘아니, 그러니까.’

- 그러니까? 뭐?

‘댁이 황태자라는 걸 증명할 뭔가가 없으시냐고.’

- 내가 왜 증명을 해야 하지? 내가 바로 황태자이며 제국의 적법한 후계자인데.

‘그리고 대륙을 제패할 운명이었지. 신이 내린 튼튼한 육체와 무력을 통해서.’

- …….

목소리가 침묵했다.

고민하는 걸까.

만약 저 목소리의 정체가 정말로 황태자 라키엘이라면, 방금 이쪽이 던진 낚시질에 어떤 식으로든 반응을 보이겠지. 그리고 아마도 그 반응의 종류는…….

- 아쉽게도 그대는 나에 대해 잘못 알고 있는 것 같은데?

황태자의 목소리에 씁쓸한 기색이 노골적으로 배어났다. 혹은, 어떤 면에서는 조금 기분이 상한 듯도 했다.

- 만약 그게 아니라면, 나를 조롱하는 것인가? 태어나면서부터 병약하여 폐하께 인정받지도 못하고 있던 나를? 그래서, 아랫것들이 항상 수군거리듯이 나를 모욕하려는 셈인가? 아니지. 별궁의 아랫것들은 몰래 수군거리기라도 하는데, 그대는 그보다 더하군. 이렇게나 무례한 방식의 노골적인 비아냥이라니.

‘아니, 그게 나는…….’

- 그만. 듣기 싫다. 나를 구하러 온 이라면 임무를 수행하고, 그게 아니라면 돌아가도록. 비록 내가 황태자다운 모습을 갖추지는 못하였지만, 그렇다고 하여 날 조롱하러 온 이에게 도움을 구걸할 정도로 망가지진 않았으니.

‘쩝. 맞네.’

- 뭐?

‘아니, 그냥. 나는 댁이 황태자가 맞는지 확인 좀 해보려고 멘트만 살짝 던진 건데. 이렇게까지 티를 팍팍 낼 줄은 몰랐지.’

라키엘은 쓴웃음을 머금으며 말했다. 저 목소리, 황태자가 맞는 듯하다. 저 까칠하고 신경질적인 반응을 보니 기억이 났다.

자신이 처음 황태자의 몸에 들어간 시절이었던가. 당시만 해도 시녀들이 이쪽을 많이 두려워하였더랬다.

‘때때로 신경질을 부리며 시녀나 시종에게 매질을 했다지? 그것도 직접 때릴 기력이 없어서 시녀끼리, 혹은 시종끼리 매질을 하도록 시키고 그걸 구경했다고도 들었어. 맞나?’

- 뭐? 그건…….

이쪽의 지적에 엄청나게 당황하는 목소리.

‘맞네. 황태자 라키엘.’

- …….

확실하구나.

건강 콤플렉스를 건드렸더니 곧바로 까칠하게 반응하는 것도. 남들에게 알리기 부끄러운 과거의 속 좁은 짓을 지적당하니 당황하는 모습도.

- ……그대는 누구지?

‘라키엘.’

- 무…… 뭐?

‘댁은 내 모습이 안 보이나 봐. 하긴. 댁이 깃든 몸이 눈을 감고 있어서 그런가. 해서 알려주자면, 나는 지금 라키엘 아드리아 마젠타노의 몸에 깃들어 있어. 2년 남짓한 기간 동안.’

- 무슨…….

충격을 받은 걸까.

하지만 알려줄 건 알려줘야겠지.

라키엘은 최대한 건조한 목소리를 유지하기 위해 신경 쓰며 말했다.

마치, 큰 병마와의 전쟁을 시작하는 환자에게 병명을 알려주듯이. 그럴 때에 최대한 감정을 배제하고 건조하게, 일상적인 톤으로 말해야 환자의 충격이 그나마 작아지듯이.

‘그리고 지금 황태자, 댁이 깃들어 있는 그 육체가 원래의 내 몸이야.’

- 잠깐만. 그럼?

‘맞아. 우리, 육체가 뒤바뀐 상황이네.’

- …….

진짜 황태자, 라키엘 아드리아 마젠타노는 입을 다물었다. 무어라 하고 싶은 말은 많은데, 그중에 어떤 말도 입술을 비집고 나오지를 못했다.

서로 육체가 바뀐 상황이라니. 이걸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 그 어찌 받아들여야 할까.

- 나는…… 무려 2년을 방황하였는데.

마젠타노의 황태자는 가까스로 탄식하듯 내뱉었다. 불현듯 2년 남짓 겪어야 했던 방황의 시간들이 떠올랐다.

처음 이상함을 깨달은 것은 어느 겨울날이었다. 눈이 내린 다음 날이었던가. 침실에서 일기를 쓰던 중이었다. 속이 뒤집혔다.

격한 기침이 나왔다. 가슴을 쥐어짜는 듯한 통증. 숨을 헐떡이며 무언가를 토해냈다.

토하고 보니 시커먼 피였다. 각혈이 멈추질 않았다. 주치의 가르딘 경을 부르려 했다. 종을 울리려 손을 뻗었다. 닿질 않았다.

고작 반 뼘의 거리. 그만큼 더 뻗을 팔힘이 모자랐다.

한 손으로는 피가 터져 나오는 입가를 막고서, 한 손은 뻗으려 애를 쓰다가, 모든 것이 기울어졌더랬다. 이내 눈앞이 시커멓게 변하였다.

그것이 끝이었다.

온통 암흑의 세상에 내던져졌다. 일렁이는 검은 물결 속에 담긴 채 부유하며 떠돌았다.

말을 걸어주는 이? 구하러 달려오는 이? 아무도 없었다. 두렵고, 외로웠다. 자신은 죽은 걸까. 아니면 괴이한 저주에 걸린 걸까.

답을 알 수 없었다. 정신이 나갈 것 같았다. 때때로 속삭이는 듯한 환청이 들려오기도 했다.

까르륵 웃는 듯한 소리. 낮게 속닥대는 음험한 중얼거림. 매혹적인 숨소리까지. 처음엔 그저 두려워 귀를 막았다. 그러다가 나중엔 알게 되었다.

유계.

자신이 떨어져 부유하는 곳의 이름이었다. 인간이 살아가는 현세와 저승 사이의 틈새에 자리한 세계. 정령들의 고향이자 무덤. 그 어떤 것도 살아 있지 못하고, 죽어 있지도 못하는 혼돈의 공간.

절망했다.

원망했다.

자신이 무슨 죄를 지은 건지. 어째서 이런 곳에 떨어진 것인지. 이유를 알 수 없기에 더욱 막막했다.

언제까지 이곳을 떠돌아야 할는지 모르기에 더더욱 암담했다. 그렇게 기약 없는 절망 속에서 떠돌았다.

그리고 나흘 전.

갑자기 이곳으로 떨어졌다. 마치 누가 건져낸 것처럼 시커먼 유계에서 휙 끌려나왔다.

그리고 내던져지듯 새로운 감옥에 불시착했다. 누군지도 모를 어떤 이의 몸속 세상으로.

그럼에도 기뻤다.

적어도 정신이 나갈 것만 같은 유계처럼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암흑은 아니었으니까. 수시로 정신을 뒤흔드는 속삭임이 들려오지 않았으니까. 살 것 같았다. 피를 토하며 정신을 잃었던 날 이후 처음으로 웃어보았다.

하지만 그 웃음도 오래가지는 못했다. 누군지도 모를 이 몸뚱이가 깨어나질 않았다.

몸뚱이에 깃든 자신의 의식은 또렷한데, 정작 육신이 눈을 뜨질 못했다. 마치 영원한 잠에 빠진 신세 같았다.

‘그래서, 막막하고 암담했지만 드넓은 유계를 벗어났다고 기뻐한 것도 잠시였고. 막상 지금 신세를 정리해보니 비좁은 감옥에 갇힌 것만 같았다고?’

- 그렇지. 이해가 빠르군. 내 육신을 강탈한 날도둑이여.

‘…….’

- 왜 그러지, 날도둑?

‘아니 그게, 날 부르는 호칭이 갑자기 급발진을…… 왜…….’

- 나는 정확한 사실만을 말하고 있을 뿐이야. 그대가 내 육신을 빼앗았고, 덕분에 내가 유계에서 기나긴 시간을 방황한 끝에 지금과 같은 신세가 되지 않았는가. 그러니 내가 그대를 날도둑이라 칭하는 것은 지극히 합당하지 않을까?

‘응, 안 합당해.’

- 어째서?

‘어째서긴. 지금 황태자 댁도 내 몸을 무단으로 점거하고 있잖아.’

- ……뭣?

‘그러니까 지금 그쪽도 날도둑질을 한 거고. 따지고 보면 쌍방과실 상황이라고 해야 하나? 그러니까 댁이 날 일방적으로 날도둑이라 비난하는 건 좀 아니다, 이거지. 안 그래?’

- 전혀!

마젠타노의 황태자의 목소리에서 정색의 기운이 물씬 풍겨왔다.

- 똑같은 몸이라 하여도 가치가 다르다. 그대가 빼앗은 몸은 고귀한 황족의 핏줄을 지닌 몸이야. 그런데 어찌 감히, 같은 선상에 놓고서 비교를 하려 드는가.

‘어, 그래요?’

- 그렇지.

‘하지만 90일쯤 뒤에 죽을 몸이었다는 사실은 알고 있었으려나.’

- 뭐?

‘황태자 당신, 각혈을 했던 날로부터 90일쯤 뒤면 죽을 신세였다고.’

- …….

이쪽의 솔직한 말에 마젠타노의 황태자가 침묵했다.

뭐, 본인도 막연하게나마 예감하고 있었겠지. 자신이 오래 살지는 못할 상태였다는 것 정도는 말이다.

- 그런데…… 그대는 어떻게 아직껏 내 몸을 지닌 채로 살아 있는 거지? 그대가 내 몸을 차지한 지가 2년가량 되었다 했지 않나. 한데 대체 어찌?

‘체질개선, 원기회복, 자양강장, 활력증진.’

- 뭣?

‘나름 열심히 가꿨다고. 안 죽으려고. 덕분에 약간이나마 건강해진 채로 살아서 이렇게 댁과 만나게 된 거고. 게다가 지금 우리, 사실은 이렇게 입씨름이나 나눌 때는 아닌 것 같긴 해.’

- ……무슨 뜻이지?

‘이대로 두면 댁이 갇혀 있는 내 원래 몸이 죽을 거 같거든.’

라키엘은 솔직하게 말했다.

사실은 마젠타노의 황태자와 언쟁(?)을 벌이는 와중에 진맥의 결과가 뜬 상태였다.

그는 검진표 아래에 떠오른 ‘종합소견’ 란을 마젠타노의 황태자에게 읽어주었다.

‘종합소견. 대체적으로 무난한 신체입니다. 최근 받았던 극심한 스트레스에 의한 새치의 증가 및 탈모의 조짐이 보입니다. 약간의 복부비만이 감지됩니다. 전형적인 마른 비만, ET형 몸매입니다. 성인병 예방을 위한 건강한 식습관과 적당한 강도의 운동을 권장합니다.’

- ……대체 몸을 어떻게 가꾼 거지? 게다가 뭐? 탈모의 조짐?

‘그건 중요한 게 아니고. 더 있어. 여기부터가 심각해.’

황태자의 항의를 뚝 자르고 계속 읽었다.

‘또한, 현재 육신과 그에 깃든 영혼의 싱크로가 전혀 맞지 않는 상태이며, 그로 인하여 전신의 기맥이 서서히 흩어지고 있습니다. 이러한 상황이 개선되지 않을 시, 1개월 후에 전신 기맥이 모두 끊어지는 단맥 현상으로 사망에 이를 수 있음을 경고합니다.’

- …….

‘들었지?’

- 들었다만. 그걸 내가 믿어야 하나?

‘믿을 경우와 믿지 않을 경우, 어느 쪽이 이득일까.’

- …….

마젠타노의 황태자는 침묵했다.

라키엘은 한숨을 푹 내쉬었다.

‘진맥 결과는 거짓말을 안 해. 그러니 당분간 쓸데없는 논쟁으로 시간을 소모하진 말자고. 그리고…… 엇?’

와락!

마젠타노의 황태자에게 앞으로의 계획을 말하려던 순간이었다. 돌연, 누군가의 우악스러운 손아귀가 멱살을 확 틀어쥐어 왔다.

“당신, 누구야.”

“……!”

이글거리는 눈빛. 아까 전화를 받으며 병실을 나섰던 오랜 친구 원호가, 어느새 돌아와서 내 멱살을 움켜쥐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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