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45화. 거짓보다 파괴적인 진실 (3)
“당신, 누구야.”
“…….”
이쪽을 노려보는 원호의 눈빛이 장난이 아니다.
가슴이 철렁했다. 대답을 해야 하는데. 뭐라고 변명을 하면 좋을까. 잠깐 머릿속이 새하얗게 백지가 되는 기분이었다.
그럴수록 이쪽의 멱살을 틀어쥔 원호의 손아귀가 강건해졌다. 우악스럽게 당기는 힘 너머에서 이글거리는 눈빛. 잔뜩 화가 난 내 친구, 원호.
“묻잖아. 당신 누구냐고. 여긴 뭐 하러 들어온 거냐고.”
“…….”
원호가 이렇게 화가 난 이유는 뻔하다. 날 못 알아봐서겠지. 그러니 생판 모르는 사람이 몰래 병실에 들어와서, 의식이 없는 친구의 손을 붙잡고 있던 거라고 여기는 거겠지.
생각해보니까 나, 안 맞은 게 다행이다. 아니, 내가 아는 원호의 성격으로 봐선 지금 당장 재빠르게 이 상황을 해명하지 못하면…….
“안 되겠네. 당신, 따라나와. 안 그러면 경찰 부를 거니까.”
“……!”
망했다.
이놈, 이대로 이쪽을 끌고 나가서 간호사들에게 넘길 기세다. 아니면 진짜로 경찰을 부르거나. 이놈은 한다면 하는 놈이라서. 그걸 너무나 잘 알고 있어서. 그런 최악의 사태만은 막아야 한다는 생각에 재빨리 말했다.
“원호야.”
“……뭐?”
설마하니 이쪽의 입에서 자기 이름이 나올 줄은 상상도 못 한 걸까. 이쪽을 끌고 나가려던 원호가 걸음을 멈추었다.
이내 돌아보는 녀석의 눈길에는 약간의 놀람과, 그보다 더욱 짙은 불신이 잔뜩 배어 있었다.
“당신 뭔데. 내 이름은 또 어떻게 아는 건데.”
“그게…….”
“스토커야? 어?”
“스토커는 아니고. 데리버거 10개.”
“…….”
“싸나이는 10개는 먹어야지. 맞지?”
“…….”
“그거 억지로 다 먹고 농구하다가 토하고. 한 타이밍 늦게 까스백명수 원샷하다가 사레들려서 네 얼굴에 다 뿜고.”
“당신…… 누군데. 뭔데 그걸 아는 건데.”
내 멱살을 움켜쥐고 있던 원호의 손아귀가 조금 느슨해졌다. 혼란스러운 걸까. 어쩌면 충격을 받은 건지도 모르겠다.
당연히 그럴 거다. 방금 말한 데리버거 10개 사건. 저건 고등학교 1학년 때 벌어진, 원호와 나만 기억하는 사건이니까.
그러니까 가능하겠다. 귀한 거짓말 이용권을 소모할 필요 없이, 이대로 설득할 수 있을 것 같다.
“말해. 그걸 어떻게 아는 거…….”
“설명할 테니까. 이거부터 좀 놓고. 차분하게. 잠시만 조용한 데로. 다 설명할 거니까.”
“…….”
원호의 눈을 피하지 않았다.
녀석의 눈동자가 흔들리고 있었다. 의식불명인 채로 입원한 친구에게 접근한 이상한 사람이, 갑자기 20년도 더 지난, 둘만 아는 추억을 불쑥 말하니까 많이 놀랐겠지. 혼란스럽겠지. 이 기회를 놓치면 녀석은 정말로 경찰을 부를 거고.
“그러니까, 잠시만. 정말로 잠깐만. 한 번만.”
진심을 담아서 부탁했다.
원호의 눈빛이 고민에 휩싸였다. 그렇게 얼마나 있었을까. 녀석이 못내 멱살 쥔 손아귀를 풀어주었다.
“……후우. 일단은 들어는 보겠는데. 아니, 그래. 나갑시다. 혹여나 튈 생각은 하지도 마시고.”
원호를 따라나갔다.
병원 5층, 옥외 산책로 겸 야외 휴게실의 벤치에서 원호가 인상을 쓰며 이쪽을 쏘아보았다.
“자, 그쪽 부탁대로 나왔습니다. 그럼 어디 좀 들어봅시다. 당신 누굽니까. 대체 누군데, 뭘 하려고 병실에 들어와서 내 친구 손을 잡고 있던 겁니까? 그보단, 아니. 내 이름은 그렇다 치고, 데리버거 10개…… 하 참. 그건 또 어떻게 아는 겁니까? 예?”
“그건…….”
당연히 알 수밖에 없다.
물론 다른 것도 안다.
초등학교 때부터의 오랜 친구, 원호를 제대로 설득하고 의심을 풀어주려면 이 방법이 제일이라는 사실을.
“내가 이한이니까.”
“……예?”
찡그려지는 원호의 한쪽 눈썹. 그리고 한 손에 들려 있는 휴대폰. 아마도 원호는 지금 휴대폰의 음성녹음 기능을 켜놓았겠지. 날 의심하고 있을 테니까. 혹시나 정말로 경찰을 부르면 지금 녹취하는 내용이 도움이 될 거라고 여길 테니까.
역시 내 친구답다.
“알지. 지금 내가 이런 모습이라서, 내 몸이 입원실에 누워 있어서 안 믿기겠지. 그런데 어쩌냐. 내가 이한인데.”
“미쳤어요?”
“좀 미치긴 했지. 특히 내가. 그러니까 너한테 면회 갈 거라고 저녁 10시 다 돼서 너네 부대 위병소로 택시 타고 쳐들어갔지. 그 한겨울에. 기억 안 나냐?”
“무슨…….”
“너 병장 달고 있을 때. 내가 여주까지 갔잖냐. 눈 엄청 많이 온 날에.”
“아니, 그걸 어떻게…….”
“당연히 알지. 그걸 어떻게 잊겠냐고. 내가 생각해도 미친놈 같았는데. 하필이면 면회 가겠다고 약속한 날에 역대급 폭설 내리고, 고속도로고 뭐고 죄다 막혀서 난리가 나고, 버스는 움직일 생각도 못하고. 겨우겨우 여주까지 도착했더니 이미 저녁 9시쯤이고.”
“…….”
“망했다는 생각이야 당연히 들었는데, 그냥 돌아가기도 싫더라고. 그 고생을 하면서 갔는데 싶어서. 게다가 돌아갈 교통편이나 도로 사정도 막막했고. 알지? 그래서 내가 미친 척하고 택시 잡아서 너네 부대까지 간 거.”
“그…… 저녁 점호 준비하고 있던 도중에…….”
“1소대 손원호 병장, 외박 준비해서 행정실로. 방송 듣고 벙쪘지?”
“…….”
“나도 그게 되나 싶더라고. 나 처음 갔을 때 위병소에서도 당황하고. 당직사령까지 와서 당황하고.”
“그때, 당직사령이 뭐라고 했는지…….”
“기억나냐고? 당연히 기억하지. 나보고 묻더라. 진짜로 이 시간에 면회 온 거냐고. 그리고 손원호라는 애랑 무슨 사인지 묻더라고. 그래서 말했지. 친굽니다.”
“……하.”
“그랬더니 당직사령이 웃더라고. 그리고 너 불러서 쿨하게 외박 보내준 거, 기억 안 나냐?”
“기억은 나는데. 나긴 하는데…….”
“더 웃긴 건 그 난리를 떨어서 겨우 만나고, 외박 나오고, 우리 오랜만에 봤다면서 감격스러워했는데 딱 1주일 뒤에 네가 포상휴가 나온 거.”
“후우.”
“방금 욕할려고 했지?”
“…….”
움찔하는 원호.
녀석의 눈빛이 제법 혼란에 휩싸여 있었다. 내가 말한 저 한밤의 면회 사건, 진짜 100% 실화니까.
아마 어지간한 군필자들도 들으면 저게 말이 되느냐고 하겠지만, 실제로 200x년 12월, 20사단 6x여단 11x기보에서 벌어졌던 생생한 기억이며, 둘만의 추억이니까.
“……후우. 진짜로 이건 헷갈려서 묻는 건데.”
원호가 당혹감을 누르려는 듯 심호흡을 하며 이쪽을 노려보았다.
“지금 뭐 하는 겁니까. 당신, 누굽니까. 혹시 무슨 뉴튜번지 개인방송인지 뭔지 하는 거세요? 몰래카메라, 이런 건 아니죠?”
“당연히 아니지.”
“그럼 뭐 하시는 거냐고요.”
“말했잖아. 내가 이한이라고.”
“장난하지 마시고. 내 친구는 병실에 누워 있는 저놈이 이한이고.”
“그건 내 몸일 뿐이고. 진짜는 여기에 있고.”
“미쳤어요?”
원호의 미간이 잔뜩 찡그려졌다. 이쪽이 말하는 둘만 아는 이야기들. 그걸 들으며 많이 흔들리면서도, 선뜻 믿는다는 게 스스로 받아들여지지가 않는 듯했다.
아마도 그렇겠지.
이쪽이 아무리 우겨도 겉모습은 라키엘의 것이니까. 심지어 이쪽의 원래 몸이 병실에 떡하니 누워 있으니까. 그런데 이런 모습으로 와서 ‘내가 이한임’ 이러면, 대체 그걸 누가 쉽게 믿어줄까.
하지만…….
‘그렇다고 죄송합니다, 하고 물러설 수는 없어.’
라키엘은 내심 각오를 다졌다.
원호는 피할 수가 없다. 지금 이 상황도 대충 얼버무리며 넘어갈 수가 없다.
그래선 안 된다. 그러면 망한다. 지금, 저 병실에 누워 있는 원래의 육신이 이쪽의 치료를 필요로 하기 때문이다.
‘기맥이 흩어지고, 한 달이 지날 때까지 그걸 해결하지 못하면, 단맥.’
전신의 기맥이 끊어지며 사망할 것이다. 진맥 스킬이 그렇게 알려줬으니, 의심의 여지가 없다.
하물며 이곳 병원에선 그걸 진단하지도, 치료하지도 못할 것이다. 제아무리 최신식 설비라 해도 기혈을 감지하거나 분석할 수는 없을 테니까.
그건, 나만이 접근하고 해결할 수 있는 영역이니까.
‘그러니까 무조건, 내가 병실에 보호자로 붙어서 치료를 해야 해.’
그러려면 원호의 의심을 풀어야 한다. 원호의 허락과 협조가 필요하다. 최소한 녀석이 경찰이나 간호사를 부르는 사태는 없어야 한다.
아니, 때에 따라선 이쪽이 치료를 하는 동안 간호사가 오는지 망을 봐주어야 할 것이다.
그러니 지금은 피할 수 없다.
어물쩍 넘겨서도 안 된다.
오직 정면돌파로 의심을 풀어야 할 뿐.
“인마. 진짜로 나라고. 응?”
“…….”
“잘 봐봐. 고1 때 파리채 블로킹 잘못해서 너 어깨 탈구시킨 사람이 누구? 나.”
“…….”
“수학여행 때 밤에 쌤들 몰래 컵라면 먹을려고 했는데, 정수기에서 뭐가 안 나왔다? 뜨거운 물. 그래서 우리 그날 찬물에 라면 사리 불려서 말아먹었다, 그치? 완전 멍청하게. 차라리 그냥 뿌셔 먹었으면 됐을 건데.”
“…….”
“그리고 하루는 나 학교 가기 싫어서, 늦잠 자고 싶어서, 잠 깨우는 우리 엄마한테 오늘 개교기념일이라고 구라쳤는데, 딱 10분 뒤에 평소처럼 네가 학교 가자고 오는 바람에 나 구라 다 들키고 엄마한테 개처럼 맞았지. 그때 넌 나 맞는 거 보고 완전 터져서 개처럼 웃었고. 기억 안 나냐고.”
“…….”
“이래도 못 믿어?”
“…….”
“그리고 우리 고3 때 수능 끝난 다음 날에…….”
“못 듣겠네, 진짜. 이젠 안 되겠습니다.”
“어?”
이쪽의 말을 확 자르는 원호의 목소리. 어느새 녀석이 휴대폰 화면을 톡톡 두드리고 있었다. 설마. 전화? 경찰에?
이렇게까지 말을 해도 결국엔 녀석의 의심을 완전히 풀어내지는 못한 걸까. 아무래도 그런 것 같았다. 1, 1, 2, 번호를 차례대로 눌러가는 녀석의 손길이 조금씩 떨리면서도 멈추지는 않았다.
가슴이 철렁해졌다. 저걸 멈춰야 한다. 실패하면 죽는다. 내 원래의 몸이 죽는다.
그 안에 깃든 황태자 라키엘의 영혼이 자칫 소멸할 수도 있다. 아니, 지금의 나 또한 어떻게 될지 모른다.
그러니 저걸 멈춰야 한다. 전화를 못하게 막아야 한다. 동시에 신뢰를 얻어야 한다.
어떻게? 이렇게까지 둘만 아는 추억들을 말했는데, 이제는 무슨 수로? 진짜로 눈 딱 감고 거짓말 이용권을 쓸까?
머리를 확 굴렸다. 인간은 급해지면 잠재력이 발휘된다고 했던가. 이쪽 또한 예외가 아니었던 것 같다.
‘아.’
그동안 까맣게 잊고 있던 사소한 기억 하나가 떠올랐다. 동시에 재빨리 손을 뻗었다. 휴대폰 통화 버튼을 누르기 직전이던 원호의 손을 붙잡아 멈추었다.
녀석이 빡친 눈길로 이쪽을 쳐다보았다. 그래서 더 빡친 눈길로 맞받으며 툭, 물었다.
“야. 근데 너 인마, 저번 달에 네 와이프 몰래 그래픽카드 바꾸는 데 보탠다고 빌려갔던 10만 원은 왜 안 갚냐?”
“어?”
“까먹고 있었는데 생각해보니까 빡치네. 월말에 갚는다며. 왜 안 갚냐고.”
“……어어?”
지금까지는 어떤 이야기를 해도 놀라기는 하되, 의혹을 풀지는 않던 원호의 눈동자가 처음으로 왕창 흔들리며 무장해제 되었다.
빙고.
그러니까 인마.
내가 이런 이야기까지는 안 할려고 했는데. 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