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50화. 버림으로써 얻는 것들 (1)
또 그런 표정이다, 당신은.
항상 혼자서 무언가를 짊어지려고 할 때마다. 고민에 휩싸여 선택의 갈림길에 섰을 때마다. 그럼에도 기꺼이 타인을 위한 길을 걷고자 할 때마다.
항상 그런 표정이었다, 황태자 당신은.
지금도 마찬가지다.
내가 잠든 사이 다녀온 어딘가. 그곳에서 무슨 일이 있었던 걸까. 일이 마음대로 풀리지 않은 걸까. 내가 모르는, 결코 알 수 없을 종류의 어떤 불운을 겪은 걸까.
“…….”
잠에서 깨어난 데미안은 물끄러미 라키엘을 바라보았다. 정신은 아직 약간 몽롱했다. 잠이 덜 깬 탓일까. 아니. 그보다는 엉망인 몸 상태 때문이겠지.
하지만 상관없다.
자신은 황태자의 호위니까. 어떤 상태이건 황태자를 돕고, 보좌함이 주어진 유일한 임무니까. 그건 지금도 마찬가지일 테니까.
“전하.”
“뜨허잇!”
“…….”
“아 씨. 깜짝이야.”
화들짝 놀란 가슴을 쓸어내리는 황태자. 그 새하얀 손에 쥐어진 종이 한 조각. 놀라서 펄쩍 뛰는 바람에 무의식중에 꽉 쥐었던 건가 보다. 한데 저 종잇조각이 제법 중요한 걸까. 어째서 황태자는 구겨진 종잇조각을 잠깐이나마 걱정스러운 눈초리로 바라본 것일까.
알 수 없다.
저 종잇조각도.
당신이 살던 방에 고이 보관되어 있던, 나와 똑같은 모습의 초상화도.
‘대체 당신은, 그리고 이 세상은…….’
무엇인 겁니까.
묻고 싶었다.
하지만 지금은 물을 수가 없겠다. 평소처럼 피식 웃으면서도 끝내 수심의 그림자를 눈가에서 떨쳐내지 못하고 있는 당신의 모습을 보자니, 차마 그런 곤란한 질문을 던질 수는 없겠다. 적어도 지금만큼은.
“다녀오신 일은 만족스러우셨습니까.”
“어, 대강?”
“그렇습니까.”
“으음. 너는 끼니 잘 챙겼냐.”
“예, 대강.”
당신이 남겨둔 삶의 흔적 덕분에.
“전하께서 알려주신 그대로 했습니다. 저 하얀 상자…… 냉장고라고 했지요? 그 안에 먹을 것들이 서늘하게 보관되어 있더군요. 맛은…… 조금 특이했지만 말입니다.”
“김치가 제법 잘 익었지?”
“그게 뭡니까?”
“새빨간 배추. 안 먹었어?”
“먹을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나마 채소 비슷한 건 그것밖에 없어서.”
“먹을 만했어?”
“말도 마십시오.”
낯설고, 끔찍했다. 특히 향이 적응되지가 않았다. 마늘 향은 왜 그렇게 강한지. 새빨간 외양에 걸맞은 매운맛은 왜 또 그렇게 맹렬한지. 게다가 시기까지 하니, 우리 전하가 사실은 괴식의 소유자였던 것인가 일순간 고민이 들었을 지경이었다.
“그래도 그나마 스팸은 괜찮았습니다.”
“……아. 스팸 까는 거 안 알려줬는데.”
“제가 스스로 깠습니다.”
“어떻게?”
“검기로 껍질을 도려내니 간단하더군요.”
“……뉴튜브 각 놓쳤네.”
“예?”
“아니아니. 됐고. 주사는? 스스로 놓을 만했고?”
“그건 연습을 많이 시키셨으니까요.”
“다행이네.”
“전하 덕분입니다. 그나저나-”
다시금 당신의 얼굴을 바라본다. 평소와 똑같은 모습, 동일한 표정, 여전한 눈빛. 남들이 보면 그렇다 여기겠지. 그저 평온하고 별일 없는 듯하다고.
하지만 내가 보기엔 다르다.
평소와 똑같은 모습은 조금씩 흔들리고, 동일한 표정에는 옅은 그림자가 드리웠으며, 여전한 눈빛은 희미한 고민의 색채로 물들어 있으니까.
분명, 황태자 당신은 지금 흔들리고 있는 거겠지.
“고민이 있으신 겁니까.”
직설적으로 물었다.
황태자가 멈칫했다.
“고민이야 당연히 많지. 항상 그랬던 거 모르나?”
“압니다. 별궁 한의원의 운영이며, 매일 밀려드는 다양한 환자들에게 어떤 처방을 내리면 좋을지 항상 고민하시는 모습을 말입니다. 그런데 오늘은 그것과 조금, 다르신 것 같아서요.”
“…….”
“이곳에 후회와 미련을 남기지 않겠다며, 그래서 다녀오겠다던 전하이십니다. 그런데 지금 보니, 출발하시기 전보다 더 짙은 수심을 품게 되신 듯해서 말입니다.”
“내가 그래 보여?”
“예.”
“헐. 숨도 안 쉬고 대답하는 거 보게.”
“너무나 명확하게 보이니까요.”
사실이다.
내게는 보인다.
항상 당신과 붙어 다녔으니까.
당신의 눈빛이 움직이는 각도, 숨을 쉬는 간격, 스스로도 모를 수많은 몸짓에 배어나는 감정들, 그 모든 것들을 누구보다 많이 보았고, 겪었다. 나는 말 그대로 황태자 당신의 그림자, 그 자체였다. 그러기를 자처했고, 지금은 자랑스럽다.
그러니 보인다.
보일 수밖에 없다.
“해결하러 가신 일이 잘 안 풀린 겁니까. 혹은…… 새로운 고민이 생기셨는지요.”
“후우.”
“……죄송하진 않습니다.”
“뭐래냐.”
“호위 주제에 선을 넘는 참견과 질문을 한 것이 딱히 죄송하지는 않다는 뜻입니다.”
“…….”
“전하나 저나 지금은 함께 이방인이 된 처지니까요.”
“한배를 탄 셈이니까, 뭔가 일이 생긴 거면 솔직하게 밝히라는 거지?”
“일찍 알아들으셔서 다행입니다.”
“쯧. 끝까지 지지를 않아.”
“한배를 탔으니까요.”
“……후우, 그래. 듣고 보니 그렇네.”
라키엘은 피식 웃고 말았다.
그리고 자신의 손아귀를 내려다보았다. 구깃구깃한 종잇조각. 로또 용지. 바라보자니 제법 웃겼다. 이 아무것도 아닌 종이쪼가리가 실수령액 44억의 가치를 지녔다니. 이만큼 지독한 넌센스가 또 어디에 있을까.
이쪽이 양화대교에서 떨어지지 않았더라면, 이 44억을 누렸을 것이란 사실도 그렇다.
“그래. 네 생각이 그렇다면 솔직히 말하지.”
잠시 고민하던 라키엘은 입을 떼었다.
그때부터였다.
그는 모든 것을 말했다.
병원에서 있었던 일. 친구와의 조우. 설득. 자신의 원래 몸을 늘려줘서 황태자 라키엘의 영혼과 싱크로를 맞춰야 하는 상황. 집에 돌아와서 생각이 난 로또 용지. 번호. 당첨. 어마어마한 금액까지.
“뭐, 대강 그랬던 거지. 아마 내 멘탈이 조금 깨져 보였던 거라면, 이거 때문이 아닐까 싶네.”
로또 용지를 흔들어 보였다.
데미안의 눈가에 슬픔이 배어났다.
“서글프시겠군요.”
“그래 보이냐?”
“예. 충분히 고민이 되실 것 같습니다.”
황태자가 밝히는 사연을 듣고 보니 그랬다. 반대로 자신이 황태자의 입장이었다면 어땠을까. 제정신일 수가 있을까. 적어도 겉으로는 멀쩡하고 평범해 보이는 저런 기색을 유지 비슷하게라도 할 수 있을까.
아니.
자신이 없다.
그래서 황태자가 존경스러웠다.
‘아마 엄청난 충동을 느꼈겠지. 아니, 지금도 느끼고 있겠지.’
황태자의 저 피식거리는 평범한 미소 아래에는 어떤 격랑이 소용돌이치며 가슴을 갈가리 찢고 있을까. 그 어떤 충동을 마구잡이로 불러일으키고 있을까.
감히 상상이 가지가 않았다.
그럼에도 대략 예상은 되었다.
‘내가 전하라면…… 여기에 남고 싶어질 것 같다.’
44억이 구체적으로 얼마나 큰 돈인지는 모르겠다. 그럼에도 황태자의 이야기를 통해 추측을 해보자면, 보통의 사람이 그럭저럭 새 인생을 살기에는 충분한 액수인 것 같다.
그렇다면 누구라도 여기에 남고 싶어질 것이다. 아까워서. 자신이 큰 다리에서 떨어지지만 않았다면, 그랬다면 며칠 안에 저 금액을 얻을 수 있었을 거라고 생각한다면, 아깝고 원통해서 잠도 오지 않을 테니까.
보상심리?
잃었던 것을 찾겠다는 마음?
그것도 있겠지만…….
‘익숙한 고향에서 편안하게 살 기회를 얻었다고 느끼겠지.’
안주에 대한 욕망.
아마 그럴 것 같았다.
허나 그래도 좋다는 생각 또한 들었다.
‘만약 그것이 당신의 결정이라면, 저도 그 결정을 따르겠습니다.’
나는 당신의 그림자다. 당신을 지키는 것이 나의 유일한 임무이자 사명이다. 그러니 기꺼이 따르리라. 설령 당신이 지옥에 떨어진다 해도, 나는 그 지옥불에서조차 황태자 당신을 호위할 터이니.
……라고 생각하는 순간이었다.
“너, 지금 쓸데없는 상상하지?”
“예?”
황태자가 썩은 미소와 묘한 눈빛으로 질문을 툭, 던져 왔다.
“무슨…… 말씀이십니까?”
“무슨 말씀이긴. 너 혼자 이상한 생각하면서 막 결의 다지고 있었지?”
“예? 그건…….”
“맞네. 맞아. 넌 혹시 ‘나만이 황태자 전하의 미묘한 기색을 알아차릴 수 있어. 항상 붙어 다녔으니까!’라고 생각하는 거냐?”
“…….”
명중이다.
황태자는 바늘로 사람을 찌르는 것만큼이나 마음의 정곡도 잘 찌르는구나.
“쯧. 너만 나랑 붙어 다녔냐? 나도 그만큼 너랑 붙어 다닌 건데. 너만 내 미세한 기색을 잘 알아보는 거겠냐고.”
“그럼…….”
“당연히 다 보이지, 이 사람아. 너 방금 이런 생각 했지? 아, 전하께서 로또 때문에 흔들리고 계시는구나. 이쪽 차원에 남아서 안주하고 싶어하시는구나. 그렇지만 괜찮아. 나는 전하의 호위니까! 전하께서 어떤 결정을 내리셔도 난 전하를 따르겠어! 뭐, 이런 느끼하고 망측하고 오글거리는 생각만 잔뜩 하고 있었지?”
“……오글거렸습니까?”
“당연하지. 그리고-”
라키엘이 콧김을 풍 뿜었다.
“나 그런 충동 안 느낀다.”
“정말이십니까?”
“그것도 당연하지.”
또 콧김을 프풍.
“44억? 엄청난 돈이지. 솔직히 눈이 안 뒤집히면 거짓말이지. 그런데 어쩌냐. 내가 저쪽 세상에서 44억보다 훨씬 럭셔리한 걸 많이 누려 버려서.”
“……예?”
“솔직히 따져봐도 44억 그걸론 별궁에 딸린 건물 하나 정도만 겨우 살 수 있을걸? 제일 후져서 저어기 구석쯤에 있는 걸로. 게다가 건물만 사면 끝이에요. 건물에 딸려오는 시종이랑 시녀는 고용하지도 못해요.”
“그, 그렇습니까?”
“물론이지. 요즘 세상에 인건비가 얼마나 비싼데. 집안일 해주는 아주머니 한 분만 고용해도 돈이 얼만데. 그런데 저쪽 별궁으로 가면? 그런 일만 전문으로 하는 고급 인력 수십 수백 명이 날 보살펴 주신다, 이 말씀이야. 그게 44억으로 가능해? 턱도 없지.”
“…….”
“거기에 온갖 자연산 산해진미에 귀한 것들 끼니마다 다 챙겨줘. 최상급 경호 서비스도 넘쳐나게 해줘. 현실에선 못 타보는 황소 브랜드, 명마 브랜드 자동차? 저기선 진짜 황소랑 명마도 지겹도록 탈 수 있다는 거지. 안 그러냐?”
“드, 듣고 보니 그렇군요.”
“그렇지. 우리 데미안이 이제야 이해타산에 눈을 떴네. 축하해?”
“감사……합니다.”
“그래. 고마운 거 알았으면 됐고. 이 화제는 여기까지. 일단 앞으로의 일에 집중하자.”
“앞으로의 일이라시면?”
“아까 말했던 내 원래 몸. 그쪽 키를 늘려줘야 하는 관계로 열흘쯤 추가로 이곳에서 체류하게 될 것 같다.”
“저는 괜찮습니다.”
“뭐. 별궁에서 만들어온 인슐린도 그 정도 분량은 넉넉하고, 복사한 인슐린 샘플 유통기한도 충분하니까.”
“예. 그럼 걱정 말고 병원에 다녀오시지요.”
“싫은데.”
“예?”
“나도 낮엔 쉬어야지, 이 사람아.”
“……아.”
“눈 좀 붙일게. 심심하면 꼬슴이랑 놀고 있어. 컨디션 이상하면 나 바로 깨우고.”
“알겠습니다.”
“쿠울…….”
대답을 듣자마자 잠드는 황태자. 많이 노곤했던 걸까. 그렇겠지. 빈약한 육신과 나약한 체력으로 밤을 지새우며 녹초가 되었을 테니까.
“……하나도 안 괜찮으면서.”
역시 나는 안다.
다른 이들은 모르겠지.
그러나 내게는 보인다.
황태자 당신은 전혀 괜찮지 못하다. 44억이 별거 아니라고 하면서도 내심 쓰라린 가슴을 움켜쥐고 있다. 그럴 수밖에 없겠다. 별궁의 호화로운 생활보다, 고향인 이곳에서의 적당히 넉넉한 삶이 훨씬 매력적일 테니까.
그럼에도 당신이 충동을 억누르고, 아무렇지 않은 척하는 이유는 하나밖에 없겠지.
‘책임감.’
별궁 한의원에서 당신을 기다릴 수많은 이들. 입원 병동의 환자들. 당신 덕분에 사회생활이 가능해진 특근대원과 웨어울프 간호사들. 남겨둔 환상종, 우루스, 꾸꾸까지.
그 모든 이들을 어깨에 짊어진 책임감. 그것이 당신을 태연하게 보이도록 버티게 해주는 힘이겠지.
그렇기에 나는…….
‘존경합니다, 당신을.’
어느새 곤히 잠든 황태자의 이불을 끌어올려 주었다. 머리맡에 앉아 한참을 바라보았다. 앞으로 평생 모실 주군의 얼굴치고는 참으로 무방비투성이라고 생각하며. 그런데 이 무방비한 모습 때문에 더욱 이 사람을 진심으로 따르게 되는 듯하다 여기며.
데미안은 황태자의 곁을 묵묵히 지켰다.
물론 그는 몰랐다.
지난밤부터 방금까지 라키엘이 보인 행동들 때문에 이곳 차원의 새로운 정령이 꼬이기(?) 시작했다는 것을. 그 정령들이 어느샌가 원룸까지 들어와 곁을 서성이고 있다는 사실도.
딩동.
잠든 라키엘의 귓가에 희미한 알림음이 울렸다.
[당신의 최근 행동이 2종류의 정령을 감동시켰습니다.]
[타인의 키를 늘리려는 적극적인 노력이 감동 포인트가 되었습니다.]
[애매한 거금을 초연하게 거들떠보지 않은 통 큰 마인드가 감동 포인트가 되었습니다.]
[당신이 지닌 오행순환의 기운이 호의적으로 접근하는 2종류의 정령을 감지합니다.]
[감지된 정령들이 연결을 수락하였습니다.]
[‘성장판의 정령’과 페어링을 시작합니다.]
[‘돈벼락의 정령’과 페어링을 시작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