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51화. 버림으로써 얻는 것들 (2)
[당신이 지닌 오행순환의 기운이 호의적으로 접근하는 2가지의 정령을 탐색하였습니다.]
[탐지된 정령들이 연결을 수락하였습니다.]
[‘성장판의 정령’과 페어링을 시작합니다.]
[‘돈벼락의 정령’과 페어링을 시작합니다.]
‘……으음.’
귓가를 소란스럽게 간질이는 소리. 혹은 소음. 라키엘은 감은 눈을 찡그렸다. 피곤했다. 병원에서 밤을 꼴딱 지새우느라. 혹여나 간호사에게 들킬까 하여 내내 긴장했던 터라. 그러다 이게 겨우 원룸에 돌아와 갓 잠이 들려던 참이라서.
‘뭐냐…… 또…….’
귀찮았다.
메시지고 뭐고 다 꺼놓고 싶었다. 그런데 그게 불가능하니까 문제다. 이놈의 시스템 알림은 도통 사람을 배려할 줄은 모르니까. 아마도 확인을 하기 전까지 계속해서 귓가에 딩동딩동 소리를 울려대겠지.
딩동!
“…….”
역시나.
‘뭔데. 뭐길래 이러는 건데 또.’
결국, 라키엘은 부스스한 눈을 억지로 떴다. 어김없이 눈앞에 들이밀듯 떠올라 있는 메시지. 처음엔 눈의 초점이 안 잡혀서 흐릿하게 보였다. 눈두덩을 거칠게 주물렀다.
그제야 보이는 내용은…….
[‘성장판의 정령’과 페어링이 완료되었습니다.]
[‘돈벼락의 정령’과 페어링이 완료되었습니다.]
[정령과의 본격적인 교감을 시작하려면 보안 자격을 획득하여야 합니다.]
[정령과의 교감을 시작하기 위한 비밀번호를 입력하여 주세요.]
“…….”
이건 또 뭘까.
‘갑자기 페어링? 한국에도 정령이 있었어?’
뜻밖이었다. 그는 잠들어 있던 사이에 지나간 메시지 내용들을 불러왔다. 비로소 지금 사태(?)의 이유를 알 수 있었다.
‘내 원래 몸을 늘려주려고 애썼던 행동이랑, 로또 당첨금에 대한 집착을 쿨하게 내려놓은 행동이 두 정령을 감동시켰다고?’
라키엘은 눈길을 들었다.
정령과의 연결을 위한 비밀번호 입력창이 떠올라 있었다. 역시나 비밀번호에 대한 힌트 따위는 없었다. 그럼에도 어쩐지 모종의 촉이 왔다.
성장판의 정령이 이쪽과 기꺼이 교감을 시작할 비밀번호라면…….
‘180!’
모름지기 매력적인 남자의 상징이랄 수 있을 숫자. 수많은 남자들로 하여금 깔창을 찾게 만드는 마성의 숫자. 그리고 자신 또한 도달하기를 바랐지만, 당연히 턱도 없었던 바로 그 서글픈 숫자!
180을 외쳤다.
반응은 곧바로 왔다.
[비밀번호 입력 완료]
[‘성장판의 정령’과 교감이 시작됩니다.]
[‘돈벼락의 정령’이 당신을 의아하게 쳐다봅니다.]
[‘내 비번은?’이라는 눈빛을 당신에게 보냅니다.]
‘으음, 돈벼락의 비밀번호는 혹시…… 4,435,888,926?’
바로 자신이 당첨된, 그러나 로라시아 대륙으로 돌아가면 쓸모없는 휴지조각으로 전락하게 될 로또 당첨금 실수령액이었다.
딩동댕!
[비밀번호 입력 완료]
[‘돈벼락의 정령’과 교감이 시작됩니다.]
상큼한 알림음과 함께 변화가 시작되었다. 아무것도 없던 원룸 허공. 약간 누레진 천장 벽지와 꺼진 형광등을 배경으로 두 형체가 모습을 드러냈다.
츠스스스……!
한쪽은 길었다. 매우 길었다. 어제 개업한 주유소 앞에 세워진 풍선인형? 그것처럼 길쭉한 형체가 하늘거리며 빵긋 웃었다.
반면에 나머지 한쪽은 짧고 두툼한 실루엣을 자랑했다. 영락없이 빵빵한 돼지저금통 모양이었다.
‘어, 그러니까…… 긴 쪽이 성장판, 두툼한 쪽이 돈벼락?’
이쪽의 추측에 두 정령이 고개를 끄덕였다.
- 180도 안 되면서 촉은 제법 좋네?
- 킁킁. 심지어 이건…… 짝퉁 황족 수저 냄새인가요?
“…….”
- 그래도 날 감동시켰으니까 칭찬은 해줄게. 180이 안 되긴 해도.
- 짝퉁 수저 주제에 44억을 쿨하게 내려놓는 패기를 보였으니까 저도 인정해줄게요.
“…….”
- 그런데 왜 표정이 안 좋아? 우리 안 반가워? 아님 정수리 높이가 180센티 아래의 고도라서 내내 행복하지가 않니? 내가 아는 소설 작가 백경 씨도 평생 그런 상태던데?
- 얘는 44억 생각나서 그런 거겠죠.
“…….”
- 괜찮아. 다시 태어나서 주사위 갓챠 굴리면 180 찍을 가능성은 있으니까.
- 돈벼락은 현생에서도 주사위 굴릴 수 있으니까 좀 더 괜찮지 않나요?
- 어? 설마 도박 권장?
- 에이, 투자는 도박 아니거든요?
- 도박 아니긴. 포장된 도박 맞지. 아무리 돈 많이 벌어봐라. 그걸로 키는 못 사잖아?
- 키만 크면 뭐 해요? 180센티 위쪽 공기가 밥 먹여주나?
- 뭐? 지금 말 다했어?
- 아뇨. 아직 할 말 많은데요?
“……니들 뭐하냐.”
라키엘은 한숨을 푹 내쉬며 두 정령 사이에 끼어들었다. 첫 대면부터 다짜고짜 이쪽을 디스하질 않나. 급기야 지들끼리 투닥거리기까지. 아무래도 이번의 두 정령은 제법 성깔이 있는 듯했다.
“일단 교감을 시작하게 된 건 반갑고. 그런데 그쪽도 나한테 용건이 있으니까 먼저 찾아온 거겠지?”
라키엘은 예전의 경험을 떠올리며 물었다. 캡사이신의 정령 때도 비슷했다. 그땐 장군 에두아르가 몰래 물에 타서 마시던 고춧가루를 고자질하기 위해 정령이 먼저 찾아왔더랬다.
아니나 다를까, 두 정령이 고개를 끄덕였다.
- 용건? 당연히 있지. 특히 내가.
먼저 나선 쪽은 성장판의 정령이었다.
- 지난밤에 보니까 신기한 기술을 쓰더라? 손으로 사람 몸을 만지니까 우두둑, 뚜둑? 미세하게 탈구를 시키던데?
“어, 그랬지.”
- 그거 설마 키를 늘리려는 거야?
“대강은?”
라키엘은 어깨를 으쓱였다.
성장판의 정령이 흡족하게 웃었다.
- 훌륭해. 키를 위해 척추를 탈구시키는 미친 짓거리도 주저하지 않는다니. 이 정도로 산뜻하게 미친 인간은 처음 보네?
“…….”
- 아무튼. 그 노력이 가상해서 찾아왔지. 이 정도로 진심인 인간이라면 조금 도와줘야겠구나 싶어서.
“도움을?”
- 그래.
성장판의 정령이 짓는 미소가 의미심장해졌다.
- 네가 키를 늘려주려는 인간 말이야. 사실은 키 성장의 한계가 정해져 있거든? 생명체라면 예외가 없듯이 말이지. 특별히 그 한계를 올려줄까 해서.
“한계를? 얼마나?”
- 176.5cm.
“…….”
라키엘은 입을 다물었다. 한계를 늘려서 176.5라니. 그럼 성장판의 정령의 도움이 없으면 어떻게 될 예정이었단 걸까.
“원래 한계는 얼마였는데?”
- 174.5cm.
“…….”
큰일 날 뻔했구나. 혼자서는 아무리 애를 써도 목표를 달성할 수 없었겠구나. 라키엘은 내심 가슴을 쓸어내리며 물었다.
“부작용 없이?”
- 당연하지. 그게 내 특기니까.
“그런데 어째서?”
- 응?
“왜 이렇게 먼저 찾아와서 날 도와주려는 거지? 대가는 없는 건가?”
라키엘은 진심으로 궁금해하며 물었다. 성장판의 정령이 엄청난 능력과 호의를 베풀려 한다는 것은 알겠다. 그런데 왜? 어째서? 라는 의문이 자연히 들었다.
성장판의 정령이 오히려 어이가 없다는 투로 대꾸했다.
- 대가? 인류의 평균 키가 그만큼 커지는 건데?
“…….”
- 내가 제일 싫어하는 게 뭔지 알아? 성장기에 일찍 안 자고 컴퓨터하고 폰 보면서 자정 넘기는 거. 성장호르몬 버프 다 놓치는 거. 하여간 요즘 인간들은 그렇게 키에 집착하면서도 정작 키가 클 수 있는 노력은 안 해요. 그거 보면서 내가 얼마나 속이 상하는지 모르지? 한데 이 와중에 상큼하게 미친 기술을 써대면서 사람 키를 늘리려는 인간을 봤어. 내 기분이 어땠을 거 같아?
“…….”
- 이건 도와야지. 부작용이 가득한 외과 수술도 없이, 이런 위업을 이룩하는 인간을 발견했는데, 이걸 안 돕고 배겨? 미쳤어? 내가?
“…….”
- 크흠, 흠! 잠깐 흥분했던 것 같네. 미안.
“아, 아니야. 암튼 땡큐.”
어쨌건 대략 알겠다.
그럼…….
“돈벼락, 그쪽은 무슨 용건으로?”
- 구경하려고요.
“응?”
이건 또 무슨 뜻일까.
돈벼락의 정령이 퉁퉁한 배를 쓰다듬으며 의미심장하게 웃었다.
- 모처럼 찾아온 인생 돈벼락의 기회를 스스로 뻥 차버리는 인간들은 그 직후의 반응이 재밌거든요. 구경하는 맛이 쏠쏠하다고 해야 하나.
“…….”
- 암튼 구경 잘할게요. 화이팅?
“…….”
잠깐이었지만, 진심으로 콱콱 밟아주고 싶었다. 하지만 참았다. 지금은 그것보다 더 중요한 일이 생긴 듯하니까. 그러니까 그 중요한 일이라는 건…….
“전하, 괜찮으신 겁니까?”
“…….”
“전하?”
데미안이 걱정 가득한 눈빛을 보내오고 있었다. 하긴 그럴 법도 하겠다. 몇 분 전까지만 해도 녀석과 이야기를 나누다가 눈 좀 붙이겠다며 누웠던 이쪽이니까. 그런데 갑자기 이불을 박차고 벌떡 일어나서는 정령들과 이야기를 나누기 시작했으니까.
정령은 자신과 교감한 자에게만 모습과 소리를 건넨다. 데미안은 정령과 교감을 이루지 못했다. 덕분에 데미안에겐 이쪽이 허공에 혼잣말을 하는 미친놈처럼 보였을 것이다.
“아. 괜찮아.”
“별로…….”
“안 괜찮아 보인다고?”
“예. 솔직히 말씀을 드리자면…….”
“말씀드리지 마. 솔직하지 마.”
“조금 미치신 것 같습니다.”
“하지 말라고.”
“약간 도르신 것도 같고요.”
“이놈 이거 진심이네.”
“최근에 깨달은 사실인데, 전하를 놀리는 건 은근히 재미있으니까요.”
“황족 능멸죄가 무섭지 않으시다?”
“어차피 저 처형 못 하실 거니까 말입니다.”
“……어?”
“절 처형하시면…… 마계왕 강림…….”
“…….”
“후후훗.”
“…….”
와 이 x끼.
라키엘은 푸핫 웃고 말았다.
말은 저렇게 해도 데미안 녀석이 얼마나 진심으로 이쪽을 따르고 걱정하는지 누구보다 잘 알 수 있었다. 지금도 그렇다. 이쪽이 가짜 황태자라는 것을 다 알게 된 지금까지도 여전히 전하라고 불러주니까. 태도를 바꾸지 않고 있으니까.
사실은 그것만으로도 고마웠다.
“뭐 어쨌건. 정령과 이야기를 나눴어.”
“정령…… 말입니까?”
“어. 내가 좀 잘생겼잖아? 그래서 가만히만 있어도 정령이 막 꼬여요. 날파리나 모기처럼. 어때? 멋지지 않냐?”
“…….”
데미안이 침묵했다. 성장판과 돈벼락의 정령이 보내는 야유가 뚱두당땅 16비트 자진모리장단으로 고막을 때려왔다.
하지만 라키엘은 얼굴 가득 철판을 깔며 이불을 덮었다.
“어쨌건 난 다시 눈 좀 붙인다. 컨디션 이상하면 나 바로 깨우고.”
“알겠습니다.”
순식간에 벽을 향해 돌아누운 라키엘. 그의 뒷모습을 보며 데미안은 몇 번인가 입술을 달싹였다.
사실은 묻고 싶은 게 있었다. 당신의 책장을 살펴보다가 무언가를 발견했노라고. 전혀 다른 이곳 차원, 이곳 세상의, 당신의 책장에서 내 초상화를 찾았노라고. 그건 아무리 보아도 내가 맞는 듯하다고. 하여 궁금하다고. 나는, 당신은, 이 세상은, 모두 무엇인지 묻고 싶다고.
하지만 그는 물을 수 없었다.
라키엘의 숨소리가 쌔근쌔근 편안해진 까닭이었다.
“……잘 주무십시오.”
그리하여 편안하십시오.
데미안은 가슴에 배어나는 의문들을 애써 눌렀다. 평범하여 평온한 시간이 흐르고 저녁이 찾아왔다. 라키엘은 어김없이 출근을 하듯 B병원으로 향하였다.
그날부터였다.
라키엘의 밤과 낮이 바빠졌다.
“땡겨!”
밤에는 간호사 몰래 키 성장 프로젝트를 실행했다. 친구들이 자신의 원래 몸을 열심히 잡아 늘이는 동안 레고조립술을 시전하였다. 성장판의 정령 또한 도움을 주었다.
뿌드듯↗ 득!
마흔이 넘은 이한의 육체에서 모세의 기적처럼 성장판이 열렸다. 라키엘이 레고조립술로 늘려주는 키가 일시적인 것이 아닌, 영구적인 진짜 키가 되어갔다.
그런 덕분이었다.
마침내 1주가 지났을 때.
뽀각!
이한의 5번 척추에서 상큼한 뼛소리가 울려 퍼지며 키가 176.5cm에 도달하였다. 영혼과 육신의 싱크로가 처음으로 맞추어졌다.
“허억……?”
마젠타노 황가 황태자의 영혼이, 신토불이 한국인 이한의 육신으로 눈을 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