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52화. 정령도 반띵이 되나요 (1)
편안하다.
이 낯설고 이질적인 육신. 새로운 세상. 이곳에 갇힌 뒤론 내내 갑갑하였는데. 영혼을 옥죄는 느낌에 숨이 막힐 것만 같았는데. 다리 하나 제대로 뻗을 수가 없어 실로 불편하였는데.
그런데 편안하다.
낯설고 어색한 육신치고는 편안하다. 아니, 이 느낌은 객관적인 기준으로 보아도 충분히 안락하다고 표현할 수 있겠다.
마치, 처음부터 내 몸이었던 것처럼.
“…….”
마젠타노의 황태자는 천천히 눈을 떴다. 오랜만에 눈을 뜨는 것이어서였을까. 온전한 육신의 눈꺼풀을 밀어 올리는 것이 무려 2년 만의 일이어서였을까. 그저 얇은 피부에 불과한 눈꺼풀 하나를 뜨는 하찮은 일 때문에 전율이 느껴졌다.
그러나 정작 뜬 눈앞은 희뿌옇기만 하였다. 소리 또한 마찬가지였다. 웅웅거리는 소리들. 마치 물컹거리는 공이 허공을 굴러다니면 저런 묵직하면서도 웅웅대는 소음을 흩뿌리지 않을까. 아니, 저건 누군가의 말소리일까.
“여기…… 은데…… 사님 불러…… 하나?”
어지러웠다.
그런데 기뻤다.
이런 감각이 너무 오랜만이라서. 육신을 통해 감각을 느낀다는 사실 자체가 너무 그리웠던 터라. 저도 모르게 눈물이 흘러나왔다. 덕분에 눈앞은 더욱 희뿌옇게 번지고 말았다.
그때였다.
“어? 이놈 웃으면서 우는데?”
“놔둬. 좋은 꿈을 꾸고 있나 보지.”
“일단 우리는 좀 화장실로 숨어 있을게. 간호사님 부르고.”
어느새 또렷해진 귓가로 남자 셋의 대화가 들려왔다. 하나는 익숙하고, 둘은 생경했다. 그나마 안심이 되었다. 익숙한 하나가 최근 유일하게 대화를 나눈 대상이라서.
‘내 몸을 차지한…… 이 몸의 원래 주인이었다는…….’
이한.
지금은 라키엘이 된 남자.
그렇다는 건, 내가 이한의 몸에서 눈을 떴다는 뜻일까. 그건 좀 내키지 않지만…… 아무래도 좋다. 기약도 없이 막막하게 유계를 떠돌던 시절보다는 훨씬 나을 테니까. 적어도 사람으로 살아서 숨을 쉴 수는 있게 되었다는 뜻이니까.
“이봐, 정신이 들어?”
부드러운 무언가가 눈가를 꾹꾹 눌러주는 감각. 배어나던 눈물이 닦여 나갔다. 그제야 시야가 조금 또렷해졌다. 새하얀 벽면과 천장. 희뿌연 박명이 밝아오는 창가. 그걸 뒤로 두고서 너무나 익숙한 얼굴이 이쪽을 보고 있었다.
“…….”
라키엘 아드리아 마젠타노.
한때 내 육신이었던 얼굴.
오랜만에 인간의 몸으로 눈을 뜨자마자 처음으로 보는 얼굴이 내 예전의 육신이라니. 이건 너무 고약하다. 한마디 욕설이라도 꺼내주지 않으면 견디기 어려울 정도로.
“이런 빌어먹을.”
태어나서 거의 처음으로, 그리고 가히 최강으로 상스러운 욕설을 입에 담아보았다. 그런데 그 느낌이 뜻밖에도 상쾌했다. 한편으로는 깨달을 수 있었다. 아, 이래서 아랫것들이 투덜거릴 때 몰래 욕설을 섞었던 거였구나.
그런데 이쪽을 보는 이한, 지금은 라키엘이 된 자의 기분은 그리 상쾌하지만은 못한 듯했다.
“이야. 마침내 싱크로 맞아서 눈 뜨자마자 욕부터 발사하시네. 우리 황태자님 성격 있으셔?”
“…….”
“지금 그쪽만 기분 묘하게 착잡하고 드러운 거 아니거든요?”
“…….”
“나도 내 원래 육신에 다른 놈 영혼이 들어가서 눈 뜨는 모습 보는 거, 마냥 편한 기분은 아니거든? 그러니까 우리 서로 좀 조심합시다? 어?”
“……미안하구나.”
“알았으면 됐고. 다 울었어?”
“어?”
라키엘의 물음에 황태자가 멈칫했다. 잠깐. 내가 울었던가. 그랬지. 그리고 저쪽이…….
“하아. 진짜 자괴감 든다. 난 그래도 내 얼굴이 평균은 된다고 생각하면서 살았는데. 방금 질질 짜던 모습을 보니까 또 그건 아닌 거 같네.”
“…….”
“암튼 이렇게 눈을 떴으니 다행이야. 더 자세한 이야기는 조금 있다가 하자고. 지금은 간호사님 좀 불러야 할 거 같으니까.”
“그, 그래. 그러도록.”
“무리해서 일어나려고 하진 말고. 일단 기다리고 있어. 다녀올게.”
“……알겠다.”
복도로 달려나가는 자신의 뒷모습.
그걸 보며 황태자는 다시금 묘한 기분에 휩싸였다. 그리고 천천히 두 손을 들어보았다. 기억에 새겨진 것과 조금 다른 모양의 낯선 손바닥, 손가락.
“…….”
내 손은 이것보단 훨씬 가느다랗고 매끈했는데. 이렇게 관절이 살짝 울퉁불퉁하지도, 자잘한 흉터가 새겨지지도 않았는데. 이 몸은 뭘 하면서 살았던 걸까. 혹시 허드렛일 같은 걸 하던 몸일까.
수많은 의문과 걱정이 떠올랐다.
하지만 마냥 그런 감상에만 젖을 시간은 주어지지 않았다. 별안간 문밖 복도가 어수선해졌다. 새하얀 옷을 입은 여자가 들어왔다. 간호사를 부르러 간다더니, 이렇게나 벌써 온 건가 싶었다.
그때부터였다.
“환자분? 이한 씨? 어지럽거나 속이 메스껍진 않으세요?”
“아…… 괜찮은 듯한데…….”
“일단 혈압 체크할게요. 팔 주세요.”
“……아? 어?”
생전 처음 보는 기구로 팔을 감싸고, 꽉 조이고, 당황해서 벌떡 일어나려 했더니 움직이거나 말을 하지 말라는 훈계를 들었다. 그 뒤로도 여러 사람이 병실을 들락거렸다. 갖가지 방법으로 자신을 괴롭혔다. 아니, 검사했다.
정신이 없었다. 거친 파도에 휩쓸려 허우적거리는 듯한 기분이었다. 그렇게 반나절을 보내고 나니, 어느새 자신은 이국적이고 두툼한 외투를 걸친 채 병원이라는 건물 밖으로 쫓겨나 있었다.
“퇴원 축하해.”
“…….”
황태자는 흔들리는 눈길로 주위를 둘러보았다. 커다란 병원 건물. 그 앞의 도로. 이어지는 빌딩의 물결. 직선. 직선. 오로지 직각만이 존재하는 세상일까, 이곳은.
“여긴 대체 어떻게 된 곳인가. 유계보다는 낫긴 한데.”
“공기가 좀 더럽지?”
“마치 굴뚝 속에 들어온 것 같군. 눈도 조금 따갑고.”
“응. 지내다 보면 익숙해질 거야. 미세먼지 월드에 온 걸 축하해.”
“……그것이 이 왕국의 이름인가?”
“아니, 왕국은 아니고. 대한민국. 그게 여기 이름이야.”
라키엘은 어깨를 으쓱 추켜올렸다. 그리고 여전히 당혹감을 누르지 못하고 있는 황태자를 향해 말했다.
“더 자세한 이야기는 차차 해야겠지만, 지금은 일단 이건 말해둬야 할 거 같네.”
그는 곁의 두 남자를 가리켰다.
“여긴 원호. 이쪽은 은수. 내 친구들이야. 댁이 이렇게 살아날 수 있도록 많이 애를 쓴 은인들이기도 하고.”
“…….”
“보통 고맙다고 하지 않나, 이럴 때는?”
“아, 그, 그래……. 고맙도다.”
황태자가 어색하게나마 인사했다. 친구들도 어색해하는 것은 마찬가지였다. 그걸 보며 라키엘은 희미하게 웃었다. 일단 오늘은 통성명 정도면 됐다. 이제는 안정을 취하며 앞으로의 일을 의논할 때다.
“그럼 우리는 가서 쉬자. 댁도 새로운 몸이 낯설 테니까 적응이 필요할 거고.”
“쉰다니? 어디로?”
“어디긴. 우리 집.”
라키엘은 당연하다는 듯 말했다. 그리고 두 친구를 보내고 자신도 택시를 잡았다.
“타.”
“…….”
“이상한 거 아니거든? 여기서 찬바람 계속 맞을래? 그냥 버리고 가?”
“아, 아니다.”
황태자는 태어나서 처음으로, 자신의 손으로 문을 직접 여는 경험을 하였다. 택시 안쪽은 모든 것이 어색했다. 최고급 원단과 가죽으로 치장된 광활한 전용 마차에 비해 너무나 비좁았다. 약간 퀴퀴한 냄새도 났다.
“마두동 설촌공원 앞이요.”
부르릉!
이질적인 소리와 함께 택시가 말도 없이 혼자서 잘 달렸다. 시트에 앉은 황태자는 낯선 창밖 풍경을 바라보았다. 흘러가고. 또 흘러가고. 새로운 세상에 대한 기대감과 두근거림? 아니. 그보다는 묘하게 막막한 두려움이 더욱 컸다.
택시라는 마차에서 내린 후에도 그러했다.
“여기야.”
라키엘이 한쪽을 가리키며 빙긋 웃었다. 그가 가리킨 건물을 본 황태자의 표정이 덜컥 굳었다.
“이…… 이게…… 집이라고?”
“어. 이상해?”
“이렇게 작은 건물이…… 집이라고?”
“어, 응?”
“이건 가히 빈민이나 살 법한 아담한 건물이 아닌가.”
“빈민가 아니고 빌라거든요?”
“그렇지만.”
“어느 세상 빈민이 이렇게 콘크리트로 지은 튼튼한 집에 살겠어. 비도 안 새고, 외풍도 없고, 난방 따끈하고, 인터넷도 팡팡 터지니까 걱정 말고 입장하시지요, 전하?”
“하면…….”
황태자는 살짝 밀려오는 암울함 속에서도 일말의 희망을 품고서 물었다.
“내가 머무를 방은 몇 층이지? 최소한의 기품을 갖출 다과실과 응접실 정도는 따로 있는 거겠지?”
“응 없어.”
“…….”
“참고로 이 건물 전체가 내 집인 것도 아님.”
“그, 그럼?”
“201호. 저기 창문 보이지? 딱 저거 한 칸이 내 거야.”
“…….”
“참. 아니다. 월세니까 내 거도 아니네. 집주인 거네. 월세 밀리면 쫓겨나.”
“…….”
“뭐 해. 안 움직이고.”
“…….”
이젠 모르겠다, 아무것도.
황태자는 자포자기하는 심정으로 빌라로 들어갔다. 사람이 사는 건물 계단에 붉은 융단이 깔려 있지 않다는 사실도, 창틀 구석에 먼지가 껴 있다는 사실도 이제는 그냥 포기하는 게 낫겠구나 싶었다.
원룸이라는 방 안으로 들어갔을 때도 마찬가지였다.
“하.”
황태자는 저도 모르게 웃고 말았다. 원룸을 둘러보며 떠오른 첫 생각은, 사람이 이렇게도 살 수 있는 거로구나, 라는 것이었다. 웃겼다. 이게 남의 삶이 아니라, 어쩌면 이제부터 자신의 삶이 될 듯하여서.
그게 한편으로는 막막하고, 그럼에도 끝내 받아들여야 하는 것이겠구나 싶어서.
다행히 그나마 위안이 되는 일도 있었다.
“오셨습니까, 전하.”
원룸에 있던 흑발의 남자가 이쪽을 보더니 일어났다. 다가오며 예를 표하였다. 그 모습이 조금은 뜻밖이면서도 반가웠다. 저도 모르게 눈물이 핑 돌았을 만큼.
“……그래, 경이 누구인지는 모르겠으나, 나를 이렇듯 정중한 예로 맞아주니 참으로 고맙도다.”
2년 만에 받아보는 제대로 된 예법이었다. 이게 뭐라고. 이 사소한 게 뭐라고. 그런데 왜 콧등이 시큰거리는 걸까. 어째서 울컥하며 눈시울이 뜨거워지려는 걸까.
……라고 황태자가 감격하려던 순간이었다.
“함께 온 걸 보니 마침내 해내신 거로군요. 노고가 많으셨습니다, 전하.”
“오냐. 후우, 피곤하다. 피곤해.”
흑발의 남자가 이쪽이 아닌, 가짜 라키엘에게 다가가며 웃었다. 가짜 라키엘이 너무나 자연스럽게 인사를 받으며 너스레를 떨었다.
그 모습에 황태자는 치밀어오르려던 감격을 흠칫, 떨쳐내야 했다.
“무, 무슨…….”
황태자는 나인데.
내가 전하라고 불리어야 하는데. 그게 맞는 건데. 그렇지만…….
“…….”
이곳에서는 더는 아니겠지.
저 흑발의 사내에게도 아닌 거겠지. 저 자에겐 자신이 모셔온 가짜 라키엘이 황태자이며, 전하인 것이겠지. 그것이, 저자에겐 당연할 테지.
‘나는…….’
이제 내가 아무것도 아닌 세상에 던져진 것이로구나.
황태자는 저도 모르게 다리가 스르르 풀렸다. 그나마 유계에서 벗어났다는 사실이 주는 안도감도, 사람의 몸으로 다시금 살아갈 수 있게 되었다는 안정감도, 모두 부질없게 느껴졌다.
‘내가 이곳에서 적응할 수 있을까.’
막막했다. 외투를 벗지도 못한 채 바닥에 주저앉아 버렸다. 덕분에 황태자는 몰랐다. 지금 이 순간, 라키엘의 귓가에 뜻밖의 알림이 울리기 시작하고 있음을.
……딩동!
[당신과 교감 중인 ‘돈벼락의 정령’이 새롭고 흥미로운 교감 대상을 발견하였습니다.]
[‘돈벼락의 정령’이 ‘이건…… 진짜 황족 수저의 냄새!’라고 외칩니다.]
[‘돈벼락의 정령’이 새로운 교감 대상과의 연결을 원합니다.]
[‘돈벼락의 정령’이 당신에게 분리 독립을 요청합니다.]
[요청을 수락할 시, ‘돈벼락의 정령’이 ‘돈의 정령’과 ‘벼락의 정령’으로 분리될 것입니다.]
[분리된 ‘돈의 정령’은 황족 수저인 새로운 교감 대상에게 건너갈 것이며, ‘벼락의 정령’이 당신의 곁에 남을 것입니다.]
[‘돈의 정령’은 금융 사기를 원천적으로 차단하고, 지닌 재산을 굳건하게 불려주는 힘을 발휘합니다.]
[‘벼락의 정령’은 교감 대상에게 전격의 권능을 대여합니다.]
[‘돈벼락의 정령’의 분리 요청을 수락하시겠습니까?]
[YES / N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