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약 파는 황태자-356화 (355/468)

356화. 아련하여 낯설은 (1)

“저기 말이야.”

또 이런 식이다.

내 육신을 차지한 그대는.

이 순간에도 무언가가 떠올랐다는 듯이, 뻔뻔하게, 한편으로는 감히 나를 돕겠노라 다짐하는 눈빛으로, 새로운 생각을 제안하는 것이 말이다.

“너 혹시…… 명품 감별 컨텐츠로 뉴튜버 해보지 않을래?”

“…….”

뉴튜버?

그건 또 뭘까.

황태자는 말없이 미간을 살짝 찌푸렸다. 알아듣게 더 설명을 해보라는 듯이.

라키엘이 말했다.

“사실 방금 택시에서 좀 놀랐거든.”

“놀랐다니. 뭐가.”

“그런 재능이 있는 줄은 생각해본 적이 없어서.”

“…….”

무슨 소리일까.

“재능이라니, 혹시 내가 마부의 그…… 시계라는 손목 장신구를 감별하던 걸 말함인가.”

“어. 바로 그거.”

“그건 재능이 아니다.”

황태자는 잘라내듯 말했다.

“그저 눈에 보이는 걸 알려줬을 뿐이지. 이래서 아랫것들은 피곤하다니까. 당연히 보일 수밖에 없는 걸 말하였더니 호들갑스럽게 감탄하는 모습이라니.”

“…….”

“하니 그런 걸 재능이라 일컫는 것은 적절하지 못해. 그저 자연스러운 눈썰미 정도가 적당할 듯하군.”

“…….”

“왜 그런 눈으로 쳐다보지?”

“응. 어딜 때리면 아파할까 고민하고 있었지.”

“…….”

“지가 여기서도 황태자인 줄 알어, 아주.”

“뭐? 감히…….”

“됐고. 아무튼 시계를 감별하던 재능, 아니, 눈썰미 말이야. 솔직히 좀 대단하더라고.”

“그랬나?”

“어. 많이 놀랐어. 굼벵이도 구르는 재주는 있다더니, 요절할 뻔했던 황태자도 예외가 아니었구나 싶어서.”

“이런…….”

“끝까지 들어봐. 어쨌건, 아까 보여준 그 안목 말이야. 잘만 활용하면 이곳에서 지내며 쏠쏠한 일거리가 될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드네.”

“일거리?”

“어. 뉴튜버.”

“조금 전부터 말하던 그 뉴튜버라는 것이 대체 무엇이지?”

황태자의 미간이 더욱 찌푸려졌다. 어쩐지 느낌이 별로 좋지 않았다. 일거리라니. 자신이 일을 해야 한다고? 고귀한 핏줄로 태어난 자신이?

라키엘이 피식 웃었다.

“간단해. 오늘 은행에 오가면서 그림이 움직이는 기기를 봤을 거야. 택시 기사님 휴대폰이라거나, 은행에 있던 디스플레이라거나.”

“보았지. 기이하더군.”

“그래. 그건 원하는 모습을 담아서 여러 사람에게 보여주는 장치거든. 거기에 네 모습을 담는 거지. 시계나 팔찌, 목걸이, 혹은 가죽 제품 등등의 명품을 감별하는 모습을 말이야.”

“……설마.”

“감이 와?”

“지금 내게, 광대짓을 하라는 건가?”

“…….”

“날 돕겠다는 듯한 눈빛을 반짝이더니, 떠올렸다는 생각이 고작 그런 것이었나. 실망이로군, 진심으로.”

황태자는 인상을 쓰며 목도리를 추켜올렸다. 새삼 느끼는 건데, 이곳 세상의 겨울은 꽤나 매서웠다. 그런데도 이렇게 멀쩡하게 돌아다닐 수 있는 자신이 놀라웠다. 보다 정확하게 말하자면, 이한이라는 이름의 이 몸이 원래 자신의 육체보다 건강한 덕분일 테지만.

그는 원룸 건물을 향해 걸음을 돌렸다.

“방금 제안은 못 들은 걸로 하겠다.”

“못 들은 건 개뿔. 광대짓이 뭐냐. 이미 많은 분들이 종사하고 있는 분야에.”

“뭐?”

“게다가 네가 할 일도 광대짓이 아니지. 너만이 지니고 있는 고급진 안목을 대중에게 설파하는 거지.”

“……뭐라고?”

“생각해 봐.”

라키엘이 입꼬리를 슬며시 올리며 황태자 곁으로 찰싹 다가갔다. 그리고 한때 한의원에서 약을 팔던 진지하고도 교묘한 어조로 혓바닥을 놀려댔다.

“사람들은 잘 몰라요. 아까 택시 기사님 봐봐. 아들이 선물해서 매일 차고 다닌 시계가 진짠지 가짜인지도 모르고 그냥 막 다녀. 그런 사람들이 어디 한둘이겠어? 안타깝지 않아?”

“어, 그건…….”

“안타깝지? 막 안쓰럽지?”

“조금…… 어.”

“그렇지. 바로 그거지. 그럼 반대로 생각을 해보자고. 아까 택시 기사님 같은 분이, 어? 물건을 사러 갔는데 진짜인지 구분할 능력이 없어요. 그럼 가짜를 속여서 파는 사기꾼들만 배를 불리는 거겠지? 안 그래? 분하지 않아?”

“그것도 조금…….”

“그렇지? 안목만 살짝 높여 주면 되는 건데, 그게 안 되고 있어서 사기당하고. 그런 거 보면 복장이 터지지 않느냐고요. 응?”

“음, 생각해 보니 약간 그런 것도 같다.”

“옳지. 바로 그거지이. 내 말은, 네가 그런 사람들을 도울 수 있다는 거야. 너한테는 숨 쉬듯이 자연스러운 그 안목을 대중에게 설파하는 거지. 이게 바로 물건을 보는 눈이다. 이걸 배워서 너희도 나처럼 속지 말고 살아라, 하고.”

“…….”

“어때?”

“그럼, 그건 광대짓이 아니라…… 내가 가르치는 건가?”

“그러취.”

“어, 음, 그런가?”

“그렇다니까?”

“그건 좀…… 괜찮은데?”

“후후후?”

“음?”

“아니아니, 네가 내 생각을 알아주니까 기뻐서 나도 모르게.”

라키엘은 서둘러 음흉한 미소를 지우며 못을 박았다.

“어쨌건 그럼, 하는 거다?”

“그래, 알겠다. 그러면…….”

“준비는 내가 알아서 해줄게. 일단 휴대폰부터 다시 살리러 가자.”

이후로 조금 바쁘게 움직였다.

황태자에게 새 휴대폰을 사주었다. 간단한 사용법도 알려주었다. 의외로 황태자는 새로운 것에 대한 습득력이 굉장히 좋은 편이었다. 겨우 한두 시간쯤 휴대폰의 개념을 알려줬더니, 그 뒤부터는 스스로 알아서 뉴튜브 영상을 이리저리 찾아보는 경지(?)에 도달했다.

“뉴튜브라는 거, 생각보다 주제가 매우 다양하군.”

“그렇지?”

“으음. 옥석을 가리는 것이 꽤나 피곤한 일이겠구나 싶다.”

“취향껏 알아서 보는 거지 뭐.”

“그런가. 한데 촬영에 도움을 준다는 친구는?”

“어. 이따가 올 거야. 퇴근하고.”

이미 은수에게 연락을 했고, 오케이도 받아둔 터였다.

“그놈이 영상 쪽 일을 하니까. 서포트 퀄리티는 걱정하지 말고. 자, 밥이나 먹자.”

“…….”

“왜?”

“이게…… 식사?”

밥상 위에 놓인 프라이팬.

개인 그릇에 따로 덜지도 않고서, 프라이팬에 그대로 왕창 담긴 채로 밥상에 올라온 김치볶음밥을 본 황태자의 표정이 일그러졌다.

라키엘이 곁에 앉은 데미안을 돌아보았다.

“어이, 데 씨. 우리 황태자님이 반찬 투정을 하신다? 그럼 우린 어떡해야겠냐.”

“밥상을 엎을까요?”

“아니. 그건 좀.”

“…….”

“야. 그래도 김치볶음밥인데.”

“…….”

“내가 직접 열심히 볶고 계란프라이도 얹어주고 깨까지 뿌려놨는데.”

“죄송합니다.”

“아니, 됐고. 솔직히 이거 맛있지 않아?”

“맛있습니다.”

“그렇지?”

“예, 전하. 전하께서 만들어 주시는 음식 중에선 그나마 제일 먹을 만합니다.”

“……그나마?”

“예.”

“…….”

“탕약보다는 맛있습니다.”

“차라리 욕을 하세요.”

“예. 솔직히 개똥처럼 더럽게 맛없습니다.”

“……하란다고 진짜 하니?”

“죄송합니다…….”

“풉.”

결국, 황태자의 입술을 비집고 웃음이 터져 나와 버렸다. 그는 모든 것을 내려놓은(?) 듯이 웃으며 숟가락을 들었다.

“이걸로 그냥 퍼먹으면 되는 것인가?”

“어. 궁중예법 같은 건 없으니까 맛있게만 먹어.”

“방금 데미안 경이 했던 말로 미루어보자면 그 맛있게 먹기가 제일 어려운 과제일 듯한데.”

“아 쫌. 해주는 대로 먹어라, 이 인간들이 진짜.”

“그래……. 고맙군.”

황태자는 낯선 김치볶음밥 한 술을 떴다. 이국적인 향기가 코를 찔렀다. 미각 또한 마찬가지였다.

“……으음.”

“어때?”

“으으음.”

“먹을 만해?”

“……으으으으응음.”

“전하. 혼수상태로 빠져드는 중인 것 같습니다.”

“아 씨. 그만하라고 미친놈들아.”

라키엘도 푸핫 웃어 버렸다. 데미안도 진지한 얼굴에 보기 드문 장난기 서린 미소를 띠었다. 어쩌면 그래서였을까. 황태자가 저도 모르게 눈물을 흘린 것은.

“하핫, 하, 하…… 하하…….”

무의식중에 미소와 함께 눈앞이 그렁그렁해졌다. 김치볶음밥이 너무나 낯설어서? 아니. 의외로 먹을 만은 해서. 다만, 누군가와 이렇듯 마주 앉아 식사를 하는 것이 너무나 오랜만이어서. 따스한 음식을 씹는 것도 너무나 오래된 일이어서.

저도 모르게 울었다.

“이거…… 맛있네……. 하하, 하…….”

한데 어째서 눈물은 흐르는데 웃음이 나오는 걸까. 안도감? 혹은, 앞으로 여기서 홀로 살아가야 할 미래가 주는 막막함? 모르겠다. 정말로 모르겠다. 그저 지금은 스스로도 정의할 수 없을 복잡한 감정에 울음을 삼키려 애를 쓸 뿐. 그럼에도 애쓴 보람 없이 그저 눈물지을 뿐.

황태자는 가까스로 밥을 삼키며 억지로 웃었다.

“아, 이거. 미안하구나. 하하…… 나도 내가 왜 이러는지, 이거 참…….”

“괜찮아. 그런데 하나는 알아둬.”

“무엇을?”

“울다가 웃으면…… 읍?”

텁!

데미안이 라키엘의 입을 잽싸게 가로막았다. 그가 황태자를 향해 민망한 눈웃음을 건넸다.

“미안합니다. 우리 전하가 좀 철딱서니가 없으셔서.”

“…….”

“계속 드시죠.”

“그래……. 고맙군.”

한 수저.

또 한 수저.

씹고, 삼켰다.

비로소 무심결에 흘린 눈물의 의미를 조금은 알 것 같았다.

한 수저.

또 한 수저.

씹고, 삼키는 동안 고향과 한 걸음씩 멀어지는 기분. 확신. 자신을 드러내며 사랑해 주지는 않았지만, 그럼에도 끝까지 황태자위를 걷어가지 않았던 황제. 그랬던 아버지와 별다른 추억을 만들어보질 못하여서. 그 사람마저 이제는 추억이 될 것이어서.

그래서 나는 우는구나. 나의 과거를 스스로 지우듯이 우는구나.

“흐흑…… 흑…….”

황태자는 낮게 흐느끼며 김치볶음밥을 꼭꼭 씹어먹었다. 라키엘과 데미안은 말없이 황태자를 바라보았다. 그리고 한편으로 생각했다. 3인분인데 저걸 혼자 다 먹네.

은수가 온 것은, 라키엘이 추가로 만든 김치볶음밥을 다 먹고 설거지까지 끝낸 직후였다. 은수의 양손은 묵직(?)했다. 추운 겨울인데도 들고 오며 땀을 뻘뻘 흘리고 있을 정도였다.

“뭘 그렇게 많이 가져왔냐.”

“네가 촬영용으로 가져오라며 인마.”

은수가 가져온 것은 촬영용 휴대폰 마운트와 마이크, 거기에 라이트탭 스탠드 2개와 소품용 링라이트였다.

“……제법 본격적이네. 그보다 리뷰할 물건도 가져왔지?”

“어. 이거 차고 오라매.”

은수가 손목을 쓱 내밀었다. 클래식한 디자인의 은색 직사각형 시계였다.

“까르피에 탱고 마스타드. 이 정도면 오케이?”

“어. 오케이.”

은수까지 들어오자 안 그래도 비좁던 원룸이 다 큰 남자 넷으로 북적거리게 되었다. 물론 은수는 그런 상황을 전혀 불편해하지 않았다. 아니, 오히려 수줍은 소녀처럼 즐겼(?)다.

“저기, 처음 뵙겠습니다. 제가 이놈 친구인데…… 혹시 그쪽이 데미안 씨……?”

“맞습니다만.”

“아 예. 이렇게 실물로 보니까…….”

“쯧!”

라키엘이 재빨리 은수의 옆구리를 쿡 찔렀다. 뜨끔한 은수가 황급히 표정을 관리했다.

“어, 그래. 일단 촬영 준비부터 하자.”

과연 프로답게 은수의 준비는 척척이었다. 원룸에 있던 책상을 옮겨서 위쪽을 다 치우고, 하얀 천을 깔아서 화면에 비칠 배경을 정리했다. 스탠드와 조명을 적절하게 놓고, 황태자를 앉혔다.

“좋아. 각도 좋아요. 그럼 테스트 촬영 시작할게요.”

“……그럼 난 이 물건을 평가하면 되는 것인가?”

“예. 제가 쓰던 물건이니까 생활기스는 고려해 주시고요. 마음대로 씹고 뜯고 맛보시면 됩니다.”

“그런가?”

“물론이죠. 자, 그럼 인삿말부터 시작합시다. 카메라 온.”

똥!

녹화가 시작되었다.

황태자가 녹화 중인 렌즈를 빤히 쳐다보았다. 그러더니 갑자기, 무표정하게 두 손을 관자놀이에 갖다 대는 양손 경례를 시전하며 멘트를 던졌다.

“황하! 너희들의 황태자다.”

“…….”

저 x끼, 저런 건 언제 배웠냐 진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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