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약 파는 황태자-357화 (356/468)

357화. 아련하여 낯설은 (2)

황태자의 첫 테스트 방송은 성공적이었다.

아니.

솔직히 이걸 성공이라고 불러야 할까. 잘 모르겠다. 굳이 더 정확한 표현을 쓰자면…….

“대박이네.”

“…….”

생각을 자르고 들어온 은수의 한마디. 라키엘은 퍼뜩 상념에서 벗어났다. 촬영 장비를 차 트렁크에 싣고 있는 은수가 보였다.

“그랬냐.”

“어. 솔직히.”

은수가 감탄하며 말했다.

“기대 안 했거든. 다른 세상 사람이라서, 사고방식도 다를 거라서 해봤자 얼마나 하겠나 싶었고. 그런데 내가 잘못 생각했네. 황태자 저 사람 저거, 은근 방송 체질이더라?”

“그러게.”

저도 모르게 웃음이 피식 나왔다. 은수의 말은 사실이었다. 황하? 황태자가 언제 그런 인사를 배운 건지.

그것뿐만이 아니었다.

뜻밖에도 카메라가 돌아가자마자 황태자는 완전히 딴사람이 되었다. 방송이 뭔지 제대로 이해하고 있는 사람의 모습이었달까.

“캐릭터 제대로 잡았더라. 좀 허세 많고 싸가지가 없는 듯한데 그게 은근 묘하게 어울려서 약간 병맛끼 느껴지는? 그래서 밉지가 않은 줄타기를 엄청 잘하던데.”

“어. 동감.”

정말 그랬다.

그게 제일 대박인 점이었다. 그것마저 황태자가 의도한 것인지는 모르겠지만, 캐릭터성과 명품 감별 컨텐츠라는 소재의 시너지가 잘 나오는 느낌이었다. 덕분에 실시간 댓글 반응도 나름 나쁘지 않았다.

거기에 컨텐츠의 알맹이 또한 충실했다. 사실 캐릭터성은 부가적인 것이었을 뿐, 황태자는 은수가 차고 온 시계의 거의 모든 부분을 디자인적으로 해부하다시피 분석했다.

소재, 마감에 쓰인 방식의 장단점, 그걸 구현하기 위해 필요한 장인의 수공예 기술, 짝퉁이 카피가 가능한 부분과 불가능한 부분, 그런 요소들을 일반인이 구분하는 법까지.

거의 완벽했다.

기대 이상이었다.

“후우, 생각보다 너무 잘해서 오히려 걱정이 되네.”

“뭐가?”

은수가 물어왔다.

라키엘의 입가에 다시금 웃음이 맺혔다.

“난 사실 그냥 적성을 살릴 소일거리 하나 찾아주려던 마음이었거든. 소소하게 용돈벌이가 될, 딱 그 정도만.”

“근데 의외로 감당이 안 될 거 같아서?”

“뭐, 잘나가는 감당이야 본인이 하는 거고.”

그렇다.

이곳에서 살아갈 앞날은 황태자의 인생이다. 거기에 일일이 간섭하는 것도 이상하고. 라키엘은 은수의 재킷 주머니 쪽을 힐끔 눈짓했다.

“근데 너, 진짜로 받았냐.”

“어?”

“사인. 데미안 거.”

“어. 크크큭!”

“…….”

“와, 살다 살다 내가 소설 주인공 본인한테 사인도 받아 보네. 이거 작가한테 알려줘 볼까?”

“…….”

“음, 안 돼?”

“하지 마라.”

“……응.”

어느 차원은 다른 차원의 소설 속에 존재하고, 소설이 쓰이는 더 큰 차원은 또 다른 차원의 무언가에 속해 있겠지. 그런 인과의 고리를 흔들면 저쪽 세상에선 어떤 일이 벌어지는 걸까. 그런 위험을 감수하고 싶지는 않았다. 은수도 그런 뜻을 알았는지 고개를 끄덕였다.

“너 위험해질 일은 안 할게. 걱정 마라.”

“믿으니까 사인도 받게 해줬지.”

“그러냐.”

“어. 앞으로 황태자 잘 좀 도와주고. 영상 편집 신경 좀 써주고.”

“너라고 생각하고 도와줄게. 솔직히 얼굴만 봐도 너 생각 계속 날 거 같으니까. 편집 페이도 적당히 잘 받기로 했고.”

“그래…….”

“일단 난 간다. 내일 원호랑 같이 올게.”

“어. 잘 가고.”

은수의 차는 금방 골목 모퉁이 너머로 사라졌다. 그제야 참았던 한숨이 흘러나왔다.

“하아.”

차가운 겨울바람 속으로 흩어지는 입김이 생소하다. 이 세상에 내가 남긴 입김은 어디로 흩어져 떠돌게 될까. 허무맹랑한 의문이 들던 무렵이었다.

“어쩐 일로 홀로 한숨을 쉬는 것이지?”

“…….”

돌아보지 않아도 누군지 알겠다. 그냥 묵묵히 있었더니, 과연 황태자가 옆으로 와서 나란히 섰다.

“아니면 혹시, 홀로 궁상을 떠는 습관이라도 있나?”

“딱히?”

슬쩍 돌아보니 황태자는 롱패딩을 걸치고 있었다. 저거 이쪽 건데. 그런데 어울렸다. 사실 당연한 일이다. 이쪽의 몸을 지니고 있으니까. 이쪽이 평생을 살아온 얼굴로, 하얀 입김을 만들어내며 말하고 있으니까.

“조금 걷는 것은 어떻겠는가.”

“별로. 남자놈이랑 둘이서 산책하는 취미는 없는데.”

“안내를 하라는 뜻이다.”

“뭐?”

“곧 떠날 생각이잖은가.”

“…….”

라키엘은 입을 다물었다.

황태자의 말이 이어졌다.

“앞으로는 많은 것들을 내가 직접 감당하며 살아야 할 터이니까. 그대가 살던 이곳, 이 마을의 어디에 어떤 것들이 있는지 좀 알려줄 수 있을는지?”

“……그래.”

“고맙군.”

“별말씀을.”

나란히, 앞서거니 뒤서서니 걸었다.

딱히 아름다운 풍경은 아니었다. 그저 빌라들이 모여 있는 평범한 골목에 불과했다. 모퉁이 하나를 돌았다.

“저기가 편의점. 간단한 먹을거리나 생활에 쓰일 잡동사니를 살 수 있어.”

“계산은 아까 알려준 카드로. 맞나?”

“어. 편의점에서는 펑펑 써도 돼.”

“좋군.”

“그리고 저기는 세탁소. 집에서 빨래하기 귀찮으면 저기에 맡겨.”

“별궁에서 세탁과 다림질만 전문으로 하던 시종이 생각나는군. 매우 유능한 이였는데.”

“응. 그 친구 지금도 열심히 일하고 있어. 덕분에 내가 좀 편해.”

“……쯧.”

“미안.”

그 후로도 계속 걸었다. 카페, 병원, 약국, 식당, 편의점보다 큰 마트, 도서관까지. 그밖에도 생활에 필요할 많은 곳들을 알려주었다.

그중에서도 황태자가 가장 흥미를 보인 곳은 도서관이었다.

“마두 도서관……. 이 마을에도 이런 큰 도서관이 있었군.”

“궁금해?”

“책을 읽으면 많은 것을 알 수 있으니까. 역사, 문화, 현재의 정세까지. 특히 지금의 나 같은 이방인에게는 많은 도움이 되겠지.”

“그렇겠네. 그런데 한글은 알고?”

“어?”

“당연히 모르겠지. 원호한테 얘기할게. 안 그래도 그집 애기들 한글 다 뗐을 거니까. 쓰다 남은 책 좀 달라고 하면 되겠지.”

“그, 그런가.”

“응.”

“한데 묘하군.”

“뭐가?”

“이곳 세상 말이다. 비록 문자는 다르다지만, 완전히 다른 차원인데도 같은 말을 쓰질 않는가.”

“그러게.”

라키엘은 어깨를 으쓱였다. 사실 자신이 처음 황태자의 몸에 들어갔을 때도 그 점이 내심 의아하긴 했다.

“뭐, 일개 인간인 우리가 차원의 법칙까지 알 방법은 없겠지. 다만 내 짐작으로는-”

“짐작으로는?”

“저쪽 차원이, 이곳 세상의 작가가 쓴 소설 속 세상이라서?”

“……흐음, 일리가 있군.”

“뭐, 개연성 따지는 사람들이 보면 뭐라 할지도 모르겠지만 그게 차원의 법칙인 거면 우리가 뭐 어쩔 수 있겠냐. 게다가 따지고 보면 마볼 영화에선 아예 영어가 대놓고 우주랑 멀티버스에서까지 전부 공용어로 쓰이던데.”

“영어……?”

“그런 언어가 있어. 모르면 좀 불편해지는.”

“그렇군.”

“일단 한글이나 떼고 말씀하세요. 공부 시작할 때 세종대왕님 만세, 하는 거 잊지 말고.”

“……세종대왕?”

“그런 분이 있어. 한글 30분 만에 다 익히면 저절로 만세 소리 나올 거야.”

“자부심이 상당한 듯한데.”

“이런 건 국뽕 부려도 되거든.”

“국뽕이 뭔지는 모르겠지만…… 그래, 알겠다.”

황태자가 싱긋 웃었다.

그때였다.

“……어?”

황태자와 나란히 웃으려던 라키엘은 멈칫했다. 별안간 콧등에 차가운 무언가가 닿았다. 촉촉하고, 서늘하여, 하늘이 흘리는 꽃잎 같은.

“눈이다…….”

하얀 눈이 까만 밤하늘을 수놓으며 내려왔다. 하필이면 이곳을 떠나기 전의 마지막 밤에 내리는 눈이라니. 잔인하다. 이러면 대놓고 사람 마음을 콱콱 흔드는 것 같아서.

“이건 작정하고 신파 뿌리는 것도 아니고…….”

라키엘은 쓴웃음을 머금고 말았다.

그래야만 했다.

안 그러면 그렁그렁해지는 눈가를 들킬 것 같아서. 아니, 이쪽보다 먼저 그렁그렁해진 황태자의 눈가를 발견하고는 더 마음이 약해질 것 같아서.

사실은 알고 있다.

황태자가 마젠타노로 돌아가고 싶어 한다는 것을. 모를 수가 없다. 그가 돌아가고 싶어 하는 마음과 마찬가지로, 이쪽도 여기에 남고 싶으니까. 그렇게 황태자와 이쪽, 모두 자신의 있던 곳으로 돌아가고, 남고 싶은 거니까. 그게 솔직한 마음이니까.

그러나 한편으로는 황태자도, 이쪽도 알고 있다. 그래선 안 된다. 황태자는 돌아가보았자 낯선 모습의 이방인에 불과해질 것이고, 이쪽은 남아보았자 별궁 한의원의 사람들을 저버렸다는 죄책감에 평생을 시달리며 살겠지.

서로가 불행해지는 길이다.

그걸 알기에, 마음속 바람을 고집할 수가 없겠다. 그걸 이쪽도 알고, 황태자도 알기에, 더더욱 그럴 수밖에 없겠다.

“돌아갈까.”

“……동감이다.”

라키엘과 황태자는 걸음을 돌렸다. 그 뒤로 어느 쪽도 입을 열지 않았다. 행여나 그리하였다가 마음이 약해질까 봐. 그저 묵묵히, 하염없이 내리는 눈 속을 걸으며, 때때로 한숨을 닮은 새하얀 입김만 까만 허공에 새겼다.

아침이 밝았다.

약속대로 원호와 은수는 일찍부터 원룸으로 찾아왔다. 어쩐지 두 놈 모두 눈이 벌겋게 충혈된 모습이었다.

“니들 밤새 뭘 했길래 그러냐.”

“날밤 새웠지 뭐.”

“아 난 애기가 울어서.”

라키엘은 싱긋 웃고 말았다. 내 친구들. 거짓말 하나는 끝내주게 서투른 놈들. 그래서 믿고 황태자를 맡길 수 있는 녀석들.

“고맙다, 내 부탁 들어줘서.”

“부탁은 무슨.”

“친구 사이엔 고맙다는 말 필요없지 않냐.”

“그래 x끼들아. 잘 지내고.”

“어. 너도 잘 가고.”

“몸 건강하고.”

시큰한 걸까. 역시나 원호와 은수는 이미 콧등을 연신 찡그려댔다. 녀석들의 눈길을 애써 외면하며 데미안을 부축했다. 꼬슴이를 품속에 넣었다. 용왕에게 복제 받을 인슐린 샘플을 챙기는 것도 잊지 않았다.

“옥상으로 가자.”

아무래도 마법이 발현되면 실내가 엉망이 될 것 같았다. 그러면 청소며 뒷수습을 하는 일도 황태자의 몫이 될 테니까, 마지막에 그런 민폐를 끼치긴 싫었다.

데미안을 부축하고서 빌라 옥상으로 올라갔다. 다행히 옥상 문은 열려 있었다. 휑하니 널따란 옥상 중앙에 섰다. 황태자와 친구들이 복잡한 눈길을 보내어 왔다.

뭔가, 인사를 해야 할까.

잠시 고민이 되었다.

하지만 답은 이미 나와 있었다. 며칠째 고민했으니까. 그때마다 답은 같았으니까.

“나 간다.”

복잡한 말도, 쓸데없는 감상이 담긴 말도 건넬 필요가 없겠다. 굳이 그러고 싶진 않았다. 떠나는 사람보다 보내는 사람의 마음이 더 휑한 법이라서. 떠난 빈자리를 메꾸어야 할 이들의 그리움이 더 클 것이라서. 저들에게 그런 짐을 지워주긴 싫었다.

그런 이쪽의 마음을 아는 걸까.

황태자가 퉁명스러운 표정으로 한 손만 까딱, 들어 보였다. 원호와 은수는 울먹이며 손을 흔들었다. 셋 모두 똑같은 눈빛이었다. 벌써부터 그리워질 것 같은, 그런 눈빛들.

그렇기에 서둘러 읊조렸다.

차원이동의 발동 주문.

용왕이 알려준 단어.

이제 고향을 영원히 등지게 만들 귀환 주문이 하필이면 이런 단어라니. 저도 모르게 씁쓸해지는 심정으로 시동어를 말했다.

“……귀향.”

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