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58화. SARS-CoV-2 (1)
“……귀향.”
멀어진다.
지난 밤 소복이 쌓인 옥상 난간의 눈도. 별것 아니게 평범하여 내내 기억될 듯한 빌라촌의 풍경도. 그 속에서 손을 흔드는 친구들의 모습도. 끝내 울먹이고야 마는 황태자의 마지막 표정도.
순식간에 멀어졌다.
치솟는 광휘에 뒤덮였다.
이내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허공에 떠오른 걸까. 혹은 기나긴 터널을 내달리는 것일까. 눈길을 돌렸다. 아득한 속도감이 느껴졌다. 창밖을 스치듯 명멸하는 모습들. 한국에서 살아왔던 수많은 순간의 기억들. 가족. 친구들. 강아지. 웃음. 실망. 다시 웃음. 절망. 그래도 또 웃음.
전부 멀어졌다. 그리고 다시는 돌아오지 않았다. 이제는 기어코 저곳으로 돌아가지 못할 나처럼.
……!
눈을 뜬 것일까. 세상이 밝아진 걸까. 혹시 마침내 귀환하게 된 것일까. 눈길을 들었다. 막막한 어지러움이 느껴졌다. 눈앞의 모든 사물이 여러 겹으로 겹쳐 보였다.
그나마 확실한 것은, 이쪽이 드넓은 공간에 도착했다는 점이었다. 마룡굴이겠구나. 당연하여 씁쓸한 결론에 저도 모를 조소가 흘러나왔다. 이걸 돌아온 것이라 해야 할지, 떠나온 것이라 말해야 할지 잘 모르겠으니까.
하지만 지금은 쓸데없는 감상에만 빠져 허우적거릴 때가 아니긴 하다.
‘후우, 데미안과 꼬슴이는?’
그리고 인슐린 샘플은?
다들 무사히 함께 온 걸까.
확인부터 하였다. 옆으로 눈길을 돌렸다. 형편없이 일그러진 시야 사이로 곁의 사람이 보였다. 손을 뻗었다.
“으윽, 데미안? 괜찮아?”
입을 여니까 더 어지러워졌다. 이건 최악의 멀미를 곱배기로 흔드는 것 같은 기분이랄까. 자칫 긴장을 풀면 그대로 속의 것을 게워내게 될지도 모르겠다.
라키엘은 메슥거리는 속을 가까스로 억누르며 곁을 사람을 더욱 단단히 두 손으로 붙잡았다. 거의 매달리듯 하고서 흔들었다.
“데미안? 데미안?”
“……저는, 이쪽입니다.”
대답은 반대편에서 들려왔다.
그럼 이쪽이 매달리듯이 붙잡고서 흔들던 사람은 누구였단 말인가. 깜짝 놀라서 손을 떼었다. 그때까지 흔들림을 당하던 이는 아무런 대답도, 반응도 없었다.
“어, 어어. 괜찮냐?”
여전히 침침한 시야를 회복하려고 애쓰며 데미안의 목소리가 들려온 쪽을 돌아보았다. 그곳에 이쪽보다는 덜 비틀거리는 사람의 실루엣이 보였다. 얼핏 비치는 검정 머리칼. 데미안이 확실했다.
“네, 뭐. 전하보다는 괜찮은 것 같습니다. 저도, 꼬슴 경도 말입니다.”
“나보다는?”
“예. 전하만큼 어지러움을 느끼는 것도 아니고, 애먼 용왕을 붙잡고서 엉뚱한 사람 이름을 부를 상태도 아니니까요.”
“…….”
내가 방금 흔들어댔던 이가 용왕 베르키스였다고? 정신이 번쩍 들었다. 공교롭게도, 내내 흐릿하던 시야가 회복된 것도 그때쯤이었다.
“헐, 진짜네.”
그나마 눈앞이 맑아(?)지고서야 상황을 깨달을 수 있었다. 드넓은 공간은 마룡굴이 맞았다. 그리고 이쪽이 흔들어댔던 인물도 용왕 베르키스였다.
그런데 용왕 베르키스의 모습이 참, 뭐랄까.
‘너무 한결같으시네.’
그것 말고는 다른 표현을 떠올리지를 못하겠다. 한결같다는 말이 너무나 정확하기 때문에. 보다 정밀하게 표현을 하자면, 용왕 베르키스는 이쪽이 한국으로 건너가던 때와 똑같은 자세로 늘어진 상태였다.
1밀리쯤 움직였을까? 아니. 그냥 아예 1마이크로미터도 안 움직인 것 같다. 심지어 눈도 감지 않았다. 혹시 눈꺼풀마저 움직이기 귀찮았던 걸까.
‘어휴. 이건 뭐 우주 최강 놈팽이도 아니고.’
솔직히 부럽다.
라키엘은 치미는 속내를 애써 갈무리하고서 목청을 가다듬었다.
“저기, 용왕님?”
“…….”
“용왕니임?”
“…….”
“저희 다녀왔는데요?”
“……드르렁.”
“x발.”
설마 했는데 눈을 뜬 채로 자는 것이었을 줄이야.
라키엘은 가시로 용왕의 뜬 눈을 콕 찌르고픈 극단적인 처방 충동을 가까스로 참아넘겼다. 대신 한결 온건한(?) 방법을 선택했다.
“눈을 뜨세요, 용사여.”
“…….”
“듣고 계신 거 다 압니다. 전지전능한 용왕님이시니까.”
“…….”
“어라라, 설마 못 들으시는 걸까요? 에이, 그럴 리가 없는데. 용왕님께서 이렇게 허술하실 리가 없는 건데?”
“…….”
“야, 베르키스.”
“응 불렀니?”
“옙.”
“죽고 싶니?”
“아뇨.”
“아님 인생 서비스 종료 버튼을 누르고 싶어졌어?”
“물론 아닙니다.”
“혹은 지옥왕이랑 면담 일정 잡고 싶어졌니?”
“그것도 아닙니다.”
“괜찮아. 나님 지옥왕이랑 안면 있어. 너님이 원하면 지금이라도 다이렉트 배송 가능한데.”
“아뇨, 괜찮습니다.”
“나님도 괜찮아. 안 귀찮아.”
“…….”
“안 그래도 현직 지옥왕이 취임한 지 300년도 안 됐거든. 인간이던 때에도 프론테라 영지? 거기서 그랜드 마스터랍시고 한가락 하던 애라서, 지금 한창 실적에 목말라 있다?”
“아뇨, 저는…….”
“너님 정도의 영혼이면 실적 생색내기 딱 좋거든. 다른 차원에서 온 희귀한 영혼이잖아? 지옥귀들이 너님 보면 막 군침 삼단고음 타고 승천할 듯.”
“……죄송합니다, 살려주세요.”
“응 싫어.”
“저기, 약속!”
“무슨 약속?”
“제가 숙면대보탕 달여드리기로 했지 않습니까?”
“응, 죽고 나서 달여도 돼. 지옥왕 만나러 가기 전에 영혼 붙잡아줄게.”
“……진짜로 그러실 겁니까?”
“안 그럴 거 같아?”
“예.”
“꿈이 원대하네?”
“자고로 포부는 클수록 좋다고 했으니까요?”
“쯧. 그래. 우리 꼬맹이 때문에 봐줬다.”
“……예?”
“우리 마나님. 와이프느님.”
“아, 예…….”
“나님이 인간 죽이면 엄청 싫어할 거거든.”
“가, 감사합니다.”
라키엘은 쓴웃음을 애써 숨겨야 했다. 사실 용왕이 자신을 죽이지 않으리라는 확신이 있긴 했는데, 용왕이 하는 저 말들이 단순한 농담이라는 것도 다 아는데, 그럼에도 묘한 압도감이 몰려왔다. 덕분에 오싹한 식은땀이 워터파크를 개장할 지경이기도 했고.
“어쨌거나-”
용왕이 입을 열어 대화를 섞는 것조차 귀찮아 죽겠다는 눈빛으로 물어왔다.
“갔던 일은 잘됐니?”
“아, 옙. 여기.”
품속에 고이 챙겨둔 인슐린 약품, ‘트레제오’ 샘플을 꺼냈다.
“다행히 잘 가져왔습니다. 지원해 주신 1회용 복사 아티팩트 덕분에 절도를 하지 않아도 됐고 말입니다.”
“그거 잘됐네. 유통기한은 잘 남겨서 가져온 거고?”
“예. 13일쯤 남았습니다.”
보통 인슐린 약품의 경우, 미개봉 상태에서의 유통기한은 28일 내외였다. 지금 가져온 트레제오도 마찬가지였다.
“저쪽에서 마저 처리할 일들이 생기는 바람에 며칠 좀 걸리긴 했습니다. 그래도 13일 정도면 뭐.”
“딱 적당하겠군. 후우. 차라리 유통기한 확 지났으면 좋았을 텐데.”
“……예?”
“그랬으면 그 핑계로 약속 안 지켜도 됐을 거잖아?”
“…….”
“아아, 귀찮다. 세상은 왜 이런 걸까. 차라리 드넓은 우주 어느 한구석의 돌멩이로 태어났으면 이런 귀찮은 일도 안 겪었을 텐데. 나님은 왜 드래곤으로 태어난 걸까. 용생 진짜.”
용왕 베르키스의 얼굴에 전 우주의 귀찮음을 다 모아서 뭉뚱그린 회한이 짙게 배어났다. 하지만 그는 말과는 달리 자리에서 일어났다. 무려 두 발로 서서, 한 손을 휘휘 내저어 보이기까지 했다.
“훠이. 물러나들. 가까이 있다가 같이 복사된다?”
“아, 옙.”
“그런데 참.”
“예?”
“우리 약속 내용이 말이야. 너님이 숙면대보탕을 달여주면, 나님이 샘플을 복사해주기로 했던 거 아니었어?”
“아닙니다.”
“정말?”
“예. 용왕님께서 숙면대보탕을 먼저 드시면 곧바로 잠들어 버리실 거 아닙니까. 복사를 해주실 틈도 없이 말입니다.”
“……쯧. 이래서 눈치 빠른 놈들이 싫다니까. 지옥왕 그놈이나 너님이나.”
“예?”
“아니, 됐고. 훠이, 훠이.”
용왕이 시키는 대로 멀찌감치 물러났다.
복사 마법이 준비되었다.
베르키스의 나른한 눈빛이 움직였다.
츠즈즈즛!
그의 눈빛이 움직이는 경로를 따라 돌바닥에 복잡한 도형이 선명하게 새겨졌다. 마법? 아니었다. 그냥 시선의 압력만으로 구현된 물리력이었다.
그것으로 복사 마법을 위한 준비작업 완료!
“아, 귀찮다…….”
베르키스가 한숨을 푹 내쉬며 한 손을 들었다. 그리고 드래곤하트에 깃든 강대한 마력을 불러일으켰다. 아니, 일으키려 하였다.
그런데…….
“음?”
일어나지가 않았다.
마나가 움직이지 않았다.
방금 식사를 마친 나무늘보처럼. 일요일 아침의 직장인 눈꺼풀처럼. 혹은 지난달 카드명세서를 클릭한 직후의 심장박동처럼. 덜컥.
‘뭐지?’
베르키스의 한쪽 눈썹이 미세하게 꿈틀거렸다. 이상했다. 드래곤하트의 마나가 꿈쩍도 하지 않는다니. 해츨링 시절에도 없었던, 처음 겪는 일이었다.
‘왜지?’
다시 시도를 해보았다.
그러나 여전하였다.
강대한 마나가 드래곤하트에 틀어박혀서 움직일 생각도 하지 않았다. 설마 움직이기 귀찮아하는 주인을 닮아 버린 걸까. 그럴 리가 없어서 더욱 기이한 일이었다.
“하하핫?”
베르키스는 웃어 버렸다. 그리고 라키엘을 돌아보며 상큼하게 말했다.
“나님, 마법 사용이 안 되네?”
“……예?”
“나님도 이유는 모르겠는데, 정말로 그러네?”
“예에……?”
당황한 쪽은 라키엘이었다.
“아니, 왜 갑자기 그러신 겁니까?”
“나님도 모르겠다니까?”
“…….”
“그러니까 요약을 하자면, 서비스 장애로 약속을 지킬 수가 없게 된 거 같은데?”
“…….”
“진짜다?”
“…….”
“나님 혹시 무슨 병이라도 걸렸나? 아님 너님이 저쪽에서 이상한 병균이라도 옮아왔나?”
“예? 설마…….”
“어쨌거나 뭐 100년쯤 지나면 알아서 괜찮아지겠지?”
“…….”
아뇨, 전혀.
생각지도 못했던 상황에 라키엘은 다급해졌다. 가져온 인슐린 샘플의 유통기한은 13일밖에 안 남았는데. 그런데 멀쩡히 잘 있던 용왕이 왜 갑자기 마법불능 상태가 된 걸까.
너무나 갑작스러운 사태라 이해가 안 됐다. 설마 귀찮아서 일부러 저러나도 싶었는데, 기색으로 보아하니 그건 또 아닌 듯했다. 그래서 더 이상했다.
“혹시 오랜만에 마법을 쓰셔서, 몸이 덜 풀려서 그러신 겁니까?”
“그건 아니고. 마법이라면 며칠 전에 너님들 텔레포트며 차원이동이며 공간 관광, 차원 관광시켜 주면서 충분히 썼는데?”
“저기, 그러면 도대체 왜…….”
“나님도 몰라. 그냥 아무런 전조도 없이 갑자기 이러네? 드래곤하트에 마나는 충분한데, 평소와 컨디션도 똑같은데. 그런데 마나가 움직이질 않아.”
“그런…….”
뭘까. 왜 갑자기 저러는 걸까. 이유도 모를 사태 앞에서 어이가 사라질 지경이었다. 한데 그때였다. 때아닌 알림음이 울린 것은.
딩동!
불현듯 귓가를 두드려 오는 알림음.
이내 메시지가 떠올랐다.
그것은, 뜻밖의 핏빛 경고 메시지였다.
[WARNING!]
[당신의 체내에서 대량으로 증식된 코로나(SARS-CoV-2:GH형) 바이러스가 감지되었습니다.]
[코로나 잠복기 종료.]
[당신은 코로나 바이러스에 감염되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