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약 파는 황태자-362화 (361/468)

362화. 역사적 위업 (2)

‘해내야…… 하는데.’

하지 못하는 일들이 많다. 본인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넘기 불가능한 벽에 가로막히는 일도 많다. 누구나 그렇다. 좌절하고, 아프고, 깨지며, 넘어지고, 애쓰며, 그럼에도 살아간다.

아마 잘은 모르지만, 부모님도 그러셨던 것 같다.

‘나는…….’

펄펄 끓는 열기.

소름 돋는 오한.

그 속에서 라키엘은 거친 숨을 허덕였다. 일어나야 한다고. 눈을 떠야 한다고. 탕약을 완성해야 한다고. 스스로를 향해 외쳤다. 하지만 그럴수록 의식은 더욱 깊은 무저갱으로 빠져만 갔다.

끝없는 우물 속으로의 추락. 어둠이 사방을 뒤덮어 왔다. 수많은 무의식과 기억의 파편들이 유리 조각처럼 전신을 스치고 긁으며 지나쳤다. 사소하게 웃고 떠들었던 날들. 때로는 아팠던 날들. 그래. 언젠가 지금처럼 심하게 열이 나고 아팠던 날도 있었지.

문득, 기억이 났다.

“…….”

밤새 열이 끓었더랬다. 일어날 수도 없었다. 하지만 괜찮았다. 흐릿한 의식 사이로 드문드문 눈을 뜰 때마다 부모님이 곁에 계셨으니까. 옆을 지켜주셨으니까. 무섭지 않았다. 지금도 그럴까. 부디 그러면 좋겠다. 힘껏 애쓰는 지금의 나를 향해 박수라도 보내주시면 좋겠다.

……짝! 짜악! 짝!

누군가가 소원을 들어준 것일까.

라키엘은 흐려진 의식 속에서 움찔거렸다. 어디선가 박수 소리가 들려왔다. 처음엔 환청인 줄 알았다. 그런데 아니었다. 계속해서 들려오는 소리. 짝, 짝, 이쪽의 심장이 뛸 때마다 함께 울리는 소리.

‘누구……?’

알 수 없었다. 다만 왠지 힘이 났다. 누군가에게 격려를 받는다는 기분이 이러할까.

‘일어나야 해.’

라키엘은 의지를 되새겼다. 여기서 포기할 수는 없다. 기껏 코로나를 제압할 물질을, 그것도 한낱 고구마잎에서 찾아낸 기적적인 상황이었다. 그런데 이런 기회를 살리지 못하고 쓰러진다면? 죽어서도 눈을 감지 못할 것 같다.

‘아직, 할 수 있어.’

해야 한다. 해내야 한다. 이를 갈았다. 혼미한 의식 속에서 결의를 불태웠다. 힘이 들어가지 않는 주먹을 억지로 쥐었다. 전신이 덜덜 떨렸다. 이대로 쓰러져 휴식을 취하고 싶어 하는 육신과, 일어나고자 하는 의지가 전쟁을 벌였다.

힘겨웠다.

그러나 박수 소리가 멈추지 않고 달려왔다. 어깨를 두드렸다. 격려하듯. 힘을 불어넣어 주듯. 할 수 있다고 외치듯.

“……그읏!”

라키엘은 마침내 눈을 떴다. 주먹으로 바닥을 짚었다. 그런데 의외로 바닥이 부드러웠다. 이상한 일이었다. 조금 전에 이쪽은 맨바닥에 쓰러졌는데. 그 딱딱하고, 차갑고, 거친 감촉을 볼로 느끼면서 혼절했는데.

그런데 어째서 새하얗고 푹신한 시트 바닥이 날 떠받치고 있는 걸까.

“후우.”

궁금증을 되삼키며 심호흡을 했다. 그러고 보니 시트가 온통 축축하게 젖어 있었다. 기절해 있던 내내 식은땀을 흘린 탓일까. 옆에는 이쪽이 일어나는 통에 나동그라진 물수건도 보였다. 누군가가 이마에 얹어 주었던 듯한 모양새였다.

……짝! 짝! 짝!

여전히 어디선가 들려오는 박수 소리. 그 사이로 철컥거리는 금속성 소음도 섞여서 함께 들려왔다. 라키엘은 현기증을 참으며 고개를 들었다. 덕분에 자신이 어디에 있었던 건지를 비로소 알 수 있었다. 침실이었다.

“하.”

기절한 뒤로 시간이 얼마나 지난 걸까. 생각보다 오래 누워 있었던 건지도 모르겠다. 컨디션은 여전히 엉망이었다. 시야 한쪽에는 계속해서 붉은 경고등이 거슬릴 정도로 점멸하고 있었다. 코로나가 중증으로 악화되었다는 경고 메시지였다.

“…….”

그렇다고 이렇게 비척거리고 있을 수만은 없겠다. 라키엘은 비틀거리며 침대에서 벗어났다. 한 걸음, 한 걸음, 내딛는 모든 걸음이 천근같이 무거웠다. 귓가에는 웅웅거리는 이명이 맴돌았다. 그럼에도 아까부터 들려오던 저 박수만큼은 선명하게 들렸다.

대체 무슨 소리일까.

라키엘은 침실을 벗어났다. 마룡굴 특유의 복도가 펼쳐졌다. 박수 소리는 복도를 따라 늘어선 수많은 문 중에 한쪽에서 들려왔다.

주방.

기절하기 전까지 자신이 탕약 조제 실험을 거듭했던 장소였다.

‘대체 누가…….’

주방에서 계속 박수를 치고 있단 말인가. 게다가 박수 소리와 묘하게 맞아떨어지는 박자로 철컥거리는 금속성 소음은 또 무엇이란 말인가.

라키엘은 샘솟는 호기심을 느끼며 주방 문을 열었다. 그리고 보았다. 주방 바닥에 앉아서 열심히 박수를 치는 데미안과 용왕 베르키스를. 그 앞에서 박수 비트에 맞추어 혼신의 브레이크 댄스를 선보이고 있는 리빙아머를.

“…….”

x발 내가 아직 잠이 덜 깼나.

라키엘은 눈두덩을 비비며 마른 세수를 거칠게 시전했다. 그리고 조금 또렷해진 눈길을 들었다. 덕분에 목격할 수 있었다. 강철의 비보이로 빙의한 듯 윈드밀을 돌리는 리빙아머의 꿋꿋한 모습을.

“……지금, 뭐 하는 겁니까.”

결국, 참지 못하고 물었다.

그 물음에 데미안과 베르키스의 박수가 뚝, 하고 멈추었다. 리빙아머도 윈드밀을 중지하고는 각이 딱 잡힌 프리징 자세를 잡았다.

“뭐 하는 거긴. 탕약 달이는 중이지.”

대답은 용왕 베르키스에게서 나왔다. 어느새 이쪽을 돌아보고 있는 용왕의 표정을 살필 수는 없었다. 마스크를 쓰고 있기에 눈만 보였기 때문이었다.

다만, 그렇게 엿보이는 용왕의 눈길은 너무나 태연했다. 아니, 의외로 진지했다. 양반다리로 바닥에 앉아서 박수를 치다가 멈춘 자세를 제외하고는, 대략 그러했다.

라키엘은 식도로의 역주행을 감행하는 황당함을 애써 억눌렀다.

“그…… 박수 비트에 리빙아머가 브레이크 댄스를 시전하는 거랑, 탕약을 달이는 게 어떤 연관성이 있는 겁니까?”

“연관성이 있지. 쟤 안에 탕약 재료랑 물을 부었거든?”

“……예? 리빙아머 안에요?”

“응.”

이어지는 베르키스의 대답은 더 가관이었다.

“거기에 살라만더도 함께 들어가 있다? 그래서 안쪽에서 직화로 보글보글 탕약을 끓이는 중이야.”

“…….”

할 말이 없어졌다.

그때 마침, 용왕의 설명을 들은 건지 리빙아머 안쪽에서 살라만더로 추정되는 마수의 대답이 야물딱지게 들려왔다.

“더덕! 더더덕! 어푸푸!”

“…….”

더 할 말이 없어졌다.

데미안 녀석이 조심스럽게 입을 연 것은 그때였다.

“그나저나 전하, 괜찮으십니까?”

“아니. 안 괜찮아. 몸도, 마음도.”

“마음은…… 왜요?”

“이런 꼴을 보고 마음이 편하겠냐. 탕약 이렇게 달이는 거 아닌데.”

“하지만 용왕께서 직접 제안하신 방법입니다.”

“…….”

“고온으로 탕약을 달이면서, 동시에 오랜 시간 격렬하게 흔들어 주면 약재가 더 잘 우러나올 거라고 하셨습니다.”

“…….”

“거기에 전하께서 거듭하셨던 탕약 연구 기록을 참고했습니다.”

“내 연구를 이어갈 생각으로?”

“예. 마침 거의 다 달인 것 같은데, 결과물을 한번 살펴보아 주시지요.”

“허허.”

라키엘은 황당함과 고마움을 함께 느끼며 웃고 말았다. 하지만 데미안의 말처럼 리빙아머와 살라만더로 달인 탕약을 자신이 분석하는 건 불가능할 터였다. 자신이 직접 달이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탕약조제 스킬은 내가 직접 달인 것만 성분을 분석할 수 있어. 그럼…….’

어떡하면 리빙아머로 달인 탕약의 성분을 분석할 수 있을까. 잠깐 머리를 굴렸다. 답은 어렵지 않게 나왔다.

“지금까지 달인 시간이 얼마나 됐지?”

“예? 어, 음, 대략 두 시간쯤 달인 것 같습니다.”

“그럼 아직 조금 모자라겠네.”

“예?”

“더 달여야 할 거 같다고.”

라키엘은 태연하게 대꾸하며 데미안과 조금 떨어진 곳에 앉았다. 그리고 박수 자세를 잡으며 용왕 베르키스를 쳐다보았다.

“제가 비트 넣으면 됩니까?”

“좋을 대로 하렴?”

“옙.”

짝!

박수를 쳤다.

그 소리에 반응한 리빙아머가 기다렸다는 듯이 프리징 자세를 풀었다.

짝! 짝! 짝! 짝짝!

“삐각! 삐각각! 삐각!”

“더덕! 더더덕! 더더더더더덕!”

“아이고 잘하신다. 짝짝!”

다시 시작된 박수 비트에 리빙아머가 흥을 내며 브레이크 댄스를 시작했다. 그 안쪽에 탑승(?)해 있던 살라만더도 화력을 보글보글 끌어올렸다.

그렇게 열심히 박수를 치고. 탕약 조제 댄스가 이어지고. 중간에 용왕이 이쪽을 향해 ‘너님 박치였구나’라고 혀를 끌끌 차고. 지금 내가 뭔 짓을 하는 건가 현타를 살짝 느끼고. 마침내, 바라며 기다렸던 메시지가 떠올랐다.

딩동!

[열심히 박수 비트를 넣은 당신의 정성과 노력이 효과를 발휘하였습니다.]

[당신의 노력이 리빙아머식 탕약조제 과정에 충분한 기여를 하였음이 인정되었습니다.]

[당신의 이름이 탕약조제자 명단에 정식으로 등록됩니다.]

[탕약조제 스킬 옵션 ① : 성분 분석의 사용 자격을 획득하였습니다.]

해냈다.

의도가 제대로 먹혔다.

라키엘은 남몰래 주먹을 불끈 쥐었다. 자신이 어떤 식으로든 조제에 참여를 하면, 탕약조제자로 이름이 등록되고 성분 분석이 가능할 거라고 보았다. 하여 시도를 했더니, 역시나였다.

물론 그는 성분 분석의 결과를 크게 기대하지는 않았다.

‘뭐, 이런 식으로 우당탕 달인 탕약에 기대를 하는 게 이상한 거지.’

다만 뭔가 다른 점은 있겠지.

그 결과물만 살짝 참고해보자.

다시 내 연구를 이어가자.

“자. 이만하면 된 것 같습니다. 리빙아머님? 만들어진 탕약을 조금 볼 수 있을까요?”

“삐각? 삐가각!”

리빙아머가 댄스를 멈추고는 대접을 가져왔다. 그리고 투구를 살짝 열어서 주전자처럼 기울였다.

쪼르륵!

투구에서 흘러나와 대접을 채우는 연갈색 탕약!

여전한 고열과 오한 속에서 라키엘은 정신을 가다듬었다. 그리고 별다른 기대감 없이 대접 속 탕약을 지그시 바라보았다.

딩동!

[당신이 조제에 참여한 탕약을 감지하였습니다.]

[탕약조제 스킬 옵션 ① : 성분 분석을 발동하시겠습니까?]

[YES / NO]

선택은 물론 예스였다.

이내 결과가 떠올랐다.

[용왕배길수탕(龍王裵吉數湯)]

[유효 성분 : 철분, 베타카로틴, 어쩌고저쩌고, 기타 등등…… 이거저거…… 페노피브레이트(Fenofibrate)]

[성상 : 연갈색의 액상]

[효능과 효과 : 자윤보혈(滋潤補血), 청혈 및 혈당강하, 인터페론 유기작용, 체내 ACE-2 수용체와 SARS-CoV-2 바이러스의 돌기 단백질간 결합 방해를 통한 코로나19 억제]

역시나.

여기까지는 지금까지의 실험 결과들과 크게 다를 바가 없었다. 보는 것만으로도 가슴이 떨리는 코로나 19 억제 효과. 그러나 문제는 그다음이었다.

‘항상 복용량이 1만 리터, 이딴 식이었으니까.’

지금까지 극복하지 못한 난관이었다.

물론 이번이라고 별다를 바는…….

‘없겠…… 어? 어어?’

무심결에 아래쪽을 내려다보던 라키엘은 저도 모르게 덜컥, 두 눈을 휘둥그레 떴다.

[용법, 용량 : 1회 1리터, 1일 3회 식후에 꾸준히 복용]

“……어?”

잠깐만.

1리터?

좀 많기는 해도…….

‘마실 만한 양인데?’

해냈다.

해내 버렸다.

불현듯한 깨달음과 함께 라키엘의 귓가로 오장육부의 환호성이 아스라이 들려왔다.

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