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64화. 위업자의 작은 바람 (1)
……딩동.
귓가를 문득 울리는 소리.
아침을 깨우는 알람일까.
아니.
그런 그리운 소리는 이제 한국에 두고 왔으니 들을 일은 없겠지. 그저 멍한 새벽의 흔한 착각쯤 되는 소리겠지. 모처럼 몸이 가벼워져서. 모처럼 아프지 않은 듯하여. 이런 아침이 오랜만이라 드는 기분 좋은 착각일까.
그런데 눈을 떠보니, 그건 또 아닌 듯하다.
[역사적 위업 달성]
제가요?
뭐를요?
라키엘은 아직 멍한 기색이 남은 두 눈을 끔벅거렸다. 마치 곤히 잠들어 있다가 깬 직후에 휴대폰을 열어본 것처럼 글자가 흐리멍덩하게 뭉개져 보였다. 설마 벌써 노안이 온 건가. 말도 안 되는 생각에 그가 피식거린 것도 잠깐이었다.
‘어?’
진짜다.
다시 보니 저 내용이 맞다.
‘역사적 위업? 무슨?’
잠이 확 달아난 그의 눈길이 바빠졌다.
[당신은 인류 최초로 자연 치유법이 아닌, 적극적 치료로 코로나 19 바이러스의 후유증 없는 완치를 이루어내는 쾌거를 달성하였습니다.]
[또한, 이로써 당신은 이곳 차원의 인간계에 몰아닥칠 수도 있었을 대재앙을 조기에 완벽히 차단하였습니다.]
[타 차원에서 묻어온 코로나 19는 이후 치명적인 변이를 거듭하여 이곳 차원 전체 인류의 1/3, 유사 인류의 1/2, 기타 종족의 1/5을 죽음으로 몰고 갈, 대멸종 급의 재앙을 불러올 예정이었습니다.]
[그러나 당신은 적절한 자가방역의 시행과 치료제의 개발로 이 커다란 멸망급 재앙을 매우 효율적으로 조기에 진압 및 차단하였습니다.]
[이 사례가 로라시아 대륙의 ‘숨겨진 위업’ 리스트에 등재됩니다.]
[‘숨겨진 위업’이란, 한 차원계의 역사를 바꿀 정도의 거대한 위업을 이루었으나, 정작 그 차원에서 살아가는 존재들이 제대로 인식하지 못하는 종류의 위업을 뜻합니다.]
[당신은 이곳 차원에서 숨겨진 위업을 이룬 ‘6번째’ 존재가 되었습니다.]
<현재까지 등재된 숨겨진 위업자 명단>
[1. 베르키스]
[2. 청]
[3. 로이드 프론테라]
[4. 하비엘 아스라한]
[5. 알리시아 테르미나 마젠타노]
[6. 라키엘 아드리아 마젠타노]
“…….”
이건 뭘까.
처음엔 멍했다.
숨겨진 위업자 명단?
명단에는 용왕의 이름이라든가, 300년 전에 활동했다는 역대급 영지 설계사 같은 이들의 이름이 보였다. 그런데 저 라인업에 자신의 이름도 올라가게 되었단다.
‘하.’
딱히 원한 적은 없었다. 날뛸 만큼 마구 기쁜 것도 아니었다. 이 순간 라키엘이 느끼는 감정은 오히려, 안도감을 닮은 그 무언가에 가까웠다.
‘그럼 나, 다 나은 거구나.’
어쩐지 유달리 확 가벼워진 몸의 감각. 그러고 보니 그동안 내내 머리를 짓누르던 두통이나 고열이 사라져 있었다. 목이 아프지도 않았고, 숨을 쉬기도 한결 편해졌다.
비로소 마음이 놓였다.
‘다행이다.’
데미안을 더 아프지 않게 해서. 꼬슴이나 이곳 마룡굴 마수들에게 빌어먹을 코로나를 옮기지 않게 되어서. 그런 민폐를 끼치지 않게 될 것이어서. 정말로 잘됐다. 다행이다.
물론 그걸로만 만족할 라키엘은 아니었다.
‘그래서 보상은?’
감동은 감동이고.
다행은 다행이고.
보상은 보상이다.
무조건 보상은 꼭꼭 챙겨야 한다. 그건 마트에서 계산하고 주차등록을 받는 것만큼이나 당연하다. 혹은 치킨 시켜먹고 ‘10장이면 한 마리 무료’ 쿠폰 모아두는 것만큼이나 중요하다.
그러한 집념(?)으로 라키엘은 아래쪽의 텅 빈 허공을 쏘아보았다. 그 갈망 가득 집요한 눈길 때문이었을까. 마침내 허공에 새로운 메시지가 뚝딱 떠오르기 시작했다.
딩동!
[‘숨겨진 위업자’ 호칭 획득에 따른 보상이 지급됩니다.]
[당신은 매일 언제든 ‘숨겨진 위업자’ 호칭을 불러와서 구경할 수 있습니다.]
[그때마다 당신은 남몰래 뿌듯한 보람을 느끼게 될 것입니다.]
잠깐만.
지금 장난해?
순간 울컥하는 기분이 들었다.
하지만 진짜 보상은 아래에 있었다.
[당신의 오랜 트라우마가 치유됩니다.]
[이제 당신은 ‘코로나’라는 단어를 떠올리거나 말할 때 본인도 모르게 심장박동이 요동치지 않을 것입니다.]
[이제 당신은 아침에 기억하지 못하는, 무의식에 새겨지는 유형의 악몽에 매일 시달리지 않을 것입니다.]
“…….”
내가 매일 악몽을 꾸었다고? 지금껏 2년 가까이, 하루도 빠지지 않고?
이제야 알게 된 사실이었다.
그래서 안도감이 드느냐면, 모르겠다. 어째서 무의식중에 눈가가 뜨거워지는 건지. 콧등이 시큰해지는 건지. 이게 안도감 때문인 건지. 혹은 오래도록 틀어박혔던 응어리가 풀어지며 뒤늦게 새어나오는 설움 같은 건지.
라키엘은 황급히 고개를 저었다.
지금은 안심할 때도, 환호할 때도 아니라는 생각에 정신이 번쩍 들었다. 아직 일이 다 해결된 것이 아니다. 엄밀히 말하자면 이제부터가 시작일 뿐이다.
‘내가 완치된 것이 중요한 게 아니야. 목표는 용왕이니까.’
더 아래로 시선을 던졌다.
그곳에 진짜로 바라던 메시지가 있었다.
[당신은 코로나(SARS-CoV-2:GH형)에 대한 영구적인 항체를 획득하였습니다.]
바로 이거다.
이게 필요했다.
‘그렇다면 바로 다음 단계로.’
라키엘은 방을 나섰다. 며칠 만에 나온 마룡굴 복도는 휑하지만 따뜻했다. 복도에서 마주친 만티코어가 놀라움에 귀를 쫑긋거리는 모습도, 하루 치 탕약을 다 달이고서 하이파이브를 하던 리빙아머와 살라만더도, 둘을 응원하던 가고일과 아이스골렘도 모두.
그리고 무엇보다도…….
“꼬슴! 꼬스슴!”
마룡굴 마수들과 함께 있던 꼬슴이가 이쪽을 보자마자 도도도 달려왔다. 제 나름 이쪽을 찌르지 않기 위해 가시를 한껏 누그러뜨리고서 품으로 뛰어들었다.
콰앙!
“……궤렑!”
졸지에 꼬슴이표 명치샷(?)을 맞은 라키엘의 몸이 기역자로 접혔다. 하지만 아무래도 좋았다.
“우리 꼬슴이, 잘 지냈어?”
“꼬슴! 꼬그슴?”
“응. 나 다 나았어. 우리 거의 7일 정도는 얼굴을 못 봤던 거 같네. 맞지?”
“꼬스슴!”
“그래. 나도 많이 보고 싶더라. 반갑다.”
“꼬슴! 꼬꼬! 슴슴!”
“응? 데미안도 반가워할 거라고?”
“꼬슴!”
“이쪽으로 가면 된다고?”
“꼬!”
“그래, 고마워.”
“슴!”
기쁨에 겨워 궁디를 씰룩거리는 꼬슴이의 안내를 받으며 얼마나 걸었을까. 긴 통로가 끝이 나고 마룡굴 중심부의 드넓은 공동으로 나오게 되었다. 그곳에 데미안이 있었다. 뭘 하는 건지, 양반다리를 한 채 용왕 베르키스와 마주 앉은 모습이었다.
“제가 좌측으로 뛰며 공간과 반 박자의 흐름을 빼앗은 후에 왼손으로 바꾸어서 쥔 검을 위로 찔렀습니다.”
“흐음, 너님이 찌른 검은 제법 날카롭고 타이밍이 절묘하지만 한 가지를 빠뜨렸어. 상대가 드래곤이라는 것이지. 드래곤인 나님은 넘쳐나는 마나를 콧김에 실어서 콧바람을 일으키겠다. 그럼 너님이 찌른 검의 기세가 죽겠지?”
“검의 기세가 흐트러진 것을 감지한 저는 즉각 검을 회수하며 용왕님이 뿜은 콧바람의 범위를 벗어났습니다.”
“좋아. 그럼 이제 나님의 반격이다. 거대한 앞발로 쾅. 모기 잡기를 시전하지.”
“저는 찰나의 빈틈을 포착하고 용왕님의 앞발 발가락 사이의 공간을 활용하여 털끝 하나 다치지 않으며 검을 옆으로 눕히고 가로로 강력한 베기를 시도했습니다.”
“앗 따거.”
“어느 정도의 타격을 받으실 것 같습니까?”
“너님이 자랑하는 마나 역행의 힘을 전력으로 실은 베기였지?”
“예.”
“그럼 발가락 사이 각질 한 꺼풀 정도는 벗겨졌을 듯?”
“그건…… 따가운 게 아니지 않습니까?”
“아 시원하다.”
“반칙입니다.”
“허? 뭐가?”
“인간 형태로 가상 대련에 임해주시죠.”
“그래도 결과는 똑같을 텐데?”
“어째서입니까?”
“천사장이랑 내기를 해봤거든. 나님의 몸이 어디까지 하면 다칠 수 있는지. 그런데 불가능하더라고. 아까웠어.”
“아까웠다니, 어떤 점이 말입니까?”
“그 중성자별.”
“……예?”
“빛깔이 참 예쁜 중성자별이었거든. 그런데 실험을 위해서 근처 성운의 가스를 잔뜩 끌어다가 쏟아부어서 강제로 무게를 왕창 늘려줬지. 대략 중성자 축퇴압이 견딜 수 있는 오펜하이머-볼포크 질량을 살짝 넘길 때까지? 덕분에 뿜쾅. 초신성 폭발이 일어났고. 난 그 폭발력으로 샤워를 감행했고. 그런데도 별로 안 다치더라고. 일광욕 살짝 과하게 해서 콧등 꺼풀만 살포시 까진 정도?”
“무슨 말씀인 건지…….”
“모르겠지. 뭐 어쩌라고.”
“…….”
용왕과 가상의 대련을 벌이던 데미안이 할 말을 잃었다. 그걸 보던 라키엘도 할 말을 잃었다. 초신성 폭발에도 멀쩡한 드래곤이라니. 용왕의 저 말이 거짓일 리도, 그가 구태여 저런 거짓말을 할 이유도 없고.
상상할수록 아득한 기분만 들었다. 한편으로는 헛웃음이 나오기도 했다. 저토록 강력한 용왕도 코로나에 걸리니 마법불능자가 되어 버렸다는 사실이 떠오른 까닭이었다.
“가상 대련은 다 하신 겁니까?”
나름(?) 대련에 엄청나게 집중하고 있던 까닭이었을까. 비로소 이쪽의 목소리를 들은 데미안이 깜짝 놀라며 빛의 속도로 고개를 돌렸다. 반대로 용왕 베르키스는 의미심장한 미소만 희미하게 지었다.
“너님 다 나았구나?”
“예, 그럭저럭.”
“그럼 나님을 고쳐주러 온 거겠구나.”
“물론입니다.”
데미안의 어깨를 토닥토닥 짚으며 옆에 나란히 앉았다. 반가움과 놀라움이 뒤섞인 채 물을 것이 많아 보이는 녀석의 눈길이 옆얼굴로 팍팍 꽂혀오는 게 느껴졌다. 하지만 둘 사이의 잡담은 나중에. 지금은 우선 용왕의 치료가 급선무다.
“바로 시작해도 될까요?”
“물론. 나님은 어떻게 하면 돼?”
“그냥 그대로 계시면 됩니다.”
라키엘은 심호흡을 하며 셔츠를 벗었다. 그리고 품속에서 꺼낸 꼬슴이표 하얀 가시 다섯 개를 자신의 몸에 찌르기 시작하였다.
톳!
목과 앞가슴이 만나는 움푹 파인 자리(suprasternal fossa). 그곳에서 다시 1촌을 내려간 자리에 임맥(任脈)의 선기혈(璇璣穴)이 있었다.
그곳을 시작으로 어깨에 있는 수소양삼초경(手少陽三焦經)의 견료혈(肩髎穴), 손목에 있는 수소음심경(手少陰心經)의 영도혈(靈道穴), 새끼손가락에 있는 수태양소장경(手太陽小腸經)의 소택혈(少澤穴)과 전곡혈(前谷穴)을 차례로 거침없이 찔러나갔다.
그러자 몸에서 서서히 반응이 왔다.
두근…… 두근……!
심장이 유달리 크게 뛰며 혈류가 가슴으로 모이는 것이 느껴졌다. 그 기세를 타고서 아스라한 심법을 발동하였다. 써클 슬롯을 활성화했다. 그리고 혈액 속에 생성되어 있던 코로나 항체를 수집하기 시작하였다.
키이이이잉-!
거세게 회전하는 써클. 그 중심에서 항체를 골라내어 차곡차곡 담는 슬롯. 추출과 응축은 순식간이었다. 그토록 많은 이들이 애쓰고, 바라고, 원하였던 순수한 코로나 항체가 마침내 써클슬롯에 담겼다.
그 상태에서 라키엘은 손을 뻗었다. 용왕 베르키스의 정수리 백회혈(百會穴)에 자신의 손바닥 중심이 닿도록 하였다. 그리고 나직하게 읊조렸다.
‘방출.’
슬롯에 응축되어 있던 순수한 항체가 마나에 담겨 용왕 베르키스에게 건너갔다.
그 순간이었다.
……딩동.
귓가에 문득 닿아오는 소리.
희망을 전하는 소식일까.
아마도.
어쩌면.
오랜 응어리가 풀리는 소리인 것인지도 모르겠다. 코로나로 텅 비어 버린 한의원. 막막했던 매일의 하루. 한숨 같은 공기를 마실 때마다 몰려오던 무력감. 내가 고칠 수 있다면. 내가 치료할 수 있다면. 수없이 홀로 읊조려야 했던 혼잣말.
그 모든 나날들의 탄식과 미련을, 남몰래 삼켜야 했던 눈물을, 이 순간, 단 한 줄의 위로 같은 메시지가 부드럽게 닦아주었다.
[당신은 적절한 항체의 활용으로 환자 : 베르키스의 코로나(SARS-CoV-2:GH형) 바이러스를 성공적으로 완치하였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