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65화. 위업자의 작은 바람 (2)
딩동!
[당신은 적절한 항체의 활용으로 환자 : 베르키스의 코로나(SARS-CoV-2:GH형) 바이러스를 성공적으로 완치하였습니다.]
온 세상에 울리는 맑고 고운 소리. 언제 들어도 깊은 산 속 옹달샘에서 세수하던 토끼 고막까지 상큼해질 소리. 야물딱진 메시지가 꽉 찬 명란처럼 라키엘의 눈앞을 채웠다.
[용왕 베르키스는 뜻하지 않은 코로나 감염으로 마법 불능 상태에 빠져 있었습니다. 하지만 그는 당신이 주입한 항체의 작용으로 뛰어난 면역력을 획득하였으며, 용생을 통틀어 다시는 코로나에 감염될 가능성이 없을 것입니다.]
[다만, 그는 코로나로 인하여 건강 및 수명에 어떠한 지장도 받지 않을 예정이었으므로, 이 경우에는 진료비 청구 스킬이 발동되지 않습니다.]
[보너스 수명을 받지 못한 대신, 소정의 HP가 보상으로 지급됩니다.]
[오장육부가 당신의 공적을 치하하며 15,000 HP를 후원하였습니다.]
[현재 보유 중인 HP : 24,200]
엄청난 HP가 한큐에 가슴을 적셨다. 절로 들숨날숨이 격해지는 웅장한 규모의 보상이었다.
같은 순간, 용왕 베르키스도 깊은숨을 들이마셨다.
‘흐음.’
그는 묘한 눈길로 라키엘을 쳐다보았다. 방금, 이 인간이 자신의 정수리에 손을 얹을 때부터 내심 감탄했던 용왕이었다. 한낱 인간의 손길이 다가오는 것에 불과한데도, 그 안에 담긴 독특한 기운을 느낄 수 있던 까닭이었다.
‘마나에 특정한 성분을 담아서 상대의 몸속으로 전달을 해? 나님도 살다 살다 이런 기술은 처음 보는군.’
문득, 300년 전에 자신의 후원을 받았던 어느 인간이 떠올랐다. 아스라한 심법이라 하였던가. 극단적으로 돈을 밝혔던 그놈이 이것과 비슷한 기술을 사용했던 기억이 났다.
그런데 눈앞의 이놈은 또 다르다.
단순한 아스라한 심법?
아니다.
‘기묘한 형태로 발전을 시켜 버렸군.’
보아하니 조금만 더 발전시켜서 마음만 먹는다면 어떤 물질이라도 상대의 몸속으로 직배송(?)을 해줄 수 있을 듯했다. 그야말로 배달의 민족 최적화 심법이랄까.
지금이 바로 그러했다. 자신의 몸을 잠식한 바이러스. 그놈들을 때려잡을 물질이 마나에 담겨서 전해져 오는 것이 또렷하게 느껴졌다.
바이러스에 맞춤으로 생성된 항체였다. 항체가 들어오자마자 바이러스의 세력이 싸그리 밀려났다. 심장이 한 번 뛸 때마다 바이러스의 영역이 좁아졌다. 밀려나고, 후퇴하고, 패주하고, 마침내 절벽 끄트머리에 내몰리다가, 모조리 잡아먹혔다.
동시에 그동안 잠들어 있던 드래곤하트가 움직이기 시작했다.
……쿠구구구!
마나의 흐름이 오랜만이었다. 반가웠다. 기뻤다. 바이러스에서 회복이 된 듯하여. 그걸 아내에게 옮길 걱정이 사라진 듯하여. 다른 한편으로는 이제야 귀찮은 일들 투성이로부터 벗어날 수도 있을 듯하여서.
“너님, 다 한 거니?”
“……아? 예.”
“그럼 나님 머리에서 손 좀 치워줄래?”
“엇, 죄송합니다.”
“죄송은 별.”
베르키스는 피식 웃었다. 그리고 의미심장한 눈초리로 라키엘을 올려다보았다.
“이젠 너님도 알겠지? 나님이 완치됐다는 거.”
“예, 알고 있습니다. 축하드립니다.”
“축하는 무슨. 너님 덕분이지.”
“예, 제가 고생이 많았지요.”
“어쭈. 자화자찬을.”
“그럼 약속을 이행해 주시죠.”
“말려도 그럴 참이었다.”
베르키스는 피식 웃었다.
“인슐린 샘플은?”
“여기, 챙겨왔습니다.”
“너님, 보기보다 준비성이 철저하네?”
“제가 본 용왕님이시라면 드래곤하트가 제 기능을 찾자마자 인슐린부터 가져오라 명하실 것 같았으니까 말입니다?”
“그래애?”
“예, 용왕님.”
라키엘은 빵긋 웃으며 대답했다. 이미 용왕 베르키스의 성격(?)을 어느 정도 파악한 그였다. 그가 본 베르키스는 그냥 귀차니즘의 화신, 그 차제였다. 그런 놈팽이 용왕이 마법을 되찾으면 어떤 심리가 될까. 안 봐도 뻔했다.
‘그동안 밀린 일들 후딱 처리하고 뒹굴거리려 들겠지!’
그것이 귀차니즘에 절어서 사는 집돌이 집순이들의 특징이다. 뭔가 일이 생겨서 처리할 때가 되면 한꺼번에 몰아서 와다다다 처리를 해야 한다. 그러지 않으면 나중에 또 귀찮게 움직여야 하니까.
그래서 귀차니스트들이 일 처리에 나설 때는 은근 예민해진다. 혹여나 뭔가를 빠뜨려서 일 처리에 지장이 생기거나 하면 곧바로 스트레스를 받는다. 왜냐. 지장이 생기는 시간만큼 나중에 뒹굴거릴 기회가 줄어드는 거니까.
그걸 잘 알고 있는 그는 눈치껏 준비한 인슐린 샘플을 샤샥 내밀었다.
“복사, 잘 부탁드립니다.”
“허허허.”
베르키스의 입가에 흐뭇한 미소가 피어났다. 이 인간, 은근히 마음에 들었다. 눈치가 적당히 빠른데, 그걸 어설프게 숨기려 들지 않는 솔직한 점이 좋았다. 그래서 잠깐이지만 없던 욕심도 생겨났다.
‘콱 그냥. 황도인지 별궁인지로 돌아가지 못하게 붙잡아둬? 마룡굴 집사 시키면 일 잘할 거 같은데.’
하지만 그런 생각은 금세 털어냈다. 돌아올 아내에게 또 한 소리를 들을 게 뻔하니까. 무고하고 힘없는 이를 괴롭히는 것은 어느 모로 보아도 군자의 도리가 아니며 어쩌고저쩌고 쫑알쫑알 고막에서 피가 나도록 바가지가 긁힐 테니까.
‘쯧. 봐줬다.’
베르키스는 잠깐 떠올렸던 살벌한 충동(?)을 억누르고는 인슐린 샘플을 받았다. 그리고 대규모 물질 복사 마법을 발동하였다.
샤아아아아……!
“……!”
순식간에 생성되는 입체 마법진. 너무나 강렬한 섬광. 라키엘은 시각이 삭제될 것 같은 눈뽕(?)을 느끼며 얼른 눈을 감았다.
그러고 얼마나 지났을까.
대략 5초?
혹은 3초?
“다 끝났다. 특별 서비스로 100년 치 분량.”
용왕 베르키스의 덤덤한 소리에 눈을 떴다. 마룡굴 전체를 물들이던 섬광이 사라져 있었다. 대신 그곳에는…….
“헉.”
샘플로 가져왔던 인슐린 약품, ‘트레제오’가 산더미 수준으로 쌓여 있었다. 많았다. 너무 많았다. 상상했던 규모를 한참 상회하고도 남을 정도였다. 덕분에 그걸 보자마자 떠오른 첫 생각은 ‘이걸 어떻게 다 가져가지?’라는 것이었다.
한데 용왕은 그런 이쪽의 생각마저도 읽은 것일까.
“뭘 쓸데없는 고민이나 하고 있어?”
“아, 그건…….”
“운송 문제?”
“예.”
“그거야 쉽지. 여기랑 저번에 너님이 약재 가지러 갔던 별궁 약재보관실 사이에 직통으로 포탈 하나 열어서 1시간쯤 유지하면 되잖나.”
“아.”
그거면 되겠구나. 별궁 시종들을 동원하면 저만큼의 트레제오도 시간 안에 얼추 다 옮길 수 있겠구나 싶었다.
“그런데…… 그렇게 폐를 끼쳐도 되겠습니까?”
“아하. 나님이 귀찮아할까 봐?”
“옙.”
“너님이 저거 다 옮기느라 계속 깨작대면서 드나드는 게 더 신경 쓰이고 귀찮아.”
“아.”
“게다가 전에 말했듯이, 저 인슐린 약품들은 유통기한 걱정은 안 해도 될 거야. 개봉 전에는 물질변성이 되지 않도록 특별히 서비스 마법까지 걸어뒀으니까.”
“가…….”
“감사하다고? 그럼 이제 너님도 약속을 지켜야지?”
“물론입니다.”
그러하다.
숙면대보탕.
그걸 용왕에게 달여주는 것이 처음의 약속이었으니까.
“그럼 잠시만 기다려 주십시오.”
용왕에게 인사하고는 서둘러 주방으로 건너갔다. 불을 피웠다. 잘 손질된 약재를 순서에 맞게 투입하였다. 탕약이 끓었다. 불을 약하게, 은근하게 하였다. 그러나 결코 꺼지지는 않게, 불가를 지키며 보글거리는 탕약기를 찬찬히 바라보았다.
말없이.
그렇게 한참을.
많은 생각에 잠겼다.
쓸데없는 잡념도 있었다. 시답잖은 감상도 있었다. 어쩐지 모르게 울컥하는 기분도 들었다. 그런 잡념과, 감상과, 기분이 켜켜이 쌓이며 차츰 복잡한 심정이 되었다. 어느새 옆에 다가와 나란히 앉은 데미안이 이쪽에게 말을 붙이지 못할 정도로.
티를 많이 내버린 걸까.
“미안.”
“……무엇이 말입니까, 전하?”
“그냥.”
괜히 호위랍시고 데리고 다니며 고생만 시키는 것 같아서. 아니, 그보다 사실은.
‘내가 이곳으로 오고, 그런 나 때문에 소설 속 스토리가 바뀌면서 네가 더 비참하게 되어 버린 것 같아서.’
죄책감이 들었다.
문득, 원작 마검황의 대략적인 스토리가 떠올랐다. 그 원작에서는 데미안이 이토록 혹독한 불치병에 시달리지는 않았다. 물론 거기서도 마계왕이 최종 빌런으로 떠오르며 데미안을 고생시키기는 했지만, 지금처럼은 아니었다.
그게 전부 이쪽 때문인 것 같았다. 이쪽이 마계왕과 접촉을 해 버려서. 역혈의 심법으로 각성을 하려던 데미안을 자꾸만 저지해서. 그렇게 마계왕을 방해하고, 억눌러서. 결과적으로 데미안이 더욱 혹독한 일을 겪게 된 것만 같아서.
자꾸만 미안해졌다.
하지만 더는 내색하지 않았다. 구태여 입에 담지도 않았다. 차마 그런 말을 할 수는 없었다. 하여 더욱 묵묵히 탕약기만 바라보았다. 보글보글 솟아나는 김 속으로 남몰래 한숨을 섞었다. 물론 그런 한숨쯤, 데미안도 다 감지하겠지만.
그러다 보니 시간이 훌쩍 지났다. 탕약의 향과 빛깔이 충분히 무르익었다. 그러나 서두르지 않았다. 본디 좋은 탕약이란 달일 때보다 식힐 때가 중요한 법이었다.
인내심을 가지고 기다렸다. 아마도 가슴속에 많은 의문을 품고 있을 테지만, 그럼에도 언젠가 이쪽이 모든 것을 스스로 밝혀주길 묵묵히 기다리는 데미안처럼. 녀석의 말 없는 배려처럼.
적당히 탕약이 식었을 무렵에야 성분을 분석하였다. 다행히 기대 이상이었다. 충분한 안정 효과와 수면 유도 효과가 확인되었다. 한 방울이라도 흘릴까 조심스럽게 대접에 담았다. 용왕에게 가지고 갔다.
용왕 베르키스는 예의 시그니처(?) 같은 자세로 소파에 퍼질러져 있었다.
“이제 다 끓였니?”
“예.”
“거 생각보다 오래 걸리는구만.”
“죄송합니다. 이게 본디 그런 탕약이라서요.”
“그래. 결과물은 잘 나왔고?”
“예. 보시다시피.”
소파 앞으로 다가가 쟁반을 내밀었다. 쟁반에 담긴 대접에서 고소하고도 알싸한 향이 올라왔다.
용왕의 미간이 살짝 찡그려졌다.
“향긋한 타입은 아닌 거 같은데.”
“죄송합니다. 이게 본디 그런 탕약이라서요.”
“맛도 그렇겠지?”
“죄송합니다. 이게 본디 그런 탕약이라서요.”
“…….”
“쓰읍.”
“……죄송합니다. 그래도 이거라도.”
“사탕?”
“자두맛입니다.”
“그건 인정이지.”
용왕이 기름종이로 포장된 자두맛 사탕을 잽싸게 챙겨갔다. 그리고 이쪽이 내미는 탕약 사발을 받아들더니, 뭔가가 떠올랐는지 말했다.
“걱정은 하지 마라. 탕약 마신 직후에 별궁 지하로 통하는 포탈을 열어줄 테니. 그래야 너님이 안심하겠지?”
“예. 감사합니다.”
“쯧. 이런 걸 보면 참 뻔뻔해.”
“그렇습니까?”
“당연하지.”
용왕 베르키스가 이쪽의 눈을 빤히 쳐다보았다.
“너님, 지금 뭔가 추가로 부탁을 하고 싶은데 참고 있는 거지?”
“예?”
“맞잖아. 고민이 가득한 눈초리인데.”
“…….”
“탕약 달이는 내내 한숨 푹푹 내쉬는 소리가 여기까지 들리더만.”
“그, 그랬습니까?”
“어.”
“…….”
라키엘은 입을 다물었다.
말해도 될까. 그런 부탁을. 그런 생각을. 쓸데없는 잡념과, 시답잖은 감상과, 어쩐지 모르게 울컥하는 기분이 켜켜이 쌓인 복잡한 심정을. 그대로 밝혀도 되는 걸까.
고민이 되었다.
하지만 용왕 베르키스는 그런 이쪽의 고민 따위는 신경도 쓰지 않는 듯했다. 그래서 오히려 역설적으로 신경을 써주는 기분마저 들 정도로.
“아 귀찮아. 또 묻는 거 싫은데. 굳이 자꾸 말하게 만들어야겠니?”
“그건…….”
해도 될까. 아니. 한다고 들어줄까. 모르겠다. 어쩌면 그래서였을 것이다. 저도 모르게 입이 열린 것은. 켜켜이 쌓인 잡념과, 감상과, 심정이 고스란히 담긴 부탁을 무의식중에 입 밖으로 꺼낸 것은.
“저기, 혹시, 이번에 발견한 마룡굴의 고구마 종자와, 그걸 활용하는 코로나 치료 탕약의 제조법을…… 제가 살던 차원에 전달해 주실 수 있으실는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