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66화. 1.5마리의 토끼를 잡는 법 (1)
“혹시, 이번에 발견한 마룡굴의 고구마 종자와, 그걸 활용하는 코로나 치료 탕약의 제조법을…… 제가 살던 차원에 전달해 주실 수 있으실는지요.”
말했다. 무의식중에 꺼냈다. 그 직후, 라키엘은 아차 싶은 기분이 들었다.
‘이런 부탁, 해도 안 들어줄 거 같은데.’
용왕 베르키스의 성향으로 미루어 보면 충분히 그럴 법했다. 극도의 귀차니스트. 세상 어떤 것보다도 낮잠과 게으름을 더 좋아하는 용왕. 그런 용왕이 또 차원 마법을 쓰는 귀찮음을 감수할까? 자신에게 어떠한 이득도 없을 텐데.
‘그건 아니겠지.’
뒤늦은 후회가 들었다. 괜히 용왕에게 한소리 듣는 건 아닐까. 걱정도 됐다.
하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여전히 진심으로 바랐다. 자신의 부탁이 이루어지기를. 마룡굴 고구마잎 종자와 탕약 레시피가 한국에 전해지기를. 그러면 많은 이들이 고통에서 벗어날 수 있을 테니까.
‘저 고구마잎을 활용하는 탕약이면 충분히 가능해. 단순한 치료가 아닌, 후유증이 없는 치료가 실현되는 거야. 게다가 저게 한국에 전해지면 제약회사들이 가만히 있을까? 아니.’
엄청난 자금을 들여서 경쟁적인 연구를 시작할 것이다. 수많은 개량형 치료제가 개발될 것이다. 그러면 저쪽 세상의 코로나 완전 정복이 현실이 된다. 그동안 겪어야 했던 아픔과 슬픔을 뒤로하고, 모두가 팬데믹의 공포에서 벗어날 수 있으리라.
종자와 레시피만 전달하면.
하지만…….
꿀꺽.
여전히 말이 없는 베르키스 앞에서 라키엘은 마른침을 삼키며 대답을 기다렸다. 그럼에도 여전히 용왕은 아무런 반응이 없었다. 화를 내는 것도, 실소를 흘리는 것도 아니었다. 그저 감정을 읽을 수 없는 눈길로 이쪽을 지그시 쳐다보기만 할 뿐.
덕분에 심장이 쿵쿵.
얼마나 가슴을 졸이며 기다렸을까.
“너님, 진심이구나?”
용왕의 입에서 반문이 나온 것은 한참이 지났을 무렵이었다. 예고도 없는 갑작스러운 반문에 저도 모르게 어깨를 흠칫했다. 이어지는 용왕의 물음은 예상보다 더 살벌했다.
“나님한테 대가 없이 그런 요구를 함부로 하다간 죽을 수도 있는데, 두렵지 않니?”
“두렵습니다. 후회가 되기도 하고요.”
“후회?”
“예.”
라키엘은 솔직하게 말했다.
“사실 아까 숙면대보탕을 달이면서 내내 생각했던 것이긴 한데, 내심 많이 바라고 있던 것이긴 한데, 그걸 이렇게 제가 입 밖에 내면서 부탁을 드리게 될 줄은 몰랐으니까 말입니다.”
“너님도 모르게 무의식중에 꺼낸 부탁이다? 그게 변명이야?”
“변명은 아닙니다. 그냥, 정말로 그랬을 뿐입니다.”
“그게 변명이지.”
“하지만…….”
“하지만? 뭐?”
“짧은 시간이나마 지금껏 제가 겪으며 느낀 용왕님의 성향이시라면, 이런 부탁에도 화를 내진 않으실 거라 생각하기도 했습니다.”
“흠, 이번엔 아첨이야?”
“예.”
“허. 숨기지도 않아?”
“아무리 치장해도 본질은 아첨이 맞으니까요.”
“솔직함을 무기로 내세우는 이미지 메이킹을 해보시겠다?”
“이미 당돌하게 꺼내 버린 부탁이니, 어떻게 보시든 모두 감내하겠습니다.”
다시금 솔직하게 말했다.
그래서 베르키스는 실소……하지는 않았다. 오히려 더욱 진지해진 눈빛으로 라키엘을 지그시 쳐다보았다.
“흐음.”
그는 사실 라키엘이 마음에 들었다. 나름 인간치고는 머리를 잘 굴리는 놈이긴 한데, 그걸 스스로 포장하지 않는 점이 좋았다.
보통 똑똑한 놈들은 안 이러니까. 자신이 인지하는 스스로의 똑똑함을 더 포장하려 들거나, 혹은 적당히 숨겨서 견제를 피하려 들곤 하니까.
그런데 눈앞의 라키엘이라는 이놈은?
그러지 않았다.
‘똘똘한 것치고는 의외로 본심은 잘 못 숨기는 타입인 건가. 나쁘진 않네.’
결국, 용왕은 피식 웃고 말았다.
“그래, 뭐. 너님이 그렇다니까 그렇다 치고. 살다 보면 이상한 부탁을 할 수도 있지. 그래서 하는 말인데. 나님도 너님한테 제안을 하나 해볼까 싶군.”
“제안을 말입니까?”
“으음.”
베르키스가 고개를 끄덕였다.
“사실은 말이야. 너님은 이번에 큰 자격을 하나 얻었어.”
“어떤 자격입니까?”
“용왕 후원 멤버십 가입 자격.”
“…….”
“드래곤에게 선의로 큰 은혜를 베푼 인간은 용왕의 후원을 받을 자격이 생기거든. 물론 이건 나님이 만든 건 아니고. 성가시게 잔소리만 해대는 나님 여동생이 만들어서 떠넘긴 제도이긴 한데. 그래도 뭐 있는 제도니까 썩힐 수는 없잖아. 안 그래?”
“아, 예…….”
“어쨌건, 그 제도를 기준으로 보자면 너님은 요건을 충분히 갖췄어. 바이러스에 감염된 나님을 성심껏 치료했잖아? 거기에 과거까지 따지고 보면 등갑룡의 급성 맹장염도 해결했다지?”
“정확히 말하면 충수염입니다.”
“그게 그거지 씁.”
“…….”
“아무튼 너님은 선의를 가지고 드래곤에게 큰 도움을 줬어. 그것도 두 번이나. 이 정도면 자격 요건이 넘치고도 남아.”
“저기, 그럼…….”
“그럼?”
“용왕 후원 멤버십이라는 거 말입니다. 그거 가입이 되면, 구체적으로 어떤 혜택을 받는 겁니까?”
라키엘은 조심스럽게 물었다.
진심으로 궁금했다. 단순한 호기심? 아니었다. 확인이 필요했다. 뭔가 제안을 하겠다는 용왕이 대뜸 후원 멤버십에 대한 이야기부터 꺼냈다. 분명 앞으로 할 제안과 큰 연관이 있는 거겠지. 그러니 멤버십 내용에 대한 확인은 필수라는 생각이 들었다.
‘당연하지! 휴대폰 요금제 가입할 때도 쿠폰이나 할인 혜택이 뭐뭐가 있는지부터 따져야 하는 세상인데!’
그러하다.
하다못해 동네 마트에서 포인트 카드를 만들 때도 무슨 적립률이 얼마나 되는지를 봐야 한다. 교통카드나 배달앱 회원가입 혜택도 마찬가지다.
그런데 무려 용왕 후원 멤버십을?
내용 확인도 없이?
덜컥 좋다고?
섣부른 동의를?
절대. 네버.
해선 안 되고, 있어서도 안 될 일이다.
다행히(?) 용왕이 알려주는 멤버십 혜택은 심플한 편이었다.
“혜택? 간단해. 마룡굴의 금은보화를 제한 없이 가져다가 쓸 수 있고, 여벌의 목숨 하나를 제공받지. 일단 기본적인 혜택은 여기까지.”
“…….”
“왜 그러니?”
“아, 좀 놀라서 말입니다.”
이거 실화인가.
라키엘은 들어놓고도 귓구멍을 푹 찔러서 확인을 하고 싶을 정도였다. 멤버십 혜택이 상상 이상으로 좋았다. 무제한의 돈과 추가 목숨이라니. 이 정도면 거의 사기가 아닌가. 하지만 라키엘은 들뜨려는 정신줄을 꽉 붙잡았다.
“기본적인 혜택 외에도 더 있습니까?”
“그거야 나님 기분에 따라서?”
“추가 혜택은 횟집 시가처럼 그때그때 정해진다는 뜻이군요. 알겠습니다.”
“잘 알아들었으니 다행이군. 그럼 이제 슬슬 제안을 하려는데.”
“예, 듣고 있습니다.”
라키엘은 마른침을 삼켰다.
일단 용왕이 알려준 후원 멤버십의 혜택은 엄청났다. 아니, 그냥 엄청난 정도가 아니라 온 인류가 꿈꾸는 이상적인 선물이었다.
그렇기에 더욱 긴장이 되었다. 제안을 하겠다면서 그에 앞서 엄청난 혜택을 알려준다는 것은 곧, 그만큼 엄청난 대가를 치르는 선택을 강요하겠다는 뜻이니까.
과연 그 예상은 정확히 들어맞았다.
“너님은 이곳의 고구마잎과 탕약 레시피를 한국에 전해달라고 부탁했지? 나님은 용왕 후원 멤버십 혜택을 알려줬고. 그러니 둘 중에서 선택을 해.”
“혹시, 한국에 레시피를 전해주거나, 용왕 후원 멤버십에 가입을 하거나, 둘 중의 하나만 선택을 하라는 뜻입니까?”
“맞아. 역시 눈치가 빨라서 좋아.”
“…….”
라키엘의 목젖이 다시금 크게 움직였다.
“저기, 그럼…….”
“그래. 물어보렴.”
“용왕 후원 멤버십의 혜택 중에서 말입니다. 추가 목숨.”
“응. 진짜로 목숨 두 개가 되는 거 맞아. 슈팅 게임 해봤지?”
“슈팅 게임을…… 아십니까?”
“응. 제법 좋아해.”
“…….”
“어쨌건, 슈팅 게임을 할 때 조종하던 비행기가 총알 맞아서 펑, 하고 터져도 목숨 여러 개가 있으면 다시 살아나잖아? 그거랑 비슷하다고 생각하면 돼.”
“저기, 그럼, 새 목숨의 건강과 수명은 어떻게 되는 겁니까?”
“아하. 다시 태어난 것처럼 말끔해지는 거냐고?”
“예.”
그게 제일 궁금했다.
쓰레기 수준의 건강. 여전히 몇 년도 되지 않는 수명. 그걸 별궁 한의원의 환자들에게서 받는 보너스로 근근이, 알뜰살뜰 늘리려 애쓰는 삶이었다. 그런데 만약 죽었다가 부활할 때 건강해질 수 있다면? 그것만큼 좋은 게 있을까.
하지만 용왕의 대답은 기대와 다른 것이었다.
“건강이나 육체의 컨디션이 죽기 직전보다는 조금 개선되겠지. 지병이 사라지기도 할 거야. 하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서 재발하겠지. 병이라는 건 원래 그래. 타고난 유전자, 장내세균총의 구성, 그에 따른 신경망의 구조, 그 결과로 만들어지는 생활습관의 영향이 어마어마하게 큰 법이라서.”
“잠깐은 살짝 건강해지겠지만, 그야말로 잠깐일 거라는 뜻이군요.”
“아마도? 또 궁금한 게 있나?”
“예.”
숨도 안 쉬고 고개를 끄덕였다.
“마룡굴의 재산 말입니다.”
“응. 언제든 무한대로 가져갈 수 있어.”
“어떠한 조건도 필요없이 말입니까?”
“해봤자 얼마나 된다고. 알아서 가져가는 거지 뭘.”
“그러다가 마룡굴이 빈털터리가 되면요?”
“그럴 일은 없을 거야.”
“어째서 말입니까?”
“세상의 드래곤들이 세금을 꼬박꼬박 바치거든.”
“세금……을요?”
“으음.”
베르키스가 어깨를 으쓱였다. 그리고 스스로도 믿기지 않는다는 듯이 말했다.
“솔직히 나님은 딱히 세금을 받을 생각도 없고, 원래도 받진 않았거든? 그런데 천 년 전이었나. 귀찮게 구는 마룡인지 카이저인지 하던 놈을 박살 내고 나니까 그 뒤부터 알아서들 꼬박꼬박 바치더라고. 나님이 세상에 평화를 가져왔다나. 힘의 균형을 수호한다나 뭐라나.”
“…….”
“덕분에 마룡굴의 재산은 마를 일이 없어요. 아니, 제발 좀 가져가라. 금괴며 보석이며 정리하는 것도 귀찮아 죽겠다, 아주.”
“아, 예.”
……딱히 본인이 직접 정리하는 건 아닌 듯한데.
그래도 어쨌건 들은 건 다 들었다. 용왕 후원 멤버십이 어떤지 잘 알겠다. 덕분에 판단할 수도 있겠다.
라키엘은 잠시 고민에 잠겼다.
자신이 했던 부탁. 마룡굴 고구마잎과 탕약 레시피를 한국에 전해서 사람들을 코로나의 고통에서 건져낼 것인지. 혹은 용왕 후원 멤버십을 받아들여 여벌의 목숨과 무제한의 재산을 누릴 것인지.
고민이 되었다.
미간이 찡그려졌다.
머리가 지끈거렸다.
그걸 보던 데미안은 저도 모르게 주먹을 쥐었다가 폈다. 그는 생각했다. 자신이 지금까지 모시면서 보아온 황태자는 사람들을 위한 선택을 하리라고. 타인을 널리 이롭게 할 길을 걸으리라고.
한편으로 용왕 베르키스는 가늘어진 눈길로 라키엘을 바라보았다. 그는 궁금했다. 과연 눈앞의 인간이 어떤 선택을 할 것인지. 이타적인 길을 걷기 위해 스스로의 막대한 이득을 포기할 것인지.
그렇게 얼마나 있었을까.
라키엘이 고개를 들었다.
“저는…….”
그의 맑아진 두 눈이 베르키스를 똑바로 쳐다보았다.
“용왕 후원 멤버십을 선택하겠습니다.”
아무런 망설임도, 일말의 미련조차도 엿보이지 않는 목소리였다. 베르키스는 저도 모르게 탄식했다. 이 인간도 결국엔 이 정도였구나. 제법 거창한 척 사람들을 위한 부탁을 하는가 싶더니, 자신의 엄청난 이득 앞에서는 결국 다를 바가 없구나.
‘쯧, 사실은 이게 현실적인 선택이겠지.’
……라고 생각하며 용왕이 씁쓸한 입맛을 다시려던 순간이었다.
그때, 라키엘의 입이 다시금 열렸다.
“그런데 아까 용왕님께서 말입니다. ‘나님한테 대가 없이 그런 요구를 함부로 하다간 죽을 수도 있는데, 두렵지 않니?’라고 하셨지 않습니까?”
“어? 음. 그랬지?”
“지금도 그 생각은 같으십니까?”
“아마도?”
“잘됐습니다.”
라키엘의 입가에 흐뭇한 미소가 걸렸다.
“그럼 제게 멤버십 혜택을 다 주시고, 그 뒤에 대가 없이 함부로 요구를 하는 저를 한 번 죽여 주시고, 대신 한국으로 탕약 레시피를 배송해 주시면 어떻겠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