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70화. 부재중에 생긴 일 (1)
다그닥, 다그닥.
이곳 세계의 마차는 참 이상하다. 승차감이 나쁜 듯하면서도 은근 괜찮다. 그런데 푹신한 쿠션은 편해 보이는데 막상 오래 앉으면 허리가 아프다. 물론 좋은 점도 있다. 한국의 택시에서처럼 기사님이 말을 걸까 봐 신경 쓰지 않아도 된다는 점이다.
……라지만.
“전하. 황궁에 가시는 것치고는 표정이 유달리 좋으신 것 같습니다.”
데미안이 말을 걸어오는 것까지는 막아내지(?) 못했다. 이 역시 마차의 장점이자 단점이다. 택시보다 훨씬 아늑하게 밀폐된 느낌 때문인지, 동승자와 수다를 나누기에 적절한 분위기가 조성된다는 점이다.
라키엘은 떠오르는 잡생각을 쓴웃음으로 눌러두며 반문했다.
“내가 그래 보여?”
“예. 전과는 많이 다르신 것 같아서요.”
“전엔 어땠길래?”
“도살장에 끌려가는 돼지 같았습니다.”
“……보통 이럴 땐 소를 이용한 비유를 활용하지 않나?”
“그러기엔 우루스 경에게 미안해서요.”
“나한텐 안 미안하고?”
“예, 그닥.”
“어쭈. 황족 능멸죄가 무섭지 않으시다?”
“전에도 비슷한 대화를 나누었던 것 같은데 말입니다. 제가 처형당하면 마계왕이…… 두둥.”
“…….”
“죄송합니다.”
“응 아니야. 들뜬 기분을 적절하게 가라앉혀주는 훌륭한 지적이었어.”
라키엘은 피식 웃고 말았다.
마계왕.
놈을 생각하면 언제든 마음이 서늘하게 식는다. 그럴 수밖에 없다. 놈은 지금 이 순간에도 호시탐탐 데미안의 육신을 노리고 있을 테니까. 어떻게든 데미안의 육체를 죽음으로 몰아넣기 위해 기회를 노리고 있을 테니까.
“그나저나, 새 인슐린은? 주사해보니 어때?”
“편합니다.”
데미안의 입가에 싱긋, 미소가 맺혔다.
“역시 다른 차…… 아니, 머나먼 타지까지 다녀와서 가져온 보람이 있는 약품입니다. 뭐랄까요. 전하께서 만들어 주셨던 인슐린과는 확실히 차원이 다르달까요.”
“……내가 만들어준 게 그렇게 마음에 안 들었어?”
“아, 그런 뜻은 아니고…….”
“그렇겠지. 내가 해봤자 얼마나 잘 만들었겠냐. 싫어도 까라면 까야지 하는 심정으로 이 악물면서 놓던 주사였겠지. 내가 만든 게 그렇지 뭐.”
“아뇨, 그런 뜻이 아니라…….”
“괜찮아. 내가 그거 만들겠답시고 날밤도 지새우고 다크써클도 왕창 생기고 그랬지만 뭐 어쩌겠어. 쓰는 분이 별로 마음에 안 드셨다는데. 고객이 왕이고 손님이 갑이지. 안 그래?”
“……죄송합니다.”
“어 됐고. 그래서 트레제오 약빨이 마음에 들어?”
“예. 하루에 한 번만 주사하면 되는 점이 제일 편합니다.”
“그건 확실히 그렇지.”
라키엘은 고개를 끄덕였다.
한국에 유통되는 수많은 인슐린 약품 중에서 굳이 ‘트레제오’를 딱 짚어서 선택한 이유가 있었다. 약효가 24시간 지속되는 ‘지속형’ 타입의 약품이기 때문이었다.
덕분에 하루에 한 번만 일정한 시간에 투여를 하면 24시간 동안 혈당조절 효과를 볼 수 있다. 게다가 지속시간 동안 약빨이 확 튀지를 않아서 균등한 효과를 누릴 수도 있다.
‘균등한 효과를 보는 점이 특히 중요하지. 인슐린 약품은 다 좋은데, 약빨을 확 받으면 저혈당이 훅 올 수가 있으니까.’
그러면 위험하다.
고혈당만큼이나 위험한 것이 순식간에 몰려오는 저혈당이다. 그건 실제로 사람의 목숨을 위협하기도 한다.
게다가 이쪽의 호위로 붙어 다니는 데미안의 직업적(?) 특성을 고려하면 저혈당 방지의 중요성은 더욱 올라간다. 순간적으로 검을 쓰거나 격렬한 신체활동을 하는 경우가 있을 것이기 때문이었다.
‘그러면 또 저혈당이 훅 하고 오기가 쉽거든.’
생각하면 할수록 이래저래 환자의 일상을 참으로 힘겹게 만드는 것이 1형 당뇨였다. 그렇기에 라키엘은 인슐린이 확보되었다고 해서 치료를 중단할 생각이 없었다.
“사실은 이제부터가 더 중요해. 알지?”
“예. 압니다. 불치병이 추가로 더 생길 수도 있다는 사실 또한…….”
“그렇지. 그게 문제지.”
라키엘은 미간을 찡그렸다.
마계왕이 불러올 추가 불치병. 그게 문제다. 특히나, 데미안을 괴롭히고 있는 1형 당뇨가 그대로 남은 상태에서 광박에 피박처럼 추가로 얹어질 불치병이 정말로 큰일이다. 당뇨에 다른 불치병이 얹어지면 합병증이 생긴다는 뜻인 건데, 그건 감당이 안 될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니 인슐린을 확보했다고 해서 마음을 놓을 순 없어. 사실 인슐린은 당뇨로부터 목숨을 보전하는 연명, 그걸 위한 소모품일 뿐이니까.’
어쨌건 시간은 벌었다.
이렇게 만든 시간으로 당뇨를 완치해야 한다. 그런데…… 그게 좀 막막하다.
‘완치라.’
1형 당뇨의 완치가 가능한 걸까.
사실 현대 사회에서도 아직 정복되지 않은 질환이 1형 당뇨였다. 면역의 이상 반응 때문에 신체가 췌장 조직을 공격하고, 망가진 췌장에서 인슐린이 분비가 되지 않는 질환이기 때문에 근본적인 치료법이 아직 개발되지 않은 까닭이었다.
췌장 이식?
그것도 임시방편에 불과하다. 어차피 환자의 면역계는 이미 꼬일 대로 꼬여서, 기껏 이식한 새로운 췌장을 또 공격하기 때문이다.
‘그러면 힘들게 이식한 췌장도 또 망가지고, 인슐린이 안 나오고, 똑같은 고통이 반복되는 거지.’
그럼 당뇨를 어떻게 치료해야 할까. 살짝 막막했다. 차라리 다시 용왕에게 가서 도움을 청할까. 그냥 안면에 철판 한 번 까는 게 나으려나. 아니면 아예 흑마술 같은 금단의 수법에라도 손을 벌려야 할까.
……라는 고민에 잠기려던 무렵이었다.
마차가 황궁에 도착하였다. 그때부터 잠시 부산스러움을 겪었다. 마차에서 내리고, 입궁 절차를 밟고, 궁내부장에게 안내를 받고 하다 보니 어느새 황제의 집무실 앞에 도착했다.
똑똑.
“들어오라.”
언제 들어도 황제의 바리톤 저음은 제법 분위기가 있다. 저 목소리로 이쪽을 갈구지만 않는다면 말이지. 그런 이쪽의 소망(?)이 통한 걸까. 오랜만에 보는 황제의 눈빛은 예전보다 제법 부드러워져 있었다.
“황태자 라키엘 아드리아 마젠타노가 이 땅의 합당한 주인이신 황제 폐하를 뵈옵나이다.”
이제는 몸에 익은 예법을 자동으로 발동하며 인사를 올렸다. 그런데 돌아오는 황제의 대답이 평소와 달리 제법 낯설게 느껴졌다.
“그래. 잘 돌아왔구나.”
“…….”
뭐지.
왜 까칠하지 않은 거지.
평소대로라면 대강, ‘마음에도 없는 인사는 되었다’라거나, ‘여전히 볼품없는 몰골의 인사로구나’라는 식으로 안면을 트자마자 이쪽을 디스하기 바빴을 텐데. 그런데 오늘은 달랐다. 이쪽을 보는 눈빛도. 건네는 목소리도.
“소식은 이미 들었노라, 황태자여. 별궁의 인원을 모조리 데리고 마룡굴의 재물을 쓸어 담아 왔다지?”
“예, 폐하.”
“재물에 눈이 멀어 위험한 상황을 자초하려던 것이었느냐?”
“그건 아니었사옵니다.”
“용왕이 진노하지는 않았고?”
“예. 다행히…….”
“실로 다행이었구나.”
“…….”
왜 안 갈구는 거지?
왜 안 까칠한 거지?
왜 안도하며 기뻐하는 건데.
얼떨떨하고 영 적응이 되질 않았다. 하지만 아직은 마음을 놓을 수 없었다. 이러다가 또 어느 순간에 뒤통수를 훅 치고 들어오는 사람이 황제, 저 양반이니까.
라키엘은 지금까지의 경험을 떠올리며 방심하지 않았다. 그런 덕분이었다. 그는 이내 이어지는 황제의 교묘한 시도를 눈치 빠르게 알아차릴 수 있었다.
“참으로 다행한 일이로다. 무려 용왕과 친교를 다지게 된 황태자의 공훈으로 말미암아 제국의 국고가 한층 탄탄해지게 되었으니 말이다.”
“…….”
어?
이 양반이 오늘 어쩐지 따사롭다 했더니, 설마?
라키엘은 살포시 쌔한 기분을 감지하며 재빠르게 대꾸했다.
“예, 폐하. 실로 다행한 일이옵니다. 제가 용왕의 호의를 등에 업은 덕분에 ‘별궁’의 창고가 한층 부유해지게 되었으니 말이옵니다.”
“그렇지. 덕분에 ‘제국의 예산’에도 한결 숨통이 트이겠구나.”
“다행히 ‘별궁 한의원의 운영자금’이 아주 넉넉해졌사옵니다.”
“한의원의 운영자금뿐이겠느냐?”
“뿐이옵니다.”
“허허?”
“아닌 건 아니옵니다, 폐하.”
“허허허?”
“이번에 가져온 재물과 금은보화는 모두 용왕 베르키스께서 ‘저에게!’ 멤버십 혜택으로 내린 포상이라서 말이옵니다?”
“그것이 그것 아니겠느냐?”
“아니옵니다.”
“…….”
“우리 사이에 이러기가 있느냐, 라고 물으실 심산이시라면, 역시나 이러기가 있다고 대답드리고 싶사옵니다.”
라키엘은 선을 딱 그었다.
“게다가 과거, 폐하께서는 저에게 별궁 한의원의 운영자금을 스스로 구해보라 명하신 바가 있사옵니다. 저는 그 명을 충실히 따른 것이옵고 말이옵니다.”
“허허…… 허허허…….”
“하오니 이번에 제가 마룡굴에서 가져온 금은보화는 금화 한 닢도 국고로 환수할 생각이 없사옵니다.”
“정녕, 그럴 셈이더냐?”
“예, 폐하.”
“만약 그로 인하여 짐이 진노한다면?”
“저의 공식적인 후원자인 용왕님에게 고자질을 하겠사옵니다.”
“허어?”
“진심이옵니다.”
“허허허…….”
황제 아스테리온은 웃고 말았다. 황태자가 엄청난 재물을 쓸어왔다 하여 살짝 찔러보자는 마음으로 속내를 드러냈는데, 아들의 반응이 생각보다 단호하기가 그지없었다.
그래서 화가 났느냐고?
아니. 천만에.
오히려 기뻤다.
‘이 녀석이 드디어 짐의 앞에서도 자신의 할 말을 당당히 꺼내게 되었구나.’
모름지기 지배자의 싹은 이래야 한다. 물러서지 않을 때는 대쪽 같아야 한다. 하지만 예전에는 이렇지 못하였던 아들이었다.
그는 과거 나약했던 아들의 이러한 변화가 너무나 행복했다.
‘좋구나. 매우 좋아.’
눈물이 나올 것 같았다.
물론 그런 심정은 속으로만 품은 채, 겉으로는 까칠한 척하는 것을 잊지는 않았다. 자신은 마지막 순간까지도 아들이 뛰어넘을 험난한 장벽이 되어 주어야 한다는 일념으로. 일부러 더욱 까칠하게. 그러나 흐뭇한 눈길만은 차마 다 감추진 못하고서.
“참으로 건방진지고.”
“실로 송구하옵니다.”
물론 라키엘은 그런 황제의 기색을 모두 읽을 수 있었다. 보고만 있어도 느껴졌다. 전과 달리 이쪽을 흐뭇하게 바라보는 황제의 눈빛. 이제 용왕과도 인연을 맺은 아들을 자랑스러워하는 저 표정. 마음속 흐뭇함을 미처 다 숨기지 못한 저 입꼬리까지.
그래서였다.
황제가 보이는 뿌듯함과 그 모든 기쁨의 기색들이 오히려 라키엘의 마음을 무겁게 가라앉혔다. 이를테면 그것은, 미안함과 죄책감이라는 이름의 족쇄였다.
“…….”
사실 나는 당신의 진짜 아들이 아닌데. 진짜 아들의 자리를 빼앗은 놈에 불과한데. 그런데 당신의 이런 흐뭇함을 받아도 되는 걸까, 내가.
‘그래도…… 당신의 진짜 아들은 한국에서 건강하고 행복한 새 인생을 지내게 됐으니까.’
그 사실을 위한 삼아 남몰래 소리 없는 면죄부를 끌어안아 본다. 당신의 흐뭇한 눈길을 감내하여 본다.
그렇게 복귀 신고(?)를 마친 라키엘은 황궁에서 물러났다. 다각거리는 마차에서는 다시금 고민에 잠겼다. 여전히 데미안을 놓아주지 않고 있는 1형 당뇨. 그걸 완치할 방법을 궁리하며 별궁으로 돌아왔다.
돌아온 별궁에서는 반가운 목소리가 이쪽을 반겨주었다.
“……전하아아!”
아예 별궁 로비 앞 출입문까지 나와서 기다리고 있던 가르딘 경이었다. 그가 마차를 보자마자 두 팔을 열렬하게 펼치고서 달려왔다.
“가르딘 경? 잘 지냈어?”
“아뇨!”
“…….”
“다들! 인센티브 왕창 받았다던데 말입니다?”
“……어, 그랬지?”
“저는 그때 한의원 거래처 문제 때문에 황도의 약재상들을 방문하고 있었는데 말입니다?”
“어. 고생했어.”
“덕분에 저는 인센티브고 뭐고 하나도 못 챙겼는데 말입니다?”
“그래서 나 안 반가워?”
“반갑습니다. 그런데, 그렇긴 한데…….”
“그렇긴 한데?”
“……사실은 전하께 알려드릴 것이 있습니다.”
주위를 잽싸게 둘러본 가르딘 경이 찰싹 다가오며 목소리를 낮추었다. 사실은 은밀하게 전하고픈 일이 따로 있었던가 보다. 과연 그가 귓가에 속닥여 오는 말을 듣자니, 정말로 그러했다.
“전하. 실은 전하께서 자리를 비우신 사이에…… 재활 치료 중이던 아델린 왕녀에게 일이 생겼습니다.”
“뭐?”
일이 생겼다니.
무슨 일일까.
가르딘 경의 목소리가 신중해졌다.
“그게, 거의 식음을 전폐하고 있습니다.”
“……응? 어째서?”
라키엘은 깜짝 놀랐다.
하지만 그를 정말로 놀래킬 말은 따로 있었다.
“간호사들의 의견을 따르자면…… 전하께서 멋대로 자리를 비우신 탓이라고…….”
“…….”
이게 뭔 일일까, 진짜.
라키엘은 서둘러 왕녀의 병실로 걸음을 옮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