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약 파는 황태자-371화 (370/468)

371화. 부재중에 생긴 일 (2)

“간호사들의 의견을 따르자면…… 전하께서 멋대로 자리를 비우신 탓이라고…….”

“…….”

이게 뭔 일일까, 진짜.

라키엘은 서둘러 왕녀의 병실로 걸음을 옮겼다. 그리고 병실 앞에 도착하며 느꼈다. 왕녀가 있는 병실만 복도의 공기가 다른 느낌이었다.

꿀꺽.

이것은 살기인가. 혹은 저릿한 한기인가. 어쩐지 모를 묘한 기세를 느끼며 노크를 했다.

“원장입니다. 들어가겠습니다.”

안쪽에서는 대답이 없었다.

대신 기척은 들려왔다.

문을 열었다.

제일 먼저 이쪽을 반기는 이는 왕녀 아델린이 아닌, 그녀의 숙부인 하프엘프 장군 에두아르였다.

“오랜만입니다, 황태자시여. 아까 별궁으로 돌아오시던 모습을 창밖으로 보았습니다. 떠들썩하게 사람들을 불러모으시던 모습을 말입니다.”

“…….”

저 양반, 위궤양이 완치됐던 때와 달리 살짝 까칠하게 변했다. 인사를 건네기는 하는데, 뭔가 가득한 불만을 애써 누르고 있는 모습이었다. 이쪽을 보는 눈빛도 마찬가지였다.

“그럼 이제 완전히 돌아오신 겁니까?”

“예. 다행히.”

라키엘은 까칠한 장군의 태도에도 별다른 반응을 하지 않았다. 사실은 장군이 저러는 이유를 충분히 이해하기 때문이었다.

‘내가 왕녀를 방치했다고 여기는 거겠지.’

눈길을 돌렸다.

VVIP 병실 창가에 놓인 병상. 그곳에 별궁 환자복을 입은 왕녀가 앉아 있었다. 그런데 그녀의 시선은 시종일관 창밖으로만 향해 있었다. 심지어 창밖을 돌아다니는 사람을 보는 것도 아니었다.

그저 구름, 파란 하늘, 그 속을 흘러가는 구름만 하염없이 바라보는 옆모습이란.

“…….”

설마 우울증이 쎄게 몰려온 걸까. 왕녀가 식음을 전폐했다더니, 그게 과장이 아니었나 보다. 라키엘은 목청을 가다듬고는 조심스럽게 인사를 건넸다.

“왕녀님? 저, 돌아왔습니다.”

“…….”

역시나 왕녀는 아무런 반응도 보이지 않았다. 대답은 곁에 있던 장군 에두아르가 대신 했다.

“황태자께서 부재중인 동안 마음고생을 많이 하셨습니다.”

“혹시 특별한 사건이 있었던 겁니까?”

“예.”

“어떤 사건입니까?”

“황태자께서 자리를 비우셨지요. 황태자를 믿고 재활치료를 위하여 입원을 하자마자. 며칠 되지도 않아서 말입니다.”

“…….”

“처음엔 사나흘쯤 있으면 돌아오겠지 싶었습니다. 그런데 아니더군요.”

“…….”

면목이 없어진다. 라키엘은 조금은 난감한 심정으로 왕녀의 옆모습을 바라보았다.

이쪽이 자리를 비운 것은 정말로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마계왕이 데미안에게 일으킨 1형 당뇨의 타이밍이 정말로 절묘했다. 만약 이게 온라인 대전 게임이었다면, 상대에게 ‘게임 x같이 하네’라는 찬사를 들었을 칼 같은 타이밍이었다.

하여 그걸 해결하고자 한국에까지 다녀왔는데, 그동안 본의 아니게 왕녀를 방치한 꼴이 되어 버렸다.

물론 그는 변명할 생각이 없었다. 애초에 의미 없는 짓일 테니까.

“왕녀님, 미안합니다. 진심으로요.”

“…….”

그제야 아델린이 반응했다. 구름을 바라보던 그녀의 눈길이 거두어졌다. 그녀가 천천히 라키엘을 돌아보았다. 말없이, 한참을.

그동안 그녀는 생각했다.

많이 초조하고, 암담했노라고.

황태자가 없던 내내 그러했다. 그를 믿고서 재활치료와 입원을 결심한 직후에 그가 사라졌기에 더더욱 그러했다.

하루하루가 지나며 허전해졌다. 그를 못 보게 되어서? 모르겠다. 다만 확실한 것은, 어린 시절부터 매일 거르지 않았던 훈련을 그만두는 일이 생각보다 큰 충격으로 다가왔다는 것이었다.

“…….”

황태자가 재활을 도와주던 때엔 그렇지 않았는데. 훈련을 못 한다는 허전함과 공허함을 느낄 틈이 없었는데.

점점 초조해졌다. 훈련을 못 하는 시간이 길어질수록 두려움이 몰려왔다. 이대로 계속 병상에 누워 쉰다면, 지루한 재활에만 매달린다면, 나중에 어깨가 낫고 나서도 예전의 기량을 회복할 수 있을까.

확신이 서지 않았다. 아니, 이러는 사이에도 점점 실력이 퇴보하는 중인 건 아닐까 싶었다. 그럴 때마다 점점 초조해졌다. 하지만 할 수 있는 일이 없었다. 아니, 그나마 유일한 할 수 있는 일이란 것이 기약 없는 재활훈련뿐.

언제 다 나을 수 있는지. 낫고 나면 예전처럼 훈련할 수가 있는 건지. 누구도 알려주지 않았다. 아니, 못했다. 웨어울프 간호사들도 그러했다. 그녀들은 친절했지만, 그 이상의 희망을 심어주지는 못하였다.

그렇게 불안함과 조초함, 걱정과 조바심 속에 점점 마음이 타들어갔다. 잠을 설치게 되고, 입맛을 잃어갔다. 의욕이 사라졌다. 재활훈련도 건성건성 하게 되었다.

그런 자신이 이상하다고 느껴졌지만, 어찌 보면 어리광을 부리는 것 같아서 어이가 없었지만, 스스로에게 왜 이러나 책망도 해보았지만, 한번 찾아온 무기력함은 상상 이상의 지배력을 발휘했다.

그리고 오늘, 황태자가 돌아왔다.

반가운 건가.

아니.

모르겠다.

조금은 원망스러운 것 같기도 하고. 한편으로는 당장 일어나서 따지고 싶기도 하고. 그런데 마음속 어느 한구석에서는 그를 반기며 활짝 웃고 싶어지기도 하는. 그런 복잡하고 미묘해서 어찌해야 할지를 모를. 딱 그러한.

결국, 아델린이 선택한 것은 침묵이었다. 이대로 자신이 입을 열게 되면 무슨 말을 꺼낼지 스스로도 알 수 없어서였다.

그래서 기다렸다.

기다려야 하는데. 황태자의 말을 기다리려 했는데. 이놈의 방정맞은 입은 또 제멋대로 생각을 앞서 버리고 만다.

“조금, 걸을까요?”

무의식중에 말해 버린 아델린은 스스로도 놀라 버리고 말았다. 물론 그녀는 놀란 기색을 가까스로 숨기기는 했다. 다만 조바심이 났다. 혹시나 황태자가 거절하는 건 아닐까.

다행히 그런 일은 벌어지지 않았다.

“예. 얼마든지요.”

라키엘은 내심 안도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안 맞았다. 자신을 입원실에 쑤셔 박아넣고선 며칠째 말도 없이 어딜 싸돌아다니다가 왔느냐고 주먹질이 날아오는 건 아닐까 걱정했는데. 다행히 왕녀의 정권지르기에 죽빵(?)이 돌아가는 외교적 대참사는 벌어지지 않았다.

그는 산책을 하자는 아델린의 제안에 잽싸게 동의했다. 그리고 신발까지 병상 아래로 착착 갖다주었다.

이어지는 산책길은 험난했다. 물론 산책 코스인 정원은 평화로웠다. 최고의 정원사들이 혼신의 힘으로 가꾼 수목과 꽃은 아름다웠고, 잘 닦인 길은 걷기에 더없이 편안했다. 하지만 나란히 걷는 왕녀의 무표정과 침묵이 앞서의 모든 요소를 퇴색게 했다.

“…….”

그녀는 걷는 내내 말이 없었다. 눈치가 보였다. 이쪽이 자리를 비운 동안 그녀가 겪었을 심리적 변화가 짐작되었기 때문이었다.

‘아마 운동선수가 부상을 입고 재활기간에 들어갈 때 겪는 우울감과 비슷하겠지.’

기량 하락에 대한 두려움.

실력 회복에 대한 불안감.

내가 이렇게 쉬고 있어도 되나, 라는 초조함.

‘거기에 담당 의사가 갑자기 자리까지 확 비워 버리니까 불안감과 초조함이 광박 피박 흔들고 크리티컬로 들어갔겠지.’

그녀의 축 가라앉은 모습이 이해가 됐다. 미안함과 책임감도 느껴졌다. 어쨌건 자신을 믿고 입원한 자신의 환자니까.

기분을 바꾸어 주어야 한다. 멘탈을 치료해 주어야 한다. 앞으로의 원활한 재활을 위해서는 더더욱 그러하다. 본디 건강한 멘탈이야말로 재활훈련에 반드시 필요한 중요 요소인 까닭이었다.

‘당연하지. 멘탈이 건강해야 의욕이 나고, 스스로에게 동기부여를 하고, 재활에 적극적으로 임하게 되는 법이니까.’

그건 생각보다 중요하다. 비단 심리적인 측면만이 아니다. 실제로 긍정적인 멘탈을 소유한 사람이 그렇지 않은 쪽보다 신체의 면역력과 자가회복력이 좋다는 연구 결과도 무수히 있을 정도였다.

‘그러니 일단은 멘탈 회복부터.’

촵촵촵!

라키엘은 왕녀 몰래 입술을 촵촵 적셨다. 그리고 그녀의 우울감 해소를 위한 이런저런 제안을 슬며시 건넸다.

“저기, 왕녀님?”

“…….”

“오늘 날씨도 좋고 해서 그러는데…….”

“…….”

“쇼핑 가실래요?”

“…….”

실패인가.

그러나 포기는 이르다.

“그럼, 왕녀님?”

“…….”

“제가 방패 들고 일일 샌드백 해드릴까요?”

“…….”

“어깨는 다치시면 안 되니까 발차기로만. 좀 치다 보면 기분이 나아지실 수도 있을 텐데. 어때요?”

“…….”

여전히 묵묵히 걷기만 하는 그녀.

라키엘은 머리를 쥐어짰다.

“저기 그럼, 끝말잇기 하실래요?”

“…….”

“하실 거면 왕녀님 먼저.”

“해질녘.”

“…….”

아.

라키엘은 탄식을 내뿜었다. 한편으로 그는 알 수 있었다. 어설픈 시도나 입발림으로는 수렁에 빠진 왕녀의 멘탈에 손을 내밀 수가 없겠다고. 아니, 어쩌면 그녀의 멘탈을 고쳐주겠다는 자신의 생각 자체가 건방진 것이었는지도 모르겠다고.

생각해보니 그랬다.

자신이 잘못한 일이다. 대체 뭘 고치고 한단 말인가. 그보다는 자신의 진솔한 사과와 대화가 우선이 아닐까.

“으음, 다시 드리는 말씀이지만…… 정말로 미안합니다. 변명의 여지 없이요.”

“…….”

“저로선 어쩔 수 없었다는 말은 하지 않겠습니다. 아울러, 왕녀님의 기분을 이해한다는 따위의 말도 하지 않겠습니다. 그건 거짓말일 테니까요.”

“…….”

“다만 제 진심을 말씀드리자면, 저는 왕녀님이 재활을 무사히 잘 마치셨으면 좋겠습니다.”

“…….”

“그래서 예전처럼 거침없이 주먹질도 하고, 소리도 지르고, 왕녀 아니었으면 어디 산자락에서 오우거랑 스트리트 파이트 벌이고 다니는 풍운의 권투사쯤 했으면 딱 어울렸겠네 싶은 생각도 들게 만들고, 뭐 그랬으면 좋겠다고요.”

“…….”

“그냥, 제 솔직한 마음입니다. 그래서 저는 왕녀님의 실력이 퇴보하지 않도록 최대한 열심히 돕고 싶습니다.”

“……그런가요.”

“네.”

처음으로 왕녀의 대답이 제대로 돌아왔다. 하지만 라키엘은 자제력을 발휘했다. 그녀의 대답하는 모습에 호들갑을 떨거나 유난스러운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그저 하던 그대로, 차분하게 자신의 생각을 진솔하게 밝혔다.

“그래서 방금 떠올린 김에 드리는 말씀인데, 혹시 재활기간 동안에 누군가를 가르쳐보는 건 어떨까요.”

“가르친다고……요?”

“네.”

“제가요?”

“네.”

고개를 끄덕였다.

생각난 바를 밝혔다.

“때로는 남을 가르치는 과정에서 스스로 모르고 있던 부분이나, 막혀 있던 부분이 정리가 되면서 오히려 실력이나 이해도가 오르는 경우가 있으니까요. 분야를 막론하고 말이죠. 저도 그랬으니까요.”

“황태자께서도요?”

“네.”

물론 한국에서였지만.

아무튼 간에.

“재활기간 동안엔 격렬한 트레이닝을 못 하실 테니까, 대안적인 방법으로 말입니다. 누구에게라도 좋으니 왕녀께서 익히신 격투술을 가르쳐 보시면 아마도 실력 유지나 향상에 도움이 되지 않을까 싶은데 말이죠.”

부디 그러길 바랐다.

정말 진심으로 바랐다.

그런 바람이 통한 걸까. 혹은 너무 빡쎄게(?) 통해 버린 걸까.

“네. 그럴게요.”

왕녀가 대뜸 고개를 끄덕였다. 일말의 고민도 엿보이지 않는 너무나 빠른 수긍이라서 오히려 이쪽이 잠깐 어벙벙해졌을 정도였다.

“네?”

“가르쳐드릴게요.”

“네에?”

“앙부아즈 왕가의 기초 맨손 격투술.”

“저, 저한테요?”

“죽기 직전까지 혹독하게 구르면 비로소 익히실 수 있으실 비기를 말이죠.”

“…….”

“그럼, 잘 따라오시길 바랍니다. 마젠타노의 황태자시여.”

“…….”

왕녀가 처음으로 꽃망울처럼 활짝 웃었다. 그런데 어째서 저 미소, 작정하고 킬각(?) 잡은 사람의 것처럼 보이는 걸까.

그리고 나는 왜 오싹 소름이 돋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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