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약 파는 황태자-372화 (371/468)

372화. 달콤하여 살벌한 (1)

……오싹!

소름이 3단 합체 오케스트라로 돋는다. 이건 농담도, 과장도 아닌 철저한 현실이며 실화 그 자체다. 왜냐고.

‘내가 왜! 팔자에도 없던…… 이런 짓이나 하고 있어야 하는 거지?’

라키엘은 마음속으로 외쳤다. 그러나 실제로 그 외침을 입밖으로 꺼낼 여유는 없었다. 지금 그의 입과 혓바닥, 성대 등의 모든 발성기관이 오직 ‘호흡’을 위해서만 필사적으로 가동되는 중인 까닭이었다.

“헉! 헥! 헤엑! 흐엑!”

“마젠타노의 황태자시여? 호흡이 흐트러졌답니다.”

“훅! 헥! 학! 혹!”

“호흡이 흐트러졌다니깐요?”

“국! 겍! 각! 곡!”

“……발음만 바꾼다고 해결이 되나요. 더 깊게. 지금처럼 얕지 않게. 가슴이 아닌 아랫배에서 호흡이 올라온다고 생각하면서. 내뱉을 때도 입을 모으고 짧게 끊어서 불듯이.”

“궥!”

“…….”

이쪽을 보는 왕녀 아델린의 눈빛이 자괴감에 휩싸였다. 그럴 법도 하다. 뭐 이런 몸치 약골이 있나 싶겠지. 하지만 어쩌겠는가. 그나마 이게 지금 이쪽의 최선인 것을.

……이라고 생각하며 라키엘은 열심히 스텝을 밟았다.

탁! 타닥! 타다다! 탁!

쉴 틈 없이 전후좌우로 움직이는 두 발. 일견 제멋대로 움직이는 것 같지만, 얼핏 슈퍼랜덤 영덕대게 스텝을 밟는 것처럼도 보이겠지만, 그래도 이건 엄연히 ‘앙부아즈 왕가 격투술’의 기본 스텝이었다.

‘원래는 이런 모양이 아니라서 문제인 거지만.’

앙부아즈 왕가.

저들의 터전은 숲과 산이 많아서 대규모의 회전이나 기마전은 잘 벌어지지 않는 편이었다. 역사적으로는 소규모의 기습전이나 난전이 판세를 가른 경우가 더 많았다.

그런 저들의 특성은 왕가의 전투술에도 고스란히 남았다. 초근접 난전에서 검을 떨어뜨렸을 때의 격투술이 좋은 예였다. 물 흐르듯이 유려하게 움직이는 스텝과 치명적인 타격술. 그것으로 승기를 제압하고 적의 갑옷 사이로 단검을 쑤셔박는 것.

……이기는 한데.

“훅! 흡! 헥! 헤엑!”

유구한 전통을 자랑하는 보법의 기본기를 구현하기엔 라키엘의 몸이 너무 구렸(?)다. 동작은 뻣뻣해서 물 흐르는 유려함은커녕 이 닦으려고 떠놓은 컵 속의 물도 다 쏟을 지경이었다. 체력 문제도 마찬가지였다. 조금만 움직였는데도 벌써 천식이 살랑살랑 손을 흔들었다.

그런데 훈련 조교를 자처하는 왕녀 아델린의 입에서 ‘휴식’이라는 말이 나오지 않는 점이 문제였다.

결국, 라키엘은 거친 호흡 속에서 SOS의 메시지를 꺼냈다.

“훅, 후악! 저기, 저!”

“네? 왜 그러죠, 황태자님?”

“잠깐, 잠깐만……!”

“궁금한 점이 생겼나요?”

“네!”

우뚝!

그는 옳다구나를 온몸으로 외치며 스텝을 멈추었다. 두 손으로 후들거리는 무릎을 짚고서 간신히 물었다.

“저기, 그…… 후욱! 하악, 지금 하는 기본 스텝은…… 후욱! 언제까지…….”

“훈련하는 것이냐고요?”

“예, 예!”

“될 때까지요.”

“…….”

“그리고 앞으로는 질문이 있을 때는 스텝을 그대로 이어가면서 질문하세요. 자꾸 이러면 훈련의 흐름이 끊긴답니다.”

“…….”

그 전에 제 숨이 먼저 끊길 거 같은데요?

라키엘은 가슴 가득 생존본능이 충만해 오는 것을 느끼며 다급하게 물었다.

“그, 그럼 휴식 시간은 언제?”

“원래는 온종일 휴식 없이 꾸준하게 스텝을 반복숙달하는 것이 원칙이기는 한데…….”

왕녀 아델린이 이쪽을 슬쩍 쳐다보았다. 이미 엉망진창이 되어 버린 이쪽의 몰골에 그녀는 잠시나마 동정심을 느낀 걸까.

“30분만 더 하고 쉬도록 하죠. 훈련을 시작한 게 아직 겨우 20분밖에 되지 않았지만.”

“20분이라고요? 그것밖에?”

“네.”

“20시간은 된 것 같은데?”

“숨 돌리려고 잔머리 쓰지 말고 움직이세요.”

“하, 하지만!”

“하지만, 또 뭐죠?”

“이거 앙부아즈 왕가의 격투술인데, 귀측 왕가의 일원이 아닌 제가 함부로 배워도 되는 겁니까?”

“네.”

“어째서?”

“고급 심화 과정이 아닌 기본 등급의 격투술은 왕가의 구성원만이 아닌, 앙부아즈의 모든 백성에게 공개되어 있거든요.”

“저는 앙부아즈 사람이 아닌데요?”

“대신 최중요 등급 동맹국의 황태자이시지요. 게다가 저는 왕족이기에, 제가 선택한 사람에게는 왕가 격투술의 더 높은 등급까지를 자유롭게 가르칠 권한이 있답니다.”

“그, 그렇지만…….”

“참 다행이지 않나요?”

“……크흡!”

눈물이 나온다.

나는 어쩌자고 재활훈련 기간에 남을 가르쳐보면 어떻겠느냐는 제안을 왕녀에게 했던 것일까. 그리고 나는 또 어쩌자고 그 가르침의 대상을 황태자 당신에게 하고 싶다는 왕녀의 소망(?)에 고개를 끄덕여 버렸던 것인가.

그러나 언제나 그렇듯이 후회는 한발 늦은 법이었다. 라키엘은 후회로 가득한 가슴을 헐떡헐떡 부여잡고서 기본기 스텝 훈련을 재개했다.

물론 정말 솔직한 마음으로는 이런 거, 하기 싫었다. 더 솔직하게 말하자면, 지금 당장이라도 그만둘 수도 있다. 딱히 강제성을 지닌 훈련은 아니니까. 막말로 왕녀가 칼 들고 협박하는 것도 아니니까.

하지만 그러기는 싫었다.

여기서 힘들다고 그만두기엔…….

‘지금 왕녀의 표정이 너무 밝아.’

라키엘은 숨을 헐떡이는 와중에도 왕녀의 기색을 힐끔 살폈다. 아니, 사실은 새삼스럽게 살필 필요도 없었다. 훈련이 시작되고부터 왕녀는 시종일관 저렇게 생기 넘치는 얼굴이었다. 얼마 만에 보는 저런 모습인지.

딱 봐도 최근 그녀를 괴롭히던 우울감과는 담을 쌓은 듯한 모습. 그야말로 인생의 낙을 찾은 사람의 표정.

그걸 보며 직감할 수 있었다.

지금이야말로, 그녀의 멘탈을 회복게 할 절호의 찬스라고. 이런 기회를 걷어찰 수는 없다고. 그녀의 재활을 담당하고 있는 한의사로서는 더더욱 그러하다고.

‘멘탈의 회복이야말로…… 재활의 가장 중요한 요소니까.’

생각해보면 한국에서도 그랬다.

자신의 한의원에도 운동을 하다가 다친 스포츠인들이 제법 많이 찾아왔다. 무슨 국가대표라거나 하는 유명한 사람은 없었지만, 헬스 트레이너라거나 체대 입시생 등등의 환자는 제법 많이 접해봤다.

그들을 치료하며 느낀 점이 있었다. 대체로, 아니, 거의 대부분의 경우에, 멘탈이 튼튼해서 회복에 대한 의지가 강한 사람이 실제로도 회복이 빠르고 후유증이 적다는 것이었다.

‘재활훈련 자체를 성실하게 받고, 신체의 자가치유력도 더 높은 편이었지.’

이번에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이쪽이 아무리 현대적인 재활 프로그램을 제공해도, 정작 그걸 받는 왕녀가 우울한 상태라면 아무것도 안 된다. 그러니 멘탈은 무조건 잡아놓고 가야 하는데, 지금 그럴 기회가 왔다.

“……훅! 헥! 후욱!”

라키엘은 그러한 한의사로서의 책임감으로 더욱 열심히 훈련에 임했다. 아무리 힘들어도, 숨이 턱까지 차오르고, 무릎이 형편없이 달달 떨리고, 온몸이 흐느적거려도 끝까지 버티고 매달렸다.

그러는 사이에 앙부아즈 왕가 격투술의 특징을 조금 더 몸으로 이해할 수 있게 되었다.

‘이거…… 은근 장난이 아닌데?’

흐르듯이 부드럽게 움직이며 응축한 힘을 일격에 쾅. 예를 들자면 보법은 빙판 위를 미끄러지는 여제 김인아처럼, 타격은 양손에 핵미사일을 장착한 결전병기 Mk-2 마이크 타이순처럼이랄까.

물론 그런 깨달음(?)이 훈련을 편안하게 해주지는 못했다. 덕분에 라키엘은 계속 헥헥거리며 휴식시간이 다가오기만을 오매불망 바랐고, 그를 보는 아델린의 눈초리는 남몰래 깊어졌다.

‘황태자. 당신은…….’

어째서 매번, 이토록 진심인 걸까. 그녀는 솔직히 이해가 되지 않는다고 느꼈다. 저토록 형편없이, 스스럼없이 망가지는 걸 감내하는 황태자의 행동이 일견 이해가 되지 않았다.

그의 의도를 느낄 수 있기에 더더욱 그러했다.

‘날 위해서인 거겠지.’

기운을 차리라고. 어떻게든 의욕을 되찾으라고. 다시금 열심히 재활에 임하라고. 그걸 위해 이토록 스스로를 거리낌 없이 내던지고 있는 것이겠지, 황태자는.

“…….”

돌이켜보면 언제나 이랬던 것 같았다.

처음 만났던 때부터.

식은땀을 흘려가며 담석을 없애주던 시기에도. 앙부아즈까지 건너와 반역자를 제압하던 날에도. 황제와의 험난한 협상 테이블에 불려 온 이쪽을 배려해주던 그 모든 순간에도. 모두 이러했다.

그래서 모르겠다.

어째서 황태자, 당신과 마주할 때마다 나도 모를 이상한 울림을 가슴에 품는 것인지. 그럴 때마다 황급히 놀라며 숨을 삼키기에 급급해지는 것인지. 그럼에도 끝끝내 이 느낌을 내 마음의 경계선 밖으로 밀어내지를 못하는 것인지.

하여 결국 지금처럼, 당신을 더 괴롭히고 싶어지는 것인지도. 마치, 제 좋은 마음을 똑바로 가누지도 못하여 심술을 부리고 마는 어린아이처럼. 이렇게.

“스텝이 흐트러지고 있답니다. 더 일정하게. 호흡과 동작을 일치시키세요.”

“훅! 하악? 이렇, 게요?”

“……거칠어진 호흡과 쓰러지는 동작이라. 일치가 되긴 하는데.”

“하는데?”

“앙부아즈 왕가 격투술의 스텝에는 포함되지 않는 동작인 것 같은데요.”

“때로는 응용도 중요한 거 아니겠습니까?”

“지금은 응용보다 기초가 중요한 시기인 듯해서요?”

“흑, 유도리가 없으셔.”

“훈련할 때는 자비도 없답니다. 얼른 일어나세요.”

“크흑! 헥헥……!”

그럼에도 일어나는 황태자 당신. 고작 기본 보법 훈련 조금에 땀을 뻘뻘 흘리며 비틀거리는 나약한 당신. 어째서 나는 당신의 그런 모습이 자꾸만 새겨지는 걸까. 눈을 감을 때도 이따금 보이는 것일까.

모르겠다.

정말로 모르겠다.

아델린은 스스로도 갈피를 잡을 수 없는 스스로의 마음을 애써 갈무리하였다. 어찌 보면 훈련을 받는 라키엘보다도 그녀에게 더 힘겨운 시간이었다.

그렇게 한낮의 격투술 훈련이 끝났다. 시간과 함께 태양이 하늘을 흘렀다. 저녁이 다가오고, 어둠이 세상을 보듬었다. 그때부터는 라키엘의 시간이었다.

“자, 그럼 이제부터 재활에 앞선 물리치료를 하겠습니다.”

라키엘은 아델린을 원장실로 불러들였다. 그리고 꼬슴이표 하얀 가시들을 죽 늘어놓았다. 치료용 침상에 누운 아델린이 라키엘을 힐끗 보며 물었다.

“황태자께서는 뭔가, 벼르고 있는 표정이군요?”

“제가요? 벼른다고요?”

“네.”

고개를 끄덕이자니 살풋 미소가 나왔다.

“황태자께는 낮의 기본 훈련이 무척이나 가혹하였던 모양입니다? 그렇게나 벼르는 눈길로 침술을 준비하시는 걸 보니까 말이지요.”

“하. 하. 하. 제가 그렇게 보입니까?”

“어느 정도는요?”

“반면에 왕녀님께서는 자신만만한 기색이시군요.”

“황태자께서 펼쳐주시는 침술은 전혀 아프지 않으니까요. 오히려 배려와 정성이 들어가서 무척이나 따뜻…….”

“예?”

“아뇨. 무시무시해 보이는 가시의 모습과는 달리 안 아프기에 걱정이 안 된다구요.”

“아하. 그러셨구나.”

“네.”

“제게 낮의 훈련에 대한 앙갚음을 할 뾰족한 수단이 없을 거라고 자신하신다?”

“뭐, 굳이 그렇게 표현을 하자면요?”

아델린은 싱긋 웃었다.

라키엘도 싱긋 웃었다.

그가 마음속으로 지원군을 불렀다.

‘벼락의 정령? 발동.’

딩동!

[스킬 전용 옵션 ② : 찌릿찌릿 물리치료를 발동합니다.]

……파츠즛!

그는 벼락의 힘이 짜릿하게 깃든 가시를 들어 올렸다. 첫 공습 지점은 왕녀의 어깨 부근 노회혈(臑會穴).

마침내, 복수(?)의 시간이 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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