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약 파는 황태자-373화 (372/468)

373화. 달콤하여 살벌한 (2)

“정기 보고를 올리옵니다, 폐하.”

어둠이 내린 밤.

황궁의 모두가 잠든 시간.

그러나 집무실의 황제만은 예외였다. 또한, 마젠타노 황실 특수정보부 3호 요원 또한 마찬가지였다.

3호 요원이 말했다.

“앞서 보고 드렸던 황태자와 별궁 인원의 마룡굴 노략질 사건 이후의 일이옵니다. 당시, 마룡굴로부터 금은보화 외의 흥미로운 물건이 별궁으로 반입된 것이 확인되었사옵니다.”

“흥미로운 물건이라.”

“약물이 담긴 주사이옵니다.”

“주사?”

“그렇사옵니다.”

황제가 눈을 가늘게 떴다.

3호 요원의 보고가 이어졌다.

“사용자는 데미안 카이엔 경이며, 그가 앓고 있다는 불치병을 치료하는 목적의 약물인 것으로 사료되옵니다. 카이엔 경은 그 약물을 하루에 하나씩 사용하고 있으며, 비축된 수량으로 짐작건대 대략 100년 치 분량일 것으로 추측하옵니다.”

“100년?”

“그러하옵니다, 폐하.”

“흐음. 똑같은 약물을 100년 치나……. 보관에 문제가 생길 분량일 터인데. 혹여 용왕의 도움으로 그 문제를 극복한 것인가.”

“아마도 그럴 것이옵니다, 또한-”

“또한?”

“주사를 감싸고 있는 반투명한 포장 재질과, 그 겉면에 쓰인 문자의 형식이 극히 낯선 것으로 미루어 보자면, 그 물건의 출처가 이세계일 가능성이 짐작되는 바이옵니다.”

“이세계?”

“높은 확률은 아니오나, 그렇사옵니다.”

“……흐음.”

황제는 턱수염을 쓰다듬었다. 이세계에서 가져왔을 것으로 짐작되는 대량의 약물이라. 그 또한 용왕의 도움을 감안하자면 불가능한 일은 아닐 터였다.

아니, 사실은 기뻤다.

‘언제나 병상만 전전하던 녀석이. 허.’

죽을 날만 받아놓은 것처럼 굴던 나약한 아들이었다. 한데 이제는 용왕과 교분을 맺는 것도 모자라, 그의 도움으로 이세계의 공기까지 마시고 왔을지도 모른다니. 생각하는 것만으로도 가슴이 웅장해졌다.

당연했다.

남들은 자제들의 교육과 견문을 위하여 막대한 자금을 투자해서라도 여러 나라와 지방을 다니게 한다지 않는가. 그런데 자신의 아들은? 다른 세계에 다녀왔다! 그러니 자신의 아들이 최고다. 최강이다. 역시 내 아들이다!

‘크흠, 흠흠.’

황제의 오른쪽 콧구멍이 남몰래 벌렁거렸다. 하지만 그는 능숙하고도 자연스러운 손짓으로 콧수염을 매만지는 척하며 콧구멍을 가렸다. 그리고 물었다.

“다른 보고 사항은 없는가?”

“있사옵니다.”

“고하라.”

“예, 폐하. 다음 정보는 황태자의 최근 근황에 대한 것이옵니다.”

“그래. 이번에는 그 녀석이 무슨 일을 벌이고 있는 것이더냐.”

“아마도…… 연애를 시작하고 있는 듯하옵니다.”

“……뭣?”

“상대는 앙부아즈의 왕녀 아델린이옵니다.”

“허허. 역시. 지난번엔 치료를 빙자하고서 단둘이 밤새 병실에 있다가 나오곤 했다더니.”

“물론 당시엔 정말로 치료만 하긴 했사옵니다. 하온데 이번에는 분위기가 심상치가 않사옵니다.”

“어떤 측면에서 말인가?”

“황태자를 바라보는 왕녀의 눈빛이 심상치가 않사옵니다.”

“구체적으로는?”

“최근, 왕녀는 황태자가 별궁을 비운 기간에 우울감에 시달렸사옵니다. 자신이 황태자로부터 버림을 받아 병실에서 방치되고 있노라 여긴 이유가 컸을 것이옵니다. 이후 왕녀는 돌아온 황태자에게 냉담한 태도를 보였으나, 황태자는 인내심을 발휘하여 왕녀의 기분을 풀어줄 방도를 찾았사옵니다.”

“어떤 방도를 동원하였는가.”

“왕녀에게서 앙부아즈 왕가의 기초 격투술을 훈련받는 방도였사옵니다.”

“호오.”

“그 결과, 황태자는 온종일 왕녀의 훈련 지도에 따라 빌빌거리는 모습을 보여주었고, 왕녀는 그런 황태자를 매우 따사롭게 바라보았사옵니다.”

“그건…… 가학적 성향이 아닌가?”

“아니라고 사료되옵니다.”

“그걸 그대가 어찌 아는가?”

“감히 아뢰옵자면, 제가 아내와 연애하던 시절에 아내에게서 받았던 눈빛과 똑같았기 때문이옵니다.”

“……허허?”

“그때 정신을 똑바로 차렸어야 했사옵니다. 그런데 잠깐 판단력이 흐려지는 바람에 콩깍지가 씌어서 그만…… 흐흑.”

“저런. 안됐군.”

“송구하옵니다.”

“아니다. 괜찮노라.”

“예, 폐하. 오늘의 정기보고 내용은 여기까지이옵니다.”

“수고가 많았군. 물러가도록.”

“명을 받드옵니다.”

……스슷.

마지막 말과 함께 3호 요원의 모습과 기척이 순식간에 사라졌다. 집무실에는 황제만 홀로 남았다.

“흐음.”

황제, 아스테리온은 묘한 눈길로 천장을 올려다보았다. 기분 또한 묘하였다. 자신의 아들이 연애라. 그것도 동맹국의 왕녀와. 이 사실을 어떻게 받아들이면 좋을까.

‘나쁘지는 않군.’

아니.

엄밀히 말하자면 호재일 수도 있다.

이걸 계기로 앙부아즈와의 동맹을 더욱 단단히 다지고, 그 새로운 결속을 통하여 주변국에 대한 장기적인 영향력을 강화할 수도 있으리라. 물론 그 와중에 앙부아즈 왕가의 세력이 외척으로 편입된다는 잠재적인 위협도 있겠지만…….

‘이건 진지하게 검토를 해보아야겠군.’

그때부터였다.

앙부아즈와의 혼인 성사가 가져다줄 중장기적인 정치적, 외교적, 실리적 이익과 손해들이 황제의 머릿속에서 저울질 되기 시작하였다.

같은 시간.

라키엘은 마음속으로 지원군을 불렀다.

‘벼락의 정령? 발동.’

딩동!

[스킬 전용 옵션 ② : 찌릿찌릿 물리치료를 발동합니다.]

……파츠즛!

그는 벼락의 힘이 짜릿하게 깃든 가시를 들어 올렸다. 첫 공습 지점은 왕녀의 어깨 부근 노회혈(臑會穴). 강도는 10단계 중에서 가장 순한 맛인 1 정도로.

“어?”

이쪽이 치켜든 가시에서 파직거리는 스파크를 목격한 탓일까. 여유롭던 왕녀의 눈꺼풀이 꿈틀거렸다. 그녀의 입이 어쩐지 다급한 투로 열렸다.

“그거 무슨…….”

톳!

그녀의 물음이 다 나오기도 전에 가시가 먼저 박혔다. 그리고 노회혈 주위로 1단계의 전기 자극을 공평하게 선사했다.

“……읍?”

“어라? 아프십니까?”

“아, 아뇨. 아픈 건 아닌데.”

“아닌데?”

“그 뭔가, 이상하게 찌릿해서.”

“아하. 이거요?”

라키엘은 빙긋 웃으며 가시를 잡은 손에 살짝 힘을 넣었다.

딩동!

[전기 자극의 강도를 2단계로 상향합니다.]

찌리릿!

“……읏!”

아델린이 저도 모르게 인상을 찡그렸다. 이쪽을 올려다보는 그녀의 눈길에 황당함과 약간의 억울함이 배어났다.

“지금 이거, 제 착각이 아니죠?”

“네. 착각 아닙니다.”

“정전기 같은 이걸…… 가시를 통해서 제 어깨에 흘려 넣는 거예요? 정말로?”

“네. 정답입니다.”

“설마…….”

그녀의 눈동자에 의혹이 담겼다.

“낮의 복수를 위해서?”

“어이쿠. 또 들어갑니다.”

톳톳! 톳!

이번에는 어깨와 승모근 사이의 천료혈(天髎穴), 이두근 안쪽면의 청령혈(靑靈穴), 그리고 넷째 발가락 발톱뿌리 바깥쪽 가장자리의 족규음혈(足竅陰穴)까지!

3연타(?)로 전기 충격을 받은 아델린이 어이가 없다는 듯 물어왔다.

“아니, 어깨 주변이나 팔은 그렇다 치고, 발가락에는 왜요?”

“이게 다 이유가 있어서 그런 겁니다.”

“역시나 개인적인 원한에 따른 복수?”

“이번엔 그런 거 아니고요.”

라키엘은 쓴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인체의 모든 기혈, 아니, 마나의 경로는 서로가 서로에게 긴밀한 영향을 주기 때문입니다. 겉보기로는 아무런 상관이 없는 부위인 것 같아도 사실은 모두가 이어져 있고, 영향을 주고받지요. 하나의 생태계, 혹은 작은 우주처럼 말입니다.”

“그게 무슨…….”

“흔히 소드마스터의 경지에 오르면 체내에 끝없는 순환의 힘이 생겨난다고 하지 않습니까? 그게 같은 원리입니다. 자신의 몸속에 흐르는 마나의 모든 경로를 스스로 개통하고, 그 흐름을 자유자재로 조절해서 끊기지 않는 순환을 이끌어낸다는 뜻인 거겠지요.”

“…….”

“지금도 마찬가지입니다. 여기, 그리고 여기.”

톳, 톳!

이번에는 아델린의 양쪽 눈썹꼬리 사죽공혈(絲竹空穴)에 각각 하나씩의 가시가 야물딱지게 박혔다. 또다시 찌릿찌릿. 아델린이 잠깐 인상을 썼다.

라키엘은 개의치 않고 설명을 이어갔다.

“이곳에 자극이 들어가면 안면의 들뜬 신경이 가라앉고, 그 영향으로 승모근에 과도하게 들어가던 힘이 이완되고, 결과적으로 어깨 관절의 부담이 줄어들거든요.”

“그런……가요?”

“예. 뭐. 지금 왕녀님의 모습이 조금 볼 만하긴 하지만요.”

“……제가요? 어떤?”

“보실래요?”

라키엘이 빙긋 웃으며 거울을 가져와서 보여주었다. 따란. 덕분에 아델린은 양쪽 눈썹 끄트머리에 기다란 가시를 더듬이처럼 꽂고 있는 자신의 모습을 감상(?)하게 되었다.

“……이거 복수 맞네.”

“예?”

“아뇨. 내일 낮에 보자구요.”

“낮에 보자는 말씀은…… 또 절 가혹하게 굴리실 예정입니까?”

“저는 그저 정석적인 훈련을 시켜드리는 것일 뿐이랍니다?”

“저도 그저 정석적인 치료를 할 뿐인 거고요.”

라키엘이 받아치며 또 하나의 가시를 찔렀다. 이번에는 3단계의 전기 강도로. 톳. 이번에도 아델린은 인상을 쓰며 움찔했고, 라키엘은 만족했다. 그녀에게 낮의 복수를 할 수 있어서? 아니. 경혈 스캐닝을 통해 벼락 침술의 효과를 확인할 수 있어서였다.

‘이건…… 장난이 아닌데?’

대화는 장난처럼 했지만, 사실 치료는 장난이 아니었다. 지금 보이는 진행 과정도 장난이 아니었다.

경혈 스캐닝으로 변화된 시야. 낱낱이 보이는 아델린의 경혈 흐름. 그 덕분에 관찰할 수 있는 어깨의 변화까지.

전기 자극이 담긴 가시를 찌를 때마다 그녀의 전신 경락에 파도가 치는 것이 보였다. 잔잔한 호수에 커다란 바위를 던진 듯이 거대한 파문이 일어나 온몸으로 번졌다. 그 자극에 다른 혈맥들이 깨어나고, 서로에게 다시금 파문을 전달했다.

그 결과는 신진대사의 적당한 가속이었다. 세포 하나하나가 활성화되며 대사 속도가 빨라졌다. 특히, 집중적으로 자극을 가한 어깨 부위가 그러하였다.

‘자가치유력이 최소 다섯 배는 증폭되고 있어.’

물론 쉬운 일은 아니었다.

적절한 혈맥의 조합.

정확한 자극의 시점.

알맞은 전기적 자극.

세 가지의 요소가 모두 조화롭게 맞아떨어져야 비로소 가능해지는 일이었다. 한데 자신에겐 그게 딱히 어렵지 않았다. 한국에서부터 수없이 공부하며 쌓은 경험들과, 이곳에서 지니게 된 경혈스캐닝의 조합 덕분이었다.

여기에 추나요법까지 동원하면 치료 효과의 시너지가 더욱 커질 것이다. 왕녀의 어깨를 더 효율적으로 치료할 수 있으리라. 어쩌면 더 나아가, 조금의 후유증도 없이 말끔하게 낫게 해줄 수도 있겠다.

라키엘의 가슴속에 자신감이 생겨났다.

‘가보자.’

이럴 때가 제일 신이 난다. 내 치료가 환자의 몸을 제대로 낫게 해준다는 확신이 드는 이런 순간이. 가장 짜릿하고, 보람차다.

톳! 토돗!

그때부터였다. 벼락 침술의 치료 효과를 확신한 그의 손길이 빨라졌다. 그의 집중력이 올라가며 말이 없어졌다.

왕녀 아델린도 그를 말없이 지켜보았다. 말은 낮의 복수니 어쩌니 했지만, 사실은 그녀도 라키엘을 믿고 있었다. 어쩌면 라키엘 본인보다 더 일찌감치, 더 많이.

그렇듯 라키엘이 찌르고, 왕녀가 찔리는 보람차고 훈훈한 치료의 밤이 흘러갔다.

그리고 한편, 두 사람으로부터 아주 멀리 떨어진 어떤 곳에서는 집착에 휩싸인 한 마리 치토ㅅ…… 아니, 쟈빌론이 별궁을 노려보며 중얼거리고 있었다.

“……리한 군의관, 언젠간 잡고 말 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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