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약 파는 황태자-374화 (373/468)

374화. 달콤하여 살벌한 (3)

“……리한 군의관, 언젠간 잡고 말 거야.”

별궁이 아-주 멀리서 좁쌀만큼 작게 보이는 곳. 시가지 구석의 어느 종탑 위. 그곳에서 집착에 휩싸인 치토ㅅ, 아니, 쟈빌론이 중얼거렸다.

다만 이제 그의 눈빛은 예전처럼 광기에 젖어 있지는 않았다. 오히려 냉철했다. 한때 앙부아즈의 왕관을 갈망했던 야심가 시절의 눈빛처럼. 철저한 계산과 차가운 이성으로 물들어 있었다.

지난 프론테라 대광장에서의 난리 덕분이었다. 혈염의 흑마법사에게 당했던 정신지배. 그 올가미에서 벗어나며 기억을 되찾았다. 기억을 되찾으니 마법 실험으로 망가졌던 이성도 돌아왔다.

모든 것이 예전대로.

그렇게 쟈빌론은 가장 멀쩡했던 반란자 시절의 이지와 사고력을 모두 되찾을 수 있었다. 그런 덕분에 빠른 판단을 내렸고, 망설임 없이 도망치는 길을 택했다.

지금 와서 보면 현명한 결정이었다. 만약 광장에서 무리하게 버텼다면, 그래서 마젠타노 황가의 수중에 사로잡혔다면 지금쯤 절대로 살아 있지 못했을 테니까.

‘물론 지금도…….’

스윽.

까마득히 멀리 있는 별궁을 주시하던 쟈빌론의 눈동자가 종탑 주변을 훑었다. 다행히 수상한 기척은 느껴지지 않았다. 그러나 그는 방심하지 않았다. 광장의 사건 이후로 자신을 추적하고 있는 황실의 첩보요원들이 결코 만만한 상대가 아닌 까닭이었다.

아니, 살벌했다.

개개인의 전투 능력은 분명히 자신보다 확연히 떨어졌다. 그러나 은밀한 추적과 기습에 있어서는 타의 추종을 불허했다. 소드마스터인 자신조차도 최소 열 번은 죽을 고비를 넘겨야 했을 지경이었다.

‘지겨운 것들.’

그는 이를 갈았다.

사실 이 종탑은 위험하다. 사방에서 눈에 띄기 좋도록 홀로 우뚝 솟아 있을 뿐만 아니라, 아래쪽이 포위되면 도망갈 경로의 선택지가 극히 제한된다.

하지만…… 조금은 더 별궁을 지켜보고 싶다. 저곳에 리한 군의관이 있을 테니까. 그래서 도주를 택하고서도 황도를 떠나지 않았다. 그런 결정이 의도치 않게 황실의 요원들을 잠시나마 따돌리는 데에 도움이 되긴 했지만.

어쨌건 리한 군의관. 언젠가는 그를 반드시 사로잡아 자신만의 주치의로 삼을 것이다. 그래야 평생 자신을 괴롭혀 온 이토록 끔찍한 두통을 말끔히 떨쳐낼 수 있을 것이다.

‘두통을 극복한 뒤에는, 다시금 대륙을 정벌하는 것이야. 할 수 있어. 나는 해낼 수 있다.’

그는 아직도 접지 않은 야심을 가슴속에 갈무리하고서 종탑을 박찼다. 그의 모습이 금방 사라졌다. 그 직후, 종탑 주위로 다섯의 은밀한 그림자가 고속으로 접근해 왔다. 그들은 아주 잠깐 종탑에 남은 흔적을 살피고는 다시 바람처럼 사라졌다.

쟈빌론이 떠나간 방향을 향해서였다.

아침이 밝았다.

밤이 라키엘의 시간이었다면, 낮은 아델린의 지배기였다.

“끕! 긥!”

“황태자님?”

“굵! 궭!”

“황태자니임?”

“갸랋…… 예?”

“세 번째 스텝 그렇게 놓으시는 거 아닌데.”

“…….”

“아까 보여드렸잖아요?”

“아, 예.”

“여기서 발목을 이 방향으로. 이렇게 해야 종아리 근육과 무릎을 이어 대퇴근의 힘이 다음 스텝에서 제대로 쓰일 수 있어요. 이렇게.”

파앙!

왕녀가 가볍게 밟은 스텝에 엄청난 힘이 실렸다. 그대로 주먹을 뻗었다면 돌담 하나쯤은 너끈히 뚫었을 위력이었다.

“어때요? 참 쉽죠?”

“…….”

쉽기는 무슨.

라키엘은 초신성처럼 빡 하고 떠오르는 위기감을 느꼈다. 이제 보니 이 왕녀, 사람마다 재능과 운동신경에 차이가 있다는 사실을 체감을 잘 못하는 것 같다.

아마 본인이 격투의 천재라서 그런 거겠지. 자신에게 너무나 자연스럽게 되는 일이 남에겐 한참을 노력해야 하는 일이라는 걸 이해하지 못하는 거겠지. 현역 시절에 천재 소리를 듣던 선수가 감독이 되면 의외로 고전하는 경우가 있듯이 말이다.

‘이대론 안 되겠어.’

라키엘은 현재 시점에서의 문제점을 분석했다. 역시나 1대 1의 교습 방식이 제일 문제인 것 같았다.

아무래도 왕녀에게 단독 마크(?)를 당하고 있다 보니, 조금만 실수를 해도 매번 왕녀의 눈에 띄어 버리는 거다. 그때마다 지적을 당하며 더 빡센 자세 교정을 당하는 것이고.

이래선 안 된다.

대책이 필요하다.

라키엘은 필사의 기지를 발휘하며 두뇌를 풀가동시켰다. 그런 덕분에 반짝, 한 줄기 피어오르는 희망 같은 꼼수를 떠올렸다.

“저기, 왕녀님?”

“네? 다음 스텝 안 밟으세요?”

“그보단 드릴 말씀이 있어서요.”

“스텝 밟으면서 하시면 안 될까요?”

“안 됩니다.”

“왜죠?”

“숨차서 제 마음이 제대로 전달이 안 될 것 같거든요.”

“마음……이라뇨?”

왕녀 아델린은 저도 모르게 흠칫했다. 그리고 걱정했다. 혹시나 볼이 달아오른 건 아닐까. 황태자가 그걸 알아보면 어쩌나.

그러나 애석하게도(?) 라키엘은 독심술을 익히지 못했고, 왕녀의 마음을 조금도 알아차리지 못했다. 대신 그가 꺼낸 대답은 왕녀의 예상과 완전히 동떨어진 것이었다.

“제 마음이라면, 왕녀께서 가르쳐주는 이 보법이 널리 퍼졌을 때 수많은 이들의 인명이 얼마나 더욱 귀중히 다루어질까……라는 희망이랄까요.”

“……네?”

이건 또 무슨 뚱딴지같은 소린가. 아델린은 저도 모르게 미간을 모았다.

라키엘의 입놀림이 이어졌다.

“사실은 방금 말입니다. 문득 생각이 떠올랐습니다. 지금 제가 익히고 있는 이 앙부아즈 왕가의 기초 격투술 스텝을 별궁 한의원의 웨어울프 간호사들이 익히면 어떨까, 하고 말이지요.”

“그게 무슨…….”

“아마도 더 빠르게, 신속하게, 바람처럼 뛰어다닐 수 있겠지요. 코드 블루, 병원 내에서 환자에게 심정지가 발생하는 경우라든가. 응급환자가 실려 오는 경우라든가. 그밖에 수많은 응급상황에서 말입니다.”

“설마…….”

“예, 짐작하신 설마가 맞을 겁니다. 한발 빠르게 뛰며 환자의 건강과 안전을 더욱 잘 지켜내는 간호사들. 신속한 출동으로 환자의 생사를 가르는 골든아워를 놓치지 않는 듬직한 간호사들!”

“…….”

“생각만 해도 가슴이 뛰지 않습니까?”

“아 네…….”

“그러니 어떻습니까, 왕녀님?”

“웨어울프 간호사들에게도 격투술의 기초 보법을 알려달라는 말씀이신가요?”

“기초 과정은 앙부아즈의 모든 백성들에게 공평하게 공개되어 있다고 말씀하셨던 것, 기억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마젠타노 별궁 한의원의 간호사들은 앙부아즈의 백성이 아닌걸요?”

“허어……. 그 말씀은……우리가 남이라는 뜻?”

“……네?”

“하아……. 서운하네요, 조금…….”

“아니, 무슨…….”

아델린은 당황하고 말았다.

그러거나 말거나 라키엘은 더욱 본격적인 철판을 3중 엠보싱으로 안면 가득 도배했다.

“솔직히 저는 말이지요. 왕녀님을 한 번도 남이라고 여겨본 적이 없습니다.”

“그, 그럼요?”

“피를 나눈 혈맹! 전우! 기꺼이 등을 맡길 수 있는 존재!”

“그리고요?”

“예?”

“더…… 없나요?”

“어, 이걸로 부족합니까?”

“그런 뜻은 아니고…….”

“그럼 도원! 결의!”

“그게 뭐죠?”

“한날한시에 태어나지는 못했지만 죽을 때는 함께 죽자! 뭐, 그런 돈독한 사이랄까요.”

“해석하기에 따라서는 물귀신 같은데요?”

“아무튼!”

라키엘은 성대 가득 아스라한 심법의 마나를 싣고서 우겼다.

“저는 왕녀님을 남이라고 여기지 않습니다. 그런 왕녀님을 섬기는 앙부아즈의 백성들? 마찬가지입니다. 제게는 다 제 백성만큼이나, 아니, 제 백성과 똑같이 소중한 이들이지요. 그러니까 제가 신분까지 감추고서 앙부아즈의 환란을 보듬기 위하여 기꺼이 내전에 참전했던 것이 아니겠습니까?”

“아, 그건 인정하지만…….”

“그렇지요. 인정하시는 거지요?”

“아…… 네…….”

“그런데 왕녀님은 왜! 어째서? 우리 별궁 한의원의 간호사들을 앙부아즈의 백성처럼 대하시지 않는 것입니까?”

“아니, 그건…….”

“혹시 인간이 아니라 웨어울프라서요?”

“아, 아뇨. 그건 정말로 아니고요.”

“예, 그럴 거라 믿었습니다. 고귀하고 기품 있는 왕녀님께서 인종차별주의자일 리는 없지요. 역시. 제 기대를 저버리지 않으시는 모습에 어찌나 안심이 되는지.”

“…….”

“그러니까, 왕녀님?”

“…….”

“간호사들한테도 좀…… 어떻게 안 되겠습니까?”

“후우…….”

아델린은 한숨을 내쉬었다. 그리고 스스로 인정하고 말았다. 이 남자가 이렇게 고집을 부릴 때면 자신은 언제나 지고 만다. 이 남자가 진짜로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 의도가 무엇인지 짐작이 가는데도 이렇게 되고 만다.

어째서일까.

모르겠다.

왜 이런 말도 안 되는 어거지에도 결국엔 이렇듯 고개를 끄덕이고 마는 것인지.

“네, 뭐…… 그러도록 할까요.”

“역시. 믿고 있었습니다. 감사합니다!”

“…….”

얄미워.

한 대 때려주고 싶어.

왕녀는 잠깐 거칠어지는 마음을 접어두고서 라키엘의 요청을 허락했다. 덕분에 30분 후, 비번인 무료한 일과에 뒹굴거리던 간호사 30여 명이 격투술 훈련에 동참하게 되었다.

한데 그 효과(?)는 라키엘의 기대와 반대였다.

“하!”

“하압!”

“탓!”

스팟! 스파팟! 파팟!

웨어울프답게 동물적인 반사신경과 운동능력을 지닌 간호사들이었다. 그녀들은 아델린이 시범을 한 번 보이는 것만으로도 보법의 동작과 그 안에 담긴 원리를 거의 완벽하게 습득하고, 즉석에서 구현해냈다.

반면, 라키엘은 여전히 낑낑대며 거의 모든 동작을 틀리기에 바빴다. 그래서…… 더 눈에 띄었다! 수십 명이 나란히 서서 하는 와중에 혼자서만 자꾸 틀리니까, 혼자 훈련을 받을 때보다 어쩐지 더 눈에 띄었다.

심지어 수시로 비교까지 당하게 되었다!

“황태자님? 방금 무릎의 각도가 틀어졌답니다. 다시.”

“읏, 안 틀린 것 같은데요?”

“아뇨 틀렸답니다.”

“왕녀께서는 어떻게 확신하시죠?”

“옆의 아니스 수간호사의 모습과 직접 비교해 보세요.”

“…….”

“잠깐 각도가 틀어진 결과로 다음 스텝의 왼발 오른발이 아예 바뀌었죠?”

‘……망할!’

생각지 못한 작전(?) 실패에 라키엘은 한탄했다. 그러나 따로 원망할 곳도 없었다. 한다면 그저 저주받은 몹쓸 자신의 몸뚱이를 원망할 수 있을 뿐.

그렇게 하루하루 시간이 흘러갔다.

밤이면 아델린의 어깨가 나아갔다.

낮에는 라키엘의 보법이 영글었다.

그렇듯 매일 규칙적인 트레이닝을 거치는 동안, 라키엘의 몸이 조금씩 변해갔다. 정확히는 체질이 가다듬어졌다. 용왕 베르키스에게 한 번 죽었다가 부활하며 초기화된 육체가, 시기적절하게 가해진 자극에 의하여 남몰래 탄탄해져 갔다.

그동안 데미안은 그런 라키엘을 호위하며 앙부아즈의 기초 격투술을 유심히 관찰했다. 물처럼 흐르듯 부드럽게 움직이며 담아낸 힘을 일순간에 타격력으로 전환하는 특유의 격투술이 흑발 호위의 마음속에 한 가지 실마리를 주었다.

그것은 최근 그가 남몰래 고민하고 있던, 자신의 1형 당뇨를 오히려 새롭고 강력한 심법의 발판으로 만들 실마리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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