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75화. 족쇄를 날개로 (1)
아프다.
황태자, 당신을 생각할 때면 나는 언제나 아프다.
한때는 내가 당신을 이용한다고 생각했다. 순진한 당신이 나를 검투장에서 건져낸 그 순간부터, 딱 그만큼의 은혜와 소임만 갚자고 생각했다. 한때는 정말로 그러했다.
하지만 곧 깨달아야 했다.
그건 착각이었다.
당신이 내게 베푼 은혜는 고작 소임만 갚는다고 덜어지는 것이 아니었다. 아니, 당신은 어느새 평생에 걸칠 은혜를 내게 입혔다.
그것은 족쇄일까. 축복일까.
모르겠다.
다만 확실한 것은, 어느 순간엔가부터 내가 그것을 기꺼이 받아들이게 되었다는 것. 진심으로 당신을 모시고, 보호하며, 곁에 머무름에 순수한 기쁨을 느끼게 되었다는 것.
그래서 나는 아프다.
황태자, 당신에게 도움이 되어야 할 내가. 당신을 지켜야 할 내가. 언제고 목숨을 바쳐서라도 당신을 위해야 할 내가. 언젠가부터 오히려 당신의 부담이 되어 버린 이 상황과 현실이 너무나 아프다.
“…….”
따사로운 햇살.
평화로운 정원.
그 한쪽에서 데미안은 한숨을 내쉬었다. 그리고 몇 걸음 떨어진 곳을 바라보았다. 그곳에 황태자가 있었다. 왕녀에게 기초 격투술 훈련을 받으며 버벅거리고, 그 모습이 웨어울프 간호사들과 비교가 되는 통에 그만 얼굴이 빨개져 버린 황태자가.
“…….”
나는 그런 당신을 지키고 싶은데.
그런데 어째서 당신이 날 지키는 걸까. 어찌하여 당뇨라는 재앙이 나를 제 역할도 해내지 못하는 짐덩이로 만들고 만 것일까.
생각할수록 서글펐다.
특히 요즘은 더더욱 그러했다.
아침에 일어나면 황태자는 제일 먼저 이쪽부터 찾았다. 곁을 지키던 이쪽이 대답하면, 황태자는 언제고 이런 질문부터 던져왔다.
‘혈당은 어떠냐’고.
그러고는 황태자에게 혈당을 검사받고, 인슐린 주사를 맞는 것. 그것이 최근 이쪽이 겪는 아침의 일관적인 시작이었다.
물론 고마웠다.
다만 한편으로는 자괴감이 고여갔다. 황태자의 오른팔이 되기는커녕 걸리적거리는 짐덩이가 되어가고 있다는 느낌. 아니, 실존적 직감. 그러한 현실의 자각이 가슴속 자괴감을 키워 갔고, 자괴감은 무수한 고민을 낳았다.
나는 무엇을 해야 다시금 황태자에게 도움이 될 수 있을까.
요즘처럼 그 고민을 맹렬하게 해본 적은 없을 것이었다. 그러나 답은 좀처럼 떠오르지 않았다. 사실은 당연한 일이었다. 마계왕이 불러온 1형 당뇨의 재앙이니까. 1형 당뇨는 황태자와 다녀왔던 발전된 이세계에서도 아직 길을 찾지 못한 불치병이라 하였으니까.
그럼에도 포기하긴 싫었다.
어떻게든 극복하고 싶었다.
자면서도 방법을 궁리했다.
눈을 뜰 때도, 걸을 때도, 황태자의 시답잖은 농담을 받아줄 때도, 훈련을 받는 황태자를 지켜보던 이 순간에도 마찬가지였다.
그리고 방금.
그는 불현듯 실마리를 얻었다.
‘앙부아즈 격투술 특유의 움직임…….’
데미안은 아델린의 시범과, 그걸 따라 하는 간호사들의 동작을 바라보았다. 지금까지는 며칠째 그저 구경만 했던, 지극히 단순하고 초보적인 동작들이었다. 자신도 하라면 당장 완벽하게 구현해낼 수 있을 정도로.
그런데 이제는 아니다.
저 동작이 다르게 보인다.
‘물이 흐르듯이 끊임없이, 유연하게 움직이며 그 동작 속에 힘을 응축하고, 비로소 응축된 힘을 일격에 터뜨리는 것.’
그것이 앙부아즈식 격투술의 특징이었다. 아니, 어쩌면 세상의 수많은 움직임, 마음의 흐름, 인간관계, 정치적 파벌 싸움 등등의 거의 모든 일들에 저런 이치가 깃든 것은 아닐까 싶었다.
그렇다면…… 자신의 당뇨도 다르지 않을 것이다.
그때였다.
“후우! 수업 끝났다. 아이고, 허억, 헤엑.”
한창 무아지경에 빠지려던 찰나, 친숙한 목소리가 고막을 두들겨 왔다. 어느새 훈련을 마친 황태자가 땀 범벅이 되어선 앞에 다가와 있었다.
“어이, 데 씨. 뭐해. 무슨 생각을 그렇게 멍하니 하고 있어?”
“아, 예. 조금…….”
“월급 생각 중이었어?”
“그건 아닙니다.”
“그럼 빨리 수건 좀. 자꾸 어물쩡거리면 감봉할 거야.”
“……그거, 권력남용 아닙니까?”
“아닌데?”
“그럼 뭡니까?”
“고용주의 횡포?”
“…….”
확 수건 따위 갈기갈기 찢어버릴까 보다.
데미안은 쓴웃음을 삼키며 황태자에게 수건을 건넸다. 그리고 한창 몰두하려던 상념을 잠시 접어두었다.
“오늘 훈련은 평소보다 빨리 끝난 것 같군요.”
“뭐, 나도 일이 있으니까?”
“진료 말입니까?”
“그것보단 가르딘 경이 보고할 것들이 산더미라고 하도 징징거려서.”
“아.”
“요즘은 가르딘 경이 별궁 한의원을 실질적으로 도맡은 거나 다름없으니까. 아마 우리가 한국에 다녀온 동안 알아서 처리한 일들도 많을 거고. 나한테 보고를 한 후에 진행하려고 묶어둔 일도 많을 거고. 하여간 수고가 많아, 가르딘 경이.”
“그렇겠군요.”
부럽습니다, 그가.
데미안은 진심 어린 부러움을 가슴속에 억눌렀다. 자신의 몫을 충분히 해내며 황태자에게 도움이 되는 가르딘 경이 무척 부러웠다. 자신도 하루빨리 그렇게 되면 좋겠다.
“그럼, 오늘 밤에도 왕녀의 어깨를 치료하시는 겁니까?”
“어.”
“치료 경과가 괜찮은가 보군요.”
“생각보다 더 괜찮아. 이대로면 한 달만 꾸준히 치료하면 전처럼 쌩쌩해질 거 같고.”
“그럼 전하께서도 졸지에 당하는 훈련에서 해방되는 거고 말입니까?”
“뭘 좀 아네?”
“제가 좀.”
“하지만 이 훈련, 나한테도 많은 도움이 되는 게 사실이야.”
황태자가 수건을 머리에 걸친 채 음료병을 기울이며 말했다.
“사실 요즘 체질이 조금씩 바뀌는 게 느껴지거든.”
“체질이라니요?”
“용왕 베르키스한테 한 번 죽었다가 살아나면서 체질이 리셋되는 기회를 얻었잖아? 너도 용왕이 해주던 설명 들었지?”
“예, 들었습니다.”
“바로 그거.”
황태자가 싱긋 웃었다.
“이 기회를 놓치지 않으려고. 지금 아주 잠깐 부활빨(?)로 지병들이 사라진 상태잖아? 그러니 바로 이때 적절하고 적당한 강도의 운동과 영양 섭취로 몸을 강화시켜 두려는 거지.”
“그러면 지병이 돌아오지 않는 겁니까?”
“아마 그래도 일부는 돌아오겠지.”
“전보다는 나을 거라는 뜻이시군요.”
“대략적으로는?”
어깨를 으쓱거리는 황태자. 그 모습에 데미안은 남몰래 감탄을 머금었다. 비로소 황태자가 그렸을 그림이 보였다. 황태자는 처음부터 이걸 목적으로 왕녀에게 남을 가르쳐보라고 제안했던 것일까. 아마도 그랬던 것 같다.
“다행입니다. 그럼 어쨌건, 오늘 밤에도 왕녀의 어깨 치료에 전념하시겠군요.”
“응. 그렇긴 한데…… 너 오늘 무슨 일 있냐? 왜 자꾸 야간 스케줄을 확인해?”
“오늘 밤에 다녀올 곳이 있어서 말입니다.”
“그래서 다른 특근대원에게 호위 임무 땜빵을 부탁하겠다?”
“꼭 다녀와야 할 일입니다.”
“무슨 일인데?”
“…….”
데미안은 잠시 대답이 궁해졌다.
솔직하게 말하려니 조금 그랬다. 자신이 얻은 실마리는 말 그대로 실마리일 뿐. 아직 어떠한 성과나 결과도 확인하지 못했으니까. 그러니 개인적인 훈련과 확인을 위해서라는 말은 아직 차마 못 하겠다. 괜히 설레발만 치는 것 같아서.
그래서…….
“데이트입니다.”
“……뭐?”
“어떤 여성분과 만나 저녁식사를 하기로 했습니다.”
“저, 정말?”
“예.”
뻔뻔하게 대꾸했다.
황태자의 당황하는 모습이 보였다.
“이 고얀 놈…….”
“…….”
“배신자…….”
“…….”
“반역자…….”
“그건 좀 너무 나간 것 같습니다만.”
“나한텐 그래!”
“아 예…….”
다행히(?) 황태자는 잠깐 좀스럽게 투덜거렸을 뿐, 야간 외출을 반대하지는 않았다. 덕분에 데미안은 저녁노을이 질 무렵, 실로 오랜만에 황태자의 곁을 벗어나 홀로 움직일 수 있게 되었다.
그런 그가 향한 곳은 별궁 정원의 구석진 공터였다.
‘역시. 아무도 없구나.’
별궁의 정원은 사실 엄청나게 넓다. 어지간한 마을 몇 개를 넣고도 면적이 남을 정도니까. 그런 까닭에 이처럼 인적이 드문 장소들이 제법 있었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사람의 눈길이 없다는 뜻은 아니긴 했다.
“…….”
느껴졌다.
곳곳에서 자신을 주시하는 눈빛이.
총 세 명.
아마 황실의 특수정보부 요원들이겠지. 그들이 이쪽의 일거수일투족을 24시간 감시하는 것이겠지. 자신은 황태자의 호위니까. 그만큼 역심을 품었을 때 누구보다도 황태자를 위험에 몰아넣을 수 있는 존재니까.
이해한다.
또한, 상관없다.
볼 테면 얼마든지 보라지.
“우루스 경.”
그는 이곳에서 만나기로 한 상대를 불렀다. 그러자 아리따운 여성(?) 대역을 맡아줄 우루스가 되새김질을 하며 수풀 사이로 모습을 드러냈다.
“누우우? 누우?”
“잘 오셨습니다. 제 부탁을 들어줘서 고맙고요.”
“누우! 누!”
“예. 심심하던 차에 잘됐다니 다행이군요. 그럼 경을 부른 용건부터 밝히겠습니다. 제가 새로운 심법 하나를 창안하려 합니다. 해서 그걸 시험할 상대가 되어 주셨으면 해서요.”
“누우우?”
“제가 아는 모든 이들 중에 우루스 경의 맷집이 제일 튼튼하니까요.”
“누! 누우우!”
“예, 맞습니다. 세상에서 제일 질긴 소가죽이지요.”
“누우! 푸륵!”
우루스의 콧구멍이 자부심으로 벌렁거렸다. 전신의 근육이 전투태세를 갖추며 불끈거린 것은 물론이었다.
데미안도 날을 세우지 않은 연습용 철검을 꺼냈다.
“실은 낮에 실마리를 하나 얻었습니다. 흐르는 힘의 응축과 발산. 거기에서 힌트를 얻었지요. 어쩌면, 당뇨라는 것도 비슷한 방식으로 활용할 수 있지 않을까 해서 말입니다.”
스르릉.
연습용 철검이 고요하게 달빛을 머금었다.
데미안의 말이 이어졌다.
오늘 정립한 가상의 이론을 스스로에게 정리시키듯. 주지시키듯. 마침내 현실로 이루어냄에 있어 최선을 다하리라 다짐하듯.
“황태자 전하께서는 제가 앓는 1형 당뇨를 일컬어 이렇게 말씀하셨지요. 혈액 속의 혈당이라는 영양분이 몸에서 에너지로 쓰이지 못하는 병이라고. 그래서 갖가지 문제와 합병증을 일으키는 병이라고 말입니다.”
스르륵.
데미안의 발이 움직였다. 부드럽게. 물이 흐르듯. 한 걸음. 두 걸음. 내딛는 걸음과 동작에 따라 체내의 마나가 반사적으로 흐르기 시작하였다. 그의 걸음과 일치하는 방향으로. 끊임없이 순환하며. 하나의 물줄기를 이루어 갔다.
“그래서 저는 생각했습니다. 혈당이 신체에서 쓰이는 에너지의 재료인 것이라면 말입니다. 어쩌면, 그걸 신체가 아닌 마나하트에서도 에너지로 쓸 수 있지 않을까 하고.”
읊조리는 독백.
흘러가는 동작.
동작에 배어나 생성되는 마나의 흐름. 달빛을 머금은 검이 공간을 가볍게 쓰다듬고, 그의 시선이 흩날리는 낙엽을 좇듯 떠올랐다.
“하지만 저는 전하와 같은 아스라한 심법을 지니지 못했습니다. 황족이 아니니까요. 따라서 써클을 갖지 못했고, 체내의 마나의 흐름을 완전하게 자유자재로 조절할 수는 없습니다. 그렇기에 이러는 것입니다. 써클이 있었다면 간단하게 마나의 흐름을 만들어 혈당을 모았을 과정을, 써클 대신 보법과 몸의 움직임이 만들어내는 일정하고도 강제적인 흐름으로 대신하는 것이 말입니다.”
츠즈즈즈…….
동작에 따라 그의 몸속을 흐르는 마나의 물줄기가 커졌다. 늘어났다. 거대해졌다. 어느새 거스를 수 없는 도도한 흐름이 되었다. 혈액 속의 혈당도 예외가 아니었다. 웅혼한 흐름에 거역할 수 없도록 붙잡혀 끌려갔다. 한곳으로 응축되었다. 그곳에 마나하트가 있었다.
철검에 깃든 달빛이 서늘해졌다.
혹은 강렬해졌다.
그 순간, 총 여섯 단계의 일관된 움직임을 통하여 체내의 혈당을 마나하트로 집중한 데미안이 일곱 번째 동작을 수행하였다.
……스륵.
철검이 소리 없이 달빛을 갈랐다.
그 일검에 혈당으로부터 변환된 모든 에너지가 마나로 응축되어 실렸다. 그것은 그가 저주처럼 떠안았던 당뇨라는 족쇄가, 오히려 새로운 검술이라는 날개로 비상한 기념비적인 순간이었다.
그리고 그걸 맷집으로 받아내려 했던 우루스는 그날, 하마터면 LA갈비가 될 뻔하였다.